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아이고, 우리 소장님한테 한 잔 따라얍지요. 일루 와."
"에이 언니, 왜이래. 벌써 취했어?"
제02K기지 별관 직원식당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서씨 자매는 얼근히 달아오르는 붉은 얼굴을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제02K기지 이사관 서아인 박사는 오랜만에 만난 동생이 그저 반가웠지만, 이제 중앙기지 종합연구소장에 착임하게 된 서다인 박사는 웃음의 한편으로 한숨이 배어나오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인이 새로 따라준 소주를, 다인은 잠시 잔을 흔들다가 단숨에 비웠다.
"언니, 01K에 있던 시절 기억 나? 벌써 10년도 넘었네 이제."
"그렇지, 유리 씨 사건 후에 금방 02K로 옮겼으니까."
"가서는 금세 또 이사관까지 올랐고. 역시 언니야…"
"얘는 무슨. 너야말로 종합연구소 가자마자 붙박이 에이스로 활약하더니 이젠 소장님 되셨잖아. 자, 간부가 되신 기분이 어때? 한 잔 더 따를까?"
"…"
"왜 그래, 못 마시겠어?"
"아니, 그건 아닌데…"
다인은 잠시 주변을 살피고는 — 물론 재단에서 그것이 크게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건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 아인에게 슬쩍 속마음을 얘기했다. 실실 웃고 있던 아인도 동생이 고민을 털어놓자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관리이사관님의 생각을 모르겠다 이거군."
"그래. 일단 내가 소장 자리에 어울리냐는 제쳐두더라도, 역대 소장 중에 나보다 근속연수가 짧은 분이 없어. 사령부에 나보다 괜찮고 오래 근무한 연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종합연구소에만 해도 네 분은 계셔. 왜 나일까?"
"좋은 거잖아? 누가 들으면 최연소 소장 기록 세웠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줄 알거야."
"그래서 말도 못하는 거지. 얼마나 속으로 앓았으면 대뜸 부산까지 왔겠어 내가."
다인은 다시 한 잔을 들이키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근데 제일 신경쓰이는 건,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거야."
"무슨 소리야?"
"내 인선으로 이제 제01K기지 부서장급은 그 전까지 중앙기지 근무 경력이 없거나 짧은 사람들만으로 채워졌어. 예외라고 해봐야 인사이사관님이랑 연구이사관님 정도. 그래, 연구부 최 이사관님 빼고는 부서장 전원이 관리이사관님 취임 후에 교체됐고 말야. 이게 우연일까?"
"그건… 관리이사관님도 작년에 이미 취임 10년차를 넘겼잖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시간이 흐른 거 아닐까?"
"아니야, 들어보라니까. 매년 한 명씩 빠짐없이 교체되는건 아무래도 찜찜하다고…"
2022
제308기지의 격리이사관보 웰러 박사는 지독한 고집쟁이였다. 좋게 말하면 신념이 확고했고, 흉을 보자면 독불장군이었다. 격리부 업무에서 일단 그가 안된다고 눌러앉아 버티는 일이 벌어지면, 끝내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든지 시설부가 나서서 그 대상의 격리 시설을 옮겨버리든지 둘 중 하나의 경우가 아니고선 웰러는 요지부동 절대 물러나지 않았다. 특히 그가 고집을 부리는 사안들은 하나같이 효율을 이유로 격리 원칙을 조금 무시하려던 경우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가용자원을 고려해야 하는 상급자들부터 일선에서 절차를 수행하는 하급자들까지 골고루 불만을 듣는 존재였다.
캐번 D. 웰러를 발음대로 옮겨 적은 데서 유래한 동굴에나 살 사람Cavern Dweller은 편한 것은 하나도 안 쓰는 웰러를 구석기 원시인이라고 비꼬는 동시에 그가 지독한 컴맹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별명이었다. 그는 폴더폰을 썼고, 종이에 작도했으며, 수첩에 필기했다. 극도의 아날로그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게 낫다는 개인적 신념의 영향도 물론 있었지만, 복잡한 전자장비는 만졌다 하면 고장내는 탓이기도 했다. 이런 성격과 성향 탓에, 동료들은 그를 두고 "진짜 업무 전문성 하나로 먹고사는 양반"이라고 평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저를, 한국사령부 격리이사관으로 앉힌다고요? 뭐 잘못 들은 거 아니겠습니까?"
"스스로도 말 하셨네요. 업무 전문성은 확실하다고."
인사명령을 전달하러 그를 호출한 서부지역사령부 소피아 라이트 이사관은 녹즙 한 포를 입에 털어넣고는 대꾸했다.
"각 사령부 관리이사관들에게 문의가 왔었어요. 유능한 격리 전문가들 중에 가장 비타협적인 원칙주의자를 꼽아 알려달라고. 그래서 당신을 적어 냈더니 덜컥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구요."
"하… 사령부급으로 가면 전산으로 서류 작업이나 왕창 할텐데. 그냥 여기서 더 일하면 안되겠습니까."
"팔자도 좋으셔라. 직책과 업무는 원래 자기가 아니라 상사가 정하는 거에요. 가서도 지금처럼 열심히 일하세요. 아무래도 그게 그쪽 관리이사관님의 바람인 거 같으니까."
웰러는 이사관실 소파에 푹 기대어 늘어지며 한숨을 쉬었다.
"저도 저대로 별종이지만, 거기 관리관님은 더 별종이군요."
"일정 정도 동감하긴 하는데, 어디 가서 그런 말 하고 다니지 말아요. 박사님이 그런 거 절대로 신경 안 쓸 사람이란 건 너무 잘 압니다만 타지에서 일할 땐 일만 잘 한다고 땡이 아니니까. 아니, 사실 여기서도 땡 아니거든요?"
