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의 극간

karkaroff 2019/11/04 (월) 17:58:41 #82422596


한 2-3년 전 얘기다.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아는 놈이 있다면 가르쳐 주라.

그 때 나는 러시아의 벽지에서 어떤 시설의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 시설은 구 소련 시절의 셸터인데, 소비에트 붕괴 이후 기록에서 누락된 것들을 다시 등기하고, 상태를 알아보는 것이 그 때의 업무였다. 일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시설의 장소를 자료에서 특정, 예정보다 빨리 입구를 확보해서, 이제 남은 것은 느긋하게 조사만 하면 된다는 상태가 되었으니, 모두 모여 축하회를 했다.

식료보급이 이틀 뒤에 올 것이니, 남은 것들을 처분하는 의미도 있었다. 모두 마시고 먹고 다음 날 지장이 올 정도로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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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숙박했던 곳은 구 소련의 수요소를 개수한 관측소였는데, 나를 포함해 24명의 조사단, 관측소 직원 2명 해서 26명 대부분이 숙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전원의 숙취가 싹 달아나다 못해 얼굴까지 새파랗게 질릴 문제가 일어났다. 보급물자를 가져올 헬기가 악천후로 이륙할 수 없게 되었고, 게다가 메인터넌스 스케줄상 10일 정도 배송을 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불운하게도 부품 수급이나 기타 여러가지 말 못할 사정도 포함된다)

winter_hunter 2019/11/04 (월) 18:05:44 #82427457


가끔 그럴 때 있지. 헬기나 뱅기로 변경까지 일용품을 실어다 주는 것은 좋지만, 노후화 문제도 있고, 뇌물이나 눈보라가 얽히면 엄청난 기세로 늦어지잖아.

뭐어 지금 살아 있으니 된 거 아닐까.

karkaroff 2019/11/04 (월) 18:19:33 #82422596


뭐 그렇지. 살아있으니 럭키라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절망의 늪이었거든.

그 때 남아 있던 식료 비축은 4일치, 개인 비축분까지 털어서 6일치, 절약해서 연명해도 2일치는 식료가 부족하다고 계산이 되었다. 파티와 평소 두 사람밖에 없을 장소에 26명의 인원이 체류했다는 특수한 상황이 겹친 결과다.

밖은 완전히 눈보라로 시계가 화이트아웃되어서 조달반을 내보내기도 어려워 보였고, 수중의 식료를 나누어 먹으면서 어떻게 첫 날을 넘겼다. 차를 꺼내서 식료를 사러 나갈까 했지만, 이것도 가도가 통행불능이 되어서 좌절, 결국 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게다가 이 날은 캐비아와 크래커라는, 아무래도 식료가 곤궁하다는 것은 생각나지 않게 해주는 고급 식사였다. 버터 풍미의 크래커와 소금기 가득한 캐비아가 묘하게 어울려서 엄청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바삭한 촉감에 톡톡 터지는 식감을 따뜻한 봉밀주로 씻어넘긴다. 양은 부족해도 활력을 얻기에는 충분했지.

하지만 다음 날 식사가 문제였다. 아침 식사로 먹은 것아 어째 식료라고 할 수 없을 겔 상태의 물질이라 참을 수가 없었다. 아마 리버 파테liver pâté로 추정되는 러시아군 한지행동용 레이션 통조림은, 음식은 커녕 영양보충제 같은 차원을 넘어 섭취할 수는 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의 겔이었다. 끈적끈적한 감촉이 불쾌감을 전신에 침식시키는 듯했다.

나 스스로도 바보짓이었다고 생각되지만, 나는 못 견디고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아 사냥에 나서기로 했다.
,

눈보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지만, 식료에 굶주린 나를 포함해 몇 명이 한지행동용 장비로 몸을 감싸고, 반자동 기병총과 GPS를 가지고 의기양양히 뛰쳐나갔다.

몇몇이 말렸지만 귀담아 듣지 못했다. 고기를 가지고 돌아오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그것을 조우했다.

teahasucal 2019/11/04 (월) 18:27:44 #82427457


지브리에 나오는 신님 같은 게 나왔는가?

센을 내놔! 막 이러고

karkaroff 2019/11/04 (월) 18:41:33 #82422596


그런 『카오나시』나 『옥코토누시』 같은 크리처라면 차라리 다행이지, 쏴 죽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건 뭐라고 해야 좋을까…… 헌팅에 나선 것은 2개조 9명. 그 중 4명이 나와 같이 행동했고, 그 전원이 욕망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지옥을 봤지.

