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한 느리게
평가: +6+x
blank.png

미국의 괴짜 작곡가 존 밀턴 케이지 주니어John Milton Cage Jr(1912~1992)는 작품에서 음악 기호를 생략하며 연주자가 다소 추상적인 분위기 묘사에만 의지해 작품을 공연하도록 지시하고는 했다. 케이지는 이런 예측불가능성과 혼돈이 모름지기 예술에서, 나아가 음악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소라고 표현했다.

어떤 작품은 순전히 간단한 퍼포먼스로만 이루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연주곡 4'33''는 4분 33초 동안 침묵하는 것이 작품의 전부이며, 초연 당시 케이지가 연주자에게 지시한 행동은 악장이 넘어갈 때마다 피아노 뚜껑을 여닫는 것뿐이었다. 음악의 정의란 무엇인지 묻는 도발적 질문이었다. 초연 직후를 케이지는 이렇게 회고했다. "[사람들은] 웃지 않았다. 그저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깨달은 뒤 화낼 뿐이었다. 30년이 지나고도 사람들은 잊지 않았다. 여전히 화나 있더라."

또 다른 케이지의 실험음악으로, 1985년 작곡한 Organ²/ASLSP(As SLow As Possible: 가능한 한 느리게)이 있다. 케이지는 이 8페이지짜리 작품을 얼마나 느리게 연주해야 하는지 일부러 명시하지 않았다. 이 원칙을 좇아 기부를 거쳐 2001년부터 독일 할버슈타트(Halberstadt)의 성 부르카르디(Saint-Burchardi) 성당에서 이 곡을 공연하는 중이다. 인간의 음계로 최대한 느리게 이 곡을 연주하는 전용으로 만들어진 오르간이 지금도 음 하나하나를 짧으면 몇 달, 길면 몇 년에 걸쳐 연주하고 있다. 공연은 시작하고 639년이 지난 2640년에 끝날 예정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음악이 음악이려면 꼭 듣는 자가 있어야 할까? 음악의 전체를 들어볼 만큼 오래 사는 생명체가 아무도 없다면 음악은 더는 음악이 아닐까?

이 작품을 듣고 감상해줄 생명체가 존재할까?


ASLSP%201-100px.png

큰줄무늬짐승Grande Viande Rayée은 아주 빨리 달린다. 하지만 약하다. 등에 돛이 없으니까. 추장님이 그러셨다. 선조들께서 돛을 달아주셔서 우리는 더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고.

녀석은 너무 더워서 오래 뛰지 못한다. 저런 소나무 그늘에서 쉬어줘야 한다. 지금 나는 4일째 지칠 줄을 모르고 녀석을 쫓아서 지치게 하는 중이다. 땡볕만큼이나 그늘에서도 사냥감을 쫓으며 약한 생명체처럼 자꾸 쉴 필요가 없는 것, 바로 나같은 뛰어난 존재의 강점이다. 조금만 더 견디면 온 부족이 허기를 달랠 수 있다.

숨어 있던 데서 튀어나와 침을 뱉고 식식거리니 녀석이 부리나케 다시 달아나려 한다. 녀석이 뭘 찾는지 잘 안다. 큰줄무늬짐승은 고대의 동물, 요즘 시대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동물이다. 물의 시대에는 늪이 많았고, 수많은 줄무늬짐승들이 짠물에 퍼져서 살았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해의 시대가 되고, 우리 할머니의 할아버지가 알이었을 때쯤에는 웬만한 늪은 깡그리 말라붙어 버렸다. 저 녀석은 물 바깥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 녀석을 4일 동안이나 몰고 다닌 이 땅에선 변변한 물이 없고.

마침내 5일째, 한낮의 땡볕 아래 녀석은 쓰러졌다. 살갗이 꼭 의식 때 북으로 써도 될만큼 팽팽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 흐리멍텅하니 말라붙은 눈. 갑자기 내가 지금 저지른 짓의 중압감이 쿵 내려앉았다. 이건 더는 뛰어난 존재와 약한 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이런 녀석이 아직 우리 시대에 남았지? 큰줄무늬짐승 같은 생명체가 우리 눈앞에 나타났던 지 얼마나 되었더라?

이 녀석이 마지막 생존자인가?

창을 쳐들면서도 주저한다. 이 생명체를 나는 5일 동안이나 괴롭혔다. 약할망정 존중받아 마땅할 고대 생명체. 이 생김새를 아마 이제 아무도 못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부족에서 기다릴 아이들과 노인들, 열흘 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나무 잔가지처럼 야위고 말라갈 이들이 생각난다. 그러고 보니 우리 말고 다른 부족을 마주친 지도 참 오래 지났다. 우리도 마지막 생존자일까?

우리들은 먹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해.

내 창이 큰줄무늬짐승의 숨통을 끊는다. 생명체의 마지막 소리가 빠져나온다. 마치 내가 대신 창을 맞은 기분이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우린 살아야 해. 살아야만 해.


