前 | 『전우치전』을 찾아서 | 終
2011년 6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야, 그럼 우리한테 들어오기로 한 거다?」
「그런 말 한 적 없다. 새 거처 생기기 전까지 잠시 머무르겠다고만 했지」
모리안이 내 어깨를 팡팡 치며 말했고, 나는 그 손길을 뿌리쳐내면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럼에도 모리안의 텐션은 전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성격이 이런 건지, 포섭 전략으로 일부러 이러는 건지…….
「그래서, 원래 살던 데 치우러 가는 거야?」
「깨끗하게 치워야지. 새로 신분세탁 하려면, 이전 신분에 대해 뭐라도 남아있으면 난감하니까. 사람은 홀려서 기억을 조작하면 그만이지만, 물증이 남아 있으면 곤란하거든」
「흐음. 또 기억 지울 거야?」
「글쎄……」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얼결에 발걸음이 멈춰졌다. 옆에서 따라 걷던 모리안도 멈췄다.
「일단 네들 신세 지는 동안은 안 지우겠지」
한숨이 나왔다. 이번 신원은 꽤 안정적인 수입과 만족스러운 소비가 가능한 삶을 구축한 편이었는데.
「근데 넌 왜 자꾸 따라와?」
「너 사는 데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어서. 그리고 위험할 수 있으니까 동행도 겸사겸사」
뭐야, 이 여자…….
「너 외국인이라 눈에 너무 띄어. 됐으니까 돌아가」
「이 동네에 유학생 많아서 괜찮아」
「에이, 씨. 맘대로 해라 그래」
융경 2년 (서기 1568년)
한성부 용산방 마포나루
이지함의 흙집이 우글우글 들어찼다. 방 안에 전우치와 황진이, 전우치의 딸과 이지함이 앉았고, 차식과 양사언은 나무토막을 가져와 문간에 앉았다. 본래 전우치의 딸이 밖에 있겠노라 했지만 전우치가 사정하여 곁에 앉혔다. 딸은 내내 전우치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낯빛은 어딘가 차가웠다.
전우치의 긴 이야기가 끝났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낮게 깔렸다. 침묵을 깬 것은 이지함이었다.
「그래서, 그 여우를 어드리 찾아냈소?」
「내 관에 잡혀 죽은 척 한 뒤로 한동안 여우가 보였다는 소문이 있는 곳이면 어데든지 다 찾아다녔지. 그리고 실지로 여우가 있으면 잡아 죽이고. 그러다 보면 그 천년 묵은 여우에게 언젠가는 닿을 거라 여기고 맨땅에 들이받은 걸세」
전우치가 답하고, 이 말을 들은 차식이 추임새를 넣었다.
「그때 나는 죽은 줄 알았던 전노사가 어드록 뒤에 찾아와 두공부시집을 빌이어 달라기에 참말로 귀신인가 하고 감즉 롤랐지 뭐요」
「내가 여우를 쫓듯이 여우도 나를 평생 쫓아 왔으니, 일 나서기 전에 날 찾을 길이 없게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지」
「여우는 전노사에게서 천년 호정을 도로 앗으려 그런 것일 터이고, 전노사는 여우를 잡아 죽이려 그런 것일 터. 서로 마삼이 맞으니 언제라도 만날 수 있었을 것 같소만」
양사언의 질문에 전우치가 고개를 저었다.
「호정을 가진 보통 사람인 나와 호정을 잃은 천 년 묵은 요괴가 서로 호각이니. 정면에서 붙어 누가 이긜지 장담을 할 수 없음이라. 그 년이 나를 찾기 전에 내가 그 년을 먼저 찾아 급습을 해야 했네」
「그렇게 여우들을 죽이고 다니면, 그 여우가 언제고 낌새를 채지 않았겠소?」
「그 년은 내가 가장 잘 아네. 그 년은 세상에 자기 한 몸밖에 거리낄 것이 없어. 알았다 하더라도 전혀 괘념치 않았을 걸세」
「아니, 자기 동족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었겠소?」
전우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저리가 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람의 도리로 그 년을 이해하려 들지 말게」
「그래서, 여우를 찾아내 어찌 하셨소, 사형?」
전우치가 손을 들어, 요 두 달 조금 넘는 기간동안 방 구석에 처박혀 있던 족자를 가리켰다.
