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 각하 패스트푸드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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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4K기지 식량 배급은 끊어지고, 남경민은 슬퍼하지 않는다.

제04K기지에서 기근은 흔했다. 산자락마다 반달곰과 고라니가 보인다는 이 깊숙한 요새에서 배급차량은 뒤집어지고 그러면 쓰러진 차량에 실렸던 식량들과 운전수들은 산짐승들이 먹어치우는 바람에 소멸하는 일은 공공연했다. 여름이면 굶주린 고라니와 팅커벨으로 불리는 나방들은 차량의 헤드라이트에 흥분해 달려들었고 겨울이면 국경의 한파는 인간의 기계와 엔진을 살려둘 만큼의 자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으레 판타지나 메르헨에 나오는 요정들의 숲처럼 제04K기지를 둘러싼 지형은 침입자를 선호하지 않았다. 요정의 숲과 제04K기지가 다른 점은 그 숲에 요정이 사느냐 파렴치한 재단 인원들이 사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특히 한겨울 밤에 고라니가 차디찬 공기 새로 긴 울음을 울면 인원들은 방 안에 틀어박혀 부디 식량이 무사히 공급되기를 죽도록 바랬으나 차가 덜컹이는 소리는 절대로 다가오는 법이 없고 다만 포식한 산짐승들만 근처에서 비명 같은 울음을 지르고는 했다.

다만 식량 뿐이 아니었다. 전기나 온수도 가끔은 끊어지고는 했다. 보일러실이라는 심장을 중심으로 도는 배관은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차디찬 겨울에 동파(凍破)한다. 섬세한 아이의 핏줄처럼 냉혹한 대자연 속 덜렁 남겨진 기지는 내출혈이 발생하면 고통받았다. 으레 몸에 문제가 생기면 두통과 오한으로 반응하듯 재해는 D계급 수용소를 거쳐 등급 낮은 인원들의 숙소를 차츰차츰 괴롭히고는 한다.

등에 와 닿는 보일러의 온기가 언제든 겨울이면 시체나 무덤을 연상케 하는 냉정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아는 낮은 등급의 인원들은 간혹이면 이 모든 것은 억울하게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변칙 개체와의 전투 속에서 죽어간 동료 인원들의 유령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짜낸 말 치고는 극도로 신빙성이 높다고 평가받은 소문이었는데, 이들은 한 번도 유령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제04K기지에서 유령이라고 함은 증거를 남기지 못하므로 이러한 것이 나타났다고, 출몰을 허위보고하면 보상금을 물어다주는 전서구로 통용되었다. 그럼에도 몇몇 인원들은 단수 사태가 정말로 억울한 유령들의 비명임을 믿었고, 이들을 위해 추운 숙소에서 목 놓아 울며 애도하는 단체 풍습은 강윤상 이사관이 여자친구 롤플레잉 ASMR 청취에 방해되자 애도를 금지시킬 때까지 지속되었다.

제04K기지 식량 배급은 끊어지고, 남경민은 슬퍼하지 않는다.

남경민, 2등급 제04K기지 하급 수면변칙부 연구원은 잠이 덜 깬 채로 부시시한 머리를 대강 감고는 식당으로 나선다. 식당은 넓지만 한기가 가득해서 줄을 서노라면 남극의 눈물에나 나오는 빙하 위 황제펭귄들의 행진을 연상케 했다. 남경민으로서는 자신이 행복한지 남극에서 평생 크릴새우와 정어리만을 먹는 펭귄들이 행복한지 알 수 없었지만 다만 가끔은 크릴새우의 비린 맛과 정어리의 쓰레기 같은 식감을 그리워했다. 조리사는 묵묵히 국자로 무언가를 퍼 담아 식판에 퍼 주는 기계적인 일을 반복한다. 그네들의 표정에는 웃음기도 자비도 신경쓰려는 의지도 없기 때문에 혹여라도 식판을 거꾸로 든다면 눅진한 반찬이 이상한 곳에 질퍼덕 내려앉는 일이 다반사였고 항의, 당황, 사과는 애초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이론상 된장찌개, 쌀밥, 고추장불고기, 애호박전이 되어야 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기대와 일치하지 않는 법이다. 모든 메뉴를 모두 받은 남경민은 어디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철 식판에 보이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시각 자료였다. 잿더미, 정체불명의 뒤섞인 고기, 바다처럼 많은 물에 된장 한 스푼을 넣고 끓인 너무도 묽은 국 등은 차라리 음식이라기보다는 세 살짜리 어린애가 클레이 장난감에 열중하다 낮잠 시간에 대강 뭉친 일종의 덩어리에 비유할 수 있겠다.

