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 송편 먹기 대작전

"철현 도령은, 송편 안 자시나?"

맑은 하늘이 비치는 오후. 서천 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이 지상을 뒤덮고 있었다. 평화로운 날이었다.

김철현은 약간의 여유를 빌미로 자신의 방에 앉아 있었다. 테라스 너머로 지긋이 풍겨오는 솔향과 떡 찧는 소리가 어우러져 오랜 정취가 피어올랐다. 고즈넉한 공기와 드문드문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퍽 잘 어울린다고, 철현은 생각했다.

오랜 습관을 다시 시작할 찰나였다. 가을이라고 얇은 티셔츠 위에 청재킷을 두른 홍위가 찾아왔다. 열어둔 문 안으로 들어오진 않고, 그는 틀에 기대 벽에 툭툭 노크하고 있었다. 철현은 수첩을 덮고선 안경을 벗고 그를 돌아보았다.

"송편이라니?"

"한가위라고 안뜰에서 체험 같은 걸 하던데, 저녁 찬에는 송편이 올라올 것 같아. 두류랑 영주는 벌써 가서 한 자릴 차지했고."

철현이 피식 웃으며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홍위는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와 철현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철현이 말했다.

"그 둘, 그런 건 참 놀림이 재단 말야."

"칼럼은 연재 종료하지 않았어?"

철현의 필기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잉크 묻은 펜촉을 닦던 철현이 홍위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한참 되었지. 왜?"

홍위가 대답 대신 고갯짓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 위에는 완연한 집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철현이 슬쩍 딴청을 피우려다가, 이내 그만두곤 멋쩍게 중얼거렸다.

"일전에 하던 작업이 있어, 간만에 손이라도 풀 겸…"

"문인은 문인이야." 홍위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대꾸했다. "난 이제 작문이라면 치가 떨리는데."

"그래?"

"그럼. 애시당초 내 업은 아니었어. 단지 태어나길 그리 태어난 거지."

철현이 빙긋 웃었다.

"남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 말라 하겠어. 왕으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천금을 줄 자들이 널렸는데."

철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꺼내둔 갈색 코트를 어깨에 걸치면서 홍위에게 고갯짓했다.

"나가세.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걷자구."


한가위는 서천에서도 주요한 명절이었다.

이날만 되면 일각을 다투랴 바삐 움직이던 동자들도, 서천객들도 여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고요하기만 하던 하늘의 움직임도 부드럽게 일렁였다. 풍요로운 바람과 푸근한 대지의 기운이 사방을 메우는 것이 느껴졌다. 바야흐로 가을의 시간이었다.

투숙객이 모두 한반도 출신은 아니었으므로 한가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다. 그러나 서천의 한가위를 경험해 본 투숙객은 이 하루의 값어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가을 본연의 풍족함과 맞물려 전파되는 고소하고도 안온한 분위기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성질을 함유하고 있었다.

철현은 홍위와 함께 일출관 밖으로 나섰다. 추석이라고 투숙객이 아주 많진 않은 듯했다.

"밖으로 친지를 만나러 간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지." 철현이 중얼거렸다.

"꽤 있는 모양이야."

홍위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선선한 바람이 그의 앞머리를 흩뜨리고 날아갔다.

"신이나 정령이라고 가족들이 모두 여기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도 제사에 참석하려고 잠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돌아갈 곳이 있군."

홍위가 슬쩍 철현을 바라보았다. 철현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지만, 홍위는 철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철현처럼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날이 그저 기쁜 날만은 아니었다.

"…난 그래서 좋네. 편하고."

철현이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이젠 분위기를 읽네?"

"분위기를 읽다니?"

"예전엔 분위기 싸해지든 말든 할 말만 하고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잖아. 아, 물론 방금 그대 이야기가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철현이 홍위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랬나?"

"응. 자주."

"…미안하네."

홍위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젠 안 그러니까."

