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다니는 사슴대 교환 학생을 위한 육상 생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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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툴루 소환은 기원소환학과가 아닙니다. 그냥 바다에서부터 순간이동 해서 지상을 목적지로 삼는 거죠. 초기 기원소환학 연구가 힘들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구 내의 순간이동과 다차원 간의 이동은 엄격히 구분해야 함에도 인간의 편협한 관점에서는 자기가 아는 거 빼고는 죄다 이계였거든요…."

그렇게해서 나는 수업을 듣다가 할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적어도 우리 가문의 오랜 논쟁거리가 해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사슴대 교환 학생을 하게 된 의미는 충분하고도 남은 셈이었다.

"….그것참 굉장했겠다. 너희 할머니는 최초로 이계 체험을 하게 된 거잖아! 내가 만약 외계 행성으로 향하는 소환진이 열린다면, 나는 무조건 뛰어들 자신이 있어!'

"하지만 스완, 먼저 그 소환진은 네가 생각하는 문의 형식이 아니고 체감되는 물리 법칙이 다르게 느껴지는 공간이어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져. 그리고 둘째로, 그 역겨운 상태에서 주변을 돌아보면 신화에서도 안 나오는 혐오체들이 자기를 둘러싸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거야. 그래도 너는 참을 수 있어?"

사슴대에 들어올 때 인간 룸메이트와 함께 생활한다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피부가 나에게 지나치게 바싹 마르고 미끈거린다는 모순적인 감각을 느끼게 하듯이 인간에게 또한 바다에서 온 나는 비슷한 느낌이라고 여길 지성은 있었고 그에 대해 나 스스로 노력할 각오는 하고 있었다.

"응!"

하지만 그걸 좋다고 달라붙는 룸메이트일 줄은….

"그렇게 좋다면 너도 우리 집에 놀러 올래? 학기 중에 소환진 준비하면 방학 때 놀러 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건 좀 힘들 것 같아…. 내가 어렸을 때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어서 부모님은 바다라면 무조건 피하게 하거든."

"너는 괜찮고?"

"어렸을 때여서 기억이 안 나는 걸! 근데 그 네가 처음 들어왔을 때 가지고 왔던 안내서, 나도 보면 안 될까? 이번 생리학 리포트로 너희 종족 얘기 써보려고."

"그거? 나도 받아놓고 한 번도 안 읽어봤는데. 어차피 난 지상 활동하는 데 우주복 같은 거 필요없는 종족이기도 해서. 뭐, 이참에 나도 한번 읽어나 볼까."

"정말? 고마워!"


그 책자는 지나치게 깔끔하게 제본되어 있었다. 젠장, 물속에 사는 종족은 이런 두께가 얇은 종이를 보면 칼날 같아서 섬뜩하단 말이야. 아무튼, 종이에 쓰여 있는 글씨는 종이 따위는 물에 녹아버려 문자 문화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우리에게 책을 읽히기 위해 발악한 흔적이 보이는 것이었다. 얼마 있지도 않은 벽화 문자를 집어넣고(내가 고문화 전공이 아니었으면 읽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다 표현하지 못한 언어는 밈을 쑤셔 넣어 입으로 소리라도 낼 수 있게 만들었다.

"근데 이거 인간용 밈이야."

"우리 종족의 언어는 어떻게 알아낸 걸까? 이쯤이면 진심으로 궁금해지는데."

"예언학과 불러서 이 글을 쓰는 자신들의 모습을 예언으로 알아낸 거겠지. 데이터양이 적은 문서는 그런 식으로 작업하는 게 가능하다고 들었어."

"그거 너희 말로 그, 그….."

"타임 패러독스?"

"맞아, 근데 그거 우리한테는 엄청 안 좋은 거거든? 미안한데 난 이거 못 읽겠어. 대신 내가 읽어줘라."

"뭐, 인간용 밈이어서 읽기는 내가 더 편하긴 하겠네."


"당신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시게 되었습니다. 생존에 필수적인 조치는 이미 받으셨겠지만, 이 외에도 문화적, 생리적 차이로 인한 불편함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는 그러한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작성된 문서로…. 하나 마나 한 이야기는 뛰어넘을게."

  • 건조한 환경에서 익숙해지십시오. 여기서도 물은 여전히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이므로 구하기는 어렵지 않으므로 호흡이 곤란하시다면 언제든지 화장실을 찾으십시오.

"호흡이 문제가 아니야…."

"온도 문제야? 어떤 애는 양동이에 발을 담가서 수업을 듣던데."

"그보다는 피부가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이 크지. 그래서 우리는 살이 문자 그대로 익는다고…."

  • 항상 낙하에 주의하십시오. 부력이 존재하지 않는 환경에서 낙하는 지나치게 빠릅니다.

"계단 처음 쓸 때 존나 무서웠어."

"인간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기도 하니까 괜찮아!"