융경 2년 (서기 1568년)
? ? ?
지난 수백 년 간 그래왔듯, 그날 역시 사람의 간을 빼먹고 유유히 은신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느 때와 다를 것은 전혀 없었다. 뒤에서 돌연 살기가 느껴지기 전까지는. 칼날은 왼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재빨리 피하지 않았다면 심장을 꿰뚫렸을 것이다. 칼등을 손으로 붙잡고 흉수를 살폈다.
「오란만이외다, 임자」
백발이 성성하고 수염에 서리가 앉았지만, 그 이목구비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지난 50여년 간 그렇게 찾아다녔던, 그리고 자기가 되찾아야 할 호정을 품은 채 어느 날 덜컥 죽어 버렸다는 소식에 화풀이로 애꿎은 화전민촌을 피바다로 만들게 했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손톱을 세운 여우의 오른손이 전우치를 향해 날아들었다. 전우치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오른손을 꺼내보였다. 길이가 두 척 정도인 다듬은 나무막대 두 개였다. 전우치가 손을 놀리자 막대 사이에 산과 물이 펼쳐졌다. 왼손에 들고 있던 칼을 놓은 전우치가, 파고들어오는 여우의 오른손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거리까지 좁혀 들어오더니, 산과 물이 둘의 주변을 감쌌다.
그것이 모두 찰나처럼 짧은 순간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무슨 장난질을 친 게야?」
「살아선 못 나갈 곳이지」
순식간에 족자를 말아서 품 속에 집어넣은 전우치가 한 자루 더 차고 있던 칼을 뽑고 허리에 찬 주머니들 중 하나에서 부적을 꺼냈다. 주변은 안개낀 숲 속이었다. 얼굴에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다. 발 밑에선 싱그러운 풀이 자박거렸다. 이 모든 느낌이 거짓이 아님을, 여우는 알 수 있었다. 산 이의 오감을 속이는 것은 그 자신의 장기였으니.
「환술이 아니라고?」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장난을 치겠소. 사람 홀리기로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임자를 상대하며 같은 수를 써서 쓰나」
전우치가 능글능글 웃으며 부적을 칼에 꽂았다.
「그러고 보니 임자와 처엄 맛보았던 묏속도 여기하고 퍽 비슷했던 것 같소? 그 때 거기는 이런 자욱한 안개는 없었지만 말요」
오래 전 얘기를 꺼내는 전우치의 얼굴은, 그 오래 전과는 달리 두려움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혹은 두려우나 그것을 내비치지 않고자 애쓸 뿐일지도 모르나, 어느 쪽인지는 전우치 당사자만이 알았을 것이다. 부적이 푸르게 불타올랐다. 그 불꽃을 담은 여우의 눈은 붉게 빛났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안개는 걷히지 않았고, 어두운 녹색을 옅은 회색이 덮은 공간 속에서, 푸르고 붉은 두 빛만이 형형하다가―
―서로 부딪혔다.
2011년 6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다른 녀석들은 그 네 아버지라는 치를 꽤나 존경하는 거 같던데, 아까 옆에서 보니 넌 좀 시큰둥해 보이더라」
「직접 날 죽이려 한 건 아니고, 또 결과적으로 죽지도 않았지만, 죽으라고 내맡긴 아버지를 좋아할 수는 없지」
「흐음」
「듣기론 꽤나 유쾌한 양반이었다는 거 같은데, 그러니까 날 버리고 한 사십 몇년 동안 말이지. 그래서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도 자주 했어. 뭐, 화담 선생이나 진랑 언니하고 지낸 세월이 그렇다고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었으니 큰 불만은 없지만. 아, 근데 정희량 그 양반은 정말 별로였어」
「왜?」
「맨날 술만 처먹었거든」
「뭐야, 술 안 좋아해?」
「내가 먹는 거야 좋지. 남이 처먹고 술냄새 풍기는 건 싫거든」
「복잡한 가정사네」
복잡하다마다. 어머니는 천 여년 동안 사람을 몇 명이나 죽이고 잡아먹었는지 모를 미친 싸이코패스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죽이려다 죽었고. 게다가 그 아버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를 후환거리로 여기고 정씨 영감에게 덜컥 넘겨버렸는데다,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어머니가 아버지를 강간해서라고.