철현이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멋쩍었다. 언제부터 밖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지 기억은 나질 않았지만, 몇 년 전의 그라면 분명히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사실인즉 처음에는 다가오는 그들이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가택신 사건 이후 급격히 가까워진 영주, 두류, 그리고 홍위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철현의 삶에 빠르게 침투했다. 가모장을 돌보랴, 이들의 부름에 응하랴, 칼럼을 연재하랴, 바쁜 나날이었다. 그래도 불러준 정이 있어 부름에는 거절하지 아니하고 최대한 나가보려고 했었는데, 그때도 이전의 버릇을 못 주고 그런 식으로 응수했던 듯했다.

철현은 머쓱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끄러움이었다.

"누구든 30년 동안 정신도 온전치 못한 분과 그리 지내고 있었으면 다 그대처럼 행동했을걸."

철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말이 옳음을 알았으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세상에는 옳다는 성질 자체가 어려움과 직결될 수밖에 없는 존재도 있으리라.

"송편 먹어!"

저만치서 두 명이 무언가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두류와 영주였다. 종류별로 빚은 송편이 대나무로 엮은 소쿠리 위에 놓여있었다. 송편만 있는 게 아니라 인절미, 시루떡, 두텁떡 등등 여러 가지로 빚어놓은 떡도 놓여 있었다. 둘은 양손에 하나씩 떡 소쿠리를 들고 있는 상태였다.

"진짜 맛있어, 너희도 빨리 가서 하나씩 받아 와!"

두류가 소리쳤다. 이미 오면서 약간 먹었는지 차조 가루가 입가에 묻은 상태였다. 떡은 산신제를 지내면서 매번 먹을 텐데도 늘 뭐가 그렇게 맛있는지. 철현의 생각을 읽었는지 홍위가 킥킥대면서 대꾸했다.

"내 살다살다 이렇게 떡 좋아하는 산신은 처음 본다."

"군소리 말고 어서 갔다 오셔."

"우리가 자리 맡아둘 테니까, 너희도 가서 원하는 대로 담아와."

영주가 준엄하게 둘을 내몰았다. 영주는 떡을 미리 시식해 보진 않은 모양이었는데,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것이 꽤나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알아주는 먹보 둘이 모여서 작당했다고, 철현은 생각했다.

영주의 얼굴에 사뭇 득의양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번에 행사 맡은 분이 누군지 알아? 세경 씨라구. 농경신, 자청비!"

홍위가 잠시 멈칫했다.

철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김세경 교수가 민속음식 행사를 한다는 게 그리 놀랄 일이었던가.

홍위가 철현에게로 얼굴을 홱 돌렸다. 그 바람에 놀란 철현이 살짝 물러섰다. 홍위의 얼굴에도 영주의 얼굴에 떠오른 열의가 발생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철현이 눈을 찌푸렸다. 대체 방금 들은 문장에 무슨 놀랄 게 있어서?

"당장 가자."


줄은 길었지만, 놀랄 정도로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홍위의 태세 전환에서 회복된 철현의 미간은 다시 찌푸려져 있었다.

"줄이 엄청 길군."

"이 정도는 감내할 만해."

홍위는 전투적으로 돌변해 있었다. 재킷도 벗어서는 허리춤에 묶더니, 앞을 바라보며 힘주어 팔짱을 꼈다. 떡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난관이든 돌파해 보이겠다는 기백이었다.

"김세경 교수가 요리를 잘하나?"

홍위가 철현을 바라보았다.

"자청비를 몰라?"

마치 모를 리가 없다고, 모르면 이 리조트에 거주해 본 적도 없고 그럴 일도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듯한 어투에 철현은 당황스러워졌다. 그러나 여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친교가 깊진 않은데."

"그러니까 내 말은 자청비, 그러니까 김세경 교수가 주관한 음식 행사에 참여해 본 적이 없느냐고."

"…없어."

실제로 없었다. 지금까지 서천에서 하는 행사란 행사는 그저 열린다 수준의 이야기만 들었지, 실상 참여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아니, 그대라면 그럴 만도 하지."

