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균실

발병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내게 치료될 때까지의 독방 사용을 권했고 나는 동의했다. 그의 서랍 속에서 한 움큼의 서류가 딸려올라와 내 눈앞에 내려앉았다. 작은 글자가 빼곡한 A4 용지들에 내 이름을 삼십이 번 볼펜으로 썼다. 갈수록 손에 힘이 빠지며 글자가 삐뚤어졌다. 어지럽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느낌.

지금 본인의 상태에 대해 이해하고 계십니까? 의사가 물었다. 아니오, 아니오. 난 아무것도 몰라요. 내게 설명해 줘야 하는 사람은 당신이잖아. 비명을 속으로 삼키고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내게 나가라고 손짓한다.

진료실 밖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둘 있다. 그들은 내 양어깨에 손을 얹고 나를 어딘가로 떠밀면서 걷는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몸이 텅 빈 듯한 느낌, 꿈꾸고 있는 것같이 세상이 흘러간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병동이요. 그들이 말한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을 구분할 수 없고, 사실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안내를 따라서 병동의 복도로 걸어간다. 길은 점점 단조로워지고 공기에서는 톡 쏘는 소독제 향기가 난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제 짐은요? 잠시 후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힘이 실려 있다. 반항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권위 서린 목소리. 나는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선다. 조립식 침대 위엔 린넨 이불이 얹혀 있고, 한쪽 벽에는 세면대와 샤워기, 그리고 최소한의 위생 도구들이 놓여 있다. 강화 플라스틱 유리창이 한쪽에 덩그러니 달려 있다.

뒤를 돌아보니 문은 이미 닫혀 있다. 나는 혼자 남겨졌다.

***

식사는 하루에 세 번 배급구를 통해 지급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들이 식기를 회수하고 나는 양치를 한다. 샤워는 잠에 들기 직전에 한다.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수치심과 불안감에 휩싸여 나 자신을 갉아먹으면서 하루를 보낸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감금 생활은 환자 보호 규약이라는 말로 한 차례 포장된 이후 아나운서의 부드러운 입술과 유연한 혀를 통해 편집되고 재조립되어 세상으로 발표된다. 오늘부로 환자 수가 5천 3백만을 돌파했습니다. 감염 경로는 여전히 불명이지만 발병 사례는 점점 늘고 있습니다. 우리는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환자들은 즐겁고 편안한 환경에서 고급 의료진에게 진료받고 있습니다…

그들이 언제 나를 죽일까? 이 병은 치료제가 없다. 우리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

밤이 되면 객실의 불을 끄고, 창문 너머로 찬란하게 빛나는 마천루들을 보며 잠에 든다. 저들은 지금쯤 아주 평범하고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겠지. 나는 그들에게 질투조차 느끼지 않는 내 자신에게 놀라워한다. 마음속에서 몰아치는 주된 감정은 허망함이다. 저들의 삶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는데.

잠은 불규칙적이고 불쾌한 악몽과 함께 찾아온다. 식은땀을 흘리며 비명을 지르다가 일어나면 시계는 오전 2시 29분을 가리키고 나는 한숨과 함께 다시 베개에 눕는다. 가끔 너무 힘들 때면 일어나서 물을 한 잔 먹는다. 의사는 충분한 수면이 병의 진행을 완화시킬 거라고 했었다. 개소리. 그의 말 중에 맞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침을 먹고 나면 또다시 텅 빈 시간이 나를 찾아온다. 자기연민도 합리화도 분노도 이미 할 만큼 했기에 나는 무기력증을 택한다. 자해보다 아프지 않고 울음보다 에너지를 덜 소모한다. 침대에 누워서 지친 눈으로 바닥을 바라본다.

기억에 커다란 벽이 세워져 나의 삶을 두 부분으로 쪼개 버린다. 발병하기 전과 발병한 후. 나는 의식적으로 이 벽을 넘어 예전의 생활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사람의 뇌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라, 가끔씩 친구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친다. 나는 기어이 몇 번씩 벽에 머리를 박고서야 통제력을 되찾는다.

의사는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병에 대한 상담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전에 만났던 의사가 아닌 전혀 다른 의사다.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보는 손.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고개를 젓고 그를 돌려보낸다. 마이크의 잡음 너머로 수많은 의사들이 다른 환자를 상담하는 게 얼핏 들린다.

다른 병실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린다. 나도 마주 비명을 질러 준다.

발병의 시점은 정확히 언제일까? 이 물음에 답을 찾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언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천천히 시작된 것 같고, 언제는 아주 최근에 시작된 것 같다. 병은 시간선을 이리저리 넘나들며 내 삶을 갉아먹는다. 오염되기 전의 ‘순수한’ 기억들은 점점 사라진다.

오후 3시가 넘어가면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인다.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던 몸은 내가 관절을 돌릴 때마다 고통을 호소한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제자리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허리를 쭉 펴고 다리를 움직인다. 의사는 그런 나를 칭찬한다.

땀을 실컷 흘리고 나면 등목으로 몸을 간단하게 씻어내고 저녁을 먹는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순간 혀도 고장난 건가 싶었지만, 곧 내 미각이 아니라 머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몸이 아무 반응을 하지 않고 있는 거겠지. 후식으로 나온 쿠키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물을 들이킨다. 마치 콘크리트를 씹는 것 같다.

다시 잠에 들 시간. 샤워를 하고 불을 끈다. 문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내일이 오기 전에 죽을 수 있을지 고대하며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태양은 떠오른다.

