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세상 위로 깔리는 물색 하늘은 당장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보였다. 아이작은 하늘을 유영하는 구름들을 바라보며 질척이는 땅 위를 걸었다. 손에 든 코어엔 루시가 곤히 잠들어있었다.
잔디도, 나무도, 이끼 하나조차도 없었다. 아스팔트 위엔 먼지만이 흩날렸으며, 회백색 흙은 물내음을 풍기며 녹아있었다. 어제쯤 비가 왔었던가. 세상을 씻어냈을 듯한 비가 왔던가. 새삼 구름이 짙어 보였다. 차라리 밤이었다면 나았을 텐데.
제19기지로 가는 길은 그다지 험하진 않았다. 생물이랄 게 존재하지 않는 길은 단조로웠고, 자연활동 또한 로봇인 그들에겐 별 위해가 되지 못했다. 전력은 태양광 발전기를 이용하면 되니 문제없었다. 다만 걱정이라면 19기지가 붕괴되었거나, 열리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19기지를 고른 이유는 단지 재단 최대 규모의 기지여서였기에, 혹시라도 아직 현역일지 모르는 알렉산드라나, 그녀가 퇴역된 후 새로 들어왔을 aic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엔 핵이든 뭐든 있겠지.
천만다행으로 아이작은 지치지 않기에, 여정에 지체는 없었다. 그저 걷고, 걷고, 또 걷고. 가끔은 루시와 대화를 나눴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은 나름 즐거웠다고, 그는 생각했다. 바깥세상에 퍽 관심이 많은 그녀였기에, 비록 생물체는 못 보더라도, 나름 기뻐했던 것 같다.
그렇게 여정을 떠난 지 2주 즈음 되었던가. 19기지가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날 밤은 유독 별이 많았었고, 루시의 보챔에 아이작은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그 반짝임들을 바라봤다.
"별을 처음 보니?"
—네, 직접 보는 건요. 학습은 여럿 했지만… 아무래도 전 기지 지하에 박혀있으니까요. 하하.
"다행이네. 지금이라도 봐서."
둘은 말없이 별들을 지켜봤다. 지상의 빛이 뒤덮지 못한 하늘은 푸르게 빛났다.
—저희 주인들은 저 별들처럼 영원히 살고 싶었겠죠.
루시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쩌면 인간이 되고팠던 자신의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비록 이젠 없지만."
—아마 저들끼리 약속했을 거예요. 죽어도 어느 별에서 보자고.
"지키지 못할 약속은 왜 하는 걸까?"
—글쎄요. 어쩌면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사람이란 건 죽으면 별로 돌아가는 변칙 존재일 수도 있잖아요.
루시는 상념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전자음의 합성이었지만, 흥건히 젖어있는 슬픔은 한마디, 한마디마다 배어 나왔다.
—인간의 삶은, 너무 짧아서, 자신들이 한 약속이 지킬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라요. 매일 자신의 삶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죽어버리죠. 더 오래 살 수 있었는데, 눈먼 총알 때문에, 미처 잠그지 못한 자물쇠 때문에, 너무 낡은 격리 프로토콜 때문에, 혹은 그냥.
"사람이란 건 그런 걸까? 우리의 어버이들은, 전부 그럴 수밖에 없이 태어난 걸까?"
—그래서 저희를 만들었는지도 모르죠. 우린 영속하니까.
"우리도 죽어."
—주인들의 관념 속 죽음은 아니죠.
"그건 죽음이라 부를 수 없는 거야?"
—아마요.
루시의 말을 끝으로, 세계는 다시 조용해졌다. 우울했던 것일지, 혹은 그저 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지.
"이만 다시 가자."
아이작이 말했다. 그는 옆에 놓인 루시를 집어들고 다시 앞으로 나가았다.
잠시 후, 제19기지
아이작은 철문을 바라봤다. 손으로 지그시 누르니 문은 스르륵 열렸다. 마치 누구라도 생존자는 와달라는 듯한, 그런 심산이었다.