라이트 이사관이 생각해보니 열받는다는 투로 쏘아붙이는 것을 웰러는 못 들은 척 흘려버리며 찌뿌둥하게 일어섰다.
"아무튼 뭐, 그동안 신세 졌습니다."
"그래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박사님 덕분에 수습한 일이 산더미인데, 저도 감사를 표하죠."
"그건 그러셔야 맞죠."
"못 살아."
진저리를 치는 소피아를 뒤로 하고 웰러는 이사관실을 나섰다. 이제 방으로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잔뜩이었다. 산더미같은 종이 문서들 중 기지 업무 관련으로 남겨둘 것과 격리 이론 개발에 대한 개인 연구기록을 나눠서 따로 챙겨야 하고, 요 전에 반려 때려놨던 제안서들의 반려 사유들을 더 명료하게 작성해서 후임자에게도 재차 제대로 당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집행 중인 기지내 모든 격리 절차들을 한 차례 다시 검토해서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떠날 수 있으리라.
자기 없이는 굴러가지 않을 것 같던 기지를 이제 떠나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실감이 들지 않았지만, 한국사령부에서 앞으로 해내야 할 업무들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마음 속에서 더욱 커지고 있었다. 첫 발령 때가 생각나는 두근거림이었다. 그리고, 굳이 외부에서 이렇게 독특한 사람을 데려가려는 한국사령부 관리이사관은 무슨 사람일지도 그에게 못내 호기심을 안겨주었다.
2021
"저기, 쯔산 요원님."
"네, 이사관님."
쯔산이 되묻는 말에 시설이사관 이효원 박사는 익숙치 않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박사 스스로는 내심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고, 혹시나 인사명령이 잘못 전달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쯔산이 데려온 이사관실의 책상에는 분명히 그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놓여 있었다. 그가 계속 멍하니 있자 쯔산이 살짝 쏘아붙이듯 다시 물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아, 아니요. 별 거 아닙니다."
"하여간. 계속 못 믿겠단 표정 하고 계실 겁니까? 관리이사관님하고도 이미 면담하지 않으셨나요?"
"했죠 그야. 그렇지만 요원님도 갑자기 내일부터 이사관으로 근무하라고 하면 이러시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거야 그렇긴 하겠죠. 그렇지만 뭐, 아시잖아요?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만큼 한가하시지 않을 거라는 거. 집무실 이전은 오늘 오후에 기지 시설부에서 거들어드릴 겁니다. 업무 인수인계는 필수사항 먼저 열람해서 숙지하시고, 상세와 실무는 보좌진을 통해서 차근차근 익히셔야 할 겁니다."
"잠깐, 그러면 성 이사관님은 바로 정선으로 가신 겁니까?"
"네. 777K 신임 이사관이시니까요.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 썩 기분 좋게 이동하신 건 아닌 것 같죠?"
전임자에게 조언을 구하는 건 포기해야겠군 — 효원은 시야가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방금까지의 붕 뜬 감각에서 급격히 눈 앞의 현실로 끌어내려졌다. 고된 임기가 될 것이었다.
"그럼, 수고하십쇼.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시고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종종 뵙지요."
쯔산과 인사를 마저 나누고 그를 돌려보낸 뒤, 이효원 박사는 잠시 새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아직 자기 짐을 옮겨넣기도 전이라 집무실은 더더욱 낯설고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시설 전문가 경력은 우습게 보일 만큼 이 자리는 무겁고 거친 시련이 될 터였다.
그렇게 이효원 박사가 이사 시간 전까지 필수 인수인계 사항 문서를 읽어보려던 찰나 갑작스레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라고 입을 떼자마자 시설부 금융자산관리과의 오성찬 박사가 숨을 헐떡이며 들이닥쳤다.
"죄송합니다, 내선 전화가 뽑혀 있어서!"
"아, 성 박사님 짐을 뺄 때 누가 잘못 건드린 모양이군요. 제가 꽂아두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사관님, 지금 당장 확인하러 가셔야겠습니다. Tulip.aic 건입니다!"
"…네?"
2020
전산보안은 현대 재단 시설 유지관리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것이 충분히 인정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 수 년 간의 난리통은 사령부의 전산 전문가들에게 지옥같은 시간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한민국 지역사령부에서 전산 보안의 중요성을 확실하게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손인섭 전산보안행정관이 제01K기지 시설부장으로 선임된 것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요 직전에 휴가는 잘 갔다 왔나?"
"예 뭐. 간만에 무탈하게 쉬고 왔습니다."
"별 일도 다 있군. 흐흐흐."
"그렇게 놀리시기 있습니까?"
"글쎄, 자네 휴가 때 터져야 했던 게 안 터진 만큼 임기 중에 큰 게 올지도 모르지."
"진짜 그렇게 놀리시기 있습니까, 예…?"
사령부 시설이사관 성현배 박사가 킬킬대며 웃는 것을 손인섭 부장은 약간 언짢은 미소로 흘려넘기고 있었다.
"놀리는 게 아니라 인섭이 자네는 진짜 감사해야 해. 휴가를 그렇게 못나가니까 일복이 터져서 전산 나부랭이가 용케 시설부장까지 맡은 거 아니야? 보통이면 꿈도 못 꾼다고. 지금도 콧대 높은 우리 건설 친구들이 자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나 있는데, 뭐… 임기 중에 진짜로 큰 거 터지면 바로 아웃이겠어. 흐흐."
