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님, 형제니이이임.. 일어나세요, 형제님. 다 왔어요."
삼일은 깊은 잠에 곤히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곧 중현의 목소리가 마치 어두운 바다를 뚫고 올라오는 빛처럼 그의 의식을 느릿느릿 깨우고 있었다. 그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차창 밖으로는 아직도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까워지는 공항의 희미한 불빛들이 도착이 임박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뭐야.. 여기 어디야.. 벌써 공항이야?"
이제 막 자다 깬 삼일은 멍한 목소리로 중현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그는 차창 너머로 펼쳐진 공항 주차장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눈을 비볐다. 공항의 정신없는 느낌이 삼일의 혼란스러운 정신을 깨워가는 것 같았다.
"예, 형제님. 도착했습니다, 이제 내릴 준비 하시죠. 근데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꾸셨어요? 자는 도중에 계에속 소리를 질렀다니깐요. 뭐, 감자교 얘들이 세상이라도 정복하는 꿈이라도 꾸셨나 봐요?"
중현은 농담 섞인 말투로 삼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삼일과 같은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지만, 여전히 특유의 장난기가 남아 있었다. 삼일은 중현의 말을 듣고 잠시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냥 술 때문에 그런 거일 꺼야. 요즘 이래저래 피곤해서 꿈도 엉망이네.. 근데 감자교는 또 뭐야? 옥수수교로도 부족해서 이제 감자교까지 생긴 거야?"
삼일은 아직 덜 깬 눈으로 중현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차 안은 잠깐의 정적 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중현은 이내 다시 말을 꺼냈다.
"당연히 그냥 농담이죠. 저희 옥수수교가 이렇게 잘 나가는데, 감자교가 뭐라고 우리를 이길 수 있겠어요? 어쨌든 자, 이제 진짜로 내리셔야 합니다. 올 때 짐은 다 챙기셨죠?"
삼일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으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공항의 불빛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삼일은 자신의 바지 주머니를 더듬으며 중현의 물음에 대답했다.
"짐? 뭐, 대충 챙긴 것 같은데… 근데 진짜로 공항이야? 아직도 믿기지 않아.. 내가 이렇게 갑작스레 옥수수교 일에 다시 휘말릴 줄이야…"
중현은 삼일의 말을 듣고 약간 얼굴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형제님, 이건 휘말린 게 아니에요. 재차 말하지만 이건 운명이라구요. 스르크나보트프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사명이자 축복이죠. 형제님도 곧 느끼게 되실 겁니다. 일단 어서 나가시죠."
그는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섰다. 찬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삼일은 잠시 주저하다가 슬슬 차에서 내렸다. 공항 특유의 웅장한 느낌이 삼일의 눈앞에 펼쳐졌다. 삼일은 한동안 그곳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중현은 그의 곁에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형제님,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스르크나보트프님을 위한 계획은 현재 진행 중이라구요. 어서 늦지 않게 어서 가야 합니다."
삼일은 고개를 돌려 중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삼일은 잠시 입술을 떼다가 말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차는 어떡하지? 버리고 가는 거야?"
중현은 삼일의 어깨를 다시 한번 가볍게 툭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에는 불쾌할 정도로 많은 여유와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형제님. 이 차는 어차피 제께 아니에요. 그리고 세상엔 항상 대체할 것이 있으니까요. 중요한 건 운명 덕에 다시 재회한 저희의 목적이지, 이 차가 아니라구요. 형제님. 이제 서두르죠."
그 둘은 공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공항의 희미한 소음과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엔진 소리가 두 사람의 발걸음에 따라 멀고도 가깝게 울렸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은 어두운 밤 속에서도 밝은 조명이 그들의 길을 비추고 있었다. 삼일은 여전히 반쯤 깨어난거 같은 표정으로 중현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운명이라니… 참,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네."
중현은 삼일의 말을 듣고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현의 눈빛에는 무엇인가 깊은 확신이 서려 있었다. 중현은 잠시 삼일과 발걸음을 맞추다 다시 속도를 높이며 말했다.
"형제님, 인생이란 그런 것입니다. 저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때로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그것이야 바로 진정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삼일은 중현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삼일의 발걸음은 전보다 느려졌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삼일은 그저 고개를 약간 까딱거리며 중현의 말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흔들고 있음을 느꼈다. 삼일이 더 이상 대답하지 않자, 중현은 자신의 걸음걸이를 약간 빠르게 하여 다시 삼일의 걸음을 재촉했다.
그 둘이 공항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소음은 점점 더 커졌다. 사람들의 목소리, 캐리어를 끄는 소리, 안내 방송의 목소리가 서로 겹쳐 들려왔다. 삼일은 이러한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공항 건물의 유리문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흐름이 보였다.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그들을 보며 삼일은 문득 자신이 이곳에 왜 와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현아..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가… 정말 이게 옳은 걸까? 이 선택이 맞는 걸까? 그냥 다시 돌아가면 안 돼?"
중현은 삼일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에는 동정도, 조롱도 아닌 어떤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중현은 걸음을 멈추고 삼일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가 입을 열었다.
