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

평가: +4+x

식당은 꽤 좋았다. 좋은 곳이었다. 오히려 너무 좋은 식당이라서 조금 문제가 되기도 했다.

신서준 연구원은 생각했다.

자기 돈으로 이런 곳을 온 적은 가히 손에 꼽는 수준이다. 하물며 남을 대접하기 위해서 이런 분위기 차린 레스토랑에 오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겨우 두 번 만난 사람인데, 이런 자리에 초대하는 게 맞나? 아직 그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신서준 연구원은 기대감에 조금 일찍 도착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예약해 놓은 테이블 자리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이 보냈던 메시지 내역을 다시 보고 있었다.

오늘 9시에, 저녁 어때요?

네. 좋죠.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무모한 도전이었나 싶다.

장소는 정해둔 데가 있나요?

음, 제가 생각해둔 식당이 하나 있어요. 시내에 있는 건데,

"주문하시겠어요?"

손가락의 스크롤은 그 말 끝에서 함께 멈추었다.

"아, 일행이 있어서요."

서준은 그 말을 하고, 고개를 들어 말의 근원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얼어붙었다. 바로 그 앞에 경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은은 싱긋 웃어 보인 뒤 자리에 앉았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저번 만남 때와는 다른 아주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어느 정도 긴장한 듯 보이는 서준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녀의 태도는 아주 가볍고, 친절하고, 따뜻했다.

서준이 어떤 요리를 시키면 그녀가 가장 좋아할지 메뉴판을 들고 계속 고민하는 사이, 경은은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처음 식사 만남을 하는 자리 치고는 좀 과분한 느낌이 들기도 헀지만, 귀히 대접받는 느낌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 샹들리에는 은은하게 노란빛으로 빛나 주변에 화사한 분위기를 주고, 은빛으로 조각된 테이블들은 마치 유럽풍의 만찬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서준은 오늘따라 메뉴판의 메뉴들이 더욱 복잡하게 느껴졌다. 분명 메뉴판의 메뉴들은 대개 한글로 써져 있었지만, 한 마디도 알아먹을 수조차 없었다.

'링귀네 알레 봉골레 베르디(Linguine alle Vongole Verdi), 부카티니 알라 아마트리치아나(Bucatini all'Amatriciana), 파케리 알라 제노베제(Paccheri alla Genovese)… 젠장.'

갑자기 네이버 지도랑 블로그로 유명 레스토랑을 찾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서준은 메뉴판을 지켜보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들어 경은을 쳐다보았다. 경은은 계속 레스토랑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샹들리에나 테이블 위의 양초 하나하나, 웨이터가 신은 멋드러진 구두, 와인을 담은 곡선형의 유리잔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조리 눈에 담았다. 그렇게 움직이던 눈이 서준과 마주쳤다.

서준은 눈을 피해야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별로 좋은 대안이 아니었다. 경은과 서준은 서로 몇 초간 눈빛을 교환했다. 서준은 그녀의 눈에서 다정함, 부드러움, 인자함, 그리고 어딘가 모를 강인함이 담겨져 있음을 느꼈다.

경은은 그의 눈을 몇 초간 가볍게 바라보다가 메뉴판으로 눈길을 옮겼다.

서준은 물병을 꺼내 컵에 물을 따라 주려고 했다. 하지만 병도 열기 어렵게 생긴 건 마찬가지였다. 이상한 형태의 플라스틱 고무 뚜껑에다가 얇은 철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뚜껑을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았다.

서준이 고무 뚜껑과 힘싸움을 하고 있을 때, 문득 경은이 웨이터를 불렀다.

"판넬레 알라 크레마 디 포르치니(Penne alla Crema di Porcini)…"

경은은 그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서준을 살짝 훑어보았다. 그는 꽤 체격이 커 보였다.

"…두 개 주세요."

웨이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방 쪽으로 갔다.

그제서야 서준은 그녀가 자신 대신 메뉴를 시켰다는 것을 알아챘다.


경은은 그의 표정과 눈동자에서 불안과 초조함을 읽어내었다.