스푼을 쥐고, 남경민은 묽은 국을 뜬다. 기지 빙하 녹은 샘물처럼 순진무구한 맛이 느껴지자 열불이 치솟아오르지만, 텅 빈 속으로 차디찬 액체가 흐느적흐느적 내려가는 것이 느껴지자 분노가 사라지는 듯 하다. 잿더미에 스푼을 갖다 대자 국으로 젖은 스푼에 검은 잿더미들이 잔뜩 눌러붙는다. 아마도 이 잿더미는 애호박전이었을 것이다. 먹어보나 마나 불맛이다. 대신 그는 녹슨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는다. 본래 살아 있는 돼지였을 짐승을 모독하듯, 으레 그렇듯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박제된 어느 슬픈 짐승의 맛이 난다. 문득 남경민은 제04K기지 이사관보들은 밤마다 다섯 종류 짐승의 고기를 이용한 바비큐 파티를 할 것이라는 뜬소문이 떠오른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있다. 이곳까지 고기가 들어올수는 없다. 아마도, 정말 그의 동료들이 유령이라고 믿는 존재들만이 진실을 알겠지만,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타는 냄새는 다만 D계급들의 몸을 불사지르는 것일 뿐이야.

"잘 먹었습니다."

남경민은 식판의 모든 것을 짬통으로 되돌려주며 말했다. 사람이 먹지 않은 것, 즉 기지 식단 전부로 이루어진 이 양철 통의 내용물들은 보통 땅에 묻힌다. 정식 프로토콜은 비용을 지원받아 지속가능한 형태로 처분하는 것이지만 비용이 어디론가 새고 있기 때문에 이런 형식으로 처분되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순식간에 혹한의 추위에 잔여물들이 모두 얼어붙어버리지만 보통 썩어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야수들이 이것들을 먹어치우지 않는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남경민은 이에 대해 고심하다가 식당을 떠났다. 추위 뿐 아니라 바람까지도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배를 곯으면서 일터로 향했다. 수면변칙부의 하급 인원들이 일하는 그곳의 다른 이들 역시 만만찮게 굶주려 있다. 꼬르륵거리는 소리는 상수다. 항상 굶주리고 침묵하는 곳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앉았다.

생각해보면, 남경민 또한 이 기지가 언제부터 엉망이었는가는 잘 모르고 있었다. 윤리위원회 사찰관을 피하기 위해 항밈성채를 건축했을 때부터? 이사관실에 충무김밥 자판기를 지었을 때부터? 기지 내에서 은밀하고도 공공연한 제21K기지 타도 계획을 실시했을 때부터? 글쎄, 이 모든 짓은 사실 남경민이 이 기지에 오기 전부터도 자행되었는데 어느 하나의 사건을 기점으로 잡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단지 기지가 죽어온 것에 대한 일종의 증상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경민은 스스로 생각망상회로를 끊고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고라니 떼가 지나다닌다. 눈밭을 헤치는 그 짐승들은 어떤 인원보다도 튼튼하다. 그 육질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이 얼마나 낭비인지, 남경민은 독백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경민은 당장 움직인다. 그는 기지 바깥쪽 야외관찰장에 낡은 삽이 있음을 기억해내고는 그것을 쥐고 기지를 벗어나 숲 속을 통과했다. 앙상하고 키 큰 나무들 사이로는 얼어붙은 개울이 흐르고 거대한 새들은 지저귀며, 박쥐들은 그의 머리 위쪽을 스치며 지나다녔다. 모기떼가 옷 사이로 드러난 그의 살을 물어뜯고 빨았다. 그러다가 떨어져 죽었다. 제04K기지 인원은 너무도 굶주리기 때문에 혈액 중 양분상태는 음수에 가까웠고 모기들은 피를 빨다가 탈진해 죽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숲을 울린다. 이랬다면 이랬을 것이다. 이것 때문이다 하는 말이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깨닫는다.

평지 쪽에 도착하자 그는 있는 힘껏 삽을 움직여 단단히 얼어붙은 흙을 파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한동안 보일러실처럼 얼어붙었던 근육이 움직이고 땅의 살점이 조금씩 찢겨나간다. 희망이란 것이 보였다. 만일 함정을 완성할 수 있다면야 멧돼지, 반달곰, 고라니, 스테고사우루스와 같은 들짐승들을 붙잡아 그 고기를 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웬만한 삼겹살 파티의 총량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기를 가지게 된다면 1년간 식량 배급이 끊어져도 버틸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에 들뜨기 시작한 것이다.

남경민은 여러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하나는 오래 전 동경했던 한 선배가 해 준, 신비로운 이야기였다. 물론 그 선배는 제21K기지가 완공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단 3.5초 내에 그곳으로 도망쳐버리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는 동경할 만큼 세련된 사람이었고 똑똑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선배는 이런 말을 했다.

'어딘가에는 끝이 없는 치킨과 피자 상자가 있을 거야. 제04K기지에서 죽은 가엾은 인원들은 재단발할라에서 치킨과 피자를 마음껏 먹게 돼.'

