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깨어나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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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합이 끝난 하늘에는 어느새 어둠이 걸려 있었다.

오름다방을 나선 홍위는 뒤에서 천천히 거닐어 오고 있는 두류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간 참 빠르지."

"그러게 말이다. 벌써 7년이 지났을꼬."

"그땐 시사도 아니었는데."

"이름도 없었지. 그저 시간 되면 밥 한 끼 하고, 시간이 나면 나들이나 가고. 그런 작은 모임이지 않았나."

홍위는 2018년 초봄의 시절을 떠올렸다. 겨울 휴가를 정리하던 그 마지막 겨울의 편린. 그 날카로운 칼날은 언제 잊혔냐는 듯 환한 정경으로 시야 앞에 자리했다.

반야 김철현이란 존재를 안 것은 기백 년의 세월이었지만 철현이라는 사람을 안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삼엄한 정장 차림에 무표정한 얼굴. 창백한 시선 앞에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기능하기만 하는 톱니바퀴 같은 사내.

그 눈에는 생명이란 없었고, 세상에 대한 아무런 의사도 표하지 않는 무감각한 시선만이 거기 있을 뿐이었다.

해동 땅에서 천 년을 산 사내라 하여, 흥미가 동해 말을 걸었던 그때의 인상은 그러했다.

"나 이홍위라 하는 사내요. 그대가 김반야가 맞는지?"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으니.

"…그렇소만. 무슨 일이 있소?"

"그저 내 흥미가 동하여 그러오. 내 듣기로 조선 땅에서 천 년을 살아왔다 들어서."

다정한 말에도 사내는 잠시 침묵하다 이리 답할 뿐이었다.

"내 그대와 상종할 수 없는 몸이오. 그대의 치세, 그대 숙부의 치세, 그대 사촌의 치세에도 나는 그 땅을 어지럽힐 뿐인 괴력난신이었으니."

날카로운 말에, 아픈 기억을 건드리는 말이었으나 홍위는 어쩐지 그 내뱉음이 마음에 한참 걸려 있었다. 그 말이 꼭 자신을 공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밀어내기만을 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저자도 나와 같은 종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시간이었다.

"반야도 성격 많이 변했다 싶어."

"그놈 그거 우리가 사람 만든 거라니까."

두류가 툴툴댔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홍위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한 번 우리가 반야라는 인물을 겪어봤으니까 지난 시간도 잘 버틴 거 아니겠어. 그건 반야에게 고마워할 일이지."

"허 참. 두 번 더 고마워했다가는 사람, 아니 신령 하나 죽어 나가겠어."

황당해하는 두류와 웃음이 씩 걸린 홍위.

둘은 호실로 천천히 거닐어 가면서 이 난장판의 시발점이 어찌 되었나 자문하기 시작했다.


동아리를 만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천 컨트리클럽 대표 안매화에게서 날아온 연락.

동아리는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고, 또한 자율적으로 만든 동아리인 만큼 동아리 담당자의 권고를 받아 운영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성품 안온하기로 유명한 안매화 서천 컨트리클럽 대표에게서 온 서신이었으니 그 말투가 날카로울 리 만무했으나, 아무튼 납작하게 요약하자면 그러한 뜻이었다.

그 권고가 무슨 뜻인지는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아… 그러니까, 시를 짓는다는 것인가? 가히 어려운 일은 아닐 터."

동아리 회합이 벌어지던 한창때, 대뜸 문을 박차고 들어온 여인 한 명.

키가 크고 훤칠한 인상에, 카리스마 가득한 눈매.

기품 있는 말투에 당당한 태도. 배우를 방불케 하는 아름답고 뚜렷한 이목구비, 새하얀 피부.

그러나 대조적으로 감색 아디다스 운동복으로 위아래를 깔맞춤한 의상에 푸석한 머리, 뿔테 안경을 쓴 모습은 어딘가 여신의 그것이라기보다는 하릴없이 나돌아다니는 한량에 가까운 형태였다.

여신을 뒤따라 들어온 안매화 대표의 당황스러운 얼굴도 이 기묘한 분위기에 일조하였으니.

어쩌면 당황하는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들어왔더니 냅다 빈 소파에 착석하여 세상 편한 자세로 누운 아나히타, 그리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당장 요구하는 듯한 다섯 명의 눈초리.

"미안합니다."

나머지 셋은 아나히타를 좀 돌봐달라고 요청한 뒤, 홍위와 철현을 따로 불러낸 매화.

매화가 말해준 내력은 이러했다.

그러니까, 아나히타는 하릴없이 나돌아다니는 한량이 맞고, 그 하릴없이 돌아다니면서 자꾸 사고를 친다는 것이었다.

"매번 천상관 벤치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동자나 손님들한테…"

"손님들한테…?"

"물총을 쏩니다."

"예?"

현대 군문(軍門)에서는 경을 칠 대답이었지만, 여기 모인 셋 중 그나마 현대 군대를 경험해 봤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철현 한 사람이었기에,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공기 중에서 물을 소환해서… 아무튼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손님이셔서, 보다 못해 첫째 스승님께서 동아리에 들어서 소일하라고 권유하셨지요."

