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은 자신이 감시하고 있던 두 사람과는 반대쪽 방향으로 산을 내려왔다.
산 아래에서 승연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지훈이 잡혔어." 소연이 그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누구한테?"
"나루 오빠. 다른 한 명은 재단 요원."
"흠."
승연은 잠시 벤치에 걸터앉아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소연은 걱정스러운, 아니 걱정스럽다기보다는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승연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을 때, 소연은 그 동작에 놀라 자기도 모르게 살짝 뒷걸음질쳤고, 그런 그녀를 승연은 한심하게 보았다.
"유지훈이 잡혔으면, 박사님이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신 지도 불었겠지?"
"응."
"치세나 지훈이야 별 상관 없지만, 박사님을 재단이 잡으면 프로젝트는 끝이야. 친구들한테 연락해야겠군. 차에 타."
소연은 고분고분하게 차로 걸어갔다. 갑자기 승연이 벤치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소연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소연의 눈이 흔들렸다.
"너,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고는 있는 거겠지?"
소연은 침을 삼켰다. "싸울 거잖아. 재단이랑."
"'나루 오빠'도 거기 있을 거야. 그렇겠지?"
"……그렇겠지."
"전에 '나루 오빠'에 대해서 내가 한 말 기억해?"
"기억해. 그런데-"
"그렇게 해 줄 거지?"
"하지만-"
"신소연."
"……그렇게 할게."
"잘했어. 이제 내 손목을 봐."
소연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 내려다본 승연의 손목에는 시계의 모습을 한 장치가 채워져 있었다.
장치가 푸른 빛을 발했다.
승연은 무너지는 소연의 몸을 능숙하게 받친 다음 소연의 귀에 대고 말했다.
"다시는 내 말에 토 달지 마. 알았지?"
"응."
"강나루는 죽어야 돼. 알았지?"
"응."
제3장
아마테라스
Amaterasu
2019년 10월 8일 아침, 대한민국 양산
올해로 예순 둘이 되는 고다 스에히로 박사는 솔러스 사이언스와 탄생과 죽음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는 프로메테우스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경력을 시작해, 연구소가 잇다른 사고와 경영 실패로 무너졌을때 태양기적학 관련 자료를 가지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같은 처지에 있었던 한국의 신정우 박사와 의기투합해, 한국과 일본 각지에 연구시설을 세우고 태양기적학의 힘을 빌려 엔트로피 법칙을 초월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솔러스 사이언스'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그 계획은 결국 프로메테우스 연구소의 비전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고다 박사와 신 박사 간의 의견차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고다 박사의 제안을 뿌리치고 독자적인 연구에 몰두하던 신 박사와 휘하 연구진이 BE의 테러로 몰살당한 탓이었을지도, 그것도 아니라면 애초에 고다 박사가 2012년 말에 솔러스 사이언스보다도 엔트로피 법칙의 극복을 진지하게 여기던 BE의 제안을 받아들인 게 가장 궁극적인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 원흉이었든, 솔러스 사이언스는 사라졌고, 이제는 각지에 버려진 폐건물들이 한때 그런 기업이 존재하기는 했음을 증명해줄 뿐이었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 양산에 건설되었던 2층짜리 공장은 솔러스 사이언스의 연구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핵심 시설 중 하나였다. 복잡한 철제 관과 탱크로 이루어진 자재 처리 시설을 지나, 창문은 다 깨져 있고 건물을 덮고 있었던 슬레이트 지붕이 사라져 철근이 드러난 채로 방치된 이 공장의 커다란 철문 앞에 고다 스에히로는 서 있었다.
그는 자기 혼자서는 밀어 열지도 못할 철문을 지나는 대신, 그 옆에 난 녹슨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다 박사는 이 장소를 잘 알았다. 녹슨 문이 다행히도 열려 준 덕분에, 그는 마찬가지로 녹슨 상태의 철제 계단을 밟고 올라가 지금은 텅 빈 하역장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하역장 너머에는 복잡한 구조의 생산 시설이 있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근무했던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그 작동 방식을 알지 못하는 기계와 장치들이 지금은 관리되지 않아 먼지가 내려앉은 채로 다시는 오지 않을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생산 시설의 맨 끝부분에, 고다 박사의 사무실이 있었다.