아무리 SCP 재단일지라도 재단발할라라니, 유물론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지만 남경민을 비롯한 수없는 인원들이 유령을 믿듯이 이 멋진 이야기를 믿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굶어서 식용유만 마셔도 좋아하는 기지 인원들에게 치킨과 피자는 환상의 음식이었다. 이러한 망상도 기지에서 신드롬을 일으키고는 했지만 치킨과 피자라는 음식이 정상성을 수호하는 재단 정신을 해친다는 이유로 사상 금지된 후에는 남경민만이 기억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빈약한 체력이지만 부단히 노력을 거친 탓에 제법 깊숙한 굴을 만들게 되었다. 짐승이 떨어졌다가 기어나올 수 없는 적당한 각도였다. 그는 낙엽으로 대강 굴을 덮어 놓고는 가지고 온 잿더미를 뿌려 사람 냄새를 지웠다. 예전에 보았던 학습만화가 기억이 나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 냄새를 지우지 않으면 짐승들은 그 자리를 곧잘 피해버리거나, 성난 고라니떼나 세계 오컬트 연합이 냄새를 추적해 기지를 침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 낙엽까지도 자연을 흉내낸 세심한 방향으로 디자인하며 덫을 놓았다.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은 다만 몇 잎의 낙엽이었음에도 입에는 고기가 있는 듯 침이 고였다. 큼지막한 들짐승을 잡는다면 그 고기를 자신이 독점할까, 아니면 친한 이들에게 나누어줄까 하는 행복한 고민이 지속되었다. 만일 쥐나 산토끼, 노루 같은 짐승이라면 택도 없는 말이지만 스피노사우루스와 같은 큰 짐승이라면 모두가 나눠 먹어도 좋겠지.

그는 부서장의 추노를 눈치챌 때까지 함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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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같이 기지의 배수로와 온수관들이 얼어붙고, 고라니 떼의 긴 울음소리를 두려워한 인원들은 양 귀를 막고 침대 아래에서 몸을 덜덜 떨던 어느 날, 남경민이 숲 속에 덫을 놓은지 정확히 하루째가 된 날이었다.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강윤상 이사관의 개인 욕조를 청소하는 고된 작업 중에도 흥이 났다. 사자가 사슴을 잡아먹기 전에 달리듯이 이 모든 노동은 고기를 먹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면 깃털을 드는 것처럼 편한 일이었다.

그는 모든 일을 끝내고는 천천히 함정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관찰한 적도 없었던 모든 행위, 아마 그의 까마득한 조상 대 사람들이 창과 화살으로 매머드를 쓰러뜨리고 나서 춤을 추던 그런 행위가 생각났다. 그러나 이 모든 기쁨과 기대 위에 만일 함정에 그 어떠한 짐승조차도 잡히지 않았다면, 하는 불안감이 독버섯처럼 피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지만 신속한 동작으로 함정을 덮었던 것들을 털어냈다. 고라니의 새된 비명도 곰문의 끼익거리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는 약간 실망하면서, 함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무러칠 듯이 놀란다.

혹한의 햇살을 맞은 무엇이, 어떤 철덩어리와 같은 것이 안에서 빛나고 있다. 남경민은 이것의 정체를 도통 알 수 없어 조심스럽게 발을 함정 안으로 들여놓는다. 강철 거북 같기도, 쇳덩어리로 조각한 금자라남생이잎벌레 같기도 한 그 물체를 남경민의 앙상한 손이 쥐어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두 손으로 들어올린다. 그제서야 그것의 정체가 드러나고야 만다. 양철 접시 위의 스테인리스 푸드 커버. 마치 이탈리아 전통 국밥집의 품격마저 느껴지는 요리를 내오는 접시다. 야수나 짐승 따위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 형상에, 그는 이것이 간악한 부서진 신의 교단의 만행이라 여기고 쥐어 내던져버리려다 다시 몸을 움찔한다.

온기. 접시와 뚜껑으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얼마만의 엔트로피 조작인가. 게다가 후각 신경으로 전해져 오는 내음새. 이 내음새는 으레 밀 따위가 온기와 조우하고 고기나 기름이 천 년의 라스베이거스 지옥에서 튀겨지는 그 눅진한 것과 동일하다. 남경민에게는 30년만에 맡아보는 이국의 그윽한 향취. 그 순간 그 눈이 돌아가버린다. 마치 사냥한 짐승의 목을 일격에 따듯이 뚜껑이 내던져진다. 챙 하는 소리가 고요한 산을 울리웠다. 그리고 드러난 존재자에, 남경민은 흐느낀다.

싸이버거 세트다. 갓 버거집에서 붙잡아 올린 햄버거가 포장 하나 손상되지 않은 채로, 그 기름내로 세상의 모든 짐승을 유인하고자 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싸이버거는 강원도 야산에서 스스로 서식할 수 있는 잡초가 아니다. 더군다나 이곳에 누군가 싸이버거를 가져다두었을 리 없다. 만일 이것이 사람을 낚기 위한 성 베드로의 미끼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후각이 인간보다 삼만 배는 뛰어난 짐승들이 함정을 파헤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나, 수면변칙부 학위의 3분의 1까지 보유하고 있는 똑똑이 남경민은 이깟 고민을 할 수 없다. 먹어. 신경이 다정한 애인처럼 속삭인다. 먹어야 해. 싸이버거의 포장지를 뜯고, 가죽을 찢고, 빵과 튀김옷을 씹고 고기와 야채를 취해. 생각하느라 신경에서 소듐을 쓰게 만드는 건 죄악이야. 해. 어서.