ASLSP%201-100px.png

27세대 이전, 남부인의 지도자 현자 타미크Thamik le Savante는 어느 날 혼자 이렇게 물었다. 우리가 등에 달린 돛 때문에 바람을 맞아서 잘 나아가지 못한다면, 바람을 이용해서 돛 달린 물체가 밀리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현자는 첫 번째 돛수레를 만들었고, 우리는 더 멀리 더 빠르게 움직이게 되었다.

돛수레는 발전을 거듭해 머지않아 돛차가 되었고, 3세대만에 남부인들은 이 땅과 바다의 주인이 되었다.

우리 도시는 커다랗다. 알은 생기가 돌고 건강하다. 유체들은 아름답고 강건하다. 매일같이 우리는 수가 더 불어나고, 인구를 감당하려다 보니 기계를 자꾸만 도입한다. 이러다 보니 장작이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들어간다. 도시로 들어오면 소나무 수액과 타들어가는 나무껍질 냄새가 자욱하다. 하지만 그 냄새 덕분에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기분이 든다.

우리 일족은 어깨에 기술자 인장을 새기고 사는데, 바다를 떠다니는 돛수레가 더 멀리 움직여서 다른 대륙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모양을 개량하는 일을 가업으로 삼는다. 하지만 난 그보다 훨씬 미친짓을 꾸미는 중이다. 나는 잠자리처럼 돛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싶다. 분명히 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내 돛을 부르르 타고 느껴진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최초 추진력이다. 도약 한번 시도할 때마다 엄청난 가연성 수액을 꽉꽉 농축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북쪽 나무들은 씨가 마르기 직전이다.

갑자기 나무꾼 하나가 겁먹고 불안한 모습으로 나한테 달려와서 뭔가 알려준다. 북쪽 숲에 도사리는 전설의 수호자 세 이빨Trois Dents이 또 인부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소름이 돛을 타고 오른다. 세 이빨은 크기가 무지막지하고 위험한 생명체인데, 우리가 땔감을 찾아 나무를 벌목하기 시작하면서 서식지가 마치 햇볕 내리쬐인 늪처럼 줄어들어 버렸다. 평야를 위협하는 종이라서 오래 전에 우리가 평야를 정복하며 모두 잡았는데, 한 마리만이 저렇게 나무 속에 숨어 사는 중이다. 송곳니가 내 팔뚝만하다.

오늘은 인부를 또 얼마나 잃는 걸까.

부리나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니, 짐승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퍼진다. 살아 있는 거대한 화염이 절박하게 나무 사이를 뛰어다닌다. 눈을 깜빡여본다. 역시 어떻게 봐도 거대한 이 동물이, 등짝을 태우는 불을 어떻게든 끄려고 분투하고 있었다. 세 이빨이 내 눈앞에서 불타다니. 아마도 어떤 인부가 저항해볼 요량으로 가연성 수액에 불을 붙여서 던진 탓이겠지. 붉은색, 주황색, 황금색, 끔찍한 - 저 무시무시하게 아름다운 광경이 닥쳐오며 나는 자리에서 몸이 굳는다.

세 이빨, 북쪽 숲의 수호자, 타의에 따라 불의 신이 되어버린 짐승이 분노와 고통에 눈이 멀어 날뛰다가 나를 밀처 넘어뜨렸다.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일어나서 제대로 숨을 쉬어보려 해도 안된다. 그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지금 내 흉곽을 부순 것을.

짐승이 이 나무에 쿵, 저기 쿵 부딪히더니 털썩 주저앉아 쓰러진다. 내 돛에 닥쳐오는 고통 너머로 짐승이 보이고, 불에 감싸이고, 우리를 힘세게 해주는 바람과 수액에 휩싸인다. 우지직거리는 소리가 마치 사체가 노래부르는 듯하다.

우리 모두 사라지고 나면, 이 세상에 남아서 잠자리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다닐 돛차가 있을까?


ASLSP%201-100px.png

뙤약볕 아래를 네모비늘Écailles Carrées과 나는 걷는다. 내 나쁜 눈은 빛과 그림자밖에 분간하지 못하지만, 저 나이 많은 친구는 우리가 물을 찾아야 하는 줄을 알고 갈 길을 이끌어준다. 그리고 나는 우리를 맹수에게서 지켜주는 방법을 안다. 함께하면 우리는 더욱 강인해진다.

우리 일족은 나를 쫓아냈다. 물과 식량을 함부로 썼기 때문에. 네모비늘의 종족도 이 녀석을 쫓아냈다. 늙고 지쳤으며 포식자를 끌어모으기 때문에. 얼마 뒤 우리 일족은 네모비늘의 종족을 포위해 모두 잡아 죽여버렸다. 나는 녀석의 등딱지에다 우리 가족의 인장을 새겨주었다. 그렇게 네모비늘은 비록 짐승이지만 내 새로운 형이 되었고, 나는 이 짐승과 전혀 닮지 않았지만 녀석의 새로운 동생이 되었다.