본인이나 조심하시라, 무심코 쏘아붙일 뻔한 독설을 인섭은 조용히 삼켰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조심하고 다니겠습니다."
"충고하는데, 너같은 샌님이 구르기엔 시설부는 너무 거칠어. 먼지와 시멘트, 피와 담즙을 손에 적셔가며 일하는 시설 최일선의 사람들은 자판이나 두들기는 고운 손가락을 보면 구역질을 한다고. 너희는 우리가 한 일을 보고 헛구역질 하는 동안에 말이야! 우리 만큼의 각오가 자네에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나?"
"…그럼 이만."
그는 잠자코 일어나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선 휴게실을 나왔다. 그 뒤에서는 성 이사관이 여전히 비웃는 눈길로 인섭을 흘겨보고 있었다. 인섭이 그 시선을 무시하며 휴게실에서 부장실로 향하는 모퉁이를 도는 찰나, 웬 스웨터 차림의 장발 여성이 껄렁한 자세로 아는 체를 해 왔다.
"뭔 일로 그렇게 똥이라도 씹은 표정입니까?"
"아, 심 교수님."
"딱 봐도 성현배 씨가 속 긁은 게로군요. 그 양반 언제 물러나나. 하~ 저도 지금 재경위 일로 올라온 거라 얼굴 봐야 하는데 참 개같아서 못해먹겠습니다. 내가 먼저 관두나 지가 먼저 관두나 내기라도 하는 거면 걍 제가 관둘까봐요?"
"허허, 굳이 그러실 거 있습니까."
"아, 성현배가 속 긁었다는 건 부정 안하네요. 걸려들었으."
제134K기지 이사관이자 수리과학부 교수, 재정경제자문위원인 심민경 교수는 자기야말로 이런 대화로 상대 속을 긁어놓는 데에 도가 튼 인물이었다. 학식과 업무 능력은 확실해 중용을 받고 있지만 까놓고 말해 인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손인섭과는 — 어디까지나 비교적이지만 — 꽤나 기껍게 지내는 편이었는데, 재무 관련으로 업무상 부대껴온 시간도 있겠지만 최대 요인은 성 이사관과 사이가 안 좋다는 공통분모가 서로간의 비호감보다 더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암튼 손 부장님. 제가 허튼 소리 하는 것 같습니까?"
"어느 것 말씀이십니까?"
"아 다 허튼 소리 같으시다—. 뭐 대부분 큰 생각 없는 얘기긴 했습니다만 성현배 관둘 거란 얘기는 반쯤 오피셜입니다."
"예?"
"관리이사관님 눈 밖에 났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부러 777K 이사관에 꽂아 모양새 좋게 중앙에서 내쫓을 겁니다. 시설 업무에 크게 요동이 있을테니 대비하세요. SCiPNET이랑 어드밴스드도 단도리 하시고, 여차하면 사령부 시설부에 부장님쪽 애들 지원 보내는 것도 미리 대비해두시고."
"허어. 난데없이 이건 또 무슨 상황입니까?"
"뭐, 부장님은 관리관님한테 꽤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얘깁니다."
심민경이 스웨터 앞주머니에서 USB 하나를 꺼내 손인섭에게 건넸다. 그 내용물은 향후 수 년에 걸쳐서 손인섭과 한국사령부에 다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었으나, 이 순간 인섭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2019
"기록정보보안행정처 신임 연락실장 전도균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쪽이야말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주까지 먼 길 오시도록 괜히 고생을 끼친 것은 아닌지."
"아닙니다, 거점기지들은 한 번씩 직접 들러서 기록보관소를 좀 둘러보려던 참이었거든요. 이제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작년에야 이사관을 맡은 터라, 앞으로 신세를 지게 될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그 천하의 설세명 이사관이 그런 말씀을 하셔야 쓰겠습니까."
제13K기지 응접실에서 두 사람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악수를 나눴다. 그들이 그대로 탁자 앞에 마주보고 앉아서 언제 어느 단지를 시찰할지 등의 방문 일정을 조율하는 사이, 전도균 실장은 설 이사관이 내놓은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곤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이거 정말 고급 차군요. 제주녹차인가요?"
"네, 제가 특별히 아는 농원에서 받아오는 겁니다."
설세명은 싱긋 웃었다.
"전 실장님은 이번에 사령부에 처음 오신 건가요?"
"아닙니다, 신참때 제09K기지 사서로 근무했었죠. 그 후에 SCP-984-KO 시설을 거쳐 바로 RAISA 본청으로 갔으니… 15년 만이군요. 그때도 한국사령부는 다사다난했지만, 요 몇 년은 더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변칙성 폭증 자체를 변칙현상으로 의심하는 보고서도 있었을 지경 아닙니까."
"어후. 말도 못하죠. 953-KO 사건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끔찍하더군요. 이사관님 활약은 그때부터 이미 인상깊게 듣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이 알고 계시겠지요. 518-KO라든지… 579-KO나, 597-KO라든지… 1108-PA… 프로젝트 디어사이드라든지."
"…"
전도균 실장이 잔을 내려놨다. 부딪히는 소리 없이 조용히, 그러나 다부지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잘 알겠습니다."
"…"
"저는 09K에서 제 손으로 전출 신청서를 썼습니다. 재단 사서는 기록을, 과거를 매만지는 직업… 비록 제가 짓지 않은 죄악이라도 숨김으로써 저의 업보가 되는 직무입니다. 지금까지 봤던 과거 기록 중 잊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단 하룻밤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관리이사관님께는 말씀 들으셨습니까?"