서준이 그녀가 자신 대신 요리를 시켰다는 것을 겨우 알아채고 나서 벙쪄 있을 때, 그녀는 물을 따라 주기 위해 유리병의 뚜껑에 연결된 철제 고리를 가볍게 밀어 열었다.

경은은 컵에 물을 따르다가 문득 아직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단 것을 깨달았다.

"서준 씨."

"예. 예?"

갑작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그는 당황스러워하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무슨 일 하세요?"

"예?"

갑작스럽게 날아들어온 중요한 질문에 그는 거대한 난관에 빠진 듯한 모습이 되었다.

"아니, 그게 있잖아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어요? 너무 조용히 계시는 것 같아서."

서준은 순간 목 끝까지 올라온 "에스-시-피-재단"이라는 말을 겨우 내뱉지 않는 데 성공했다.

"저는 에- 공무원입니다."

"공무원이요? 어디서 일하세요?"

"시청, 시청에서 일해요."

공무원, 그나마 가장 사용하기 쉬운 변명거리였다.

"꽤 어린 나이인 것 같은데, 공부 열심히 하셨나 봐요."

"아, 저 그래도 스물여섯입니다."

"그래요?"

경은은 조금 놀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서준은 마치 동안으로 보인 것 같아 기분이 조금 좋았다.

"저는 서른하나거든요."

"예?!!"

순간 반응이 서로 뒤집혔다. 이제는 반대로 경은이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고, 서준이 깜짝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짜 몰랐어요?"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요. 그, 뭐랄까, 얼굴이나 목소리도 어려 보이고, 보라색으로 염색한 것도 잘 어울리시고 해서."

경은은 그 말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집어 보았다. 분명히 살짝 붉은빛이 섞인 자줏빛이 돌았다.

"그리고, 눈동자도 보라색이라서요."

"눈동자 색깔도 알아봤어요?"

경은은 마치 여우같이 알고도 물어본다.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컨택을 대놓고 몇 번이나 했는데.

"워낙 특이하게 예뻐서요. 이건 어떻게 된 거에요? 렌즈나, 그런 걸로 돼요?"

"렌즈는 없어도 돼요. 자연적인 거라서."

"그래요? 저는, 전에 보라색 눈을 본 적이 없어서, 진짜인지도 몰랐어요."

"그럼 진짜인지 좀 더 가까이서 볼래요?"

순간 경은의 얼굴이 부담스럽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준은 당장이라도 반사적으로 뒤로 등을 당길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겨우 그 자리에 버텼다.

영원 같은 몇 초가 지나서야 경은이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음, 진짜, 에, 예쁘네요."

"그렇죠?"

눈 얘기가… 아마도 맞을 것이다. 경은은 다시 싱긋 웃어 보였다.


서준은 겉으로는 웃음짓고 있었다. 행복하지만 불안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계속 페이스에 말리면 안 되는데, 나도 뭔갈 보여줘야지.'

그런데 무슨 말을 하지? 무모한 도전을 한 것 치고는 생각보다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는 방법이나 경험이 그에게는 잘 없었다.

문득 그의 머리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조언이 떠올랐다.

'그래, 이런 자리에서는 취미를 물어보면 된다 그랬었는데 누가.'

"그리고 보니,"

처음으로 그가 주도하며 시작하는 말에 경은도 관심을 가졌다.

"뭐 하는 거 좋아하세요?"

"취미요?"

"네."

"저야 뭐, 가끔씩 멀리 드라이브 나가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죠."

"대화하는 거요?"

그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말하는 것이 취미가 될 수 있다니. 그는 대화하는 것이 어떻게 재밌는 것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죠. 친하거나 특별한 사람들이랑 시시콜콜한 이야기 나누다 보면 재밌잖아요?"

"저는 아직 그런 사람이 잘 없어서 그런 느낌을 못 받아본 것 같아요."

"에이, 그런 사람이 왜 없어요?"

"예?"

"특별한 사람, 여기 있잖아요. 바로 앞에."

서준은 잠깐 동안 멈칫했다가, 점차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인간을 어떻게 이겨? 저런 멘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치는데?'