……그런 얘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올 뻔 했지만 꾹 눌러삼켰다. 이런 얘기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아서 무슨 소용이야.
그것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마음 붙일 일도 없는 상대한테.
「그런 복잡한 가정사, 한 3백년 가까이 지고 살았으면 이제 좀 그딴 거 잊어버리고 살고 싶어해도 되는 거 아니냐? 내가 이렇게 살았던 게 뭐 잘못이야?」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모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품새가 너무 얄미워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웃고 넘겼다.
「아참, 언제 네 여우 모습 좀 볼 수 있어? 궁금해」
「그건 또 뭔 지랄이야」
「참, 난 너한테 까마귀 모습도 고양이 모습도 다 보여줬는데, 이러기야?」
「누가 보여달랬어?」
그렇게 투닥거리는 사이, 내 오피스텔 방 건너편에 도착했다. 횡단보도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어 아스팔트 도로를 건너는데, 중간쯤 왔을 때 모리안이 왼팔을 들어 나를 막았다. 돌연 올라온 그의 팔에 내 발길은 자연 멈추었다. 왜 그러냐 물으려고 모리안을 바라보자, 방금 전까지 싱글거리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셔 있었다. 모리안이 오른팔을 들어 오피스텔 건물 쪽을 가리켰다.
승합차 세 대가 오피스텔 입구 앞에 나란히 불법주차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늦게 온 거 같다」
뭐라 설명을 요구하기도 전에 모리안이 내 손목을 붙잡고 오던 길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나는 어어 하는 사이 그대로 끌려갔다. 하지만 날카로운 마찰음이 우리 앞을 막아섰다. 뒤이어 왼쪽 뒤와 오른쪽 뒤에서도 마찰음이 공기를 할퀴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승합차 세 대―오피스텔 앞에서 대기타고 있던 세 대와는 다른―에 둘러싸여 버렸다.
융경 2년 (서기 1568년)
? ? ?
이놈의 곳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곳이기에, 치고받고 싸우다 보니 푸른 숲에서 메마른 풀밭, 추운 눈밭까지 온갖 환경을 지나쳤다. 그러다 다다른 곳이 천 길 낭떠러지 앞이었다. 여우가 손톱을 휘두를 때마다 핏물이 튀었다. 때문에 여우의 옷 곳곳이 붉게 물들었지만, 당연히 여우의 피는 아니었다. 전우치도 전우치대로 얼굴에 생채기가 점점 늘어갔지만, 심장이나 간 같은 급소는 요리조리 피해가고 있었다. 전우치의 칼에 붙은 불이 꺼졌다. 여우가 그 틈을 타 치고 들어왔다. 전우치는 주머니 하나의 부적을 몽땅 털어내어 공중에 흩날렸다. 일시에 모든 부적들에 불이 붙고, 안개가 가득찬 주변이 잠시 밝아졌다.
열기를 느낀 여우가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 이상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자 얼굴을 가린 팔을 내렸다. 불꽃들은 여우 쪽이 아니라 전우치의 머리 뒤로 뿌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로 인해 여우 쪽으로 드리워진 전우치의 그림자가 크게 몸을 비틀었다. 그림자는 커다란 뱀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여우를 덮쳐들었다. 여우는 비켜서며 뱀의 목을 손톱으로 할퀴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허상이었다. 불꽃들이 잦아들면서 뱀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차 하는 순간, 전우치가 여우에게 바짝 다가와 복부를 무릎으로 걷어찼다. 여우가 침 섞인 신음을 뱉었지만, 전우치가 팔 닿는 범위 안에 알아서 들어오자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간이 놓인 오른옆구리에 손가락을 쑤셔넣었다.