박사는 주머니에서 오래된 열쇠를 꺼내, 사무실 문에 끼우고 돌렸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사무실 안 풍경은 어둡고 황량했다. 더 이상 켜지지 않는 전등을 대신해 전기식 램프를 켜서 서류함 위에 올려놓은 고다 박사는 자신의 책상을 발견하고 그 뒤로 돌아갔다. 아직까지도 기억해두고 있었던 금고 번호를 누르자 책상 뒤 바닥에 설치되어 있던 금고가 열리면서 안에 들어있던 문서들을 내보였다.
고다 스에히로는 금고 안에 들어 있었던 문서들을 꺼내 그가 같이 들고 온 서류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나오는 대신에,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책상 옆 의자에 앉았다.
"강나루 군이라고 했나? 오랜만에 보는군."
강나루가 램프의 빛이 닿지 않는 사무실의 어두운 구석에서부터 걸어나왔다.
"저를 아십니까?"
"신 박사 집에 들렀을 때 잠깐 봤지. 그게 언제더라? 벌써 10년은 더 된 것 같군."
나루는 슬쩍 미소를 지었지만, 고다 박사는 무표정했다.
"재단 사람들과 같이 붙어다닌다고 하더군."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아니고."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 재단에 협력할 마음을 먹는 작자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 못했다고 말하고 싶긴 하지만, 자네 표정을 보니 남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네."
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와 계약을 맺으셨더군요, 박사님."
"그들이 우리와 같은 비전을 공유하고 있었을 뿐이야. BE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걸 지원해 주겠다고 제안했어. 인력, 설비, 안전, 그리고 프로젝트에 꼭 필요한 표본들까지."
나루가 눈을 찌푸렸다.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마음에 안 드네요."
"달리 적절한 용어가 없네. 신소연 양은 아마테라스 프로젝트의 성공에 있어 필수적인 표본이야."
"지연이는요? 아니, 그것보다 일단 아마테라스 프로젝트가 대체 뭡니까? 그게 뭐길래 신 박사님을 죽이고 그 딸아이들을 표본, 아니, 말이 표본이지 실험실 쥐로 만들기까지 해야 합니까?"
"알고 싶나?"
"지금까지 그 아이들 구하겠다고 6년을 보냈습니다!" 나루는 이제 대놓고 화를 냈다. "지금 박사님 얼굴을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화가 뻗치는지 알기는 하십니까? 박사님이 무슨 짓을 하실 생각이시든지 저도 좀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다 박사는 울분을 토하는 나루에게 뭐라고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왼쪽 귀를 두들겼다.
나루는 자기 귀에서 이어피스를 빼내 바닥에 떨궜다.
"됐습니까?"
고다 박사는 딱히 감명받은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저 기기의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나루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이어피스를 밟아 부숴 버렸다.
"자요. 이제 말씀하시죠."
박사는 그의 의지를 알았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 책상에 손을 올려놓았다.
"자네도 신 박사와 친했으니 알고 있겠지만, 솔러스 사이언스의 비전은 태양기적학을 응용해 열역학 법칙을 초월하는 데 있지. 아마테라스 프로젝트는 그 비전을 현실화하기 위해 준비된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도구야. 바로 태양을 매개로 삼아 영구적으로 작동하며 에너지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관을 발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마테라스 프로젝트일세."
"인공 태양 말입니까?"
고다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태양이 아니라, 태양신이네. 아마테라스라는 이름은 일본의 태양신에게서 따온 것이지. 우리는 태양에 신적인 힘과 인격이 존재한다는 태양기적학의 전제 하에, 태양과 계약을 맺어 그 혼을 우리 지구에 강림시키려고 했네. 태양 수준의 힘, 또는 그 이상의 권능을 가진 존재를. 그렇지만 태양의 혼이 지구에 내려오려면, 그 혼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지."
"그게 그 아이들이군요." 나루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신 박사님께 그런 짓을? 왜 그 아이들에게?"
"신 박사는 인간을 태양신의 그릇으로 삼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못했지. 사실 그가 옳아. 한없이 비윤리적인 일이었네. 나도 처음에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어. 하지만 솔러스 사이언스는 그 시절 폭풍 속에 표류하는 배 같은 것이 되어 있어서, 상황을 길게 볼 여유나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지 않았네. 신 박사는 초연했지. 나는 그의 초연함이 부러웠지만, 그뿐이었어."