신경은 충동질한다. 남경민에게 교감신경은 언제까지나 가장 친밀한 배우자였고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흰 포장지를 야수처럼 찢어발긴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버거를 짓씹었다. 이빨 사이에서 난데없이 온기가 퍼지고 수증기가 나비처럼 비상한다. 놀란 것은 그뿐이 아니다. 닭의 희생 하에 육즙이, 단숨에 퍼지면서 혀를 적신다. 남경민의 구강에 그 특유의 소스와, 닭 기름이며, 채소 즙과, 그런 따뜻한 인공의 것들이 마구잡이로 세를 든다. 남경민은 씹고, 뜯고, 먹기를 반복해 온다. 그럴 때마다 버거의 존재는 여간 새롭지 않다. 이때껏 이 기지에서 먹었던 것들. 그런 잡것들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런지 모르는 무아지경. 마치 평생 풀만을 먹은 티라노사우루스처럼 그는 버거의 목숨을 탐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찬바람이 그의 등을 홱 스친다. 심장이 철렁해진다. 이대로라면야 아직 남아 있는 감자튀김이 얼어붙고 말 것이 불보듯 뻔하다. 그는 짐승처럼 우우우, 하고 울부짖으며 몸으로 감자튀김을 품는다. 그러면서도 싸이버거를 뜯어 먹고, 입과 손까지 핥아 새어나가는 영양분을 배제한다. 그 모든 것을 다 취하고서야 감자튀김을 흡입한다. 트랜스지방의 기름내만큼 달콤한 맛도 달리 없으리라, 그는 독백한다. 인류가 좋아하는 당, 기름, 고기, 소금은 고대 빅풋 치하의 야생에서 귀중한 것이었고 빅풋 대신 강윤상 하의 야생에선 두 배로 귀중한 것이다. 감자의 본 모습을 잃은 선 형상의 튀김도 남김없이 먹고 소화기관이 말을 듣지 않으면 콜라도 빨아 마신다. 달기도 달거니와 이산화탄소의 자극이 지금껏 철가루나 곤충, 쥐로 연명하던 그의 내장 벽을 기분 좋게 때린다.

그러한 탐식의 와중, 남경민의 뇌가 포도당을 3년만에 섭취함에 따라 그는 퍼뜩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이 함정에 왜 싸이버거가 나타난 것이지? 영문을 알 수 없다. 남경민은 남은 콜라를 핥으며 생각해보았으나 그 어떠한 적합한 판결도 낼 수 없었다. 결국 가장 일리가 있는 설명은 이 굴은 산신령의 무저갱이고 자신을 가엾이 여겨 선물을 건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번에도 그 다음 번에도 다시 여기 도착한다면, 신선한 패스트푸드를 다시금 획책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것이 무한하다면야 굶주리는 가엾은 선후배와 동기들도 쌀밥에 고깃국을 먹일 수 있지 않을까? 남경민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모든 음식을 남김없이 먹고 말았다. 잿가루에 익숙해진 위는 유례없는 풍족에 즐거워하였다.

그는 서서히 일어섰다. 근무 시간을 초과하게 되면 수면변칙부 선임 라은희 박사가 벨로키랍토르 공룡을 풀어 추노를 시작할 것이었고, 그 전에는 서둘러 기지로 돌아가야 했다. 벨로키랍토르의 호통을 듣는 것이라든가 라은희 박사의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에 물어뜯기는 것은 짧은 생을 재촉하는 가혹 행위임이 분명했지만, 배부른 남경민은 슬퍼하지 않는다. 마음 속에 모종의 풍족함 — 단순한 만족, 즐거움, 산신령의 무저갱을 통한 모든 기지 인원들의 구원과 같은 즐거운 감각에 사로잡히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잡풀로 다시 함정을 덮고 인간 냄새를 지우고는 기지로 향했다. 기지는 어두웠고, 그럼에도 그에게는 불꽃 같은 희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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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다음날, 남경민은 또 한 차례의 놀람을 경험하고 말았다. 함정에 이번에는 황금 올리브 치킨 한 박스가 있었던 것이다. 또다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튀긴 치킨이었다. 그는 또 한 번 아주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그때까지도 남경민은, 심상찮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모양이다. 지능 높은 고라니가 덫을 놓은 것인가? 혹은 패스트푸드로 둔갑하는 일종의 식인 곤충의 공격인가? 그러나 이런 걱정들은 치킨 상자를 열자 놀랍게도 싸그리 소멸하고 말았다. 남경민은 고소하고 달큰한 치킨의 내음과 노오란 튀김옷, 기름의 진한 향을 무시할 수도 두려워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닭은 뼈가 없는 상태였다. 씹고 버릴 것은 없었다. 마치 지난번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펭귄이 정어리를 꿀떡 삼켜버리듯이 삼킬 수 있는 연한 조직이다.