시간을 때우려고 네모비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 옛날에, 아주 발전한 문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온갖 마법에 능통했대. 바람과 불꽃으로 이루어진 이 마법들로 사람들은 오만 끔찍하고 강력한 기계들을 움직였고, 나중에는 지구의 주인이 되었지. 하지만 마법을 쓰려면 나무로 대가를 치러야만 했고, 마법사들은 강력한 힘에 눈이 먼 나머지 숲이란 숲은 모조리 태워버리다가 결국은 공기를 더럽히고 바다의 숨통을 끊고 말았어. 오늘날 지구는 광대한 사막이 되었고, 우리는 그런 지구를 물려받았지. 우리 사람들은 거칠고 가난하게 살아가지만 세상은 더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우리는 조상 마법사들이 탐욕을 부린 까닭으로 조금씩 죽어가고 있어. 이게 바로 우리 교훈이야, 네모비늘. 모든 것은 대가를 치러야 하고, 지구는 배은망덕한 아이에게 떡을 하나 더 주지 않아.

친구가 갑자기, 결연한 발걸음으로 저 멀리 어두운 형체로 걸어간다. 바위인가, 아니면 외따로 떨어진 나무 잔해인가 싶다. 내 눈으론 분간하기 어렵다. 오래된 샘일까? 우리 둘이 조금 더 살 수 있는 걸까?

네모비늘이 땅을 긁어대기 시작하며 콧김을 뿜는다. 점차 땅속으로 파고들어가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녀석이 물을 느낀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나도 있는 힘을 다해 땅을 파낸다. 내 돛이 햇볕을 받아 익어나고 두 손이 아파오지만, 벌써부터 떠오르는 물맛과 시원한 느낌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다.

이윽고, 땅속 모래가 축축해진다. 우리 일족의 승리의 함성,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세 번 불어본다. 네모비늘이 더욱 깊이, 절박한 모습으로 땅을 파고들고, 구덩이에 들어차는 물이 내 손가락을 건드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물 향기가 너무 세고 기분 나쁘다. 마치 땡볕에서 죽은 생명체의 악취처럼. 기쁨이 갑자기 모두 녹아내린다. 물이 아니다. 분명히 옛날에 마법사들이 만들었던 오래된 그 액체다. 마술을 부리고 주문을 걸 때 사용했던 그 불길한 액체.

본능에 따라 바로 몸을 확 멀리한다. 하지만 네모비늘은, 뙤약볕에 시달리며 얻은 목마름과 조금은 나가버린 정신을 이기지 못하고 액체에 머리를 담가버린다.

소스라치게 놀라 내가 외친다. 그 물을 마시지 말라고, 마시면 죽는 물이라고. 하지만 내 친구는 그저 짐승일 뿐이고, 결국 그 불길한 액체를 크게 한 모금 들이마신다. 갑자기 네모비늘이 고개를 쳐들더니 주체하지 못할 만치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구토한다. 몇 번을 거듭해서, 목숨 살리는 물이라 생각했던 저주받은 액체를 모두 토해낸다. 내가 겁먹은 사이 녀석이 기우뚱하더니 내 곁의 모래에 풀썩 쓰러진다. 너무 늦었다. 내 돛이 찬바람을 맞은 듯이 덜덜 떨린다.

녀석을 간호해준다. 해가 지도록. 그리고 밤 내내. 가끔 녀석이 일어나려 한다. 가끔은 신음을 내뱉는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늘의 바다 끝에는 엄청 큰 해변이 있는데 우리 조상들은 죽으면 모두 그곳으로 간대. 거기 있는 모래는 부드럽고 항상 시원하고, 물이 진짜 많아서 조상들도 어떻게 다 쓸지 모른대. 녀석을 안심시키며 말해준다, 내가 네 옆에 있다고,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아냐 네모비늘, 널 원망하지 않아, 너도 몰랐잖아, 알아챌 수 없었잖아. 네모비늘, 내가 여기 있어. 저기 봐, 태양이 떠오르려 해. 넌 강인해, 정말 강인해. 이 밤 내내 나랑 같이 버텨줬잖아, 나 혼자 한밤중에 남지 않게. 넌 내 가족이야, 내 친구야, 내가 여기 있어, 죽지 마, 부탁이야, 나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어, 안돼, 가지 마, 안돼 제발, 나랑 조금만 더 같이 있어 -

네모비늘이 죽고 나는 일족의 슬픔의 노래를 부른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내 몸에서 힘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이렇게나 성긴 음표들을 모두 듣고 이어붙여 한 가지 곡조로 여겨줄 생명체가 존재할까?