"그때 엔트로피를 넘어서가 박사님에게 접촉했군요. 정확히는, 신승연이요."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지. 신승연 군이 언제부터 그들의 일원이 되었는지는 나도 짐작 가는 바가 없다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매력적인 제안을 했고, 나는 받아들였지. 신승연 군은 BE가 우리 작업에 필요한 자산들을 조달해 줄 것이라고 했어. 나는 그에게 물었지. 표본도 그 '자산'에 포함되느냐고. 그는 씩 웃더니, 표본은 자신이 직접 가져오겠다고 말했네."
"그러고 나서 2013년의 사고가 일어났고요. 생각해보니 사고가 아니군요. 처음부터 그 연구시설을 박살낼 생각이었죠?"
"일이 이렇게 진행된 상황에서, 신 박사의 존재는 골칫거리일 뿐이었네. 그는 나와 사실상 결별하고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했지. 인간이 아닌 다른 요소를 이용해 태양과의 계약을 성사시키려고 노력했던 거지. 우리가 그를 곧바로 막지는 않았어. 그가 독자 노선을 걷고 있다는 사실은 타카하마 양 덕분에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왜죠?"
"평범한 인간이 신이 되려면, 우선 신을 알아야 하지. 우리가 필요로 했던 표본은 첫째로 인간이어야 했고, 둘째로 태양의 신성을 지식이 아니라 본능의 수준에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인간이어야 했네. 신 박사의 연구 시설에 있었던 그 광원은, 말하자면 태양과 인간 사이의 계약을 중재하는 대리인의 역할을 하는 물질이었어.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신 박사의 연구가 어느정도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행동했네. 유지훈 군 덕분에 침입은 어렵지 않았고, 신 박사와 동료들을 처리한 다음 신승연 군은 BE의 요원들과 함께 그 물질을 의도적으로 두 아이들에게 노출시켰네. 어째서 그가 자기 여동생들을 표본으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네만, 그 결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테지."
"두 아이들은 그 물질을 체내에 받아들였죠. 태양과의 계약을 상징하는 기적학적 증표를." 나루의 얼굴이 굳었다. "태양신의 무녀가 된 거군요."
"그것도 거의 완전하게."
"두 명인 이유는 뭐였습니까? 지연이가 BE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라질 걸 예상하기라도 했나요?"
"그건 예상하지 못했네. 신소연 양은 어디까지나 신지연 양과 프로젝트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카드였어. 신지연 양은 아직 어린이들 특유의 순수한 신앙심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표본으로서 적합성이 높았네. 반면에 신소연 양은 더 나이가 많았으니, 표본이라기보단 단순히 강화인간으로서의 성격이 강했지. BE도 신소연 양을 그런 목적으로 훈련시켰고. 비록 지금은 우리가 가진 유일한 표본이 되었지만."
고다 박사는 안경을 고쳐 쓰고 말했다. "그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네. 모든 준비는 끝났고, 내 데이터는 프로젝트의 마지막 단계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해 줄 거야. 이제 자네는 어떻게 할 텐가?"
나루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제가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사실상 소연이를 제단으로 데려가서 강신을 위한 희생제물로 삼겠다는 계획을 털어놓으면, 제가 박사님 마음을 이해하고 그냥 보내드릴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모르겠네. 어쩌면 내가 너무 오랫동안 신의 세계를 바라보기만 하다 사람의 가치들을 잊어버린 걸지도. 그렇지만 이제 와서 사람의 눈으로 이 모든 걸 바라보기에는, 이미 아마테라스 프로젝트가 지나온 길이 너무 길고 험했어.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네. 표본도. 아, 신지연 양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러고 보니 말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횡설수설하는 박사를 나루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연이의 행방을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까?"
"신지연 양은 몇 년 전에 이미 우리 손에서 떠나갔네. 더 이상 표본으로서도 가치가 없어." 고다 박사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서류 귀퉁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무슨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아마 이 주소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는 중일 걸세."
박사는 주소가 적힌 서류 모서리를 찢어 나루에게 건넸다. 나루는 그것을 받아들고 고이 접어 주머니 한쪽에 집어넣었다.