그는 거친 손으로 조각 하나를 붙잡고 씹는다. 싸이버거가, 빵과 채소의 즙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짐승의 고기는 오로지 고기였다. 고기에 충실했다. 닭의 조상은 하늘을 날았을 것이다. 남경민은 그 새를 지금 잡아먹고 있다. 거기다가 올리브. 굶어서 예민해져버린 남경민의 혀끝은 너무나도 기민해져서 바닷물 속 크릴새우의 피도 느낄 수 있는 정도였는데 그것이 참으로 행운이었다. 여신 아테나가 인류에게 주었다던 그 기름의 소산의 향은 굉장히 특이한 것이어서, 그는 차라리 이때껏 먹었던 잿가루가, 난방이 켜지지 않는 방이, 기지 구석마다 뼈만 남은 죽은 쥐가, 짜증나는 모든 기지 인간들이 차라리 한 그루의 올리브나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남경민은 조각들을 모두 입에 쳐넣고 다람쥐처럼 씹으면서 바보처럼 헤, 웃었다. 거친 땅에 등을 기대도 궁정 침대처럼 느껴졌다. 산신령이라는 것은 정말로 실존하는 것이었구나, 그의 두 눈에서 짠물이 흘렀다. 아, 이 얼마나 다정한 구덩이인가. 그는 어제 했던 생각을 다시 되감아보았다. 이 무저갱만 있으면, 기지 인원들을 구휼할 수 있다. 떡과 생선을 담은 광주리로 사람들을 먹였던 예수 그리스도, 양 한 마리를 잡아 군대를 배부르게 했던 주홍왕처럼 모두를 살릴 수 있다면 기지엔 더 이상 폭행, 사냥, 기아, 아사가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남경민의 마음 한켠에서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굳이 모두에게 이 구덩이를 공개해야 할까? 처음에는 이사관보들이 이 구덩이를 심심풀이로 묻어버릴까 걱정이었지만 그 다음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경민 그 자신이 무언가 선택받은 이가 아닐까? 남경민이 착해서, 수면변칙부에서 일을 열심히 해서, 성실하고 공정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여서 산신령이 기회를 주었다면 어떤가. 혹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람이라서 자비를 베푸는 것 아닐까? 전자라면 선한 남경민이 굳이 악한 다른 이들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 후자라면 불쌍한 남경민은 굳이 브루주아이자 기만자인 다른 못된 이들을 도울 이유가 없다. 더구나 어느 쪽이든 이것은 남경민이 정당히 얻어낸 권리다. 어떤 이유로든 양도할 필요는 전무하다. 그렇게 믿으니 황금올리브는 더욱 달콤해졌고 뼈마디마다 기력이 더욱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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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도 남경민은 계속해서 땅의 소산을 맛보았다. 파파존스 피자, 고구마치즈돈까스, 도도새 사과즙 절임 요리, 스테이크나 스시 등등 제각기 한식, 양식, 일식 등 대단한 것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같이 신선했고, 맛있었다. 남경민은 그것들을 탐하면서 항상 만족했다. 항상 부귀영화를 누리는 인간은 쉬이 지치지만 남경민은 하루 한 번 씩만 이런 음식을 먹었기에 상시 새로운 마음가짐이었다. 거기다가 대강 13일간 미식을 탐닉하며 메뉴가 겹치는 일은 전무했다.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남경민은 본래 다른 이들을 구휼하려는 계획을 깔끔히 망각해버렸고 조금 후에는 산신령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내다버렸다. 14일째 되자 그는 곧 이런 일이 돈을 넣으면 자판기에서 음료가 나오듯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버렸다. 당연히 설마 오늘은 구덩이가 텅 비어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도 완전 소멸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며 가장 편리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남경민은 오늘도 일상적으로 함정에서 접시를 끄집어냈다. 로제, 바질크림, 일반적인 세 맛의 떡볶이 접시다. 남경민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세 가지 맛을 즐기는 것은 즐거운 일임이 분명하다.

매운 맛은 곧 바질크림의 지방질로 말미암아 중화되고 그 지방의 느끼함은 곧 매콤한 자극의 향이 파괴한다. 세 발으로 서 있는 거대한 기린처럼 훌륭한 균형이 입 안에 가득 찬다. 즐거웁다. 그저 즐겁다. 즐거워할 수 있었다. 즐거울 수 있었다. 그것이 남경민의 존재 이유였고, 화분처럼 이 구덩이는 남경민을 종속영양생물로 만들어내는 그러한 장소였다.

오늘도 식사를 마친 남경민은 기지로 귀환했다. 수면변칙부 연구실은 참으로 차갑다. 사막 같은 곳에서 연구원들은 죽고, 마치 말라비틀어지는 나무처럼 영양을 얻지 못해 온갖 바닥이나 벽 따위에 늘러붙어간다. 남경민은 그들 새를 지나가면서 쓴웃음을 짓는다. 그가 의지만 있었다면 구덩이로부터 퍼내온 음식을 통해 그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겠지만, 이제 그와 말라붙어가는 인간형 개체들은 종이 다르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 어떤 사람도 기근의 계절을 버텨야 하는 개미나 말벌 따위를 걱정하진 않을 터다. 그것과 같다.

"선배님."

누군가가 남경민의 어깨에 손을 얹자,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려다가 잠시 말을 멈춘다. 후배 연구원인 김지원이다. 그와 꽤나 친하기는 했지만 지금 보니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비참하다. 물을 주지 않은 화분처럼 깡말랐다. 게다가, 제04K기지 인원 특유의 비참한 기운이 강하다. 경민은 유례없는 혐오를 느낀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원은 경민의 폭식이나 구덩이 같은 것을 알지 못한 채 있다. 그저 친밀함에 차 있는 그 눈동자는 순박한 잠자는 노예를 연상케 한다. 우스운 일이다.