"저희 동아리를 권유하신 겁니까?"

홍위가 묻자, 매화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게… 동아리 전단지를 벽에 붙이고 물총으로 맞춘 걸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그게 여러분의 동지시사였기에…"

"아하…"

멍하니 서로에게 시선을 던지는 홍위와 철현이었다. 그러나 그때,

"으아악!"

"하하하!"

"저 미친 여신이 하이드로펌프를 쏜다!"

갑자기 들리는 왁자지껄한 소리. 마치 동지시사의 앞날을 암시하는 듯한 그 소리에, 홍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쪼록 잘 부탁합니다. 무슨 문제가 있다면 연락 주시고요. 물심양면으로 지원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아나히타를 떠안게 된 동지시사.

그러나 아나히타 한 명이 끝이 아니었다.


페르쿠나스도 아나히타와 비슷한 경우였다.

유명한 천상관 말썽쟁이. 유명한 층간소음 제조자. 유명한… "그" 천둥의 신이라는 칭호의 소유자였다.

발트 민족의 숭배를 받던 자, 숭배의 정점에 서서, 그 모든 신 가운데에서도 가장 권위 있던 신. 아나히타나 페르쿠나스나 한때 한 민족의 중심에 섰던 신격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저 천덕꾸러기 신세.

특유의 웅장한 소리를 시로 한번 표현해 보라는 권유를 받고, 동지시사 멤버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정확히는 이홍위 앞에.

그것도 새벽 5시에.

냅다 칠성관 687호를 두들기는 소리에 비몽사몽인 얼굴로 문을 연 홍위. 아내가 깰까 봐 애써 조심히 나오던 찰나였다.

"반갑소, 조선의 상왕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이 몸 페르쿠나스가—"

"조용! 조용히! 아래로 내려가서 이야기합시다, 무슨 일이건 간에!"

혼비백산해서 외친 홍위. 문 앞에 서 있던 거구의 사내를 이끌고 냅다 칠성관 아래로 내려온 그다. 내려오고 나서야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미스터 올림푸스와는 다른 천둥의 신. 일명 '두두 세니스', 페르쿠나스.

일찍이 오다가다 안면은 튼 인물이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홍위도 자못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진 무슨 일로…"

"이 몸 페르쿠나스,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에게 동지시사로의 가입을 희망함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 왔소이다!"

"아이고, 그냥 이홍위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런데, 저희 동지시사에 가입을 원하신다고요?"

귀청 떨어질 듯한 소리에 우선 시호를 하나하나 읊는 것부터 제지한 홍위였다. 본론은 나중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소. 내 마고 선생의 추천을 받아 이곳 동지시사에 걸음한 바!"

듣자 하니 아나히타처럼 하릴없고 할 일 없는 인물인지라, 신격을 담당하는 천상관 마스터, 마고할미 천창희가 친히 추천해 준 듯했다.

일단 왜 지금 이 시간에, 시사의 장도 아닌 홍위에게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페르쿠나스 특유의 시간 감각은 이미 유명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우르릉 쾅쾅 댄다던가, 아침이 밝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굉음을 발한다든지.

방음벽을 반강제로 설치하면서 조금 나아졌다고는 들었는데, 그 악명은 여전한 듯싶었다.

"헌데 어찌 제게…"

"아아, 이미 동지의 좌장이라던 그 '작은 손님'에게 찾아간 바 있었소. 헌데 그자는 지금 객실에 있지 않더군? 하여 동자들을 채근하여 여기 온 게라오."

철현에게 약간의 원망과, 희생양이 되었을 동자에게 사과를 속으로 읊은 홍위였다.

"조, 좋습니다. 저희 회합은 내일 하오를 기하여 시작되니 그때 만나시겠습니까? 오름다방에서 진행하니, 그곳에서 뵙지요."

"좋소! 내 기대하리라."

호탕하게 웃는 '두두 세니스'와 이후 올라가 아내에게 무슨 변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홍위의 위로, 태양은 어느새 그날의 빛을 이끌어 오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이백의 경우는 차라리 나았다고 할까?

"이게 뭐죠?"

"그러게."

페르쿠나스와 아나히타, 그리고 세샤트가 동아리 회합에 출석하기 시작한 뒤.

개성 강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준비할 것도, 대비할 것도 많아 회합에 일찍 나선 홍위였다. 그 옆을 따르던 세샤트.

그 둘이 발견한 것은 오름다방 앞문에 웅크리고 앉은—

"아저씨?"

"취객 아저씨네."

술에 잔뜩 취한 초로의 남자였다.

"이분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누워계신 걸까요…"

"으응…"

술에 잔뜩 취해 슬슬 몸을 누이기 시작하는 사내를 일단 부축하는 홍위였다.

"이보시오, 댁 이름이 무엇이오?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겠소?"

"으응…아응아아아앙…"

만일 철현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하나라 후예 출신 초상사학자 류원시와 나눴던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원시가 철현이 다 늙었을 먼 훗날 양로원에 들어가 낼 법한 소리라며 직접 예시를 보여준 것이다.