"아니, 그 계단의 원리 자체가 한발로 지탱한 채로 몸을 떨궈야 하잖아! 발목 충격이야 익숙해진다지만 그 떨어지는 감각은 아직도 익숙해지지가 않아."

  • 생물 사체는 흔하게 발생합니다. 무시하고 지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어…. 그래도 여기서 살인 사건은 잘 안 일어나지 않나…."

"개미라던가, 파리라던가, 모기라던가…. 바닷속에서는 죽음 자체가 그렇게 당당하게 남아있기는 힘들지. 어느새 해류에 쓸려가 버리니까. 장례 같은 의식도 굳이 할 필요가 없어."

"되게 철학적이네."

  • 머리카락 색깔은 가변적인 요소입니다. 머리 색깔의 변화는 신체 개조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내가 알기로는 인간 머리카락에도 주술적인 요소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 신체 일부로 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냥 뭐, 신체 개조라는 개념 이전부터 계속 하던 거니까, 게다가 머리카락은 신체의 부속물 취급이고 본체에는 영향이 끼치지 않으다랄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함부로 여기는 거 같아. 일각수도 매년 새로 나는 뿔이라도 소중히 취급한다고. 근데 늙으면 새로 자라지도 않는 머리카락은 왜 그렇게 마구 다루는 거야?"

"아앗…."

  • 달빛을 똑바로 마주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시야 가장자리에서 달빛을 보십시오.

"무슨 코스믹 호러야?"

"물 속에서는 물 밖에 있는 게 전부 일렁이게 보이니까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에 충격받지 말라고 써놓은 거 같은데…. 잠망경은 인간보다 우리가 더 빨리 발명했다고, 이 멍청이들아."

"그럼 설마 이거 제대로 조사 안 하고 그냥 진짜 막 쓴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사는 할 줄 알았는데."

"그 망할 예언이 틀리기 시작하는가 보지. 이래서 시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된다니까. 그냥 나머지 쭉 불러봐."

  • 갑자기 야외인데도 어두워지거나 하늘에서 소리가 발생하더라도 신고하지 마십시오.
  • 신경자극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 색채 혹은 맛이 다른 공기를 느끼신다면 즉시 교내 경찰에 신고하십시오. 물과는 다르게 생존을 위한 공기는 균일한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 의식을 잃은 지성체를 목격하셔도 내버려 두십시오. 이미 적절한 조치가 취해져 있거나 취해질 예정일 것입니다.
  • 만약 수업 외에 호출 명령이 들어오더라도 무시하십시오. 저희 사슴대는 교내 폭력에 대해 단호히 대처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 인간들은 내가 무슨 오지에서 온 원주민으로 아는 거야?"

"인터넷 괴담을 감명 깊게 보고 쓴 거 아닐까."

"차라리 안 읽는 게 나을 뻔했어. 괜히 기분만 나빠졌잖아."

"그래도 마지막은 좋은걸. '우리 서로는 서로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하므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함께 나아간다면 분명 좋은 결과물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 받아, 일단 이거는 네 것이니까."

그리고 그걸 받은 순간 나는 스완이 미처 보지 못한 마지막 안내 사항을 보게 되었다. '[긴급추가 인쇄 시 이 부분은 삭제할 것] 마지막 안내사항은 무시하십시오. 저희 사슴대에 이러한 몰상식한 학생은 존재하지 할거라 여기지 않지만, 혹시 신체 부위에 대해 고추장을 바르고 싶다와 같은 의사 표출을 인식할 경우 즉시 탈출하십시오.'

"스완, 그 혹시 내 몸에 고추장에 바른다는 게 무슨 뜻이야?"

"어? 그 낙지 회 말하는 건가? 그거라면 낙지 다리를 잘라서 아직 꿈틀거리는 채로 고추장에 찍어 먹는 음식이 있거든. 쫄깃한 게 엄청 맛있어서 내가 좋아하긴 한데, 갑자기 어디를…. 아앗! 잠깐! 그런 의미가 아니야!!!!"

내가 내 기숙사 방에 다시 들어오기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나는 내 룸메이트의 실수를 용서할 수 있었고, 내 룸메이트 또한 자신의 생리학적 지식이 다른 지성체에 대한 배려와 존중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이 뉘우치게 되었다. 그때 그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문화 연구부에 들어가 생리 관계에 따른 의사소통의 주의점에 관해 연구했다는데, 마지막으로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재단이라는 곳에 들어간 후 안타깝게도 연락이 끊겨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는 알 수는 없다.

바다 속에서도 사용 가능한 방수방압이 가능한 전자기기를 구하기는 쉽지 않아 이런 글에 용량을 사용하는 것은 분명 낭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나, 바다 바깥에서 오는 태양 빛이 여기까지 닿는 날에는 그때 기숙사에서 함께 안내서를 읽었던 날이 생각날 수밖에 없어 이렇게 문자를 사용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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