여우의 손이 전우치의 살을 상당히 깊숙히 호볐지만, 무언가에 걸려 어느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황한 여우가 손을 도로 빼려 하자 전우치는 그 손을 외려 단단히 잡고, 벼랑 쪽으로 내달렸다. 두 형체가 절벽 아래로 수직으로 낙하했다.
「이 시발놈아, 환술 안 쓴대매!」
「내 말을 매 믿나?」
여우는 자신을 붙잡고 떨어지고 있는 전우치의 등을 마구 도려냈다. 옷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쇠고리 조각과 핏물이 휘날렸다. 전우치는 버티고 있다가, 여우를 발로 차 밀어내면서 동시에 품 속에서 족자를 꺼냈다. 족자를 본 여우의 눈이 돌아갔다. 여우가 족자로 오른손을 뻗자, 전우치의 왼손이 빠르게 칼부림을 하고 지나갔다. 피가 흐르는 손목을 붙잡고, 여우가 소름끼치게 울부짖었다.
「전우치! 이 개새끼야!!!」
전우치는 힘겹게 족자를 펼치고, 마포나루가 그려진 그림 속으로 사라졌다.
융경 2년 (서기 1568년)
한성부 용산방 마포나루
전우치가 족자를 펼쳐 보여주었다. 먹물이 다 번져서 무엇이 그려져 있었는지 쓰여져 있었는지 알아보기 힘든 종이 두 장이 족자의 앞면과 뒷면에 간신히 붙어 있었다. 전우치가 그 종이들을 떼어서 구겨버린 뒤 방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타이어 버리게」
말을 너무 많이 해 지친 것인지, 전우치가 이불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이 족자가 정말 그런 신묘한 힘이 있단 말이오이까?」
「마침 말 잘 했네, 봉래. 내 그것 자네에게 맛김세. 누가 함부로 쓸지 모르니 중히 지켜야 할 것이야. 그리고 얘야」
전우치가 누운 채로 딸에게 오른손을 뻗었다.
「손 좀 잡아줄 수 있겠니? 내게 시간이 어드록 깉지 않은 것 같구나」
「……」
딸은 두 손을 들고 잠시 머뭇거렸다. 옆에 앉은 황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간신히 아비의 거친 손을 감싸 쥐었다. 전우치가 눈가를 훔쳤다.
「토정, 봉래, 이재. 내 자네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네. 그리 길지 않을 것이야. 그리고 그 니야기가 끝나거들랑, 잠시 다들 자리를 에여 줄 수 있겠나? 내 마자막은 면목 없지만 딸애와 함께 있고 싶구먼」
2011년 6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세 방향에서 승합차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길 건너의 승합차들도 동시에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졸지에 생긴 차벽 너머에서 웬 놈이 지껄였다.
「에, 당신들은 현 시간 부로, 신병이 우리에게 구속되었습니다. 순순히 항복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정신조작 능력에 대한 대비책도 세워서 왔으니, 허튼 짓 하지 마시죠」
「뭐야, 이거?」
「우리가 얘기했지. 한설하인지 걔 데리고 간 건 우리 아니라고. 이 놈들이네」
「뭐야, 그럼 이 새끼들 다 조져야 한설하 소재를 알 수 있는 거야?」
「아니, 다행히도 이 놈들은 어지간해선 민간인은 안 건드려. 우리 목숨이나 걱정하는 게 차라리 이로울 걸」
모리안이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어디서 나온 것인지 허공에서 나타난 긴 칼이 들려 있었다. 그의 검은 옷 위로는 반투명하고 푸르스름한 사슬갑옷이 나타났다.
「21세기에 칼하고 사슬갑옷? 진심이냐?」
「왜, 볼베어링 권총보다야 낫지」
모리안이 대놓고 콧방귀 소리를 내며 나를 비웃었다. 빌어먹을.