***

이 생활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나는 더 이상 의사와 얘기하지 않는다. 그가 돌팔이였다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래도 여기서 나가고 싶지는 않다. 병은 아직 내 몸 속에 있다. 그것을 세상 속에 풀어놓느니 차라리 여기서 병과 함께 천천히 말라죽어가는 게 나을 것 같다. 아침으로 나온 브로콜리를 씹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대화 상대가 없어진 내 입은 귀가 심심해하지 않도록 혼잣말을 자주 한다. 입은 쉴새없이 지껄이고 귀는 해 줄 말이 없어 닥치고 듣는다. 마치 사람들처럼, 마치 나처럼. 재미있다. 나는 인형이라도 만들어 자아를 줄까 하다가 너무 미친 것처럼 보일까 봐 마음을 접는다. 그래도 혼잣말은 계속 한다.

배식구 너머로 나오는 음식들은 매일 조금씩 양이 줄어든다. 신기하게도 그렇다고 해서 배가 고프지는 않다. 식사량을 줄이는 것도 병을 고치기 위한 걸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을 궁금해한다.

TV에서는 가끔 병을 이겨내고 완치에 성공한 사람들의 사연이 흘러나온다. 그들을 지켜보지만, 예전만큼 열의에 찬 태도는 아니다. 그들과 나는 다르다. 내가 남은 평생 동안 최고급 시설에서 치료를 받고 몸을 통째로 갈아끼운다 해도 병을 없앨 수는 없다. 아마 나와 같은 환자들이 완치가 가능한 이들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옆 병실에 있던 사람은 투병 생활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죽었다고 한다. 나는 최소한의 슬픔 외에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아직은 내 감정조차 너무나 벅차서 다른 사람을 위해 할당할 공간이 없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진다. 거울을 보며 빠진 곳을 찾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이렇게 작은 고민들에 매달리고 있는 자신에게 웃음이 난다. 그래,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밤이 되면 창문에 커튼을 치고 잠에 든다. 더 이상 바깥의 일상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내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창문을 타고 머리맡으로 흐르는 희미한 도시의 소리를 듣는 것에 만족한다.

***

슬슬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병에 걸린 지 1년이 넘었고 나는 투병 생활에 익숙해졌다. 내게 남은 건 약간의 흉터와 스트레스성 발작 그리고 간헐적인 불면증이다. 다행히 상황이 여기서 더 악화될 것 같지는 않다. 처음에 각오했던 것에 비하면 견딜 만한 수준이다.

들어올 때 받았던 짐을 풀고, 옷장을 열어서 퇴원할 때 입고 싶은 옷이 있는지 살핀다. 아쉽게도 모두 너무 작아진 옷이라 나와는 맞지 않다. 아무래도 새 옷을 사야겠어. 나는 의사를 부를까 고민하다가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문을 닫는다. 대신 침대에 걸터앉아 작게 휘파람을 부른다.

최근에는 명상을 정말 많이 하고 있다.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반쯤은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라 효과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상당히 일반적인 사람처럼 행동하며 객실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여전히 혼자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다.

잠이 오지 않을 때 가끔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상상하며 혼자 연습하기도 한다.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는다. 누군가와 소통했던 게 너무 오래전 일이라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할지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꾸준히 노력한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괜스레 심장이 빨리 뛴다.

병은 천천히 내 몸에 뿌리를 내리고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고민하다가, 둘 다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시작부터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후가 괜찮아진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축하할 만한 일이다.

의사들은 내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저들을 끊어낸 건 나였으니까. 서로 갈 길을 가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병실에는 더 이상 음식이 지급되지 않고, 나는 물을 마시며 하루를 버틴다.

몸의 감각들이 하나씩 돌아오면서 나는 몸에 넘쳐흐르는 활기를 느낀다. 가끔씩 폐를 찌르는 통증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나는 병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심호흡. 충분한 수분 섭취.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가짐. 모든 명제가 그렇듯이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밤하늘의 별들이 밝게 빛나며 텅 빈 어둠 속을 아기자기하게 수놓는다. 그 빛에 가려져 도시의 색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악몽 없는 단잠을 잔다.

***

똑, 똑, 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앉아 있던 나는 당황하며 몸을 일으킨다. 누구지, 의사가 왔나? 그러나 바깥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익숙한 사람의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기억에 묻어 둔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이리 와, 같이 가자. 그가 말한다.

글쎄, 여기서 나가야 할까? 아직 잘 모르겠다. 이 병실을 나간다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의사들이 날 받아 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그 망설임을 느꼈는지 친구의 목소리도 작아진다.

안 갈 거야?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줘.

그러나 입을 떼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제 충분하다는 걸. 이 병실에는 있을 만큼 있었어, 잠시나마 혼자 즐거웠지만 여기서 영원히 살 수는 없잖아. 결국 우리는 모두 벼랑 끝에서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뛰어내려야 하는 동물이니까.

몇 년 동안의 고독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끝난다. 나는 병실 문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고 연다. 당연하지. 잠금장치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어서 와. 그가 말한다. 나는 그의 얼굴이 예전과 꽤나 달라졌다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다가 그도 감염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랬구나. 너도 꽤나 긴 투병 생활을 거쳤겠구나.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같이 병동 목도를 걸어나간다. 의사들이 그런 우리를 보지만 딱히 제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객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1층으로 향한다.

어디로 가야 할까? 내가 묻는다.

아무 곳이든. 그가 답한다.

병원의 로비는 텅 비어 있다. 우리는 그 공간을 가로질러 로비의 문을 열고 바깥 세상으로 들어선다. 도시의 불빛 속으로, 일반인들과 감염자들이 섞여 사는 곳으로.

그리고 아주 저 멀리, 해도 달도 바람도 닿지 않는 곳까지, 구름 너머 별들이 사는 곳까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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