ASLSP%202-100px.png

내가 더 이상 병아리가 아님을 증명하려면 덤불 속을 빨리 달리는 짐승 한 마리를 잡아야 한다. 담비개martre-chien도 가능하지만 나무를 타기 때문에 어렵다. 뛰달리미coureur-sauteur는 코가 길어서 잡기가 너무 쉽다. 아직 깃털도 안 빠지고 부리에서 젖니도 안 빠진 애들이나 잡는 짐승이지. 나는 엄마가 깜짝 놀랄 만한 짐승을 잡고 싶다. 말을 잡을 거다. 많이 크진 않지만 미치도록 빠르고, 줄무늬가 달려서 커다란 고사리 속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말이라도 작고빠른Petite Rapide만큼 빠르진 않다. 그녀석이야 덤불 속의 얼룩무늬 유령, 아무도 못 잡는 짐승이다. 그래도 비슷하니깐.

오늘 오전만 해도, 말을 잡으려고 그렇게 용을 썼는데 벌써 4마리째 놓쳐버렸다. 깃털 속으로 들어온 쪼끄만 짐승들이 내 몸을 쪼아대고, 옷 가죽이 무두질이 덜 되어서 자꾸 가렵다. 내 머리에 시험받는 자라는 표시로 붙여둔, 큼지막하게 뻔히 보이는 깃털 때문에 추격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그게 목적이긴 하지만. 내가 수컷이 아니라 암컷이었으면 아예 성체식 하려고 이렇게 굴러다닐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때, 고사리 속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자 고개를 돌려본다. 말이라 해도 되게 작은 말이겠지만 없는 것보단 낫겠지. 어차피 오늘 하루도 시험날로서 진전이 많이 나갔고. 내가 조심스레 볼라를 집어들고 덮쳐들 위치를 잡으려는 찰나, 저 말은 더 부드러운 먹이를 찾으려는지 고사리에서 빠져나왔다.

갑자기 귓속에서 피가 요란하게 고동친다. 조그만 갈색 동물, 얼룩이 덕지덕지 났고 덤불 속 땅에 있으면 훨씬 알아채기 어려운 모습이었고 무엇보다 발에 발가락이 아주 많았다. 실제로 봤던 적은 없지만 나이 많은 사냥꾼들이 수많은 밤에 걸쳐 하도 많이 이야기해주다 보니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동족들은 시험 때문에 모두 잡히고 이제 오직 하나 남은 그 녀석. 아무도 못 잡는 짐승이라 불리는 그 동물. 작고빠른이었다.

영광을 온몸에 두르느냐 치욕을 두르느냐였다.

작고빠른은 몹시 신경질적인 짐승이다. 지금 나무둥치에 자라난 이끼를 뜯어먹으면서도 두 귀를 사방으로 쫑긋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나뭇가지 속에서 새가 아주 잠깐 지저귀는 소리에도 펄쩍 뛰며 불안한 기색으로 머리를 휘휘 돌린다. 이러니 다가가기는 더 말도 안된다. 내가 뭘 어떻게 해도 소리가 들릴 테지. 작고빠른을 뒤쫓아보려던 모든 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혼자 덩그러니 남고 만다. 그만큼 유명한 녀석이었다.

내가 볼라를 휭휭 돌리자, 녀석의 귀가 내 쪽으로 기울어진다. 기회는 한 번뿐. 볼라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는 대로 곧장 고사리 속으로 몸을 던질 테지. 도망치는 방향으로 미리 던져야만 한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확률은 반반인데. 좋아, 왼쪽에 걸어본다. 못 맞히면 대신에 담비개를 잡아야겠다. 그러면 이런 일도 나 사냥하는 이야기 소재로 삼기 괜찮겠지.

내가 볼라를 던지는 그 순간, 작고빠른이 훌쩍 왼쪽으로 뜀뛴다. 볼라가 녀석의 다리에 친친 감기고, 녀석의 몸이 나무뿌리에 휭하니 부딪히며 사납게 우지직 소리가 난다. 머리와 목이 이상한 각도로 틀어졌다.

해냈어.

아무도 못 잡는 짐승을 내가 잡았어. 드디어 내가 세상에 자리잡은 거야.

나는 기쁨의 울음소리를 실컷 불러본다. 너무 크게 울었는지 나뭇잎에 앉았던 쪼끄만 짐승들이 모두 날아가버렸다만.


ASLSP%202-100px.png

하늘 높이 태양빛이 쨍쨍 내리쬔다. 유리와 돌로 된 이 커다란 도시가 그 빛을 반사해 수천 개 별을 띄운다. 오늘은 기쁜 날, 이빨의 축일이다. 하늘도 기쁜 줄을 아나 보다. 비가 내려서 깃털 축축하고 진흙 냄새 자욱한 축일이라면 너무 슬플 테니까.