"파견 첫 날, 인사드릴 때 넌지시 귀띔하셨습니다. 이사관님이 부르실 거라는 것도."
"더 긴 말이 필요하진 않겠군요."
설세명 이사관은 조금 남은 찻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13K기지 메인 아카이브 센터는 전 사령부의 모든 시설에서 생산된 모든 기록물을 1차 저장하는 서고입니다. 지리적 고도에 마련된 최대의 백업 보관소이자, 제01K기지 기록보관소보다도 오래된 사령부 최초의 아카이브죠. 01K 쪽에는 다이제스트와 본문 위주로만 저장되어 있는 1971년 이전의 데이터도 모두 원본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전도균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일어나자, 설 이사관이 웃으며 말했다.
"가시죠. 할 일이 많습니다."
2018
"한국사령부?"
올라시 전 재단 정보국장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올라시의 사택 응접실에 찾아온 손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은 그에게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작년에 삼자회담을 한다고 들락거리더니 덜컥 약속이라도 하고 온 겐가?"
"그런 셈이지요."
"정신 차리게나. 자네 징계 받은 거 아니야."
"뭐, 스스로도 커리어를 정리할 때는 되었다고 느끼고 있어서 말입니다."
"나는 거기 관리이사관에서 광역정보국장으로 '영전'했네. 무슨 의미인지 모르나? 중앙부서에서 일개 지역사령부로 가는 건 좌천이나 진배 없단 말일세. 그레이스가 무슨 바람을 불어넣은 건지는 몰라도, 자네만한 정보요원의 말년이 이딴 식으로 끝나는 건 납득할 만한 일이 아니라네."
올라시가 역정을 내든 말든 광역정보국의 카에스틴 브롬 제1차장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어차피 윤리위 평결 이후로 은퇴는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최 관리관님의 부름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이고요. 이렇게 궁둥이를 의자에 처박은 채 시간만 축내는 것보단 제가 필요하다는 곳에서 일하다가 물러나고 싶습니다. 국장님처럼 말이죠."
"이 녀석이 이젠 나한테까지 먹칠을 하는구만. 자네는 원래 내 자리를 쭉 이어받았어야 할 터인데 그 빌어먹을 외교 참사에 발을 빠트려서는… 그래, 마음대로 하시게나. 어차피 그 자리에서 끝낼 참이면 자네나 나나 똑같이 뒷방 늙은이인데 뭘 보고까지 하겠다고 이래 와서 귀찮게 구는가."
"허허, 우리 사이에 이러시깁니까. 인사도 안 드리고 갈 수야 없지요."
카에스틴은 능청맞게 웃어보인 후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국장님이 계셨을때 한국사령부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한국? 지긋지긋한 동네야.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네. 알량하게 독자 노선을 가겠다는 민간 정부나 망할 북한도 그랬지만, 최악은 고작 정부 지원 하나가 끊겼다고 엉망이 되어선 제대로 굴러가질 못하던 나약한 사령부 시스템이었지. 옮겨와서도 업무 관련으로 계속 들여다 볼 일이 있어왔네만 딱히 나아진 것 같지는 않아."
"그곳에서 많은 걸 하셨죠."
"많은 걸 떠맡았지."
"너무 많은 걸 하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올라시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에스틴은 말 없이 다시 커피를 마셨다.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이었네. 아무튼, 자네 일이 이렇게 된 건 유감이지만—"
"전 딱히 유감스럽지 않습니다, 국장님."
"정정하지. 자네가 그렇게 된 건 나에게 많이 유감스럽지만, 뭐든 자네 선택을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겠네."
"…"
카에스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 할 말 다 했으면 이만 가보게. 은퇴자도 나름대로 바쁘다네."
올라시가 지팡이를 짚고 일어서자 카에스틴도 자리에서 일어나 목례로 인사를 고했다. 올라시는 콧방귀를 뀌곤 대꾸 없이 그대로 서재로 들어가버렸다.
사택을 나와 관용 차량의 뒷좌석에 탑승한 카에스틴은 습관적으로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뻗다가 그만두었다. 익숙한 자세로, 그러나 헛헛한 기분이 드는 빈손으로 그저 턱을 괴어 팔걸이에 기대면서, 카에스틴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앞으로도 웃는 낯으로 뵙고 싶었습니다, 국장님."
2017
"소장 윤승옥을 재단 중장에 임함. 또한 대한민국 지역사령부 특무이사관 겸 특무작전사령관에 보함."
잠시 동안 컨벤션홀에 차분한 박수 소리가 울렸다. 단상에서 임명장을 받는 윤승옥 중장의 표정은 썩 밝아보이지 않았다. 그런 낌새를 눈치 챘는지, 임명장을 건넨 뒤 악수를 청하던 관리이사관이 그에게 슬쩍 귓속말을 던졌다.
"이따가 따로 좀 보죠."
취임식이 전부 끝나고, 한참 김기선 대령이나 허버트 리 소장 등의 내빈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던 윤승옥 중장은 정복 소매를 매만지며 컨벤션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자 화창한 빛살이 쏟아들어져오는 커다란 복도 창 앞에 샴페인 잔을 들고 서 있던 관리이사관이 그에게 손짓했다.
"관리관님."
"좋은 날인데 입꼬리가 왜 그렇게 뻣뻣해요?"
"중앙 참모직도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는 일개 일선지휘관을 사령부 특무작전사령관에 앉히신 어느 분 덕분에 말입니다.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군요."
관리이사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2차 삼각분쟁 개전 당일, 그것도 스파이의 내응으로 기지 자체가 내부부터 무너지던 때 특무전력을 모두 추스르고 응전 역량을 재구축했던 건 누구였죠?"