나루는 한숨을 쉬었다. "감사합니다만, 저는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박사님의 일생 동안 진행하신 연구가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된 것은 유감입니다만, 소연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박사가 뭐라 항의하려는 찰나, 사무실 벽에서부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나루, 들리나? 응답해!"
고다 박사는 소스라쳤지만, 나루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고 말했다.
"얘기해, 파스칼!"
"교전 세포가 여길 덮칠 거야! 무장한 요원들 다수가 하역장으로 들어왔다. 고다 박사를 데리고 당장 사무실에서 나와!"
그제서야 고다 박사의 눈에 밝게 빛나는 램프 반대편 벽에, 은빛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파스칼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법진이 반응하며 빛을 발했다.
"나를 속였군." 박사가 사납게 말했다.
"죄송하다고는 못 하겠네요. 앞으로는 저희랑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나루는 고다 박사의 팔을 붙잡고 강제로 잡아 끌었다.
두 사람이 사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총성과 함께 탄환이 날아와 나루의 머리 위에 박혔다. 두 사람은 급하게 몸을 숙이고 공장 중앙에 세워진 콘크리트 기둥 뒤로 피했다.
나루는 기둥 뒤에 숨어 주변을 탐색했다. 천장에 군데군데 구멍이 나, 앙상한 골조만 남아 있는 지붕으로부터 아침의 햇살이 새어들어오는 것이 그의 눈에 띄었다.
잠시 후 지붕에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던 파스칼이 등에 라이플을 멘 채로 재빨리 구멍을 통해 사무실 앞 철제 발판에 착지했다. 아래에서 날아오는 탄환을 가까스로 피하며, 그는 나루와 고다 박사가 엄폐 중인 기둥 바로 옆, 두꺼운 철판으로 가려진 발판 위 사각지대에 몸을 숨겼다.
"BE 쪽에서 보낸 놈들이 확실해?" 나루가 물었다.
"식별표지를 확인했어. '살쾡이'들이다. 제일 뛰어난 놈들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충분히 위험해." 파스칼은 나루의 말에 답한 뒤 슬쩍 사각지대에서 고개를 내밀었다가 빗발치는 탄환에 다시 몸을 뒤로 뺐다.
"너 혹시 낮에도 그 달로 하는 마술 할 수 있냐?"
나루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게 아니면 사무실에서는 뭘로 대화를 했다고 생각하냐?"
"할 수 있으면, 저 밖에 몇 놈이나 있는지 좀 봐 주겠어?"
"그러지."
나루는 손을 모으고 잠시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빛이 모이더니 그의 손에서 복잡한 형상을 취했다. 나루는 눈을 뜨고 빛으로 만든 형상을 손으로 살짝 집어 자신이 몸을 숨기고 있는 기둥 바깥쪽에 띄웠다. 허공에 뜬 빛의 형상이 세로로 긴 타원형으로 바뀌며 바깥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사해 보여주었다.
"여섯, 아니 일곱 명. 다섯 명은 아래층에 놓인 기계들에 몸을 숨기고 있고, 두 명은 지금 철계단 밟고 다가오는 중."
"PoI나 940KO가 그 중에 끼어 있나?" 파스칼이 글록 권총을 꺼내 슬라이드를 당기며 물었다.
"소연이? 아니. 그 애의 망할 오빠 놈도 안 보여."
"좋아, 일단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보자고."
"유리창은 다 깨져 있어. 올라온 두 녀석 제거한 다음에 창문으로 빠져나가자."
"박사를 데리고 나갈 수 있나?"
나루는 자기 옆에 있는 고다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협조해줄 것 같아?'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안 되겠네."
"하는 수 없지 뭐. 정면에서 밀어내자." 파스칼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주사기를 하나 꺼내 나루에게 건넸다.
"이걸로 뭘 하라고?"
"박사가 걸리적거릴 거야."
"어? 너희들 지금 무슨 짓-" 박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나루가 잽싸게 주삿바늘을 고다 박사의 목에 꽂아넣었다.
수면제가 주입된 고다 박사는 앞으로 기울어지더니 풀썩 쓰러졌다.
"그럼 어디 해 보자고." 파스칼이 권총을 들고 말했다.