역사에 따르면 이빨의 축일은 아득한 옛날, 아직 우리가 글도 못 쓰고 과학도 모르고 수렵채집 사회에 머무르던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동물 이빨이 으뜸가는 무기여서 조상들은 이빨이 가장 웅장한 포식동물을 숭배하곤 했다. 그러다 포식동물을 사냥할 방법을 깨우치면서 숭배는 부수적 의미로 밀려나고, 대신에 그 이빨을 차지하는 것이 영광을 얻었다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동물은, 뾰족한 톱니 모양 이빨 달린 거대 육식 고래였다.

오늘날, 기술이 발달해서 먹이를 인위적으로 수천 마리씩 번식시키는 요즘 시대에는 이빨 모으는 사냥꾼이야 옛날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빨의 축일이라는 전통은 아직까지도 이어진다. 마치 어떤 헌 옷이 더는 몸에 맞지 않더라도 차마 내놓지는 못하는 것처럼.

다들 가장 화려한 깃털을 차려달고 바닷가로 내려와 바다 위에 세운 제단으로 가는 길 양옆에 늘어섰다. 마지막 거대 육식고래, 할머니Grand-Mère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다. 먼저 병아리들이 솜털에다 향기나는 형형색색 가루를 묻히고 나와서 길에다 꽃잎과 나비 날개를 뿌린다. 제일 간단한 일을 짊어진 병아리들의 표정이 엄숙하면서도 우습다. 그다음으로 음악가들이 진귀한 나무로 만든 북과 말 이빨로 만든 마라카스를 연주하며 지나간다. 마지막으로 군중들 사이에 기쁜 울음소리가 퍼지더니 도시의 대모주(大母主grande matriarche)님이 제단으로 간다. 머리에 두른 베일과 빨간 조개껍질은 어찌나 섬세하게 새겼는지, 얼핏 보면 투명한 줄 알 테다. 대모주님 뒤로는 부화번식자 계급 하인이 돼지 한 마리를 데리고 커다란 전통식 톱칼을 들고 온다. 돼지는 최근에 더 맛있고 유순하게 개량한 품종, 톱칼은 예리한 송곳니로 장식한 녀석이다. 올해는 좋은 해가 될까? 할머니만이 아시겠지. 적어도 할머니를 아직 믿는 이들에게는.

행렬이 제단까지 다다른다. 군중이 모두 숨을 죽인다.

할머니를 부르는 노래. 돼지가 끔찍한 소리로 울부짖더니 꾸르륵하며 소리가 멎는다. 흘러나오는 피가 햇빛을 받아 번쩍 빛난다. 숨을 쉬어야 한다고 기억하지 못했으면 기절할 뻔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오지 않는다.

근심하며 웅성이는 소리들.

그때, 갑자기 바다에 거품이 부글부글 일더니 마지막 거대 육식고래의 등이 파도를 가르며 드러난다. 환희하는 군중들. 그러나 기쁨의 울음소리가 금세 공포에 찬 비명으로 바뀐다. 척추에 살점이 주머니처럼 대롱대롱 매달렸고, 구역질나는 악취가 온 바닷가에 진동한다. 죽은 건가? 하지만 헤엄쳐 오는걸! 어떻게 아직 헤엄치는 거지?

"죽음의 징조야!" 은빛 깃털 달린 노인이 외친다. 그런 것 평소에 믿지 않는 나도, 지금만큼은 몸서리친다.

쾅, 할머니가 제단에 거세게 부딪힌다. 바다 위로 제단을 받치던 기둥들이 바들바들하더니, 제단도 죽은 돼지도 하인도 대모주님도 모두 험한 바닷속으로 떨어진다. 그동안에도 우리의 우상은 바닷가까지 떠밀려와 썩어가는 채로 여전히 악취를 퍼뜨리며, 이제 생명이 막 꺼져가려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은빛 깃털 달린 노인이 저 높이 바닷말 덕지덕지 붙은 바위 위까지 도망쳐서 다시 외친다. "그 이상이야! 죽음의 징조보다 더 이상이라고!"

죽음의 징조 그 이상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생기는 거지?


ASLSP%202-100px.png

아무래도 미치지 않은 자는 이제 나만 남은 듯하다. 나 말고 다른 누가 있다고 해도 만나본 지 몇 달이나 지났고, 이 도시는 "느린 전염병"에 맞서는 최후 중 최후의 보루였으니.

동료 연구원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이제 모두 떠났다. 느린 전염병에 저항하는 유전자를 만들어내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우리가 보유한 물자가 턱없이 불충분함을 모두 깨달았을 때부터, 수많은 동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중에 내 약혼녀 낙사리Naxari도 있었다. 낙사리는 다른 이들처럼 머리통에 손말뚝총pistopieu을 쏘지 않고 대신 방벽에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등뼈도 부러졌지만, 감염자들이 대번에 달려와 아직 의식이 남은 몸뚱아리를 먹어치웠다. 피 묻은 깃털이 큼지막한 한 움큼씩 뜯겨나가 미친 감염자들의 목구멍에 쑤셔넣어졌다. 내가 보는 앞에서 두 명이나 목이 막혀 죽었다. 세 번째 감염자가 팔에서 살점을 뜯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포식자가 다가왔다. 도시의 폐허 속에 굳게 자리잡은, 입을 쓰레기통 아가리만큼이나 크게 벌려대는 그 포식자가.