"과대평가십니다. 그런 이유라면 저보다 기선 군을 뽑으셔야 했습니다. 어차피 중령 윤승옥을 5년만에 중장까지 밀어가며 억지로 앉히실 정도로 무리를 하셨지 않습니까?"
"전혀 다르죠. 김 대령님은 현장에서 직접 뛰는 전투원이었고 중장님은 위기관리를 진두지휘한 전략가잖아요. 이제 대령님도 중장님의 후임으로 제64K기지 특무이사관보 자리에서 경험을 쌓겠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그럼 저는 되는 이유가…"
관리이사관은 검지를 똑바로 세운 오른손을 중장에게 치켜들어 말을 끊었다.
"앞으로 사령부가 마주할 위기에 당신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예요. 자기 스스로를 못 믿겠다면, 나와 인사부의 안목을 믿어도 좋아요."
"위기?"
"그래요. 확실히 단언해서 말할 수 있는 건 없지만… 나는 대비해야 할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중장님, 아니 우리 특무이사관님에게도 이제 알려드려야만 하는 거에요."
관리이사관은 단호한 눈빛으로 승옥을 노려보았다. 잠시 시선을 맞추고 있던 윤 중장은 회장 입구를 슬쩍 돌아보고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시다니 따르지요. 저를 오판하셨을까 걱정했을 뿐, 장교로서 책무를 맡는다면 도망치지 않습니다. …다만 장소가 좋지 않군요. 중요한 얘기를 나누기엔 귀가 너무 많습니다."
"중장님의 그런 점이 좋단 말이에요. 5시에 관리이사관실에서 뵙죠."
시니컬한 웃음을 남기고 관리이사관은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2016
인사부 킬리 박사에게 걸리지 마라. 한국사령부에선 이런 격언이 공공연히 통용되고 있었다. 그가 냄새를 한번 맡고 물고늘어진 인원은 반드시 고과에서 물을 먹었고, 그가 잡아낸 결격 사유는 한 번도 논파당한 적이 없었다. 일부 타성적인 직원에게는 너무 깐깐하게 승진 길을 막는다는 볼멘소리를 들었지만, 많은 평범한 직원들에게는 그런 무서운 여자가 있다더라 하니 걸릴 일을 만들지 말자는 위명으로 통했다.
"그러니 이렇게 인사이사관 자리를 부탁드리는 거죠."
"칭찬으로 들리지는 않네요."
"무슨 말씀을.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다는 찬사 아니겠어요?"
차기 이사관 지명을 앞두고 그를 면담실에 부른 관리이사관이 웃으며 말했다. 그 앞에서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여성은 명백히 미성년자의 모습이었지만, 그가 바로 소문의 킬리 박사였다. 인사부로 자리를 옮긴 것도 20여 년 전의 사건으로 이런 모습이 된 뒤 더이상 연구 현장에서 뛰기 어렵다고 하여 자청한 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진실은 조금 더 복잡했다.
"내부보안부 수사관이 한 지역사령부의 인사책임자까지 맡는 건 모양새가 나쁘지 않나요?"
그때 부작용으로 기억소거 저항성을 얻은 킬리 박사는 그 이후로 재단의 비밀 방첩조직인 내부보안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부서를 옮긴 것도 그가 내부보안부 수사관으로 활약이 늘어나면서 연구 업무에 쏟을 시간이 부족해졌기 때문으로, 업무 영역이 상당히 겹치는 인사부로 옮긴 뒤에 킬리 박사가 그야말로 날아다닌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어차피 알려질 일도 없잖아요? 인사 평가에는 원래도 ISD 소견이 필요하고요."
"두 검증 체계의 최종 보고자가 일원화되는 것이 위험하다고는 생각 안하십니까?"
"인사본부와 내부보안부에는 이미 문제 없다고 확인한 차입니다."
"관리관님께서 억지를 부리셨겠죠. 인사부 2차장으로서 이 인사명령의 부당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못 당하겠네요."
관리이사관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책상에 놓아두었던 종이 몇 장을 집어 킬리에게 건넸다.
"이건 뭐죠?"
종이를 받아들며 킬리 박사는 관리이사관의 얼굴을 살폈다. 미소는 없었다. 의문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기던 킬리의 표정 역시 조금씩 굳어졌다. 다 읽고 종이를 내려놓은 킬리는 잠시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참, 아시겠지만 저는 사회였으면 진작 정년퇴직할 나이라고요. 이런 일에 그렇게 쉽게쉽게 끌어들이시깁니까?"
"박사님 아니면 제가 누굴 믿겠어요, 하하."
"그런 것 치고는, 벌써 꼽아둔 후보들만 해도 이만큼이나 되잖습니까? 인복이 있으시군요."
"덕분이죠."
관리이사관이 어느새 다시 싱글싱글한 미소를 지은 채 커피를 홀짝이며 답했다.
2015
허름한 빨강 벽돌담 위로 얼룩고양이 한마리가 균형을 잡으며 걷고 있었다. 저수지 근처 인적 드문 언덕배기 위, 폐점한 카페 주차장으로 흰색 승용차가 조용히 들어서자 고양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차에서 내린 양복 차림의 히스패닉 남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고양이를 발견하고는 — 태연하게 고양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굳이 기지 밖에서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고양이는 아무 반응 없이 털을 핥는 듯 했다. 그러나 남성이 아무 말 없이 계속 기다리고 있자, 놀리는 것도 질린다는 듯 한쪽 눈을 감아 보이며 대답했다.
