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이 없었다. 비유적인게 아니고, 진짜로 할 일이 없었다.
고등학교는 졸업했다. 대학교는 들어가기 전이었고, 나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전의 짧은 안식을 방황하는데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은 듣지 않는 편이 좋았다. 어차피 맞벌이로 나가 있을텐데 뭘. 나는 그렇게 꼬박 삼 주 가량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는 누워 있기 상당히 괜찮은 곳이었다. 원래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달리 일어나서 할 일도 별로 없었기에, 나는 침대에 누워 주로 책을 보았다. 좋은 책이라고 할 수는 없는, 대여점에서 빌려온 책이었다. 내 아침은 쾌락으로 시작했고, 내 밤은 쾌락으로 끝났다. 소설보다 값 싼 쾌락은 많았지만 내게 남은 일말의 양심이 그것을 거부했다.
친구들은 하나둘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 두 달 동안 과외를 해서 돈을 번다고도 했다. 언어를 배우겠다는 녀석도 있었다. 그렇게 점점 동창들에 대해 열등감이 쌓여가자 나는 충실히 방황하지 못했다. 난 모자란 방황의 조각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는 사람들이 날 불러주었고, 기다렸다는 듯 나는 술을 마셨다. 숙취는 내 팔다리를 짓눌러 날 망상 속에 묶어두었다. 나름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사람이 술에 취하면 뭘 해도 용서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된다. 마약 - 의료용 마약 관련해서, 내가 토론부에 있었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일종의 증언으로 쓰기 위해 수집했던 자료 중의 하나였다. 의료용 대마초를 투여받은 사람이 의료용 모르핀과의 비교를 했던 이야기였다. 모르핀은 고통을 없애서 잊게 해 주지만, 대마초는 고통을 신경쓰지 않게 해서 잊게 해 준다는 내용. 술을 처음 마셨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느끼는 고뇌란 모름지기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니까 지금은 잊어도 좋을거라고.
그래서 잊었다. 무엇을 잊었냐 하면, 나를 잊었다. 내가 누구고 어디서 뭘 했는지, 뭘 하려고 여길 걷고 있는지를 모두 잊었다. 돌담길에 몸을 문지르며 빙글빙글 돌았다.
"너 뭐냐…"
뱀이 있었다. 능구렁이였다. 서울은 아니지만, 나름 위성도시 축에 끼는 이곳에는 보기도 힘든 존재였다. 뱀은 그 노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가로등 아래에서 혀를 낼름거렸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뱀에게 술을 내밀었다. 네명이서 마시다가 결국 포기하고 가장 정신이 또렷한 내가 가져온 소주 한 병이었다.
"왜. 너도 이거 마시려고? 그래. 마셔라아아.."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뱀이 술을 간절히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소주를 길바닥에 부었다. 반쯤 붓고 나자 길바닥에는 소주로 만든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검은 쓰레기 봉지 위에서 내려온 그 능구렁이는 소주 웅덩이에 혀를 몇 번 집어넣었다가 사라졌다. 사라지는 뱀의 꼬리가 덜렁거렸다.
뱀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뒤를 한 번 돌아봤다. 비웃는 태도였다. 기분이 상해버린 나는 그대로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쓰러져 잤다. 시야 저편에서 부모님이 현관의 도어락을 해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뱀이 다시 나타난건 내가 술을 한번 더 마셨을 때였다. 손에 술병은 없었지만 부모님이 어디선가 구해오신 해장용 음료는 반 쯤 마신 채 들려있었다. 난 어이없다는 투로 그 뱀을 쳐다보았다.
"뭐, 저번에 술 마셨으니까 해장해달라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화가 치밀었다. 난 해장용 음료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뚜껑도 닫지 않고 뱀이 올라앉은 쓰레기 더미에 던져버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샤워를 하고 에어컨을 튼 뒤, 온도를 22도로 맞추고 나는 망각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가위에 그렇게 자주 눌리는 편은 아니다. 꿈을 자주 꾸냐고 한다면 그것 역시 아니다. 그래서 나도 그 날의 체험을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잠결에 눈을 뜨니 난 가위에 눌려 있었다. 숙취로 아픈 머리가 의외로 정신을 또렷하게 유지시켜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흔히들 얘기하는 무용담에서의 귀신은 없었지만, 귀신 대신 다른 것이 에어콘 위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 뱀이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났다. 집 안에 구멍이 있는건가? 설마 술 냄새로 따라온건가? 119를 불러야 하나? 능구렁이가 독이 있었나, 없었나? 사진 찍어서 트위터에 올릴까? 하지만 두통은 생각의 연속을 끊어버렸고, 내 시선을 강제했다. 나는 강제로 에어컨 위에 또아리를 튼 뱀을 쳐다보게 되었다. 다른 생각은 더 이상 나지 않았기에 나는 그 뱀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혀가 몇 번 나왔다 들어갔다. 목이 움직였다. 뱀은 목을 움직여 에어컨 옆에 세워두었던 옷걸이에 그 머리를 얹었다. 뱀은 천천히 옷걸이의 옷들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내게 어떻게 올라왔는지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것은 그 노란 눈을 가끔씩 내게 향하며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가위에 눌렸기 때문에 나는 목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뱀의 운동을 다시 느끼게 된 건 내 발 밑이었다. 내 발 옆으로 뱀은 고개를 내밀어 침대를 타고 올라왔다. 이내 뱀은 내가 반쯤 걷어찬 이불을 넘어 내 종아리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종아리를 타기 시작했다.
종아리, 허벅지, 배. 옷 위를 천천히 기어올라오는 뱀에 난 공포로 넋이 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 배 위에 또아리를 틀었다. 나는 나가버리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몸을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뱀의 상처입은 꼬리가 내 호흡에 맞춰 흔들거렸다. 뱀은 그렇게 한동안 내 배 위에서 또아리를 틀었다. 뱀은 위압적인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려 순간 생각을 멈추었다.
뱀은 내 얼굴로 기어서 내 눈에 가까이 다가왔다. 낼름거리는 혀가 내 눈 속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나는 덜덜 떨리는 얼굴로 필사적으로 손을 움직여보려고 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뱀이 다시 돌아가는 듯 그 머리를 쳐들었다.
그리고 뱀은 나를 물었다.
내가 가위에 눌린 후 무슨 꿈을 꿨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아침에 부모님이 일찍 나가셨던 건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난 일어난 후에도 한동안 엄습하는 공포를 온 몸으로 느끼며 이불 속에 남아있었으니까. 오후 세 시쯤이나 되어야 나는 타는듯한 갈증의 도움을 받아 방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술을 잘 마시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