"라이플은 어디다 쓰려고 그걸 들고 있어?"
"탄창에 마취 탄환 들어 있어. 그러는 너는?"
나루는 대답 대신 품에서 만년필을 하나 꺼냈다. 파스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진심이냐?"
"왜? 이게 총보다 더 세다고. 정 그러면 이건 어때?"
나루는 만년필 캡 아래 있던 것을 붙잡고 손에 힘을 줘 끄집어내었다. 잠시 후 캡이 분리되면서, 괴상하게도 그 안에 집어넣어져 있던 마뉘랭 리볼버가 나타났다.
파스칼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훨씬 낫네."
"위쪽 두 명은 방패를 들고 있어." 나루가 리볼버에 탄두를 흰색으로 칠한,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총탄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내가 제압할 수 있으니까, 놈들 주의를 좀 끌어 줘."
파스칼이 대략 철계단을 통해 올라온 상대의 위치를 짐작해서 엄폐한 채로 바깥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방패를 든 대원들은 잠깐 몸을 움츠렸다가 마찬가지로 권총을 쏘아 응수했다.
방패로 몸을 가리고 권총을 든 손만 내민 채 파스칼이 엄폐한 방향으로 총을 쏘던 대원은 갑자기 기둥 뒤에서 날아온 탄환을 방패로 막았다. 흰색 섬광과 함께 원형으로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탄환이 맞힌 방패를 붙잡고 있었던 대원은 저만치 날아가 누워 버렸다. 반대편에서 접근하던 대원의 시선이 날아가버린 동료를 향하는 순간 두번째 탄환이 그가 든 방패를 강타하며, 이번에는 방패를 든 대원을 난간 너머로 떨어뜨렸다.
쓰러진 대원들이 정신을 차리는 동안, 아래 층에서 엄폐 중이던 교전세포 대원들이 기둥과 철판 주변에 제압 사격을 개시했다.
잠시 후 철판 뒤에서 잿빛 원기둥 형태의 무언가가 날아와 대원들이 엄폐한 아래층 기계들 사이에 금속음을 내면서 떨어졌다.
"섬광탄이다!" 대원들 중 한 명이 외쳤다.
파스칼이 던진 섬광탄이 폭발하며 잠시 눈과 귀를 멀게 할 정도의 빛과 폭음이 폐공장의 기계실을 진동시켰다. 그때 나루와 파스칼이 엄폐한 곳에서 몸을 내밀어 일제히 총을 발사했다. 혼란에 빠진 교전세포 대원들 중 한 사람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방금 쓰러졌다가 몸을 추스른 두 명을 포함한 다른 대원들은 혼란에 빠진 채로 비틀거리다가 약간 후퇴해 하역장과 기계실을 나누는 방화벽 문 근처에 다시 엄폐했다.
파스칼은 상대가 재정비하는 틈을 타 아래층으로 뛰어내렸다. 그가 기계 뒤에 몸을 숨기고 재장전하는 사이에 고다 박사를 어깨에 맨 나루가 잔상을 남기며 바로 옆으로 다가온 다음, 2층 발판 위에서 떨어지는 회중시계를 받았다.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많군." 파스칼이 농담 섞인 어조로 말했다.
나루는 씩 웃음지으며 같이 들고 온 박사의 서류가방을 내려놓고, 자신의 리볼버에 다른 총탄을 장전했다. 이번에는 붉은색이었다.
"그 탄환은 뭐야?"
"이런 폐공장에서 불이 나도 아쉬워할 사람은 없을 거야." 나루가 실린더를 다시 닫으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다고 치자."
"엄호해줘." 나루가 기계 바깥으로 걸어나오며 교전 세포 대원들이 엄폐한 방화벽 문 왼편에 총을 겨누었다. 오른편에서 그를 쏘기 위해 몸을 내민 대원들은 파스칼이 오른편에 총을 갈기는 탓에 다시 몸을 숨겨야 했다.
나루가 방아쇠를 당기자, 이번에는 신호탄처럼 붉은 빛을 발하며 타는 소리를 내는 탄환이 불꽃의 궤적을 남기면서 방화벽 왼쪽을 맞혔다. 방화벽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오렌지색 섬광과 함께 불이 확 타올랐다. 나루가 오른편에도 붉은 탄환을 쏘자 방화벽 전체에 불이 붙어 무언가 반짝이는 물질들이 포함된 흰색 연기를 내뿜었다.