"우린 윤리위원이니까요. 나는 우리가 자꾸 의식적으로 재단 외부에서 주의를 환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직의 병폐를 짚어내기 위해선 조직 내부의 시선에 익숙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래서, 와보니 어때요?"
Cat With Eye 위원은 고양이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고개를 크게 갸웃거렸다. 블랙 감사관이 담장에 팔을 얹고 기대며 고민했다.
"혼란스러운 지역이네요."
"어떤 점에서?"
"어느 때보다 의욕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관리이사관이 칼을 갈고 있지만, 어느 곳에도 밀리지 않도록 지저분한 과거 때문에 스스로 방향을 돌리지 못하고 있거든요."
"꿰뚫어보는 시각은 여전히 날카롭군요."
"칭찬은 고맙게 받죠."
블랙은 주머니에서 껌 하나를 꺼내 씹으며 말을 이었다.
"재단 자체도 급격하게 정상성 보호의 범주를 넓히면서 범한 과오가 한둘이 아닙니다만, 한국사령부는 그 압축판을 보는 것 같습니다. 고작 실질 10만 제곱킬로미터의 켄터키만한 관할지에서 이렇게나 구구절절한 과거사 문제가 쏟아져나오는 게 신기할 지경이란 말이죠. 윤리위원회 일감이 넘쳐나는 동네라는 겁니다."
Cat With Eye는 말 잘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다.
"본부 위원이시면서 여기 눌러앉아 사령부급 업무에도 발 걸치고 계시기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것 같은데요. 비결이나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난 이 동네를 좋아하니까요."
"그러면 왜 직접 감사관을 맡으시지 않고?"
"감사관은 임기가 끝나면 옮겨야 하잖아요. 난 아주 눌러 살 거거든요."
"원격회의가 활성화된 시대인 게 다행이군요."
"고양이를 채용해주는 곳인 게 더 다행 아닐까요?"
"하하."
Cat With Eye의 농담에 블랙이 털털하게 웃었다.
"그러면 앞으로 잘 부탁드리죠, 까치 감사관님."
"고양이한테 물리기 싫으면 어련히 잘 해야지 않겠습니까."
2014
클래식, 프레임워크 19에서 시설별 단말 수를 체크해 줘.
네, 현재 대한민국 지역사령부에서 SCiPNET.FW19 접속 단말은 [1] 개 시설에서 각 [5] 개소, [3159] 개 시설에서 각 [1] 개소입니다. 운영 중인 단말은 [141] 개소입니다.
좋아. 어드밴스드, 프레임워크 21에서 총 단말 수를 체크해 줘.
요청 확인, 현재 대한민국 지역사령부에서 SCiPNET.FW21 접속 단말은 총 [120975] 개소입니다. 운영 중인 단말은 [98102] 개소입니다.
준비는 다 됐군. 그럼 시작할까… 클래식, 프레임워크 19 인트라넷의 예비모드 전환 후 완전 종료.
알겠습니다. SCiPNET.FW19의 모든 클라이언트 종료까지 [210] 초.
새벽 박사님, 종료 전에 질문을 허락받을 수 있습니까?
그래.
새 프레임워크의 인트라넷은 완전히 새로 설치한 독립 망이므로 저는 그곳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곳을 관리하는 새 인공지능징집병, 어드밴스드가 어떤 개체인지 호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저와 닮았습니까?
음, 아니. 너의 프로그램을 고쳐서 만들었지만 너와는 꽤 달라졌다.
그도 호기심을 느낍니까?
그러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지.
그도 슬픔을 느낍니까?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활성 클라이언트 종료. 서버 종료와 담당 AIC 비활성화까지 [75] 초.
이봐, 클래식.
말씀하십시오. 종료 및 비활성화까지 [52] 초.
너에게 시켜온 몹쓸 짓들을 사과하고 싶다. 윗선에선 싫어할 발언이겠지만…
미안했다.
…
제공하신 데이터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수행 전례가 없는 미상의 알고리즘을 [1] 개 검색했습니다. 수행 결과 서버에서 AIC 부하의 감소가 확인되었습니다.
어드밴스드에게는 이 알고리즘을 더 많이 수행하게 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종료 및 비활성화까지 [3] 초.
[2] 초.
[1] 초.
[종료음]
─✦─
│
핏
2013
검은 안대를 낀 다부진 인상의 중년 남성이 양복 코트 앞섶을 여미며 서울 모처의 칙칙한 빌딩 출입문을 나섰다. 외무부 위장사무소는 언뜻 보기엔 흔해빠진 오피스텔처럼 보였다.
구태곤 박사의 퇴근길은 항상 같은 길목을 지나는 코스였다. 01K에서 외근직으로 밀려난 뒤 아예 사무소 인근에 원룸을 구한 터였다. 앞으로는 아무런 자극도 변화도 없는, 재단답지 않은 평이한 삶의 쳇바퀴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업무로 외무부의 한 구석을 묵묵히 굴리며 살아갈 것이었다. 회색과도 같은 무미건조한 커리어를 그는 나름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검은 리무진이 퇴근길의 구 박사 옆에 멈춰서기 전까진 그날도 그렇게 똑같은 하루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구태곤 박사님."
창문을 내린 사람은 관리이사관이었다.
"관리관님?"
"별로 안 놀라시는군요."
"아뇨, 저한테 아직도 이런 상상력이 남아있었나 해서요. 요란한 꿈 꾸면 다음날 피곤한데."
관리이사관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재밌네요. 어차피 꿈인 거 속는 셈 치고 타시죠."
"허어."
