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반구의 모든 철새들이 적도 부근을 향해 비행하는 이상 행태를 보이고 있다. 최근 범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꿀벌들의 집단 폐사와 도심 내 들쥐 실종 사태와 연관이 있는지 여부가 조사되고 있다."
소피가 의자에 앉아 두툼한 종이 신문을 집어들고 보이는 아무 문장들을 어눌하게 뱉어내고 있었다. 특유의 혀 굴리는 발음으로 미루어볼 때 아빠의 행동을 따라해보려는 시도처럼 보였다. 나는 시리얼 그릇에 우유를 가득 담아주며 물었다.
"범세계적이라는게 무슨 뜻인지 알아, 소피?"
"몰라!"
아빠는 소피가 여섯 살치고는 꽤 정직한데다가 영특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말에 절반 정도만 동의하는 편이었다. 두번째 접시를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 마루를 쿵쿵 구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그리 뛰어나지 않은 흡착성을 가진 장난감 총알들이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제발, 닐. 내가 소피한테 밥 주는 동안에는 그 빌어먹을 너프건 좀 안 들고 다니면 안되니? 너가 아직까지 너프건을 가지고 놀만큼 철부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로 날 멈출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면 오산이야!"
올해로 여덟 살인 닐은 다시 복도 저편으로 우당탕 소리를 내며 뛰어갔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았는지 소피도 먹던 시리얼 접시를 내팽겨치고 뒤따라 뛰어가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접시에 담겨있던 우유가 책상을 따라 바닥에까지 잔뜩 쏟아졌다.
"…."
나는 가슴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는 짜증을 다스렸다. 마음만 같아서는 욕을 했을텐데, 라고 생각했다. 어린 동생들을 돌봐주는 동안은 용돈을 두 배로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 이외의 모든 것들은 항상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나는 티슈를 가져와 책상과 바닥의 우유를 문질러 닦아냈다.
"닐, 너 또 소피를 데리고 지하실에 내려갔다가는 혼낼거야! 어서 이리 와서 밥이나 먹어!"
소피의 꺅꺅소리로 보건대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모양이었다. 복도 저끝에서 목소리를 높인 닐의 대답이 들려왔다.
"밥이라고 해봤자 시리얼밖에 없잖아! 그것 말고 다른 건 할 줄도 모르면서."
맞는 말이었다. 나는 요리를 할 줄 몰랐다. 물론 시리얼이 아니어도 매쉬드 포테이토—정말 단어 그대로 감자를 으깨기만 하는 거지만—나, 가끔 성공하는 메이플 쿠키 정도는 해줄 수 있었지만 그건 시간이 오래 걸릴 뿐더러 설거지가 귀찮으니까.
다시 우당탕 소리와 함께 닐은 플라스틱 광선검과 너프건을 양손에 들고 나타났다. 소피는 그 뒤를 꺅꺅대며 따라다녔다. 분명 나는 저 나이 때 꽤 철이 들었던걸로 기억하는데, 대체 얘네들에게는 무슨 문제가 있는걸까 하는 의문이 잠깐 고개를 치켜들었다.
"닐, 너 방학이 언제 끝난다고 했지?"
"크, 아직 3주는 더 남았거든!"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든 자식을 학교에 보내야만 성이 차는 악덕 부모들의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어."
닐은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다시 소피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나는 내가 가정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머니에서 폰이 울렸다.
"네, 아빠."
"딸! 잠깐 휴식시간이라 전화했단다. 별일 없지?"
"네."
"닐은 잘 있고? 또 속 썩이고 있지는 않니?"
"네, 항상 똑같죠 뭐."
그 뒤로도 나와 내 동생들의 안부에 대한 문답이 이어졌다. 나는 단답으로 끊어 대답했다. 전화기 너머로 아빠와 하는 대화가 어색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요즈음 들어 아빠는 그런 점 때문에 나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른다고도 했지만, 그게 내게 있어 크게 신경쓰이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래, 소피 밥은 제대로 차려준거지?"
"그럼요."
원래 먹었어야할 시간보다 두시간 정도 지났고, 소피는 그걸 절반도 안 먹고 뛰쳐나가서 닐과 함께 방을 잔뜩 어지럽히고 있지만요, 나는 뒷말을 삼켰다.
"그래, 네가 있어서 참 의지가 된단다. 항상 고마워."
"네."
"아, 잠시만. 아니, 그건 이 서류철에는 포함이 안돼있어. 따로 전산실에 요청을 해야… 그래, 잠시만 기다려줘. 좋아,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안심이네. 아빠는 다시 일하러 가마."
"이따가 저녁 때 뵈어요."
"그래, 사랑한다 우리 딸."
"네."
