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
평가: +3+x

서준 연구원은 썩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경은과 마지막으로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의 보라색 눈빛이 이따금씩 떠오르고는 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항상 마지막 말을 끝으로 깨어졌다.

'저도 사랑해요.'

가끔씩 전화를 걸어보는 것도 포기한 지 오래다. 일단 전화가 걸리기는 해 본 것도 얼마 안 되었다. 이제는 전화를 걸 때마다 매일 똑같은 음성이 그 속에서 되뇌인다.

"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항상 그 소리가 반대편에서 부딪혀 다시금 돌아왔다.

서준은 일어나 기지 구내식당에 갈까 하다가 마음을 접고, 기숙사실의 선반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간단한 간편식품 몇 종류가 들어 있었다. 그렇게 대충 라면이나 먹을까 하여 물을 올리려고 냄비를 집었을 때, 그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갑자기 어떤 예감이 들어 핸드폰을 집었으나, 그를 반긴 화면의 이름은 그녀가 아닌 정보부였다.

"여보세요?"

"어, 그래, 요즈음 잘 지내지?"

"아 예, 그렇습니다. 그 때 부상도 거의 다 나았고요."

"별 게 아니라 심문… 아니, 이제 정보부가 할 일이 좀 다시 생겨서 말이야."

"애들 다 퇴원했답니까?"

"적어도 대부분은. 몇 명은 아직 입원 중이긴 한데, 이제 거의 다 나았대."

"다행이네요."

"자네가 할 일은 생포한 반란 놈 하나랑 면담하는 거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거고."

"알겠습니다. 몇 시에 가면 될까요?"

"2시 어때? 점심은 먹고 와야지."

"예, 알겠습니다."

서준은 통화를 껐다.


경은은 부드러운 손길 같은 것이 느껴져 햇살 속에 눈을 떴다. 문득 서준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렸으나 그것은 잠깐 동안의 환상이었다. 정신이 또렷해지자 회색 옷을 입은 직원이 한 손에 클립보드를 든 채로 자신을 깨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 당신이군요."

"예에."

늘 그렇듯 직원들은 가볍지만 감정이 실리지 않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가실 데가 좀 있습니다."

"네?"

"…기지로 갑니다. 그곳에서 조사를 거치고 최종 처리가 결정될 겁니다."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포로는 언젠가 포로심문을 받게 된다. 그리고 구해지거나, 버려지거나, 아니면 죽거나. 어떤 곳에서든 포로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경은은 옷을 입기 위해 성치 않은 다리로 일어나 보려고 했다. 그러나 곧 목발이나 휠체어의 도움 없이 움직이거나 서 있기에는 아직 어려운 상태라는 것을 다시금 받아들였다.

경은은 환자복 위에 새로 받은 바지와 조끼, 외투를 덧대 입었다. 확보 당시에 입었던 옷은 피로 얼룩지고 찢어져 입을 수가 없게 되었다. 병상 위에 누운 상태에서 옷을 입으려니 꽤 거추장스럽고 어려웠다.

옷을 다 입고 나서야 경은은 자신의 몸을 휠체어 위에 앉혔다.

"끌어드릴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에."

회색 옷을 입은 직원은 뒤에서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 그녀를 데려갔다.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을 곳으로. 자신이 재단 운송차량에 실릴 때까지 그녀는 곧 기지에서 일어날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해 온 공작들을 생각해 보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아니면 D계급으로 전락하여 실험체로나 쓰이다가 죽던가.

그녀는 겸허한 자세로 다소곳이 자세를 고쳤다. 마치 모든 것을 그저 그대로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듯.

얼마 뒤에 벌어질 일은 알지도 못한 채.




서준은 간단하게 라면 따위로 점심을 챙겨 먹고 정해진 시간보다 많이 일찍 기지 기숙사를 나왔다. 쉬는 시간에 할 일은 별로 없었다. 음료수나 커피 하나 입에 물고서 햇빛이 엷게 아른거리는 것을 구경하거나, 아니면 휴게실에 자주 죽치고 앉아 있는 직원들과 내기를 걸고 보드게임을 하는 등의 지루하고 현학적인 유희거리들 뿐이었다.