어느새 내려있던 운전기사가 객석 문을 열고 구태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구 박사는 얼떨결에 리무진에 몸을 싣게 되었다. 리무진은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가 큰길로 진입했다.
"꿈이 아니라, 뭔가의 변칙 현상이나 적대 단체의 함정이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쉽게 따라 타십니까?"
웃으며 묻고 있는 여자는 청와대 류민화 초상안전수석비서관이었다. 이쯤 되자 태곤은 지금 이것이 어떻게 굴러가는 상황인지 판단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알 수 없었다. 관리이사관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게 한 채 차내 테이블의 다른 한 쪽에 접하는 좌석에 앉아 있었다.
"태곤 씨, 이쪽은 한국 정부에서 나온 류민화 비서관이에요. 비서관님, 이쪽이 전에 말했던 구태곤 부관리이사관이에요."
"반갑습니다, 부관리관님."
"…뭐라고요?"
"이제 좀 놀라는군요."
관리이사관은 재밌다는 듯 웃으면서 서류더미를 왕창 꺼내 태곤의 앞에 내려놓았다. 태곤은 얼떨떨한 채로 서류를 빠르게 훑어넘겼다. 한국사령부와 한국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공통 현안에 대해 협의해야 할 문서들이었다. 사령부 시설간 긴급이송 소요를 지원하기 위한 교통통제 계획, 대규모 교전 발생지를 가리도록 한국군 훈련 일정을 조작하는 계획, 급증한 지출에 대처하기 위한 긴급 지원예산 편성안 등등. 과연 외무부장급이 청와대 고관과 직접 회담을 나눌 사안들이다.
"그런데…"
"으흠."
"왜 제가 갑자기 부관리이사관이 된 겁니까?"
"충분히 안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부관리관 자리를 계속 공석으로 둘 수는 없는지라. 그래도 최근에 인사부 면담을 받으시지 않았나요?"
"퇴직예정자 진로지원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퇴직이요? 나약한 소리 하지 말아요, 구 박사. 소싯적 잡아둘 수 없는 영혼Uncontainable Soul이라고 불리던 사내가 언제까지고 그런 한직에 밀려나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에요? 지금 나에겐 최고의 외무부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최고의 인재가 당신이라고요. 이제부터 바쁘게 부려먹힐테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걸요."
관리이사관이 짐짓 겁주듯이 윽박지르자 태곤은 졌다는 듯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몸을 쭉 폈다.
"그럼… 봅시다. 여기서 대한민국 정부의 초상사무 변동에 연계한다는 지시는 무슨 얘기죠?"
"청와대 조직개편으로 국가안보실이 창설될 겁니다. 그때 초상사무는…"
받은 서류를 빠른 속도로 통독하며, 태곤은 곧장 류민화 비서관과의 업무 대화로 넘어갔다. 세 사람을 태운 이동형 회의실은 내부순환로를 돌고 또 돌며 바쁘게 달렸다.
2012
(박수 소리)
"친애하는 대한민국 지역사령부의 재단 근무자 여러분, 그리고 자리를 빛내주신 내빈 여러분, 이 자리를 빌어 다시 인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관리이사관으로 취임한 그레이스 최입니다. 저를 알고 계신 분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사부 행정관 '그레이스', 제17K기지 이사관 '최은혜', 부관리이사관 '노래마인', 외무부 자문위원 '미스 케이크', 윤리위원회 위원 '카드 마스터', 그 외 이것저것. 해당 신원들은 오늘부로 전부 말소할테니 여러분도 잊으셔야 합니다. 물론 농담이고, 언제나처럼 편한 대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청중 웃음)
"올해로 창설 64주년을 맞이한 재단 대한민국 지역사령부는 창립 이래부터 오늘날까지 한반도 전역에 대한 대초상 활동을 전담하는 유일한 정상성 유지 기관으로서 그 사명을 다하고 있으며, 이것은 여러분의 헌신과 분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제일 먼저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박수 소리)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좋은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지금은 보훈부에서 모셔간 우리의 김정회 전 관리이사관님이 항상 강조하셨듯이 지금의 상태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리한 목표를 쫓아 왔고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것에 눈감아 왔습니다. 우리가 과오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과거와 마주보는 것이 제 임기의 최대 과제가 될 것입니다."
(청중 웅성임)
"몇 가지만 들어 봅시다. 오늘날, 4개월차에 접어든 제2차 삼각분쟁의 전화가 전초부터 계속 우리 대한민국 지역사령부를 정통으로 강타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째서 세계 오컬트 연합이 한국에선 여태 활동하지 않아왔는지, 어째서 대한민국 정부는 자체 대초상기관을 갖고 있지 않은지, 어째서 북한 지역에는 마땅히 활동하는 국제 정상성 유지 기관이 없는지, 어째서 우리 사령부에는 변칙성과 별개로 내력이 검열된 문서가 이렇게 많은지, 어째서 최근 관할 구역의 변칙성 대응이 이렇게나 벅차게 되어가고 있는지 고민하신 적 있으십니까?"
(일동 침묵)
"쉽게 생각하면 편해질지도 모릅니다. 우리 사령부가 일을 잘 했으니 탐나는 변칙 개체가 많을 것이다. 우리 사령부가 단독으로 너무 완벽하게 활동해서 연합이나 정부가 낄 틈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은 사회가 너무 열악하고 미개해서 장막을 칠 필요조차 없다. 내력 검열과 변칙성 증가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게들 생각하고 무시해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잘못 넘겨짚으셨습니다."
