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 전기를 못 켜겠어

rasan4785 2020/8/15 (토) 02:45:09 #04480971


미치겠다. 현재진행형으로 괴이와 조우하고 있는 것 같다.
장소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내 방이다. 무서워서 방의 전깃불을 못 켜겠어.


뭔일인데?

rasan4785 2020/8/15(토) 02:56:03 #04480971


좀 정리하면서 쓸게.

난 일을 그만두고 병든 엄마 병구원을 하면서 지내는데, 요 며칠은 해방되어서. 그래서 어제 오후부터 공포영화를 보면서 술을 까고 있었다. 그러니까… 영화를 3편째 조졌으니까 밤 9시쯤, 그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잠들어 버렸다. 근데 한 20분 전쯤에 눈을 떴거든.

전깃불을 켜고 있었을 텐데, 왠지 방이 어두웠다. 영화는 끝났고, 메뉴 화면이 루프 걸려서 심야에 하는 통신판매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무심코 줄을 당겨서 방에 전깃불을 켰다.

밝아진 방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방이 아니었다. 원래 그렇게 정리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쓰레기 더미 수준으로 황폐해져 있었으니까. 방금 전까지 켜져있던 TV도 꺼져 있었고. 아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까 그게 아니다. 분명히 놓여 있는 가구들이 몽땅 다 이상한 것 같다.

줄을 쥔 채로, 하아? 하고 방심 상태가 되어 있는데, 베란다 쪽에서 탕탕 하고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니까 커튼 너머였는데, 소학교 저학년생쯤 되어 보이는 어린애 실루엣이 보였다. 괜히 쫄아서 반사적으로 전등줄을 잡아당기자 방이 어두워졌다.

그랬더니 내 방이었다. 휴대전화로 방을 비춰봤는데, 좀전까지 있던 쓰레기봉투가 없어져 있고.

일단 이런 상황이란 느낌이다. 질문 있는 사람?


잠결에 본 환각인 것 같은데, 그러면 노잼이니까 네 말을 일단 믿는 걸로.

그건 그렇고, 꽤나 침착하구먼.

rasan4785 2020/8/15(토) 03:05:01 #04480971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은 이 방을 빌릴 때 옆방 사는 놈이 가르쳐 줬거든. 아무래도 이 방에서는 어린애가 사고사했던 것 같다. 입주자도 자주 바뀌니 추천하지 않는다, 그랬는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싸니까 빌렸다.

진짜 뭐가 튀어나오면 실황이라도 해야겠다, 그런 생각도 했고. 근데 진짜로 조우하니까 솔직히 떨리지만 말야. 그래도 시작한 이상 가능하다면 실황하려고. 진짜 위험하면 도망갈거임.


뭔가 갑자기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네.
실황을 하려면 일단 그 전깃불을 다시 켜야 하지 않냐?
혹시 컴퓨터도 꺼지는 건가.

rasan4785 2020/8/15(토) 03:06:10 #04480971


무섭지만 해본다. 기다려 보셈.

rasan4785 2020/8/15(토) 03:06:20 #04480971


컴퓨터 들고 하니까 되네.


일단 그 밝은 방의 모습을 알고 싶다.

rasan4785 2020/8/15(토) 03:09:11 #04480971


우선 베란다. 역시 어린애 실루엣이 보인다. 아까랑 다르게 쪼그리고 앉아있네.

방 안의 모습은 쓰레기장처럼 골판지라던가, 비닐봉지라던가, 현관까지 발 디딜 틈도 없게 어질러져 있다. 냄새도 심하다. 신경쓰이는 점은 화장품이 좌탁 위에 무더기로 놓여 있다. 여자 방인가봐.


저기, 혹시 그 방에서 죽었다는 아이는 무엇이 원인이라 죽은 걸까?

rasan4785 2020/8/15(토) 03:10:54 #04480971


뭐가 생각남?


그냥 직감인데, 혹시 방치사한 거 아닐까?
드라마 같은 데 보면 나오젆아. 학대당하는 어린애 방은 황폐해지고 그런 거.

rasan4785 2020/8/15(토) 03:12:40 #04480971


네 추측 보고 있는데 「열어줘」하는 소리가 들려서 호닥닥 소등했다.
이젠 전깃불 켜고 싶지 않아.


목소리가 들렸냐?

rasan4785 2020/8/15(토) 03:13:45 #04480971


베란다 창문 열려 있다.


헐? 실화냐?


벌써 2시간이나 지났는데, 타래주는 돌아오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겠네.

tyuuya-sagume 2020/8/15 (토) 05:30:53 #98168440


아까부터 읽고 따라잡았다. 재미있긴 했는데, 어차피 주작 아니겠냐?
보통 방을 어둡게 해야 귀신이 나올텐데, 밝게 했더니 나온다는 건 독창적이라서 좋았다.
아동 방치라는 아이디어도 뒷맛을 첨가하려는 목적이었나보지.


일찍 일어나는 네가 왔다는 건 벌써 아침이구나.
역시 주작이었나.
씨발, 밤새서 손해봤네. 잘거야.

rasan4785 2020/8/15(토) 09:00:00 #04480971


미치겠다. 엄마가 죽었다.

방 모습이 이상했던 것도 사실이고, 베란다에 있을 리 없는 여자애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의범절을 가르치려고 엄마를 베란다에 집어넣었는데. 나란 놈, 뭐하는 짓이냐. 잊어버렸던 그 때의 엄마 기분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몇 십 년 전에 나도 베란다에 있었다. 베란다 싫었는데 엄마가 안 들여보내줬다. 그 때는 이 시간에 학교에 오지 않는 나를 걱정하고 도와준 사람이 있었지. 정말 기뻤다. 엄마를 좋아했지만, 베란다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추웠고. 더웠고. 배고팠고. 목말랐다.

나도 그랬기 때문에, 여자애와 굉장히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살 수 있었지만, 이 아이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견디지 못한 거였다. 겨우 그 정도 차이였으니까, 그러니까 그 마음을 아플 정도로 알 수 있는데. 생각나게 하는 짓을 해서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 역시 알아보는 사람은 알아보는구나. 단편적인 상황일 뿐이었는데, 알아봐줘서 너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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