"뭐 해?"

서준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그 자리에는 익숙한 얼굴의 형체가 서 있었다.

"현?"

"그래."

"퇴원한 거야?"

"아직은 아니야. 한 일주일 정도만 있으면 될 것 같긴 한데."

서준은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얼굴을 만나 반가워했다. 현은 손에 커피를 쥐고 있었다.

"다시 돌아온 걸 보니 정보부 쪽도 좀 상태가 나아졌나 보네."

"우리도 계속 손만 놓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현과 서준은 기지 본관동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시시콜콜한 잡담들을 나누었다.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먼저 그 말을 꺼낸 것은 서준이었다.

"나야 뭐, 좀 치료되고 나서는 간간히 재활하고 있지. 구내식당까지 걸어가서 밥을 먹는다던가, 간단한 서류업무 같은 걸 한다던가."

이제 막 일어설 수 있게 된 환자의 삶은 그리 다양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뭐, 그래도 일단 걸을 수는 있으니 얼마나 좋아? 저번 주엔 구내식당에 스파게티가 나왔다던데 먹지도 못하고 맛대가리 없는 병원밥만 먹었단 말야."

스파게티라는 말에 서준은 구내식당의 스파게티를 생각하다가, 무의식적으로 그 때의 크림 파스타를 떠올렸다. 그는 재빨리 그 기억을 다시 머리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었다.

"넌 요즘 어떻게 지내?"

"어, 응?"

그는 방금 통째로 밀어넣은 과거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어 찬찬히 읽어 나갔다.

"어…."

그는 계속해서 휴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나갔지만, 경은과 엮이지 않은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는 생각을 그만두고 간단한 말로 얼버무렸다.

"나야 뭐, 잘 지냈지."

"뭐 특별한 일 없었어?"

특별한 일, 특별한 일. 서준은 기억 속에 있는 '특별한 일'들을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딱히 특별한 일 같은 건 없었어. 그냥 간간히 카페나 간 정도."

"그러면-"

"너는 점심 먹었어?"

그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도록, 서준은 급히 주제를 돌렸다.

"나? 나는 점심 먹었지."

"오늘 메뉴는 뭐였는데?"

"너 오늘 식당 안 왔어?"

"난 그냥, 대충 기숙사에서 뒹굴거리면서 라면이나 먹었지."

"오늘 메뉴가, 그, 제육볶음에다가, 계란말이에…"

그 때, 현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갑자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맞다, 알람이…"

현은 핸드폰을 들어서 알람을 끄기 위해 화면을 보았다. 화면에는 "1시 반에 학과장님 상담"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 맞다. 나 해야 할 게 생각났는데, 난 좀 가볼게."

"어, 그래."

서준은 갑작스럽게 자리를 뜨는 현을 뒤로한 채 벤치에 조금 더 앉아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시계를 확인해 보자 2시까지 수십 분 정도 남은 상태였다.

서준은 일어나 바지를 털곤 정보부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 낡은 방의 원래 이름은 심문실이 아니었다. 원래는 조사실이나 면담실이라는 등의 이름으로들 불렸지만, 이제는 흔히들 심문실이라고 부른다.

심문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약간 어둡고 조용했다. 방에는 녹슨 의자 몇 개, 그리고 옆으로 긴 책상 하나만이 놓여져 있었다.

서준은 자신이 앉을 문 쪽 자리에 철제 의자를 하나 두고, 반대쪽 자리에도 의자를 하나 두었다. 그리고선 클립보드와 펜 하나, 그리고 녹음기를 책상 위에 올려둔 채 의자에 앉았다.

서준은 책상에 팔을 놓고 턱을 괸 채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거의 2시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곧 정지했다. 조사가 진행될 때마다 심문실 앞에 보안을 위해 꼭 한두 명씩 배치되는 보안 요원들이었다. 그들은 회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이 왔다는 것은 곧 조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서준은 헛기침을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녹음기의 전원을 킨 다음 클립보드에 면담 정보 기록을 위해 오늘의 날짜를 적어 넣었다.

곧 반대편 방향의 복도에서 점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왔다. 그 소리는 문 앞에 정지했다. 방금 전의 보안요원들처럼.