「몇 명이야?」
「차 여섯 대에, 한 대에 다섯 명씩. 아니, 두 대는 두 명만 타고 있어서 스물일곱 명」
「왜 두 대는 둘만 타고 있는 걸까? 우리 태워갈 공간 마련해 주려고 그럴 리는 없고. 한 대나 아니고 두 대나 말이지」
「뭔가 사람 두 명 크기분의 다른 게 실려 있다거나?」
「그럼 그 차들부터 조지지. 어느 쪽이야?」
「상황파악이 능숙하네. 한두 번 한 게 아닌 것처럼. 건물 앞에 서 있던 세 대 중에 가운데 차하고, 지금 이 차」
모리안이 칼로 차 한 대를 콕 찔러 보였다. 그렇게 모리안과 둘이 속닥거리고 있는데, 차벽 너머에서 다시 짜증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충분히 경고했고, 진입합니다. 저항하지 마십시오」
모리안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빙글빙글 웃었다.
「넌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냐?」
「왜, 좋은 기회인데. 서로 실력이나 확인할까?」
2011년 7월
서울특별시 관악구
「어, 한설하씨 아니에요!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에 모교를 찾은 박하연은 공대에서 볼일을 다 보고 내려와 중앙도서관을 싸돌아다니다가 도서관 라운지에서 낯익은 얼굴을 보자 알은체를 했다.
「누구세요?」
「엥? 저 기억 안 나요? 박하연이요. 컴공과 03학번. 접때 호야네 집에서 컴퓨터 고쳐준다고 저 불렀잖아요」
「……호야가 누구인가요?」
「엥?」
약 1분 가량을 붙잡고 설명해 보았지만, 한설하는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곤혹스러워하며 볼일이 있어 가 보아야 한다고 하기에, 더 붙잡지도 못하고 그냥 보내 버렸다.
「뭐지?」
잠시 골똘하게 생각하던 박하연은, 어깨를 으쓱하고 가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2011년 7월
방랑자의 도서관
「그냥 여기서 지내시지, 밖으로 꼭 나가셔야겠어요?」
희지가 물었다.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그냥 귓등으로 흘리고 말았다.
「위험할 수도 있는데……」
「네들도 한 500년 가까이 살아 봐. 칼빵이나 총알보다 갑갑한 실내가 더 싫어. 사람이 말이야, 밖을 돌아다니면서 살아야지, 응?」
「돌아다니기야 평생을 돌아다니셨잖아요. 한중일 삼국 한해서 발 안 닿은 데가 어디에요?」
「그러니 이런데 방콕해선 나갈 일 있을 때만 기어나가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 밖에서 살 거야. 아 씨. 그리고 생각해 보니까 네들은 다 밖에서 살잖아? 왜 나만 여기 처박혀 있으래?」
「정 걱정된다면, 내가 얘랑 같이 살까?」
「뭐?」
내 고집을 만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희지가 물러나려 하는 참에, 모리안이 끼어들어 초를 쳤다. 뭐가 어째?
「야, 누가 너하고 같이 산대?」
강하게 부정하려 했지만 주변을 돌아보니 다들 그것 참 좋은 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고 있었다. 마땅히 거절할 명분도 떠오르지 않았다.
「왜, 싫어?」
「……」
「너 밖에 나가 산다는 핑계로 우리하고 또 연락 끊고 잠적할까봐 걱정되어서 그러지. 네 안전은 둘째치고, 네가 도망 못 치게 하려면 내가 감시역으로 붙어있어야 할 거 같은데」
「야, 내가 그렇게 무책임한——」
무책임하긴 했구나. 젠장. 기분나쁘게 웃고 있는 모리안을 제외한 다른 녀석들의 눈빛이 짜다.
「그리고 너를 다른 놈들보다 먼저 확보할 필요가 있어서 확보한 거하고 별개로, 지금 모두들 널 희지처럼 완전히 신용하는 상황이 아니야. 6-70년은 누군가 충분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니까. 특히 쟤」
모리안이 방 안쪽에 앉아 있는 무녀를 가리켰다. 제주 량씨의 말예로, 공석인 주석을 대리해서 부주석으로서 고생을 많이 했다지. 나한테 불만이 많다는 표정과 태도를 숨기지 않으며, 내내 나한테 한 마디도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타 고 브라tá go breá! 그럼 다 결정된 거다? 다들 동의?」
아이고.
내 팔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