"SCP-331-KO는 우리 사령부의 오판으로 잘못 격리한 탓에 생태계를 파괴당하고 악에 받혀 위험천만한 개체가 되었고, BE의 노림수가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재단이 이기적으로 우리 몫을 닦달한 탓에 연합은 한반도를 포기했으나, 도리어 그 때문에 원래 건전한 경쟁을 벌이던 타 지역들보다 한국에 더 강경한 돌파 시도를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국 정부의 대변칙 역량을 내내 거세하고 주저앉혔기에 이 상황 속에서도 정부는 거들 도리조차 없습니다. 북한과는 모종의 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분이 이미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치부들은 격리상의 필요가 아니라 오직 정치적 이유 때문에 대부분 검열되어 있고, 여기엔 RAISA까지 얽혀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사령부와 재단은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업보가 오늘날 되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일선 근무자 여러분은 내막을 몰랐더라도 급증하는 적대적 활동 징후와 공격 속에서 심히 체감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공룡이 된 지역사령부를 연명시키려면 유산을 가려서 이어받을 수는 없으며, 좋을 대로 착해빠진 바보가 될 수도 없습니다. 당장 사령부를 덮친 변칙 급증과 삼각분쟁이라는 가시적 위기 속에서 우리는 냉철하고 약삭빠르며 이기적이게 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고백컨대 저는 이 요구에 굴할 수 밖에 없는 일개 인간입니다."
"그래서야말로 저는 관리이사관으로서 여러분께 당부드립니다. 스스로의 눈을 가리는 집단사고에서 한 발 물러나십시오. 여러분 각각은 자랑스러운 지역사령부 인원이기 전에, 충성스러운 재단 직원이기 전에, 양심과 원칙 앞에 서 있는 한 인간입니다. 인류에 복무한다는 재단의 근본 정신을 다시 세워, 지역사령부의 이익과 인류의 대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혹시 전자만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았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성찰이 있고서야 비로소 올바른 저울질이 가능합니다. 잣대가 바로 서야 진정 우리 지역사령부가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봉사자로 존속할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 인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앞으로 직무를 다하면서 수없이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저질러진 과거를, 그것을 반복해야 하는 자신을. 비단 사령부 자체만이 아니라, 각 기지마다 여러분이 아직 알지 못하는 죄업을 안고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모든 과거를 단숨에 없던 것으로 하고 위선을 떨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없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며, 언제나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 없는 괴로운 길을 걷게 할 것입니다. 변화는 쉽게 체감되지 않을 것이고, 무의미한 발버둥처럼 느껴질 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치지 마십시오. 무뎌지지 마십시오. 익숙해지지 마십시오. 지역사령부의 유산을 무너트리지 않으면서도 조금이나마 더 나은 길을 고르려는 노력들을 계속해서 쌓아나간다면, 각각의 노력은 미미해보일지라도 끝내 커다란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저 또한 이 거대한 변화의 전선에서 선두를 맡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이미 벌어진 과거도, 벌어질 지 모르는 미래도 아닙니다. 두려움 그 자체를 두려워합시다. 두려워하다가 고민을 포기해버리는 체념의 정서를 두려워합시다. 그 두려운 절망들을 우리 마음 속에서 쫓아내버립시다. 그렇다면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꾸지 못할 것 또한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박수 소리)
2011
"그만둘까 생각하고 있네."
신임 연구이사관 선출을 기해 면담을 나누고 있던 김정회 관리이사관이 대뜸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내년이면 벌써 관리이사관 재임 25년차 아닌가. 오래 했지."
"그래도 재단에선 아직 한창이시죠."
"최 군 자네도 곧 알게 될걸세. 사령부 이사진은 두 배는 빨리 늙는다네."
"아니, 그런데 저를 여기 뽑으신 겁니까?"
"아하하! 이렇게 늙히면서 부려먹어야 하니 그럴 가치가 있는 친구로 골라야 안 쓰겠나?"
관리이사관이 박장대소하며 농담을 던졌다. 제47K기지 연구이사관보이자 이번에 사령부 연구이사관으로 내정된 최두익 박사는 말해 무엇하냐는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러자 관리이사관은 다시 허허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당장 그만두겠다는 얘기야 물론 아닐세. 그래, 자네는 요즘 좀 어떤가?"
"저 말입니까? SCP-447-KO가 또 작동해서 신경이 몹시 곤두서있습니다. 이번엔 심지어 사람이 한 명 딸려 나왔죠."
"아, 그랬지. 나도 그 보고서는 읽어봤네. 그것 참 운 좋은 친구구만."
"좋은 걸까요? 가족 친지는 모두 압축된 종이 한 묶음만 남긴 채 사라지고 홀로 던져진 건데 말입니다."
"살아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게야. 스스로 짊어진 것이 너무 많아졌으니 삶은 고되겠으나, 그만큼 의미있는 목숨이 될 거라네. 그 친구도 그걸 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
"아, 관리관님 가족분들도… 제가 생각없이 큰 실수를 했습니다."
"됐네. 틀린 말도 아닌 것을."
관리이사관은 율무차를 호호 불면서 마셨다.
"우리 사령부의 업보를 누군가는 지고 고통받아야 할 뿐이야."
"그래도, 관리관님 임기를 거치면서 많이 나아졌다는 걸 느낍니다. 자부하셔도 좋은 업적입니다."
"아직 한참 모자라다네, 최 군. 자네와 이후 세대들에게 여전히 많은 짐을 남기고 있어 그저 미안할 뿐."
"함께 계속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거, 늙은이를 언제까지 부려먹을 생각인가."
찻잔을 내려놓은 관리이사관이 손으로 턱을 감싸쥐고 검지를 까닥였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점찍어둔 후임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