"그 소식 들으셨어요? 제01K기지에서 옥수수를 배급한대요. 1인당 1톨이니까 그걸로 물을 우리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거에요."

"아아, 그래? 잘됐네."

남경민은 북극 다큐멘터리를 다시 생각했다. 펭귄들은 고작 정어리나 새우를 입에 문 채 배불러서 돌아간다. 그걸 보고 있는 인간들은 피자나 치킨 따위를 먹으면서 펭귄을 비웃는다. 남경민은 그 꼴이다. 이제 보니 옥수수 따위가 다 무어냐. 닭고기나 돼지고기의 품격 따위는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노릇이다. 우습다. 지원은 경민에게 한낱 펭귄에 지나지 않는다. 북극곰이나 괭이갈매기 따위와 같은 짐승이다. 즐겁다. 인간에 서 있다는 것이.

경민과 지원은 연구실을 빙 돌아서 복도를 걷는다. 둘만 남게 되었을 때, 불쑥 지원의 손이 경민의 뺨을 스친다. 손가락이 피부를 훑는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남경민은 비명을 지른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지원은 제 손가락을 핥고 있다. 이제 보니 분명히 무언가를 섭취하는 것이 분명하다. 아, 손끝의 주홍색. 마치 짐승의 피 같은 그것은 분명 먹다가 칠칠맞지 못하게 입에 흘린 떡볶이 국물이다. 방심했다. 굶주린 인원들의 후각은 사냥개와 준할 것이다. 지원의 공허한 동공에서 시퍼런 칠흑의 불길이 일었다. 경민은 본능적으로 뒤로 서서히 물러섰다. 지원은 몸을 웅크려 네 발로 걷기 시작하더니 으르렁거린다.

"선배… 떡볶이 드셨죠?"

질문의 어투가 순간 비웃음이 되었다. 앙상한 턱 사이에서 시허연 이빨이 번뜩인다.

"아니! 아니야! 생각해 봐, 이 기지에 밀가루가 어디 있어?"

"내 코는 못 속여요, 선배…… 선배. 배고픈데 이것 좀 먹어도 돼요?"

그 순간 지원이 네 발로 달려들었다. 짐승처럼 빨랐다. 제04K기지 인원 특유의 앙상한 체구는 대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지원의 손톱이 남경민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다행히도 경민의 옷 속에는 단단한 무전기가 있었기에 유혈사태가 일어나진 않았으나 그 반동으로, 경민은 휘청 균형을 잃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지원의 이빨이 다시 한 차례 그의 목을 물어뜯으려 들었다. 남경민은 공포에 빠져, 패닉 상태가 되었다. 주먹이 쥐어지더니 김지원의 얼굴을 향해 가속했다.

"후…."

주먹에 얻어맞은 지원은 그 즉시 쓰러졌다. 남경민은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찢기거나 물어 뜯긴 곳 따위는 없었다. 다만 긴장한 탓에 온 몸의 교감신경이 날뛰고 있었다. 위험했다. 이성을 잃은 인간은 강력하며, 물어뜯겼다면 기지 내 야수들이 피 냄새를 맡고 추격해 올 가능성이 있다. 그는 한참 한숨을 내쉬다가, 쓰러진 지원의 상태를 살폈다.

"야, 지원아. 미안하다. 괜찮냐?"

대답이 없다. 남경민은 지원의 맥을 쥐고 코 아래의 숨을 살핀다. 없다. 숨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순간 척추가 얼어붙는 듯 하다. 남경민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어붙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며칠간 충분한 영양소를 섭취했다만, 상대는 앙상하다. 쥐나 토끼 등에게도 패배할 만큼 약한 생물이 인간에게 얻어맞았으니,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남경민은 떨리는 손으로 지원의 육신을 들어올렸다. 새털처럼 가볍다. 이대로 시체를 두고 갈 수는 없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야수들이 몰려들지도 모른다. 남경민은 결국 그를 업고 조심스레 구덩이로 나간다.

"미안하다……"

경민은 구덩이 아래로 김지원을 내던져버린다. 툭, 하는 무거울 것도 없는 소리가 고요한 산을 울리웠다. 나무가 벌레먹어 쓰러지듯 허무했다. 산신령의 구덩이에 사람을 던져넣었다. 그는 잡풀과 낙엽을 집어들어 구덩이를 마구 덧칠하고 숨겼다. 비록 이 구덩이에서 다시는 음식을 취할 수 없겠지만, 이는 사람을 죽인 벌이라고 치부하기로 한다. 지원처럼 굶어버리기로 한다. 잡풀을 모두 뜯어 덮었을 적에 남경민은 갑자기 아깝다는 생각을 한다.

이 얼마나 낭비인지.

그 후,

남경민은 이틀간은 굶었다. 그러나, 사람은 본래 굶고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경민에겐 우습지만, 그가 미칠 듯한 48시간을 보내고 결국에 눈을 떴을 때, 남경민은 다시금 미칠 듯이 함정을 파헤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만다. 불행한 것은, 그 상황에서도 남경민은 후회하지 않았다. 손톱에는 흙이 끼이고 잡풀 냄새가 나며, 멀리서 고라니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아주 처음 함정을 팠을 때의 설렘을 기억한다. 산신령이 음식을 내놓지 않으리라는 의심 한 점도 없고, 미라화한 지원을 목격할 것이라는 불길함은 잊어버리도록 노력하며 흙을 판다.