이윽고 문이 열렸다.








서준은 자신이 자신의 눈으로 무슨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경은도 그의 얼굴을 보고는 사뭇 당황한 모양새였다. 재단 직원은 휠체어를 끌고 들어오더니 앞에 놓여 있던 철제 의자를 치운 다음 경은을 테이블 바로 앞에 가져다 놓고 문 앞에 돌아가 섰다.

서준은 상황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정신이 나가 버린 사람처럼 되었다. 그는 녹음기의 전원을 켜는 것도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제일 먼저 영원할 것만 같던 침묵을 깬 것은 경은이었다.

"…저… 저기…"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말소리였지만 일전의 다정하고 나긋한 느낌은 사라졌다. 그 속에 담긴 것은 오직 혼란이었다.

서준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정보부장이 전화로 했던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자네가 할 일은 생포한 반란 놈 하나랑 면담하는 거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 거고."

그렇다. 쉬운 일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었다.

서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설명해 봐."

"…어?"

"설명해 보라고."

이 상황이 시작되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기가 있었던 그의 낯빛에는 어둡고 위압적인 기색이 도사렸다.

그는 이때까지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떠올렸다. 폭발음과 함께 건물 일부가 무너져 내렸던 것. 현의 실핏줄들이 파열된 눈을 보았던 것. 그의 힘겹게 움직이는 붕대투성이의 손과 몰골을 보았던 것. 카페에서 그녀와 만났던 것. 고전적으로 그녀에게 식당에서 고백했던 것까지. 모든 순간이 함께 머릿속에서 맞물렸다.

곧 당혹감은 배신감과 분노감으로 바뀌고야 말았다.

"…미안해요."

"뭐?"

"…할 말이 없는걸."

서준의 손이 떨렸다.

"그러니까, 당신이 혼돈의 반란 요원이었고, 이때까지 재단에 공작으로 내 동료들을 죽이고, 그러고서 뻔뻔하게 나한테 접근해서 뭐라도 캐내려고 했던 거라고?"

"잠시만, 아냐, 그건-"

"아니긴 뭐가 아니야!!"

서준이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소리가 아주 크게 났다.

"난 그날 이후로 장례 행렬을 몇 번이나 봤어. 붕대에 싸인 직원들도 아주 많이 봤고. 악몽 속에서도 그들이 보였어. 그럴 때마다 다짐했다고. 범인을 꼭 잡아서 죽여 버리겠다고."

서준은 핏기 어린 눈으로 경은을 쳐다봤다.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였던 그 보랏빛 눈이 무척이나 증오스럽게 보였다.

"그때 만났던 건 그저 순전한 우연이었어요, 정말로, 나는-"

"닥쳐!!"

서준은 주먹으로 한 번 더 세게 책상을 부술 듯 내리쳤다. 그는 면담 중에 클립보드에 무언가 기록을 해 둬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갑자기 재단 카드를 돌려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 미친 놈."

경은의 얼굴이 공포감과 절망으로 뒤섞였다.

서준의 기억 속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현의 모습을 보았을 때 느낀 절망감. 경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위로받았을 때의 그 후련함과 고마움. 그리고 식당에서 만났었을 때…

그는 손을 꾹 쥐었다.

"서준 씨, 나는-"

그 입 속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을 때, 서준은 이성을 잃었다.

서준의 주먹은 아주 빠르게 날아가 경은의 얼굴을 쳤다.

그리고 멈추지 않았다. 또 쳤다. 계속. 계속. 계속. 계속.

상대가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해 휠체어에 앉아있는 상태라는 것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얼굴, 팔, 몸통, 공격이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문 앞에 서 있던 보안요원들이 낌새를 채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바닥에 널브러진 휠체어가 날려가 철제 의자와 부딪혀 금속성의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나서였다.

보안요원들에 의해 양팔을 붙잡혀 바깥 복도로 끌려나가기 직전까지, 그는 발길질을 했다.





심문실 바깥에 내쫓겼을 때, 그는 바닥에 쓰러지듯 널브러졌다. 그리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아주 오랫동안 공중을 지켜보았다.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