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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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11일
서울 경전철 신림선 샛강역 승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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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곧 출발합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정세검은 은빛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을 꼴사납게 휘날리며 닫히는 스크린도어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안내도가 역 중간중간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최신 경전철로 환승하는 것은 그녀에겐 꽤 어려운 일이었다.

"승강장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잖아. 엉뚱한 곳에서 괜히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네."

세검은 팔꿈치까지 내려온 자신의 검은색 체크무늬 겉옷을 다시 어깨까지 올린 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불만이 가득 담긴 혼잣말을 했다.

차가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세검은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21K기지를 나와서 9호선 타고 샛강역에 간 다음, 신림선으로 환승해서 서울대벤처타운역으로 가 최종적으로 녹두거리에 진입한다… 아직 열 정거장이나 남았네…" 세검은 전철의 뒤쪽으로 이동해 임자 없는 자리를 하나 골라 착석했다.







"검은 여왕이라는 녀석은 어떻게 전차를 훔쳐간 걸까? 조종법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외부차원에 넣어서 가져간 걸까? 아니아니, 그보다도 왜 전차를, 그것도 30년은 족히 넘은 고물을 가져간 거지? 내가 평소 생각하던 검은 여왕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데…"

심하게 덜컹대는 3량짜리 경전철에 앉아, 세검은 무기력하게 축 늘어져 검은 여왕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본사의 유능한 현장 요원들을 놔두고 나한테 그런 인물을 잡으라고 한 걸까?" 세검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익!" 이러한 세검의 무기력함에 덩달아 그녀의 봉투도 기력이 빠졌는지, 갈색 봉투가 세검의 손에서 스르륵 떨어져 나와 에어컨 바람을 타고 앞쪽으로 밀려 날아가기 시작했다.

"오늘 재수 옴 붙었나, 어디까지 날아가는 거야!"

세검은 자리에서 일어나 앞쪽 칸으로 봉투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두 번째 칸, 첫 번째 칸까지 쫓아갔지만 봉투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으, 안에 든 것 좀 미리미리 봐 둘걸… 누가 가져가기라도 한 건가?" 세검은 탄식했다.

"Excuse me."

그 순간, 세검을 부르는 것이 명백한 이국적인 언어가 들려왔다. 철테 안경을 낀 금발의 백인 여성이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세검에게 갈색 봉투를 내밀며 미소와 함께 영국식 악센트로 말했다. "Is this thing yours?"

"아, Yes! 맞아요! 감사합니다! Thank you!" 세검은 살짝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격하게 감사를 표했다. 혹여나 이 봉투가 검은 여왕 같은 작자들에게 넘어가기라도 했다면 승진은 고사하고 기본적으로 주어지던 휴일마저 날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이다. 저 사람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세검은 봉투를 챙겨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착석했다. "그나저나 지금 몇 정거장 남았지?"

세검의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열차에서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이번 역은 신림. 신림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벌써 두 정거장밖에 안 남았네. 지금이라도 빨리 안에 뭐가 들었는지 봐야겠다." 세검은 봉투를 열어 그 내용물을 보았다.

"…" 세검은 이내 황당함으로 싸늘히 굳어 버렸다.

"어라, 이 — 이거 왜 하나밖에 없냐?" 봉투 안에 든 것이 사진 한 장밖에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세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봉투를 떨어뜨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묵직했어. 그렇다는 말은 —"

세검은 열차를 등지고 나가는 금발 여성과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과 안경, 그리고 검은 외투까지 완벽하게 동일했다. "저 — 저 망할 놈이…!"

문이 닫힌다는 안내방송을 뒤로 하고 그녀를 쫓아 내린 세검은 순간적으로 무언가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채는 것을 느꼈다. "우윽!" 시선을 자신의 옷으로 돌려, 옷자락이 스크린도어 틈에 끼었다는 것을 알아챈 세검은 지체 없이 겉옷을 벗어 던지고 금발 여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꺼먼 년 같으니, 놓치면 가만 안 둬!"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우려는 뒤로 미뤄 둔 채, 허리춤에서 S&W M1917 리볼버를 꺼낸 세검은 빠른 속도로 여자와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세검을 본 상대방도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금발 여자는 신림선 대합실을 지나 환승 게이트를 무임승차로 통과한 다음, 우측으로 틀어 2호선 대합실 끄트머리에 있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가는 거야! 야!" 세검 역시 여자를 쫓아 문으로 들어갔다.

"여긴 또 뭐야…?" 나름 깨끗한 대합실과 달리, 문 너머에는 녹슨 배관과 쇳조각들이 가득한 음침한 공간이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을 닦아내며, 세검은 손전등을 꺼내 큰 소리로 외쳤다.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나와!" 그러나, 세검에게 돌아오는 것은 텅 빈 공간으로부터 생기는 메아리 뿐이었다.

"… 진짜 안 나온다는 거지? 그래. 내가 직접 가 줄게."

세검은 손전등을 비추며 서서히 안쪽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무언가 뒤쪽에서 세검을 덮쳤다.

"으헉!" 금발 여자는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총과 손전등을 떨구고 넘어진 세검 위에 올라타 외투 안쪽에서 꺼낸 페어번-사익스 단검을 세검의 가슴팍을 향해 강하게 들이밀었다.

"으그으으으그극…"

세검은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발로 차 밀쳐내고는 넘어졌을 때 떨어뜨린 리볼버를 집어들어 상대방을 향해 겨누었다.

"알겠어. 항복, 항복!" 자신이 언제 영어를 썼냐는 듯, 단검을 떨어뜨린 여자는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봉투 안에 든 거 가져가서 미안하지만 돌려주진 못해. 다 찢어서 버렸거든."

남의 물건을 훔쳐서 못 쓰게 만들어 버린 사람치곤 아주 당당한 태도에, 세검은 반쯤 어이를 상실한 상태로 그녀에게 수갑을 채우며 말했다.

"그래. 그건 그거고… 지금까지 재단에 가한 여러 차례의 공격들과 이번 기동특무부대 소속 주력전차 절도 사건에 대해서 조사가 좀 필요하겠어. '검은 여왕'."

"내 이름은 로레인 스털링Lorraine Sterling이야. 그냥 편하게 로레인이라 불러." 리볼버를 허리춤에 도로 쿡 찔러넣는 세검을 향해, 로레인은 친한 척을 하며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변명은 사절이야. 하려거든 재단 시설 가서 해." 세검은 차갑게 말을 끊고는 로레인에게 말했다. "머리에 바람구멍 생기기 싫으면 냉큼 따라와."

"쳇." 로레인은 말 없이 세검을 따라 다시 대합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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