사슴, 곰, 늑대, 먹을 수 있는 동물이라면 무엇이든 좋으니 눈을 크게 뜨고 오감을 곤두세워 차디찬 한지를 헤매다 보니, 얼마 뒤 우리가 숲 속에서 완전히 방향을 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쯤 숙소를 나온지 1시간 반이 지났을 무렵이었는데, 나왔을 때보다 눈보라가 더 강해졌다.

온도계는 이미 기능을 잃었고, 혹한의 대지에서 우리는 욕망을 못 참은 댓가로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GPS를 믿고 숙소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깊은 눈 속을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지옥보다 심한 눈보라의 숲에서 목적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점점 지치고, 추위에 모두 약해져가는데,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

눈보라가 멎은 공터가 거기에 있었다.

karkaroff 2019/11/04 (월) 18:54:16 #82422596


침엽수림의 숲 가운데에 마치 무언가 결계로 자른 듯 눈보라가 끊긴 구획이 있고, 그 안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던 것이다. 순간 그곳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뇌내를 스쳤지만, 약해진 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끌리듯이 우리는 그 공터로 들어갔다, 그 수수께끼의 공터에……

그곳은 기묘한 장소였다.

12개의 십자가에 검은 그림자 같은 인간형의 무언가들이 묶여 있고, 5 m에서 10 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구 소련의 코트를 입은, 시체보다 섬뜩한 낯빛을 한 놈들이 몇 명, 구식 소총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과장된 태도로 돌아보더니, 그 창백한 듯 묘한 얼굴을 맥아리 없이 비틀며 웃어 보였다.

「늦었잖아, 먼저 개원할 뻔했다고」

그런 의미의 말을 하더니 자기 동료에게 눈치를 보냈다. 거기서 무서운 광경이 시작되었다.

예스러운 총살형 작법으로, 놈들은 묶여 있는 무언가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한 발 쏠 때마다 장전하고, 자세를 취하고, 구령을 받아 또 쏜다. 무엇인가는 한 발 쏠 때마다 냄새가 지독한 정체 모를 체액을 흩뿌렸다. 이 세상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말을 걸어온 한 명만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무서워져서 달아났다.

나는 거기서 죽어라 달렸고, 그 후의 일은 거의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숙소 앞에서 동료들에게 발견되었다. 그저 되게 아쉬어하는 얼굴들로 맞아주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karkaroff 2019/11/04 (월) 19:54:16 #82422596


우리는 수확도 없이 곤욕을 치루고 그저 소모만 했을 뿐이었다. 뭐어, 기쁘게도 나하고는 다른 조로 헌팅에 나선 놈들이 사냥감의 둥지를 발견해서 별 일 없이 끝났지만……

뭐어, 식료 자체는 그로부터 3일 후에 눈보라가 잠시 멎은 틈을 타서 나온 수송체를 통해 육로를 통해 전달되었고, 우리는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다.

눈보라가 지나간 뒤, 우리는 그 수수께끼의 집단과 무언가를 보았던 장소를 찾아 숲을 걸었지만, 그 때 본 공터는 발견하지 못했고, 놈들이 무엇이었는지, 결국 그것은 무엇이었는지…… 그것은 아직도 알지 못한다.

teahasucal 2019/11/04 (월) 20:17:44 #82427457


뭔가 마블에 나올 것 같은 집단이다. 흰색이면 하이드라는 아니지만…… 너 사실 마블이나 엑스파일이나 그런 세계에서 글 올리는 거 아니냐?

멀티유니버스적인 분위기를 느낀다.

karkaroff 2019/11/04 (월) 22:22:22 #82422596


가능하다면 나도 윈터솔저나 스파이더맨이 있는 세계에서 살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너와 같은 세계의 어딘가에서 글 올리는 평범한 인간이다. 차원을 넘나들거나 차원 너머를 관측하지는 못하거든.

그거는 그거고, 그래서 저 공터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다면 연락 바란다. 관련되고 싶지는 않지만 아직도 신경쓰여서 어쩔 수가 없다.

그 때 함께했던 동료나 부하들은 전원 입을 다물고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상사는 잊는 게 좋다고 딱 한 번 말해주고 그 뒤론 상대도 안 해 주는 걸 봐서, 무언가 있긴 있음이 틀림없다.

거기엔 무언가가 있었다. 그 광장에서 주운 약협이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내게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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