서준은 곤경에 빠져서 마치 심란한 상태가 되었다. 경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준이 다음 공격을 시도하려고 말을 꺼내려던 때에,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크림 파스타를 담은 그릇 두 개가 종업원과 함께 등장했다.



식사시간에 밥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생각보다 건설적인 일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그리고, 친분과 감정을 쌓는 데에는 잡담만한 것이 없다는 것도.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다 드셨어요?"

"네, 뭐.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요."

"어, 여기 뭐 묻었다."

경은은 냅킨을 들어 서준의 뺨에 튄 흰 소스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손길이 이렇게나 얼굴 가까이 다가오자 서준은 약간 긴장했다.

"서준 씨."

"예. 예?"

슬슬 내성이 생길 만한 법도 한데, 서준은 아직도 경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올 때마다 당황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서준 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해요?"

"에, 뭐, 그야…"

제일 함축적인 말이 여기 왔다. 서준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살짝 망설였다.

"경은 씨."

그가 처음으로 오늘 경은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저, 사실 주제넘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신한테 호감이 있어요. 오래 만나본 사이는 아니지만, 당신이 좋은 사람이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도 있다는 것도 느꼈어요."

서준은 너무 긴장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그, 당신을… 좋아해도 되나요?"

아주 큰 결심을 한 채, 재빨리 말을 내뱉었다. 너무 성급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몇 번 더 만난 뒤에 했어야 되는 게 아닌가 하고.

경은은 똑같은 표정으로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풉."

경은은 마치 실소하듯 작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 속에는 서준이 알 수도 있는 의미들과 모를 수밖에 없는 여러 의미들이 뒤섞여 있었다.

"…왜요?"

"아뇨, 그냥 서준 씨 긴장하신 모습이 너무 웃겨서."

서준은 귀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저도 사랑해요."

짤막한 두 어절이었다. 하지만 그 의미가 서준에게는 무한했다. 그 의미가 서준에게 다가오고 나서야 그는 겨우내 긴장을 풀어내고,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다.

마침내 긴장이 풀린 서준이 피식 하고 짧은 웃음을 짓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경은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경은은 늦은 밤이 다 되어서야 본거지로 돌아왔다. 학원의 문은 닫혀 있었지만 아직 잠들지 않고 밖에 나와 담배를 피거나, 서로 만담을 나누며 잠들지 않는 대원들이 꽤 되었다.

"아, 선배님 오셨슴까."

그를 알아본 막내 대원 지섭이 펜스 출입문을 열어 주었다.

"그래, 다녀왔다."

"뭐 하다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그런 일이 좀 있었어. 난 좀 들어가 자야겠다."

"예 수고하십쇼."

경은은 몇 대원들이 이불을 깔아둔 자리 옆에 자신의 자리를 놓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짐을 정리한 뒤 이불을 바닥에 깔고 나니 드디어 하루가 끝이 나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경은은 벽에 기대어서 긴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긴 하루였다. 만족스럽기도 했다. 이보다 더 행복한 날은 자신의 인생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경은은 그런 생각들을 하며 기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왔다.




쾅!!

폭발이 자신의 몸을 덮쳤다. 직원실 옆면부가 폭파됐다.

경은은 충격파에 의해 문 쪽으로 날려가 부딪혔다. 쓰러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주변을 급히 둘러보았다. 두 대원은 팔이나 다리에 파편이 박힌 채 겨우 일어나고 있었다. 한 명은 머리에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자, 허리의 옆구리 한 쪽이 없어져 있었다.

"아…아…?"

경은은 겨우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서, 그 때 갑자기 고통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으…. 으아아악…!!!"

그녀가 무언가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 겨우 일어난 두 대원이 총탄 세례를 맞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 그 소리도 곧 잠잠해졌다.

경은이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전 구역 확보되었습니다. 사살한 적 8명, 중상 하나. 경상 하나 있습니다."

"운송에 생포자 둘 추가 요청합니다."

희미하게 들린 소리를 끝으로, 의식이 끊어졌다.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