"형제님, 모든 선택에는 당연히 의문이 따르는 법이죠.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의문에 매몰되지 않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형제님께서 돌아가고 싶다면, 물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아두세요. 형제님이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는 단순히 제가 몇 마디 지껄여서가 아닙니다. 형제님 스스로가 이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죠."
삼일은 중현의 말 속에서 절대 깨지지 않을 듯한 결의를 느꼈다. 그러나 삼일은 그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삼일은 중현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삼일은 다시 한번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의 갈등에 사로잡혔다. 그는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각들 속에 자신이 이미 결정을 내렸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정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여전히 두려웠다. 삼일은 중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려 했지만, 중현이 먼저 그의 침묵을 깨뜨렸다.
"형제님,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형제님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혼란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고, 그것이야말로 형제님께서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입니다."
중현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따뜻했고, 삼일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푹 숙였다. 삼일의 눈에는 여전히 불안과 두려움이 다소 깃들어있었으나 그 깊은 곳에서는 약간의 희미한 각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삼일은 자신의 부스스한 머리를 훑은 뒤,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대로 해볼게. 그래도 정말로 이게 맞는 길인지 끝까지 확인하고 싶어…"
삼일의 목소리에는 결심과 망설임이 하나로 뒤섞여 있었다. 그의 말을 들은 중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이해와 격려가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그 미소를 본 삼일은 중현이 자신을 정말로 아끼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하나의 연기일 뿐인지 헷갈렸다. 그리하여 삼일의 머릿속에는 자그마한 의구심 한 송이가 조용히 싹을 텄다.
"형제님, 그 길이 맞는지 확인하는 것은 형제님 혼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저희 둘의 일이죠. 저희 모두의 노력과 믿음이 형제님의 결정을 지탱해 줄 겁니다. 이제 갑시다. 이러다가 비행기를 놓치면 그건 진짜 곤란한 일이 되겠죠."
중현의 말에 삼일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속에는 여전히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전보다 한결 가벼워 보였다. 삼일은 그저 중현을 진정으로 믿고 싶었다. 삼일은 몸을 일으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보는 공항의 거대한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운 하늘은 여전히 무겁게 느껴졌으나 어딘가 포근해 보였다.
둘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출발 게이트로 차차 걸어갔다. 삼일의 걸음은 조심스럽고 무거웠지만, 반대로 그의 옆에 선 중현은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함께했다. 길고 밝은 조명이 비치는 통로를 따라 걸으며, 그들의 뒷모습은 점점 작아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비행기 안으로 사라졌다.
마침내 비행기에 탑승한 뒤, 두 사람은 말없이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삼일은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 공허하게 떠돌았다. 옆자리의 중현은 가방에서 옥수수 사내들 이슈 #8을 꺼내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간간이 깨뜨렸으나, 삼일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 어딘가를 떠돌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순간, 비행기는 서서히 이륙하기 시작했다. 삼일은 창밖에 보이는 활주로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과거의 기억에 잠기는 듯했다. 활주로에 서 있는 비행기들, 점점 멀어져 가는 공항 건물들—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흐릿한 그림처럼 엉겨 있었다. 반면, 중현은 여전히 만화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중현의 눈은 빠르게 글과 그림을 따라가고 있었고, 간혹 작은 한숨을 내쉬거나 조용히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가속하며 날아오르기 직전, 삼일은 바깥 풍경을 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삼일의 머릿속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그때, 옆자리에서 중현이 책을 덮으며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이제 좀 쉬어도 돼요, 형."
'형'? 삼일은 순간적으로 귓가를 의심했다. 방금 중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형"이라는 단어가 그의 귀를 강하게 때렸다.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동시에 어색하게 들리는 호칭이었다. 마치 먼 과거의 기억이 현실로 끌려온 듯한 기분이었다. 삼일은 천천히 눈을 뜨고 옆에 앉아 있는 중현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마치 설명하기 힘든 감정의 흐름이 교차하고 있었다.
삼일은 곧 마음을 추스르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고르며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중현의 한 마디가 그의 마음에 던진 작은 파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복잡한 마음을 간신히 다잡은 삼일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마음을 정리하려 했고, 결국 서서히 잠들어갔다.
중현은 삼일이 잠든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무릎 위에는 방금 덮은 만화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중현의 눈빛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잠시 머물렀다. 더구나 그 생각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비행기가 마침내 하늘로 오르며 기체의 진동이 잦아들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한없이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현의 시선은 금세 창밖에서 멀어졌다.
비행기는 계속해서 구름 위로 올라가며 순조롭게 비행을 이어갔다. 삼일은 깊은 잠 속에서도 얼굴에 복잡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삼일의 표정은 마치 복잡하고도 낯선 꿈을 꾸고 있는 듯 보였다. 중현은 계속해서 삼일의 얼굴을 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기대 눈을 감았다. 마치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으려는 듯, 그는 잠깐이나마 자신만의 평화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중현아. 야, 중현아, 일어나. 우리 도착했어."