원시가 냈던 그 소음과 지금 사내의 소음이 정확히 똑같음을 깨달은 철현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홍위는 그 사실을 몰랐고 알았다 쳐도 딱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이므로, 일단 사내를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다방의 조명 아래에서야 사내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술기운으로 붉게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누군지 똑똑히 알아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는 시의 신선, 시선(詩仙) 이백이었다.

인간이었으나 그 뛰어난 실력과 풍류로 인해 반쯤 숭배의 대상이 된 이 남자를 홍위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아니, 동아시아에 한때 살았던 이는 대부분 그의 이름을 알 터였다.

그런 그의 주벽(酒癖)도 유명하였지만, 설마 이럴 줄은 모르는 일이었다.

호위는 세샤트와 함께 이백을 눕히고 물을 먹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이백이 안서도호부 사투리 물씬 풍기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거 면목 없소, 하하."

"청련거사(靑蓮居士)를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군요. 내 글을 배우며 그대의 시를 즐겨 읽었지요."

홍위가 반가운 말투로 이백에게 말을 걸자, 이백 역시 반갑게 응대했다. 물론 갈라지는 목소리였지만.

"조선에서 특히 나의 비루한 글을 즐겼던 사람들을 내 많이 보았소. 나 역시 영광이 아닐 수 없소이다."

"헌데 여긴 어쩐 일로…"

"아."

이백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여기서 시를 짓는다 하던데…"

홍위와 세샤트가 눈을 마주쳤다. 설마 시의 신선, 이백이 동지시사에 관심을 갖고…?

"응. 그래서 그 누구야, 설문희 씨가 나한테 한번 여길 가 보라고 추천하던데."

그럼 그렇지. 홍위는 세샤트에게 눈썹을 으쓱해 보였다. 신위를 받은 인간 영웅들을 담당하는 칠성관 마스터, 설문희가 왜 직접 그에게 여길 추천했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백이 들어오기 전 들어온 두 명의 면면만 봐도.

그러니까 순전히 문제아를 여기 격리하려는, 그런 의도일 것이었으니.

"나야 좋지. 시랑, 술이랑, 친우들이 있다면 시는 언제나 잘 나올 수밖에 없거든."

시를 꿰뚫는 명언이자, 시를 지향하는 이들이 들었다면 어딘가에 받아적으려고 했을 문장.

그러나 그 문장을 방금 내뱉은 시선 이백이라는 자는 그대로 옆으로 누워 코를 골기 시작했으며, 그대로 누워 회합이 시작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으니, 이것도 시쳇말로 아이러니라는 것이리라.


그렇게 모든 문제아들이 모였더랬다.

잘 굴러갈 리도 만무한 멤버들이었지만, 놀랍게도 이들을 모두 아우른 것은 이홍위도 고영주도 아닌, 동지시사의 장 김철현이었다.

"그놈한테 그런 재주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두류가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재주가 있었으면 우리한테는 왜 그렇게 쌀쌀맞았던 거야?"

철현의 재주라고 해봐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개성 강한 이들의 개성을 약간 조율하고, 그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재주일 뿐이었다.

아나히타는 철현과 농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척박한 땅에 오래 머물렀을 때 농업용수를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해 철현과 그는 오래 토론했다. 이따금은 전쟁에서 용수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논했다.

오랜 대화 끝에 처음으로 아나히타는 다른 이들에게 물을 뿜지 않고 시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다.

페르쿠나스는 철현과 홀로 됨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외로움은 적어도 페르쿠나스의 전공은 아니었고, 어쩌면 철현도 천부적인 외톨이는 아니었으므로 둘은 이탈됨에 대한 심상을 자주 공유했다.

철현 자신도 언어화하지 못했던, 그러나 외로움을 같이 나누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맺어질 수밖에 없던 문장들을 들었다고, 후에 페르쿠나스는 회상했다.

이백은 철현과 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한때 유협(遊俠)이었던 이백은 천부적인 싸움꾼이었다. 그가 만취하지 않을 때면 철현과 검법과 명검, 갖가지 싸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따금 이백이 몸을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을 때에는 둘은 대련을 하기도 했다. 쓰촨성의 검술과 다에본의 검술이 맞부딪힐 때면, 검은 요사스럽게 빛났고 삶은 그윽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그렇게 문제아 셋은, 문제를 극복하지는 않았으나 그저 동지시사의 일원이 되었다. 사람을 눈여겨보지 않고 사람을 입에 담지 않으며 사람을 듣지 않았던 사내인 철현이 해낸 일이었다.

"어쩌면 그땐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간 많은 일이 있었잖아."

홍위가 씩 웃으면서 두류를 돌아보았다.

"난 그가 자랑스러워. 점점 나아지려고 하는 친우가 드디어 어떤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어."

"그건 알지만… 그래도 좀 단축할 수 있었잖아!"

두류의 투정 위로 홍위의 웃음이 깔렸다. 어둠으로 물든 하늘은 어느새 밤을 예비하여, 다가올 아침을 내어놓기 위해 분주하였다.

누군가가 태어난 순간은 천 년의 반복을 겪고 다시금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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