그리고 다시 구멍이 드러났을 때, 그는 그 광경을 목격한다. 시신 대신 크림 스프와 칠리새우 정식이 구멍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놀랍지만, 익숙한 솜씨로 그는 그 음식들을 꺼낸다. 이틀을 굶었기에 스프의 기름짐과 따뜻함이나 새우의 상큼함이 예전 처음 버거를 섭취했을 때 만큼이나 훌륭하게 느껴져 왔다. 뜨거운 온기를 그는 사랑했다. 인간의 온기가 아니라 불의 온기를 말이다. 음식은 즐겁다. 살아가는 것은 즐기기 위함임을 남경민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


그리고, 남경민이 구덩이에서 막 벗어나 다시 기지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마치 휘파람과도 같이 높은 음성으로 짖는 소리. 틀림없다. 수면변칙부장이 추노를 위해 벨로키랍토르를 푼 것이다. 하지만 왜? 남경민은 아직 업무 시간에 늦지도 않았는데. 순간 투쟁-도피 반응이 불꽃처럼 튄다. 남경민은 뛰기 시작한다. 삼십 미터 뒤에서 삼 미터짜리 두 발로 달리는 공룡들이 컹컹거리며 그를 바짝 추격해오고 있다. 예전의 남경민이라면 도주를 생각한 즉시 붙잡혔겠지만 영양 섭취의 공로가 컸다.

— 쿠에에엑!

한 마리의 벨로키랍토르가 가속하여, 아슬아슬하게 그의 등을 이빨로 스친다. 물어뜯기지는 않았지만 순간 당황한 그는 소나무 뿌리에 걸려 그만 넘어진다. 구르고, 구르면서, 등에 상처가 나고 뺨이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긁힌다. 고통에 신음할 새도 없이, 그는 이내 여덟 마리의 벨로키랍토르 무리에게 둘러싸인다. 도합 열여섯 개의 시뻘건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자, 그는 경악하여 눈물을 쏟고 비명을 지른다.

"으으, 으아아악!"

그때, 그의 등을 누군가가 짓밟는다.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 여자. 수면변칙부의 선임 라은희 박사이자 공룡들의 주인이다. 그가 신은 롤러스케이트의 날카로운 바퀴가 등을 파고들자, 남경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우…… 잘못했습니다, 박사님!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후후…… 죽이려는 게 아냐."

라은희가 목에 찬 피리를 불었다. 날카로운 소리에, 벨로키랍토르들은 그를 물어 어디론가 운반하기 시작한다. 비록 이빨로 찢거나 발톱으로 베어내지는 않았지만, 그를 끌고 가면서 계속해서 바닥과의 마찰이 생긴다. 고통 속에서 남경민은 16일만에 절망을 맛본다. 남경민은 다른 모든 인원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건만, 지금 압도적인 우유에 선 생물에 있어서는 생태계의 일부일 뿐이다. 바다표범에게 잡아먹히는 펭귄과 같이. 그는 끌려가면서 김지원을 생각했고 울었다. 왜일까. 그때까지도 남경민은 죄책감을 지니고 있지 않았는데.

기지 6140번째 비밀 땅굴으로 도착한 벨로키랍토르는 단숨에 그를 땅굴으로 내던져버렸다. 순간 몸이 아찔해지나 싶더니 순식간에 그는 무중력과도 같은 낙하 상태를 경험하고야 만다.

"으, 으아아아—"

그리고 추락한다.

분명 바닥과 세게 부딪혔음에도 그는 부러진 곳이 없다. 기묘한 일이다. 땅굴만의 변칙성일지도 몰랐지만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였다. 남경민은 공포에 질린 채로 조심스레 일어났다. 어둠뿐이다. 오직 어둠만이 그곳에 있다. 그때, 희미한 붉은 빛이 서서히 나타나나 싶더니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그가 목격한 것은 두 눈에서 붉은 안광을 분출하는 어떠한 인간형이다. 그는 젊은 여자로 제01K기지 로고를 가슴팍에 차고 있다.

제01K기지 인원의 등장은 좋은 일이 아니였다. 핵심행정부인 이 기지는 다른 기지의 비리를 수색하기 때문에, 제04K기지에 이 기지의 인원이 나타났다는 것은 도둑놈 소굴에 경찰이 기마병을 몰고 온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대다수의 기지 인원들은 감찰관을 급격히 두려워하여 허위보고 및 날조로 자금을 타먹던 인원들이 인사부, 감찰부, 그리고 노래마인 이사관을 만날 때는 주로 실금, 비명, 퇴행 등의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남경민은 그나마 비리 혐의는 없기에 겨우 스스로 몸을 쥐어뜯는 가벼운 증상만을 발현했을 뿐이었다.