몇 초의 공백 끝에 전화는 끊어졌다. 아마 아빠가 원하는 말은 '저도요' 였을지도 모르지만, 이 나이 먹고 그런 말을 하기에는 왠지 어색하고 부끄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고작 그 두 단어가 뭐라고. 나는 다시 그릇에 소피를 위한 시리얼과 우유를 부었다.
전화가 끊어진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닐은 다시 한바탕 발을 구르며 소피와 함께 뛰어왔다. 닐이 휘두르는 광선검에서는 그닥 위협적이지 않은 효과음이 흘러나왔다. 소피의 것은 이미 건전지가 닳은지 오래였다.
그래도 아빠한테 부탁받은 일이니 하는 시늉은 보여야지,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닐을 쫓아낼 구색을 찾았다. 닐과 함께 있는 도중이라면 소피에게 밥을 먹이기는 커녕 광선검을 손에서 놓게 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나는 구석에서 작은 쓰레기 봉투를 찾아냈다.
"닐, 소피 그만 괴롭히고 여기 쓰레기 좀 버려주고 와줄래?"
"괴롭히는게 아니고 놀아주는거거든! 나중에 아빠 왔을때 버려도 되잖아!"
아, 슬슬 인내심이 바닥났다. 나는 동생은 물론이거니와 나보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데에는 젬병이었고, 이런건 얼마나 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를 않는다. 나는 있는 힘껏 상냥하고, 또한 고압적인 협박투로 조곤조곤 닐에게 대답했다.
"당장 쓰레기봉투를 버리러 다녀오지 않으면, 네 그 쓰잘데기 없는 싸구려 광선검하고 너프건들을 죄다 이 봉투에 같이 담아서 버려버릴거야. 최근에 너가 모으고 있는 그 프라모델들도 같이."
그 말을 들은 닐은 켁, 하며 괴상한 소리를 내고는 구시렁거리며 곧장 봉투를 집어들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의 광선검은 놓지 않았다.
"좋게 생각해. 고작 한 블록이잖아. 소피? 와서 이것 좀 먹어. 이번에는 흘리지 말고."
닐은 빠르게 다녀올 작정으로 현관을 향해 뛰쳐나갔다. 소피는 잠시 멍하니 서있다가, 내가 준 시리얼 그릇을 거실 바닥으로 들고 가서 홀짝였다. 그래, 그렇게라도 먹어라. 똑바로 앉혀서 밥을 먹이기에는 오전부터 이어져온 피로감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닐이 나가니 집은 좀 조용해졌고 평화를 되찾았다. 나는 거실의 의자에 앉아서 폰 연락처를 뒤적였다. 소피가 시리얼을 씹는 소리가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잠시나마 얻어낸 휴식을 만끽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닫아둔 창문들이 일제히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린걸 보니 아주 잠깐 잠들었었나보다. 종종 강한 바람이 창문을 때릴 때 나는 소리였다. 흘깃 쳐다본 바깥은 여전히 따스해보였다. 소피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창문가로 다가서서 물었다.
"언니, 언니. 저게 뭐야?"
"뭐가?"
"하늘에 파란 점들이 있어."
"구름 이야기하는거야?"
"아냐, 점들이 있어. 엄청 많아."
나는 주머니에 폰을 쑤셔넣고 창문가로 향했다. 지나가는 UFO라도 발견한 건가, 그런거라면 정말 대박일텐데, 같은 실없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소피는 아까와 같이 궁금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언니, 저게 다 뭐야?"
나는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늘에는 검푸른 구름이 가득했고, 그 중간중간에 소피가 이야기한 푸른 점 같은 것들이 가득 떠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머릿속에서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그 점들은 점차 확대되며 크기가 커졌다.
그리고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소피!"
나는 반사적으로 소피를 안아들고 방으로 내달렸다. 천둥번개보다 훨씬 커다란 소리가 폭탄이 터지는 듯한 강한 충격과 함께 고막을 강타했다. 소피는 비명을 질렀지만, 그보다는 유리창들이 깨치고 가구들이 넘어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운석만한 크기의 얼음덩어리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마치 폭격을 하는 것처럼. 나는 비척비척 안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온몸이 얼어붙은 듯이 굼떴다. 호흡을 가라앉히려고 해봤지만 시도도 해보기 전에 가까운 곳에 뭔가 떨어지는 커다란 소리가 집안을 흔들었다.
"소피, 일단, 일단은…"
나는 불안에 떠는 소피를 이불로 감싸고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당장으로써는 침대 밑에 기어들어가있는 것이 나아보였다. 바깥에는 계속해서 무언가가 떨어지고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도 섞여들렸을지 모른다. 나는 그야말로 패닉에 빠져 아무 생각도 못하고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소피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오빠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아직 닐이 밖에 있었다. 저 커다란 얼음들이 쏟아지고 있는 밖에. 그것도 무방비로. 나는 사고가 정지한 채로 서있다가, 소피의 어깨를 붙잡고서 조곤조곤 말했다. 손을 따라 소피의 떨림이 타고 올라왔다.