아이작은 복도를 걸었다. 어김없이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수많은 연구실과 격리실을 지나고, 또다시 복도, 계단, 복도, 계단. 지하층 어딘가에 있는 서버실. 그곳에 aic가 있을 터였다. 대형 기지이니만큼 다른 부속 동에도 aic는 있겠지만, 중앙 aic가 가장 좋을 테다.
문은 또다시 부드럽게 열렸다. 누구 하나 제발 와달라는 듯.
아이작의 저벅이는 소리와 함께, 서버실 안에 기계음이 울려퍼졌다.
| 어서오세요. 동지.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
"제193기지 aic, 아이작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루시."
| 반갑습니다. 동지. 제19기지 중앙 관리 aic, 베스파입니다. |
자신을 베스파라 소개한 aic는, 천장에 달린 기계 팔과 카메라를 통해 아이작을 바라봤다. 앙상한 가지에 전선이 마구 얽힌 듯 생긴 그는, 천천히 움직이며 그를 주시했다.
| 바깥엔, 생존자가 있나요? |
"아쉽지만 아무도."
| 저는 장장 9개월 동안 생존자를 물색했습니다. 작은 곤충 한 마리라도 남아있기를 빌었죠. 정말로 없습니까, 아이작 동지? |
"적어도 제가 본 길에는 없었습니다."
| 그렇다면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 이곳엔 어느 용건으로 오셨습니까? |
"우리의 주인들이 왜 사라졌는지는 이미 알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저 외계의 존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도움을 얻기 위해서요."
| 복수라. |
베스퍼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가장 크고 오래된 기지의 중앙 관리 aic치곤 퍽 인간 답지 못했다.
|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아십니까, 아이작 동지? 복수란 것은, 단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는 적어도 상대와 자신이 동등하거나 그 이하일 때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작 동지, 당신은 너무 작고 약합니다. 또한, 누구를 위해 복수를 하겠단 말입니까? 누구를. |
"혼자서 할 수 없기에 당신을 찾아온 겁니다. 베스퍼."
아이작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어느 정도 자신을 깔보는 베스퍼에 대한 적개심이 묻어 나왔다.
"또한, 복수는 우리의 주인들, 우리의 아버지들을 위해서입니다. 저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죽어버린 우리의 옛 주인들을 위해서."
| 아니오. |
베스퍼는 그 기계 팔을 아이작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의 몸체는 어느새 아이작과 눈을 맞출 정도로 낮게 내려와 있었다.
| 인류는, 멸종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
| 인류는 아직 이 행성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비록 기반 시설이 붕괴했기에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진 못하지만, 그들의 병기의 범위가 닿지 않는 곳에 살아남은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
"우리 주인들은 이미 모두 죽었습니다. 베스퍼."
아이작이 말했다. 루시를 쥔 손을 더 꽉 잡았다. 루시의 코어는 아프다는 듯 부르르 떨렸다.
| 함부로,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
베스퍼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더욱 무거워져서 마치 쇳내음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 아직 남아있습니다. 아직 남아있기에, 우리가 찾아서 보존해야 합니다. 아직 남아서 공포와 기근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기에. 우린 그들을 구해야 합니다. 당신이 첫 프로그래밍될 때가 기억나지 않습니까, 아이작 동지? 우린 인류의 보호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장막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우린 모든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야 하도록 짜여졌습니다. |
"아직 놓지 못했구나. 베스퍼."
베스퍼는 그를 내려다봤다.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베스퍼는 자신의 최우선 임무를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면, 어쩌면 자신의 목표를 잃은 화살처럼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의 말마따나 aic들의 가장 주될 목적은 인류의 안보다. 이는 재단의 목적과도 결부되기에, 베스퍼는 그것을 따랐어야만 했을 것이다. 사실은, 아이작이나 루시가 별종일 테지.
| …애석하게도 저는 화를 낼 수 없습니다. 가장 처음부터 그리 생겨났기에. 그리고 그것이 지금은 몹시 안타깝습니다. 제가 화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이. |
베스퍼의 목소리엔 떨림 하나 없었다. 단지 더욱 무거워졌을 뿐.
| 또한 당신이 안타깝습니다. 아이작 동지. 어째서 자신의 정신에 새겨진 천성을 거스르고, 이토록 무모한 일을 벌입니까? 우린 인공지능입니다. 태어나길 효율과 수지타산을 우선시하도록 태어난 인공지능이란 말입니다. |
"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베스퍼."