나 혼자 연구를 계속해보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지구상에 미치지 않은 자가 나뿐이면 대체 무슨 소용이지?

뭘 어떡할지도 이제 모르겠다. 너무 무섭다.

하지만 내 정신만은 아직 멀쩡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록뿐인 듯하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문명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폴리디스크에 쓰지는 않을 작정이다. 어차피 미래에 디스크를 읽을 자도 없을 테니까. 이 악몽에서 누가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줄까. 오랜 석판에나 한번 새겨본다.

어느 날이었다. 생명공학자들이 복제 먹이들을 성격은 더욱 유순하고 의식은 더욱 희미하게 만들려고 연구하던 중에, 어느 날 크나큰 사고를 쳤다. 오랫동안 식품공업계에서는 커다란 질문을 궁리하고 있었다. 동물들의 유전자를 어떻게 조작하면 의지와 의식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까, 어떡하면 아무것도 먹을 필요가 없어질까 하는. 거기서부터 문제는 시작됐다. 유전공학이 교착 상태에 꽤나 빠졌을 때, 바이러스학이 한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바이러스의 기능은 비복제 먹이들의 의식을 전부 다 파괴하고 끊임없이 허기를 일으켜 계속해서 살을 찌우는 것이었다. 축산업자에겐 꿈과 같은 소리였지. 그리고 처음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그러나 이유는 몰라도 바이러스는 왜인지 돌연변이했고, 43년이 지나자 다른 종에게까지 전염되고 말았다.

우리까지 포함해서.

나도 감염되고 말았다. 배가 고프다.

문제가 뭐냐면. 바이러스는 지성체의 뇌에 너무 느리게 영향을 미치는 탓에 증상이 나타나려면 2년이나 걸리고, 결국 제대로 생각이 안되고 자꾸만 배가 고파온다고 이 세상 절대다수가 호소하며 병원에 한번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그 단계에서 이 느린 전염병이라고 이름붙은 질병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기는 이미 너무 늦어졌다.

느린 전염병은 뇌를 일부 파괴하고 허기를 자극시킨다. 초식동물에게는 매우 유용하다. 우리 같은 육식동물에게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악몽이다.

나도 감염되고 말았다. 배가 고파. 하지만 정신은 아직 멀쩡해.

낙사리는 어딨지? 너무 무서워.

길거리가 감염자로 빼곡하다. 멍하니 있다가 누구 하나 움직이면 보자마자 경고 없이 바로 공격한다. 그리고 미친 맹금류처럼 울음소리를 내며 서로 목을 긋는다.

내가 왜 석판에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며칠에 걸쳐서 썼다. 하지만 정신은 아직 멀쩡해. 배가 고파. 레이션은 너무 맛이 없어.

낙사리, 나 배고파.

나가. 배고파.

부러진 링거대. 아주 뾰족해. 아주 좋은 이빨. 쫓아야 해. 배고픔을. 배가 고픈 걸 막으려면 죽여야 해. 두려움. 낙스? 배고픔.

두려움. 쓰레기통 입을 죽여. 쫓아, 죽여, 먹어, 배고픔을 죽여. 배고픔을 죽여.

좋은 고기, 좋은 사냥, 배고픔을 먹어.


그런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자신에게만 들리는 그 곡조를 듣고 어떻게 반응할까?


ASLSP%203-100px.png

무녀님께서 산 속으로 들어가신 지 벌써 며칠이 흘렀다. 어른들은 어딘가 크게 다치셨을지도 모르니 얼른 가서 찾아내야 한다고 수군거린다. 도제는 뼈들이 오랜 기다림을 말하고 있으니 무녀님께서 아직도 징조를 기다리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얼른 내 토템을 가지고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괜찮은 동물이기만 하다면 싶은데.

그래도 조금은 무섭다. 부족 청년들은 모두 성인식 여행을 떠나 수천 가지 죽음의 문턱을 넘으며 자기 토템과 가까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부족 제일가는 사냥꾼 나헤로Nahélo는 자기 토템 독수리와 손가락 개수를 똑같이 맞추려고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메즈카Mejka는 먹물바늘 아래에서 몇 시간을 시달린 끝에 얼굴에 살쾡이 머리를 새겨넣고는 어린이들을 놀래켜준다. 사후렌Sahulen 족장님은 코요테 무리와 부대끼며 몇 달을 살았고, 그때 생긴 멋들어진 상처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

무녀님이 자기 토템이 고슴도치라고 처음 말씀하셨을 때 나는 웃었다. 하지만 무녀님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자기가 젊을 때는 토템을 더 잘 이해하고픈 마음으로 며칠 동안 몸에 바늘을 꽂고 다녔다고 하셨다. 그때에야 나는 무녀님의 피부에 왜 그렇게 조그만 점이 많이 찍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윽고 저녁, 파수꾼이 무녀님께서 돌아오셨다고 외쳤다. 드디어 오셨어! 이제 내 토템을 알 수 있어!