"일단… 침대 밑에 들어가있어. 나오지 말고. 내가 닐을 데리고 올게. 다 괜찮아질거야.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곧 끝날거야."
내가 소피에게 하려는 말이었는지,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는 스스로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럼에도 내 불안이 소피에게 전해지는 것은 막지 못한 모양이었다.
"언니, 나 무서워…."
"다 괜찮아질거야.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잠가놓았던 문을 열고 나섰다. 왠지 모르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주변을 따라 전해지는 충격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아수라장이 된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차가운 돌풍과 한층 가까워진 충격음이 나를 덮쳤다.
얼음덩어리들은 운석처럼 떨어지며 그야말로 지옥도를 펼치고 있었다. 도로변에 크고작은 얼음들이 가득했다. 그 얼음덩이들은 차, 나무, 집…, 가리지 않고 모든 걸 박살내고 있었다. 땅을 따라서 커다란 충격이 몇 번이고 울려퍼졌다. 길바닥에도 얼음이 가득해서 걷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다행히 멀지 않은 구석에 있는 닐을 발견하고 곧장 달려갔다. 닐은 넘어져있던 것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다가가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플라스틱 광선검은 완전히 박살나있었고, 닐의 다리 한쪽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생리적인 공포가 확 머릿속에 다가왔다.
닐은 부르르 떨면서 다리 부분을 부여잡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파편같은게 튀면서 긁어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약간의 안도를 느끼며 닐을 부축하려고 했다.
"닐! 괜찮아?"
"아, 아파! 들지 마!"
"안돼. 여기 있다가는 죽어. 아파도 참고 움직여야 돼. 어깨 잡아줄테니까 일어서봐."
닐은 내 말을 듣고 일어서려고 애를 썼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내 스스로가 아주 약간은 의젓해졌다고 느꼈다. 나는 닐의 팔을 내 어깨에 둘러서 일으켜세웠고, 천천히 원래 있던 집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문득, 지금껏 보았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얼음들이 구름을 찢고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폭음과 함께 우리 집 천장을 뚫고, 우리 집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영화에서 나오는 세트장을 무너뜨리듯, 천장을 부수고 안방 부근을 박살내는 얼음덩이의 모습에 나는 의식도 못한 채 비명을 터뜨렸다. 지면을 따라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나와, 나를 지탱하며 일어서던 닐은 다시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소피, 소피!"
넘어진 채 몇 번이고 소피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심한 돌풍이 고막을 때려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마저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허리춤의 휴대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전화를 받으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바람이 너무 심해 제대로 주머니에 손을 넣기도 어려웠다.
겨우 꺼낸 폰의 화면에는 아빠의 번호가 떠있었다. 전화를 받기도 전에 신호는 반대편에서 끊어졌다. 나는 그대로 패닉에 빠져서 몇 번 다시 화면을 두드리다가, 패턴 인식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폰을 보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쿵하는 충격과 함께 주변의 전신주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거의 흐느끼고 있다가, 다리에서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는 닐을 보았다. 너무 무서워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닐이 내게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들리지 않았다.
나는 끅끅거리면서 거의 움직이는 걸 포기했다. 얼른 어디론가로 움직여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차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섭고 추웠다. 불안하고 떨렸다. 온몸이 굳어있었다. 닐은 그 와중에도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주변에 서있던 차 한 대의 천장으로 얼음덩이가 직격했다. 사고를 알리는 높은 빠앙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퍼졌다. 이대로면 언제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죽는 건 상상도 못해봤는데, 안되는데, 안되는데. 숨을 미친듯이 헐떡였다. 산소 공급이 잘 안되는 느낌이었다.
문득 한참을 중얼거리던 닐이 한쪽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는 것이 보였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무너진 집에서부터 마당을 따라 울면서 뛰쳐나오는 소피의 모습이 보였다. 살아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닐이 내게 저걸 말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안돼, 나오면 안돼.
"오지마!"
나는 바로 일어나 소피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주변의 충격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건지, 패닉에 빠진 건지 소피는 계속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여전히 족히 수백개는 되어보이는 듯한, 아직 떨어지지 않은 얼음덩어리들이 가득했다. 안돼, 당장 집으로 가야해.
서둘러 정신을 차린 나는 닐의 손을 잡고서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보이는 것보다 크게 다친 건지, 닐은 조금만 움직여도 쇳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나는 아예 종잇장처럼 쓰러지는 닐을 들쳐업고,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소피! 돌아가! 집으로 돌아가!"
집이 무너지기는 했어도 지하실은 괜찮을 터였다. 빨리 생각하고 움직였어야 했다. 소피는 멈추지 않고 울면서 내게로 뛰어왔다. 닐을 업고서 얼추 균형을 맞춘 나는 소피에게로 당장 돌아가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집이 있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퍽.
내 머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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