"이유는 있었네."

"뭐였는데?"

철현이 턱을 어루만졌다.

"가모장도 돌봐야 했고, 칼럼도 써야 했고. 또 가끔 류 양이랑 면담도 해야 했고."

"또?"

"…가모장도 돌봐야 했고."

"내 그럴 줄 알았어."

홍위가 고개를 저었다.

"들어봐. 김세경 교수는 농경신이잖아. 그런 인물이 주관하는 음식 행사라고. 더군다나, 오늘처럼 떡이라도 나와봐."

"떡이… 아."

밭과 들에서 난 것으로 만드는 떡. 고품질의 농산물에는 당연히 신의 기쁨이 깃들어 있고, 그 기쁨을 부여하는 자는 다른 누구보다도 농경신 본인일 것이었다. 그런 농경신 자청비가 주관하는 행사.

"그래서…"

줄이 앞에서부터 줄어들었다. 홍위는 재빨리 앞으로 거닐면서 말했다.

"이참에 꼭 먹어봐야지. 그대가 이런 기회를 여태 놓치고 있었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야."

"그 정도인가?"

철현의 의문은 제쳐두고 홍위는 무아지경에라도 빠진 듯 말을 이어 나갔다.

"한동안은 자청비의 손길이 닿은 음식을 맛보지 못했어. 그가 오래 자리를 비웠잖아. 자청비가 돌아온 다음에도 한동안은 바쁘대서 행사의 주최를 맡진 않았는데, 이번에 복귀했나 봐. 다행인 일이지. 오늘 밖에 나간 사람들 꼴 불쌍하게 됐군."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한 무리씩 떡을 가져갈 수 있었는데, 하필이면 홍위와 철현 앞에서 그 줄이 끊기는 바람에 그들은 더 기다려야 했다. 앞의 무리가 떡을 한 소쿠리 가져가고 난 후에야 둘은 드디어 행사 가판대 앞에 설 수 있었다.

가판대는 거대했다.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긴 가판대에, 수백 가지 종류의 떡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단순히 한국식 떡만 있는 건 아니었고, 떡과 비슷한 종류의 음식도 같이 놓여 있었다. 게다가 철현의 기억이 맞는다면, 바깥에서는 한참 전에 소실된 떡마저 있는 듯했다. 가판대에는 동자 여러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뒤에는 거대한 찜솥이 두엇 놓여 있었다. 솥에서 갓 가져온 떡들이 배치되고 있었다. 세경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우선 골라. 영주가 이야기한 대로 난 찌는 종류를 사수할 테니까, 철현 도령은 약밥이랑 삶는 거 위주로 골라!"

홍위는 지령을 내리면서 급하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철현도 얼떨결에 덩달아 걸음을 빨리했다. 떡을 담아가는 소쿠리를 하나 받았고, 그러고 나서 질주는 시작이었다. 둘과 함께 소쿠리를 받은 인물들도 떡에 한 열정을 하는 사람들인지, 그 결기만 두고 보면 전장에 나서는 장군과도 다름이 없었다. 제각기 달리거나, 날아오르거나, 쑥 나타나는 등 정신이 없었다.

약밥은 가판대 중앙에서 우측으로 좀 더 들어가야 나왔다. 약밥 칸에 도착하자마자 철현은 다른 이들이 왜 그렇게 세경의 행사를 갈망해 왔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이건…"

그간 살아온 천 년 간의 세월이 무색해지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약밥은 처음이었다. 조화로움이라는 개념 그 자체가 구현된 느낌을 떠올린다면, 그것이 철현의 눈앞에 있는 이 약밥일 것이다. 윤기가 흐르는 떡을 보면서, 철현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이러니 다들 맹목이 되어서는…"

철현은 약밥을 집게로 소쿠리 안에 넣어두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둘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다.

"여, 다 가져왔어?" 두류가 반갑게 맞이했다.