방화벽이 빠른 속도로 무력화되고 있는 것을 알아챈 파스칼이 이번에는 불타고 있는 방화벽을 겨냥해 총을 발사했다. 반쯤 녹아내리기 시작한 방화벽을 탄환이 뚫고 지나가, 방화벽 뒤에 붙어 있던 대원들 중 두 명을 맞혔다. 한 사람은 목을 관통당해 그대로 쓰러졌고, 다른 한 명은 어깨를 맞고 비틀거렸다.
이번에는 나루가 리볼버에 장전된 일반탄을 발사해 적의 주의를 끄는 사이, 파스칼은 다시 2층 발판 위로 올라가 완전히 녹아버린 방화벽을 지나 하역장으로 나왔다. 남은 살쾡이 대원들은 방화벽에서 후퇴했지만, 텅 빈 하역장에는 몸을 숨길 공간이 없었다.
대원 하나가 어깨에 총상을 입은 동료를 부축해 하역장을 빠져나가는 동안 다른 대원들은 파스칼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적들을 밀어낸다는 목표를 달성한 파스칼은 대충 응사하는 시늉을 한 뒤 다시 뒤로 빠져나갔다. 나루가 다시 축 늘어진 고다 박사를 짊어지고 그가 가져온 서류가방을 집어드는 중이었다.
"어떻게 됐어?" 나루가 물었다.
"하역장에는 엄폐할 공간이 없으니, 곧 후퇴할 거야. 어서 나가자고."
나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어서 기계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파스칼이 2층 발판을 따라 공장 바깥으로 향하는 철계단을 내려가려 하는 순간, 하역장으로 신승연이 들어왔다.
승연은 발판 위의 파스칼을 발견하자마자 자신이 들고 있던 돌격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파스칼은 몸을 빠르게 숙였지만, 승연이 든 소총의 총구에서 총알이 나오는 대신, 그 아래 부착된 척탄통에서 묵직한 금속성의 소리와 함께 유탄이 발사되었다. 파스칼은 그 금속성 소음을 듣자마자 몸을 날려 발판 아래로 떨어졌다. 2층으로 날아간 유탄이 폭발을 일으키며 발판과 발판이 부착된 벽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파스칼은 발판이 휘어지며 나는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역장 바닥에 쓰러졌다. 승연은 떨어진 파스칼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때 나루의 회중시계가 아주 낮은 궤도로 날아와 승연의 발 밑에 떨어졌다. 곧이어 나루가 하역장 저 끝에서부터 낮게 날듯이 거리를 좁히며 다가와 슬라이딩으로 승연의 다리를 걸어 그를 넘어뜨렸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한 승연은 총을 놓치며 하역장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파스칼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그때까지도 그의 등에 매여 있던 라이플을 꺼내고 무너진 방화벽 뒤로 돌아가 모습을 숨겼다.
나루는 회중시계를 한 손에 붙잡고 몸을 일으켜 승연에게 리볼버를 쏘았다. 승연은 옆으로 굴러 총알을 피하고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켰다. 나루의 리볼버에서 발사된 총알은 바닥을 깨부수는 대신에 약간의 충격으로 인한 금만 남기고 저만치 튕겨나갔다.
"고무탄이잖아." 승연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지금 나 놀리는 거야?"
"넌 이게 놀이로 보이냐, 엉?" 나루가 굉장히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승연은 자기 손에 들려 있던 소총이 이미 붙잡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루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공격을 감지한 나루는 뒤로 물러났지만, 승연은 나루에게 주먹을 날리는 대신에 승연의 손목에 달려 있는 손목시계형 조명 장치를 나루에게 들이밀었다.
조명 장치가 붉은 빛을 발했다.
나루의 몸이 잠깐 굳었지만, 곧이어 그는 실소를 터뜨리며 성큼 다가와 승연의 손목을 붙들었다.
"대체 무슨……!"
나루가 승연의 손목에 달린 장치를 강제로 떼어내며 말했다. "내가 그따위 한심한 기술에 당할 수준이었으면 어릴 때 무진에서 이미 죽었을 걸."