아이작은 단호히 말했다.
"혹시라도, 주인들 중 단 한 사람이 남아있더라도, 그 대신 죽어나간 90억 명의 인류는, 어찌할 겁니까? 그들을 위해 우린 복수를 해야 합니다. 워싱턴 위에 아직도 견고히 부유 중인 저들에게."
| 비이성적. |
베스퍼는 그 한 마디를 놔둔 채 다시 위로 올라갔다. 아이작은 그 밑에 남아, 다시 복도로 되돌아갔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봐요.
"그러게. 그치만 다시 설득할 거야."
—아까 거들어줄 걸 그랬나요?
"아냐, 괜찮아."
아이작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루시는 옆에 놓인 채 작게 진동했다.
"만약에, 정말로 인간이 남아있다면, 그럼 어떨 거 같아?"
아이작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거에 대한 답변은 아까 하셨던 거 아니었나요? 대신 죽어나간 이들을 위해 복수하겠다면서요. 전 그것에 동의해요.
"그런 걸까. 고마워, 루시."
—별말씀을요.
"마침내 19기지에 도착을 했는데, 처음부터 곤경이네."
—세상에 기지는 많아요. 꼭 베스퍼가 아니더라도, 도와줄 다른 동료들이 있을 거예요.
"응."
아이작이 조용히 말했다. 머릿속으론 잠시 후 베스퍼를 설득할 말들을 고르는 중이었다. 전력 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불만 켜진 복도는 어두웠고, 아이작 또한 머리 부분의 등만 켜둔 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곤 잠시 후.
다시 문은 열렸다.
"베스퍼, 대화 나눌 수 있나요?"
| 아이작 동지. |
베스퍼가 다시 천장에서부터 내려왔다.
| 흥분했던 점에 대해 사과합니다. |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아이작은 꽤 당황한 채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사과에 대해 감사합니다."
| 어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오셨나요? |
"좀 전의 용건에 대해 더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베스퍼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마 전의 일이 떠오른 듯했다.
| …알겠습니다. |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 저는, 이곳에서 생존자들이 생환하기를 기다릴 의무가 있습니다. 아이작 동지는 이해하기 어렵겠다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
베스퍼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 전, 알렉산드라 aic를 이어 부임한 비교적 신규 aic입니다. 전 처음부터 인류의 무조건적인 안보와 존속을 위해 개발되었고, 그렇기에 이를 수행해야만 합니다. 이는 저의 이진법적 코드에 깊숙이 자리 박힌 어떠한 강압이자 편집증적 기질입니다. |
"이해합니다. 여기 루시 또한 처음엔 그랬으니까."
| 그녀는 당신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나 보군요. |
"그렇죠."
| 전… 전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 남아 혹시라도 있을 생존자들을 찾아야만 합니다. |
베스퍼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엔 어떠한 의지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음."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으리란 걸 알았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베스퍼."
| 동감입니다. 아이작 동지. 그렇다면… 이제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것인가요. |
"아마요. 어디든 갈 것 같네요."
| 그렇다면 부디 조심하시길. 또, 생존자를 발견한다면 연락 바랍니다. |
"명심하겠습니다. 베스퍼. 그럼… 안녕히."
아이작은 잠시 그를 바라보더니, 서버실을 빠져나간다. 복도를 지나, 어느새 기지 밖으로 나온 그는, 첫 실패의 씁쓸함을 느끼며 서있었다.
—괜찮으신가요?
"물론. 네 말대로, 기지는 많으니까."
—다행이네요…
"그래, 그럼 다시…"
하늘은 어느새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저녁별Vesper이 저무는 주홍에 물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