이번에는 삼일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 말은 중현의 귀에 닿아 그를 천천히 현실로 끌어올렸다. 중현은 무겁게 닫혀 있던 눈꺼풀을 열며 깨어났다. 깨어난 중현은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며 차분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삼일을 바라보았다. 삼일은 이미 준비를 마친 듯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가까워지며,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묘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그 둘은 드디어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려는 듯했다.
비행기는 점점 더 고도를 낮추며 착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조금씩 더 뚜렷해졌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드문드문 보이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사우스다코타였다. 브룩 레스너의 고향이자 러시모어산, 그리고 맛있는 옥수수들로 유명한 이곳 사우스다코타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삼일에게 묘한 상징성을 안겨주었다. 삼일은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무언가를 곱씹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또한 중현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각자만의 기대와 불안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비행기는 부드럽게 착륙했다. 기내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며 승객들에게 착륙을 알렸다. 두 사람은 짐을 챙기며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마쳤다. 이내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은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발 아래 단단히 느껴지는 땅의 감촉과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 순간, 그들은 서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짧지만 강렬한 눈빛 교환 뒤에, 두 사람은 말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공항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중현은 앞서 걸으며 주차된 차들 사이를 지나갔다. 삼일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삼일의 걸음걸이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검은 승용차 옆에 서 있는 한 남자와 마주쳤다. 그 남자는 잘 다려진 정장을 입고 있었으며,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그의 침착한 태도는 주변의 소란스러움과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제때 도착하셨군요, 중현 형제님."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으며, 어딘가 알 수 없는 권위감이 담겨 있었다.
"짐은 트렁크에 넣으시면 됩니다. 운전은 제가 맡겠습니다."
중현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트렁크를 열었다. 삼일은 옆에서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중현아.. 이분은 누구셔..?"
중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이분은 저희와 같이 스르크나보트프님을 섬기는 신도님이셔요. 지금은 그냥 저를 믿고 따르시면 되십니다."
삼일은 여전히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정장 차림의 남자를 바라보았으나,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중현의 가방을 조심스레 트렁크에 올려놓으며 묵묵히 따라가기로 했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차의 문을 열어 그들을 태웠다. 차는 이내 주차장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은 넓고 끝이 없었다.
차 안의 분위기는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삼일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고, 중현은 눈을 감은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은 정장 차림의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도로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분명했지만, 그곳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삼일은 알 수 없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삼일이 이 여정에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차는 한참을 더 달렸고, 창밖의 풍경은 점점 더 황량해졌다. 이제는 드문드문 보이는 나무들과 희미한 지평선만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차는 한적한 길가에 멈췄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중현과 삼일도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 앞에는 허름한 이층집 한 채와 광활하게 이어진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삼일 형제님."
중현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은 마치 오래 기다린 순간이 마침내 찾아왔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삼일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숨을 멈췄다. 삼일은 이곳이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곳임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삼일은 중현의 말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긴 미첼 콘 팔레스가 아니잖아… 여긴 대체 어디야?"
중현은 잠시 침묵하다 삼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길에는 위로와 결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이곳은 저희 옥수수교 형제자매님들께서 과거의 죄를 뉘우치시고 스스로를 반성하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 세운 장소입니다. 그리고 재단의 눈을 피하고자 지어진 곳이기도 하죠."
중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양복을 입은 남자가 트렁크에서 중현의 가방을 꺼내 들었다. 그는 그것을 조심스레 들어 집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발걸음은 묵직했고, 주위는 마치 정적에 휩싸인 듯 고요했다. 삼일은 중현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 모든 상황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옥수수밭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만이 긴장된 공기를 가로질렀다.
"그 과거의 죄라는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거야?"
삼일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궁금증과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중현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그의 눈빛은 어디론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무언가 자신만이 아는 무거운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삼일 형제님께서 물어보신 그 잘못은 단순한 실수에서 비롯된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고의였죠. 삼일 형제님과 제가 옥수수교에 참여하기 전, 옥수수교 신도분들은 어떻게든 축복을 받기 위해 그릇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그로 인해 제76기지가 습격당한 것이고요."
중현의 말이 끝날 때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비통함이 스며 있었다. 삼일은 이 모든 이야기가 어떤 결말을 향해 가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더 큰 의문과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옥수수밭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그들의 대화를 더욱 초현실적으로 만들었다.
"결국 저희는 재단과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건은 간단했습니다. 재단이 저희를 그냥 내버려두는 대신, 저희도 그들에게 어떤 방해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 계약을 어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삼일 형제님께서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중현의 마지막 말은 불길한 여운을 남기며 삼일의 가슴 속에 울려 퍼졌다. 삼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의 무게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발소리는 옥수수밭 사이에서 멀어지는 바람에 섞여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가시죠, 형제님."
짧고도 단호한 말이 정적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들은 아무런 말 없이 그 한마디를 따라 옥수수교의 새 터로 걷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옥수수밭을 스쳐 지나가며 귓가에서 속삭였고, 그들의 실루엣은 사라져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