"까딱하다 다시 훙서할 뻔했어." 홍위가 툴툴거렸다. "그 게르만 놈한테 몸통 박치기를 당해서는 다 떨굴 뻔했다고. 사과는 받았는데, 아직도 골이 얼얼하네."

철현은 대답 대신 소쿠리를 들어 보였다. 간신히 쟁취한 산물이었다. 홍위의 지시대로 종류별로 가져온 떡. 처음에는 별 관심조차 없었는데 그 거대한 가판대 앞을 몇 번 뛰어다니다 보니 이젠 뿌듯한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넷은 테이블에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앉았다. 어느덧 서천의 하늘에도 붉은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제 둘러보니, 리조트 앞뜰에는 명절을 맞아 제각기 다른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웃음소리와 왁자지껄한 부르는 소리, 흥겨운 음악.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잠시 뒤에 풍물놀이를 하고 강강술래를 공연할 거라는데."

영주가 말했다. 영주의 시선은 휴대폰 화면에 붙박여 있었다. 한가위를 맞아 예약된 수많은 비행기 편. 그 비행기 하나하나에라도 설사 무슨 일이라도 없을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업무는 언제나 2월이었지만, 2월이 아닌 많은 순간에도 영등신의 권능이 필요한 순간이면 영주는 언제든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장관이겠군."

철현이 떡을 하나 입안에 넣었다. 씹히는 식감, 맛, 향기 모두 일품이었다.

"반야 당신은 본 적 있어? 추석엔 늘 당신 어머니랑 같이 있어야 한다면서 안 나왔잖아."

두류의 말에 철현은 입가를 기울였다.

"우선 그분은 내 어머니가 아니야."

가장 중요한 부분부터 정정하고 난 뒤, 철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으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본 적은 있지. 병실 창문에서 바라보았었네. 나 역시 하릴없이 병자를 간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주의를 돌릴 대상이 필요했거든."

그날 밤, 창밖으로 넘어다본 광경이 떠올랐다. 수많은 정령과 신들이 드넓게 원으로 서서 빙글빙글 도는 광경. 인간의 삶으로 살았을 때 그런 풍경을 볼 수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그들이 환희에 빠져 원으로 돌아갈 때 공기 중에는 마법이 깃들었고, 흉곽 속에서는 시리도록 기이한 감정이 울긋불긋 피어났다. 그것은 어린 시절 금성에서 보았던 동리 여인들의 춤과도, 젊은 시절 조선 땅에서 보았던 이름 모를 여인들의 춤과도, 먼 이국에서 만난 한 늙은 한국 여인의 춤과도 다른 모습이었다.

"보기에 즐거웠지."

두류가 짓궂게 웃었다.

"놀라지 마시라고. 가까이서 보면 더 즐거울걸."

"아이고, 진짜 즐거운 건 씨름 시합이었거든. 너희 떡 가지러 가서 못 봤지? 죽여줬다."

영주가 화면에서 얼굴을 떼어내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영주는 무슨 일인지 이전부터 씨름이니, 격투기니 하는 것을 보는 취미가 있었다. 홍위는 그게 다 바람신의 고약한 성정 때문이라고 농담 섞인 악담을 하곤 했는데, 진상이 무엇인지는 오리무중이었다. 심지어 본인도 잘 모르는 듯했으니.

"다지카라오인가 다지카라요인가 하는 일본 친구가 사자 가죽 그 양반이랑 맞붙었다고. 이야, 근데 역시 장사는 장사야. 그 서양 놈이 아주 "

영주가 흥분해서 이야기하자, 홍위가 재빨리 응수했다.

"우리 보곤 떡 가지러 가라고 해두고 둘이서만 그런 걸 봤다고?"

"늦게 온 사람이 잘못이지!"

"신 경력은 나보다 길면서 속은 밴댕이 소갈딱지만 하네!"

"통치 경력은 나보다 길면서 시간 안배를 그리 못 하냐!"