"오….. 오셨습니까요, 감찰관님."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지 서열 2위인 주성환 이사관보가 나타사 감찰관에게 굽실거리고 있었다. 남경민은 그제서야 라은희 박사의, 벨로키랍토르들의 의중을 깨닫고는 절망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엇을 알아채고야 만 그때 감찰관은 오른손을 뻗어 남경민의 목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지금부터 제985회 제04K기지 식단 실태를 파악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성환의 아부를 뒤로하고 감찰관의 붉은 안광이 남경민의 눈과 조우했다. 그의 머릿속이 고통, 공포로 지배당해 뒤죽박죽인 비논리 상태가 되었다. 죽는다. 그 사소한 감정조차도 곧장 다른 심상에 말려들었다. 붉은 파도가 결국 뇌를 가득히 채운 것이다. 제01K기지 감찰관들은 강렬한 리비도 파동을 통해 상대의 정신을 교란시켜 자백 상태로 빠트리기 때문이다. 지금 남경민은 자백제 3L를 맞은 것과 흡사한 상태였다. 감찰관의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머리를 울렸다.

"질문: 오늘 무엇을 먹었는가?"

크림 스프

파스타

"저번 주에는?"

파파존스 피자

고구마치즈돈까스

도도새 사과즙 절임 요리

스테이크

스시

"그렇다면 저저번 주에는?"

황금올리브

싸이버거

"틀림없군."

확답을 들은 감찰관은 남경민을 내던져버렸다.

"시설이사관보, 자네는 아주 훌륭한 식사를 제공하고 있군."

사실이었다. 그야 남경민은 그 구덩이에서 홀로 음식을 섭취했으니까. 그는 그제서야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꼬박꼬박 나오던 음식들, 그리고 사라진 김지원의 시신. 산신령 따위 있다면 진작에 재단이 알았을 것인데, 어리석고 유치한 착각이었다. 재단의 영토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지 사람들 뿐이고, 그리고 그런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것도 기지 상부 뿐이다. 남경민은 터덜터덜 걸어가 땅굴을 미친 듯이 기어올랐다. 단단한 수직벽을 타고 오르느라 흙이나 기름이 끼여 있던 손톱이 부러지고 관절이 찢어졌다. 시설이사관보는 그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제 필요 없는 실험체를 치우듯 하는 일이다.

밖은 설원이었다. 짐승 우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남경민의 손에선 피가 흘렀다. 찬 바람이 거세다. 어느덧 저 멀리 있는 구덩이가 보였다. 우습구나. 놀아났다는 생각에 남경민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개운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해명과 연구에 중독된 재단 사람이라는 것일까. 그는 설원 비탈길을 터덜터덜 걸어서, 구덩이까지 간다. 펭귄 이야기가 왜인지 생각났다. 펭귄들은 굶어서 죽는다. 그럼에도, 죽은 시체는 썩지 않고 북극의 추위 때문에 말라버린다. 그는 안다. 만약 김지원의 시신이 계속 있었더라면 남경민은 그런 미라를 보았을 것이다. 그것만이 그립다. 남경민 또한 구덩이에 들어가고 싶다. 이제 무언가 음식이 구덩이에서 나오는 일은 없을 터. 거기로 가고 싶었다.

퍽, 하는 거센 충격이 그를 내리친다. 남경민은 반항 않고 넘어진다. 라은희의 명령에 따라 벨로키랍토르가, 등에 발톱을 박아넣은 것이다. 따뜻한 검붉은 선혈이 눈을 적신다. 고통이 참을 만한 정도로 느껴진다. 그의 앞에 수 마리의 벨로키랍토르가 으르렁대며 접근해 온다. 놈들마저 굶주렸다. 붉은 눈에서 공허가 느껴진다. 그 포효 소리에, 마치 떡볶이 소스를 손가락으로 찍었던 김지원. 그 굶주려서 말라버린 사람이 그에게 덤비던 추억이 스친다. 짐승들이 가까워지고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서쪽의 구덩이는 손에 잡힐 듯 가까운데 움직이기는 커녕 설 수도 없다. 짐승들의 이빨이 파고든다. 그 순간 남경민은 하나의 버거이자 치킨이 된다.

짐승들의 모습이 순간 기지의 말라비틀어진 인원으로 보인다. 몸을 던져서 인원을 구휼하고 있다. 구덩이에서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남경민은, 그 순간만큼은 과거가 그리웠다.

암전.




□□□□




제04K기지 식량 배급은 끊어지고, 구지혜는 슬퍼하지 않는다.

제04K기지에서 기근은 흔했다. 산자락마다 반달곰과 고라니가 보인다는 이 깊숙한 요새에서 배급차량은 뒤집어지고 그러면 쓰러진 차량에 실렸던 식량들과 운전수들은 산짐승들이 먹어치우는 바람에 소멸하는 일은 공공연했다. 여름이면 굶주린 고라니와 팅커벨으로 불리는 나방들은 차량의 헤드라이트에 흥분해 달려들었고 겨울이면 국경의 한파는 인간의 기계와 엔진을 살려둘 만큼의 자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창밖에는 고라니 떼가 지나다닌다. 눈밭을 헤치는 그 짐승들은 어떤 인원보다도 튼튼하다. 그 육질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이 얼마나 낭비인지, 구지혜는 독백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당장 움직인다. 그는 기지 바깥쪽 야외관찰장에 낡은 삽이 있음을 기억해내고는 그것을 쥐고 기지를 벗어나 숲 속을 통과했다.

그리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구덩이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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