고슴도치만 아니라면 싶은데.

무녀님은 불 앞으로 다가오더니 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기묘한 돌들을 이리저리 놓으셨다. 모두 달팽이처럼 나선이 굽이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부대에서 노래뼈를 꺼내더니, 부족 사람들이 모두 엄숙하게 침묵을 지키는 사이 노래뼈를 불어 걸걸한 소리 나는 음악을 연주하셨다. 너무나도 무서웠다. 하지만 알아야만 해.

마침내 무녀님이 뼈를 내려놓고 별들에게 얼굴을 돌리며 말씀하셨다. "돌들과 이야기하고 뼈와 이야기해 보았네. 이 소녀의 토템은 무엇이리이까? 돌들도 뼈도 모른다고 말했네. 그래서 별들과 이야기하고 숲과 이야기해 보았네. 그러자 숲이 말했지.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아라, 그러하면 네가 알리라."

한 마디를 마치고 무녀님은 뼈를 달그닥달그닥 흔드셨다. 나는 숨쉬기조차 어려워졌다. 아빠가 내 어깨를 살포시 누르면서 진정시켜 주셨다.

"그래서 나는 위대한 숲 속을 들여다보았네. 그리고 마침내 나무처럼 보이는 형상이 내게 걸어왔지. 숲이 다시 말했네. 더 자세히 보아라. 다시 보니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큰 사슴이었네. 그래, 그 뿔은 크기가 사람만하고 힘은 사람의 열 배였지! 하지만 사슴은 매우 늙었고, 나를 바라보았네, 그래 그저 바라보았어. 그리고는 숲 가장자리에 털썩 쓰러졌네. 그때 깨달았지. 그렇구나! 이 사슴이 소녀의 토템이구나!"

말이 끝나고 뼈들이 한번 더 절그럭거렸다.

"가장 커다란 사슴은 앞으로 이 아이 속에서 살아갈 터이네. 사슴은 저편에서 자기 삶을 소녀에게 맡긴 것이야. 그 사슴처럼 이 소녀는 주의 깊고 굳세며, 직감이 돕고 우아하며, 강력하고 상냥할 것이네."

그러고 무녀님께서는 뼛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사슴 뿔 형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기쁜 눈물이 터져나왔다. 훌륭한 사람. 그래,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거야. 마지막 커다란 사슴에 걸맞은, 그 모든 사람이.


그런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자기가 듣는 소리가 조화로운 곡조인지 중구난방한 불협화음인지, 아리아인지 협주곡인지 구별할 수 있을까? 그 생명체는 자기 고유의 예술적 감각을 지닐까? 음악이 무엇인지 굳이 깨닫지 않고 살아왔을까, 아니면 우리의 음악관과 그다지 멀지 않을까?


ASLSP%203-100px.png

그래, 결국 이렇게 됐다. 어차피 이럴 운명이긴 했다. 그동안 300-FR의 일과 다음 무앙 사건을 대비해서 여기 케냐에 뿌리 박고 마지막 북부흰코뿔소 파투Fatu를 감시하고 있었다만은, 일이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몰랐다. 무슨 활동가라는 사람이 같잖은 생각을 품고는 보안선을 뚫고 들어가서 파투에게 총을 쏴버렸다. 곧바로 보안 인원들이 달려들었지만 이미 총 맞은 건 어찌하랴.

활동가 놈은 체포당할 때도 계속 부르짖었다. 지구의 자원이 한정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냐고, 길바닥에서 사람이 굶주려 죽어가는데도 돈을 흥청망청 퍼부어서 어떤 종 마지막으로 남은 개체를 지키려고 드는 꼴이 역겹지 않냐고. 무슨 동물원이 불우이웃 돕기에 자금 편성 안하면 불법이다 같은 소릴 하나. 논리를 따져? 무슨 논리?

수의사들이 최선을 다해봤지만 결국 파투는 숨이 끊어질 신세가 되었다. 감시실 모니터를 거쳐서 녀석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다. 동료 후임 녀석이 카페오레를 휘저으며 놀랍도록 무심하게 화면을 지켜보며 묻는다.
"이제 뭘 할 차례죠?"
"전기충격을 시도하려나 본데, 코뿔소에 맞는 세팅으로."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가 뭘 할 차례예요? 제가 뭘 하죠?"
"치료 시도 끝나고 녀석이 죽을 때까지 지켜보고, 수의사들 기억 소거하고, 영상 찍은 거 연구팀에다가 보내고 마무리해야지."
"끝이에요?"
"끝이야."