"둘 다 나이를 뒷구녕으로 잡쉈나, 그만들 하고 떡이나 먹어!"

두류의 호통으로 둘의 언쟁은 끝이 났다. 때마침 들려온 태평소 소리가 분위기를 뒤바꾸었다. 풍물굿을 공연하는 한 무리의 연주자들이 의복을 갖추어 입고 안뜰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이 적당한 위치에 있었기에, 그들은 떡을 먹으며 앉아서 구경할 수 있었다.

꽹과리를 선봉으로 한 풍물패는 안뜰을 자유로이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연주했다. 상모를 돌리는 연주자들의 묘기가 이어질 때마다 군중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두류는 특히 더 즐거워했다.

"만날 이런 거 산 아래에서만 했잖아. 나는 그거 보려면 내 임지 아래로 내려와서 숨어서 구경해야 했는데, 산신 명색이 무색하잖아. 그래서 거의 못 봤어. 나도 그런 것 좀 보고 싶었는데 산에서는 다들 그런 걸 할 엄두도 안 냈지."

테이블에 앉거나 돗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동자들이 투숙객들에게 음료수를 권하며 돌아다녔다. 철현은 혹시나 친한 동자, 영태가 저 사이에 끼어있지나 않을까 두리번대었지만, 익숙한 얼굴 그 누구도 인식할 수 없었다. 그들의 테이블에는 맥주 몇 캔과 넥타르, 그리고 생수 한 병이 놓였다.

생수는 철현의 것이었다.

"이런 날에도 술을 안 마셔?"

영주가 물었다.

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년 전 수라꽃 궐련을 끊기 시작했을 때부터 철현은 중독적이라면 일절 가까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덕분에 위험도가 낮다고 판단했던 카페인에 빠져들면서 만성적인 소화 불량과 두통에 시달리게 되었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것에 중독된 것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은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이해할 수가 없네.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미 맥주를 반 캔 정도 비운 영주였다. 그리고 나서도 한동안 멈추지 않을 요량이었다. 영주의 주량은 이미 모임의 참여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절대 영주와 술로 대결하지는 말아라. 바람의 매서움을 그대로 알게 될 것이다…

"조심하는 게 좋을 수는 있지."

홍위도 맥주 캔 하나를 들고 철현을 거들었다. 청재킷과 청바지를 입고 노을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는 홍위를 바라보며, 철현은 그가 새삼 젊고 어리다고 생각했다. 죽은 지 이미 육백 년 가까이 된 인물이 이렇게나 청춘의 색채를 띠고 있음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를 떠올리면서.

그 옆의 두류는 넥타르를 홀짝이고 있었다. 두류가 초임 산신이 되었을 적에 그 지방의 나무 열매로 빚은 술을 한 번 마셔보고는 반하여 잊지 못하는 중이었는데, 두류의 말로는 넥타르가 그 술의 맛과 제일 비슷한 음료라는 것이었다.

"옳은 말이야. 조심해서 나쁠 게 없으니, 더욱 만전을 기해야지. 다신 옛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아니 될 것이니…"

풍물패의 흥겨운 가락이 이어질 때마다, 리조트 투숙객들의 면면에도 웃음이 깃들었다. 연주자들은 노련했다. 그들은 객석과 무대를 넘나들면서 구경꾼들을 공연에 과감히 포함시켰고, 그럴 때마다 신들은 마치 평범한 인간처럼 당황하고 기뻐하고 우스워졌으며, 즐거워했다.

철현은 오래전을 떠올리며 입가를 조금 기울여 미소를 지었다. 삶과 죽음 사이 잠깐의 간극에서 이다지도 흥겨운 가락을 만들어 낼 수 있구나, 그리 생각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철현은 무심했다. 인간이야 단지 시험의 대상이었다. 시험을 견디지 못하면 값어치가 없을 뿐인 유기체일 뿐이었다.