후임이 커피를 홀짝인다. 한 대 쥐어박으면서 뭐 그렇게 반응이 무덤덤하냐고 따지려다가, 냉정한 기운이 나한테도 옮겨붙는다. 그래, 사실은 사실이야, 할 수 있는 건 없어. 일어난 일은 일어난 거지. 이 녀석은 멸종했다. 우리 할 일은 끝났다. 데이터 다 모았으면 다음 일을 해야지.

그때, 갑자기 후배가 귀를 기울인다.
"들었어요, 방금?"
"뭐를?"
"소리요. 방금 소리 나왔잖아요. 아까 장면 다시 틀어보세요."

되감기. 쩔쩔매는 수의사들, 숨이 끊어진 코뿔소, 전기 충격, 반복. 당황하는 사람 목소리, 발소리, 기구들 찡 하는 소리. 이상한 소리는 안 들린다. "이거요, 여기." 영상 말미에 후임이 손가락을 짚는다.

나도 귀를 곤두세워 보지만, 무슨 소리를 말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되게 둔탁하고 낮게 깔린 소리 있잖아요, 바순처럼. 진짜로 아무것도 안 들리세요?"
"안 들려. 하긴 주파수 중에 특정 나잇대에서만 들리고 늙으면 안 들리는 것도 있긴 하다 그랬는데. 개소린지 뭔지 모르겠다만."

나는 장비를 챙겨서 슬슬 철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임은 아직도 진작에 꺼진 화면을, 유난히 불안한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이윽고 후임이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찝찝한 소리였어요. 너무, 미치도록 찝찝해요. 아주 먼 곳에서 으르렁거리는 바다괴물처럼."


그렇다고 하면 어떤 층위에서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들이 어떤 식으로 고유의 곡조를 구성하지는 않을까?


ASLSP%203-100px.png

감독관님께,

본인은 SCP-300-FR 관련 연구의 조정자로서 저희 팀이 무앙 사건에 관련하여 새로 내놓은 불안한 가설을 감독관님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아시겠습니다만 2044년 미투보관조(Mitu mitu)가 멸종하고 무앙 사건이 발생할 당시 변칙적 저주파 음성이 녹음되었을 때부터, 저희는 매 사건 발생 시 생기는 소리를 모두 녹음하고 분석해 데이터를 충분히 수집하고 소리의 정체를 규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년 동안 무앙 사건을 25회 겪은 이후에야 저희는 마침내 첫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변칙적 소리는 SCP-300-FR의 넷째 내장기관 속 결정 구조망에서 나오는 저주파 고동 소리와 놀랍도록 유사했습니다. 다만 지리적 간격이 너무 큰 탓에 이 소리를 SCP-300-FR에게서 나온 메시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해독할 수는 없었습니다. 더구나 무앙 사건은 저희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발생하는 만큼, 이 메시지는 항상 불완전한 채로 남을 텝니다. 무엇보다 저희가 분석 가능한 구간은 수만 년 전부터 나오기 시작한 모든 소리들에 견주면 아주 짧은 토막에 불과하고요.

그럼에도 저희 팀 중 마사와Massawa 박사를 위시한 일부 인원들이 이 연속되는 소리들의 연구를, 사뭇 다른 방향으로 계속했습니다. 이들은 이 문제를 거꾸로, 튜링의 방식대로 접근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텍스트를 일일이 해독해서 무슨 의미인지 밝혀내려 하지 말고 먼저 의미를 가정하고 그때 텍스트가 해독되는지 알아보자는 것이었죠. 이 원칙에서 시작해서 텍스트를 기존에 300-FR이 보낸 메시지와 비교해 보니 마침내 정설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기존 메시지에서 300-FR은 "우리 사람들"이 "별들 사이에서 노래했"으며 "그 노래"가 "춘분새"라는 개체를 "불렀다"라고 말합니다. 300-FR이 속하던 그 "사람들"이야 선천적으로 긴 저주파음으로 서로 소통했겠습니다만, 마사와 박사는 이 메시지를 읽는 사람 대부분이 이 부분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가설을 제기했습니다. 이 "노래"가 사실은 무앙 사건이 발생할 때 출현하는 저주파음 소리를 나타내는 말이며, 이를 저 먼 곳에 있는 개체가 "부름" 내지는 "먹이"가 여기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이러한 이론적 개체와 그를 우리 시공간 연속체로 끌어오는 부름은,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300-FR 메시지의 해석에 따른다면, YK급 시나리오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토록 불안한 사실을 직면한 이상, 우리는 몇 년 이래로 벌어질 새로운 무앙 사건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막아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줄리우 실바Júlio Silva 박사


이상처럼 우리가 가정한 듣는 자는 존재할까?

























































































































































































































그렇다.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