그 유기체가 만들어 낸 유산은 살아남았다. 그 오만하고 냉한했던 그들의 사상과는 다르게.


풍물굿 공연이 끝나자 노을도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이어지는 공연은 강강술래였다.

숙련된 예술가들의 공연이 선행되었다. 흰 저고리에 붉은 치마, 혹은 푸른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춤을 추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나아갈 때마다, 붉음과 푸름이 뒤엉켰다. 질서정연하게 춤은 수행고, 그 정갈한 움직임에 군중은 숨죽이고 그들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어지면서 서천을 밝히는 불은 달을 가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불타올랐고, 그 불 아래에서 춤의 행렬은 회전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모두가 함께 하는 춤이 시작되었다. 숙련되지 않았든, 원하는 자들은 모두 그 대열에 낄 수 있었다.

두류는 일찌감치 대열에 합류했고, 영주는 두류의 강요에 거의 끌려 나가다시피 했다. 철현과 홍위는 테이블에 남아서 대열을 멍하니 지켜볼 뿐이었다. 웃음소리와 치마 끌리는 소리, 노랫소리가 어우러졌다.

홍위는 두 캔째를 열었고, 철현은 물 한 병을 다시 건네받았다.

"나도 사실 돌아갈 곳이 없어."

홍위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철현은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아까 그대가 한 말 있잖아. 돌아갈 곳."

홍위가 웃는 얼굴과 굳은 얼굴 그 어딘가의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없어. 그대랑 똑같아."

철현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전처럼.

"그리고 우리 모두 그렇지, 뭐. 두류의 산은 그 재단이라는 집단이 가두어 버린 거나 다름없으니 한 번 찾아보기도 어렵고, 영주야 오래전부터 갈 곳을 잃고 이곳을 집으로 삼지 않았겠어."

"…"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대와 우린 비슷하다는 거지. 우리가 어디가 더 잘 나서 그대를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그대의 품성을 재단할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철현은 그제야 홍위가 아까 전의 이야기를 사과하려고 하는 걸 알아챘다.

"자네는 너무 선해." 철현이 나직하게 말했다.

"…"

"그만 마음에 담아두게. 그런 걸로 마음 상하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좀 무심했던 것도 사실 아닌가."

홍위는 말없이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둘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저 멀리서 불빛을 받아 빛나는 두류와 영주의 모습이 보였다. 둘은 웃고 있었다.

"집에는 그래도 가봐야 하지 않겠어. 부친도 그곳에 계신 걸로 아는데."

철현이 말을 꺼냈지만, 홍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늘 숙부 탓이지, 뭐."

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종묘에 아바마마만 계신 게 아니라서. 그리고 가기만 하면 늘 분위기가 안 좋아. 다들 저마다의 응어리로 가득한 사람들이거든, 이 군주란 것들이."

홍위가 피식 웃었다.

"웃기지. 내면부터 유학자가 되어야 했으면서, 정작 죽고 나서는 살았을 적의 분노와 슬픔을 들먹이는 데만 열중이라는 게."

"자넨 그래도 나와서 살잖아."

"내가 민간에서 신으로 모셔지지 않았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걸. 영락없이 숙부 옆에서 1년 내내 붙어 있어야 하는데, 하, 그랬으면 진작에 아무 차사 불러서 저승 갔어."

"그럼 부친도 여기 부르지? 지내기에는 더 편할 것인데."

철현의 제안에 홍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본인은 할바마마 위패 지키겠다고 그러시지. 할바마마 거처를 영 모르니까 영 불안한가 봐. 결국은 앞으로 한 몇십 년은 거기 계실 것 같더라고."

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의 영혼은 철현도 지금 어디 있는지 몰랐다. 소을촌 사건 이후, 탈출한 이도에 대해 수집된 자료는 거의 없었다. 철현 본인조차도 여러 사건으로 인해 그 행방에 대해 알아볼 생각은 할 수가 없었으니. 철현은 홍위에게 해줄 말이 없다는 것이 문득 미안해졌다.

밤은 더욱 깊어졌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씨에 달은 어느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에 없이 커다란 달이었다. 강강술래를 돌던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달은 또 처음이네."

홍위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철현은 홍위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걸 알았다. 최근에 분홍색으로 빛나는 애플리케이션을 하나 깔아서는 거기 몰두하던데, 아마 거기 사진을 올리려고 하는 듯했다. 홍위는 철현에게 잠시 갔다 오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사진이 잘 찍히는 구도를 찾기 위해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테이블에는 철현 혼자 남았다.

달은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달을 쳐다본 적이 언제쯤이었나 생각해 보아도 딱히 떠오르는 순간은 없었다. 서천에 오고 나서는 하늘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 듯했다. 언제나 일, 혹은 간병. 그 둘 사이의 간극 속에 위치할 뿐이었다.

오히려 떠오르는 것은 아주 먼 옛날의 기억들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최근의 기억보다 오래전의 기억이 더 잘 난다고, 그렇게 니카호 일족의 한 늙은이에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고 철현은 생각했다. 아마 인간의 나이로 치면 이제 40대를 바라볼 나이가 아닐지 하고 감히 추산해 본다. 어쩌면 그보다 아래, 어쩌면 그보다 위. 아버지의 향년을 돌이켜 보지만, 또 그런 것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아주 먼 일이므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이미지다. 12살쯤이었을까. 집에서 기르던 어린 강아지를 품에 안고 보았던 금성의 하늘,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던 커다란 달. 그런 달의 모습만이 그가 회상할 수 있는 전부다. 굶주린 백성의 시체를 타넘고 병을 전파해야만 했던 새벽, 시체를 태우던 연기에 눈이 매워 고개를 올렸을 때 문득 시야에 들어오던 푸른 달. 또 먼 타향에서 선로를 놓다가 추위에 떨면서 잠들어야 했던 순간들에도 달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서커스 천막 사이에서도 달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스챠와 그가 도망치던 순간에도, 한 마을에 정착했을 때도, 아이를 낳던 순간에도… 달은 거기 있었다. 그 달이었다. 같은 달이었다.

삶의 모든 모퉁이에 달이 있었음을 철현은 새삼 느낀다.

"오늘은 달이 만족스럽게 차올랐네요."

누군가의 말이 날아들었다. 철현은 물병을 테이블에 내려두고는 말을 건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도 무색하게 말을 건 인물은 방금까지 홍위가 앉았던, 철현의 옆자리에 몸을 묻었다.

"일은 다 끝났습니까?"

철현이 물었다. 김세경은 피곤한 듯 빙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하니까 요령이 없어져서 애 좀 먹었어요. 다들 좋아해 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떡, 맛있었습니다."

"이런 행사에 참여하신 건 처음 아녜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세경이 빙그레 웃었다.

"찍었죠."

철현은 약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이긴 사실이었으므로. 비단 이 행사, 서천에서의 한가위만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살면서 한가위를 대규모로 같이 지내본 적은 얼마 없었다. 대개 그 시간은 노상이나 시신들 사이를 걸어 다니는 수많은 순간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사실 철현은 한가위를 보낸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고 멋쩍어, 쑥스러웠다.

그러나 이 순간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풍족한 경험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행사를 열어주어서 고맙습니다, 김 교수."

세경이 철현을 바라보았다. 마치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은 것처럼 잠시간 그는 말이 없었다. 세경은 이윽고 미소를 띠며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별말씀을요."

세경은 기지개를 쭉 펴고는 달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마치 소원을 비는 듯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다음 해에도 풍년이었으면 좋겠네요."

철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농경신이 달에게 소원을 빌었으니, 당연히 이루어질 것이리라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 자신도 말없이 소원을 빌었다. 무슨 소원인지는 달만이 아는, 지극히 은밀하고도 홀로 된 소원이었다.

그리고 철현은 그 소원을 달이 들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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