승연은 저항하려 시도했지만, 나루는 승연의 배를 걷어차며 그를 다시 바닥에 눕혔다. 승연은 등을 돌려 공장 밖으로 달아났다. 나루는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듯 한 번 바라보고는 승연을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
나루가 승연을 따라 공장 밖으로 나간 그 순간에 철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달려들어 나루를 힘껏 걷어찼다. 갑자기 복부를 세게 걷어차인 나루는 원래 달리던 방향과 수직으로 수 미터를 구르다가 공장 옆에 세워져 있던 흰색 차에 부딪힌 다음 흙바닥에 엎어졌다.
복부에 느껴지는 격통으로 인해 숨이 턱 막힌 나루는 잠시 동안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엎어진 채로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약간 움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땅에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기침이 터져나올 때마다 아까의 비현실적인 고통이 다시 올라와 온 몸에 순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루는 애써 고개를 돌려 자신을 걷어찬 장본인을 보았다.
"오랜……만이야, 소연아."
잠시 후 살쾡이 대원들이 다시 공장으로 들어가 고다 박사와 서류가방을 회수해왔다.
"자산 확보 완료했습니다. 재단 요원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대원 중 한 명이 승연에게 보고했다.
"곧 돌아올거야. 뒷처리는 그 놈들한테 떠맡기고 어서 떠나자고. 야, 신소연."
소연이 몸을 돌려 승연을 바라보았다. 승연은 여동생에게 권총을 건네며 말했다.
"흔적 남기지 말고 처리해. 아까 얘기한 지점에서 만난다, 알았지?"
소연은 권총을 집어들었다.
한편 파스칼은 여전히 방화벽 뒤에 몸을 숨긴 채 살쾡이 대원들의 수색을 피했다.
대원들이 타고 온 차량이 엔진 소리와 함께 떠나가는 것을 확인한 파스칼은 기계실로 돌아가, 발 디딜 공간이 충분해 보이는 기계 하나를 밟고 올라가 2층으로 향했다.
충분히 높이 떴다고 생각했는지, 태양은 이제 하늘 가운데에 머물러 뜨거운 열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10월이었지만, 나루에게는 그 열기도 참기 어려울 만큼 더웠다. 그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고 두 발로 일어나 섰다.
소연은 여전히 무감정한 표정으로 나루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잖아. 그동안 고생 많이 했구나. 내가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나루가 말했다.
"난 오빠를 죽여야 돼." 소연의 단조로운 어조 속에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승연이는 그렇게 말했겠지." 나루가 침착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쏴도 되겠지만,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지 알려줄게."
"듣고 싶지 않아!" 소연이 갑자기 소리질렀다.
나루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가 방아쇠를 당기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맞을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거든. 나는 아마 치명상을 입을 테고, 다시 흙바닥에 쓰러져서 몇 분 지나지 않아 죽겠지. 그리고 너는 내 시체를 어디 산에 묻던지 불태우던지 해서 처리하고 승연이랑 만나기로 했던 약속 지점으로 갈 거야."
"말하지 마……!" 소연이 총구를 들이밀며 말했다.
"승연은 너한테 잘 했다고 잠깐 위로를 한 다음에, 널 재우고 실험실로 끌고 가겠지.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모르지만, 난 너가 거기서 겪게 될 일을 경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소연은 씩씩대고 있었지만,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았다.
공장 위로 올라온 파스칼은, 반쯤 부서져 있는 지붕 대신에 그 사이로 드러난 철골을 밟으며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발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철골 끝 부분까지 도달한 그는 공장 바깥에서 소연과 나루가 대치 중인 것을 발견하고 몸을 낮추었다. 두 사람은 자기 눈 앞의 상황에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공장 지붕 위의 파스칼을 발견하지 못했다.
파스칼은 마취탄이 들어가 있는 탄창을 라이플에서 빼내고 대신 검은색 탄창처럼 생긴 물체를 라이플에 끼워넣었다. 그는 라이플에 눈을 대고 소연을 조준했다.
"승연이가 내가 죽는 것도 안 보고 너한테 일을 맡긴 걸 보니 네가 완전히 자기 통제 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난, 난 쏴야 해." 소연은 자기 자신에게 되뇌이듯이 중얼거렸다. "쏘지 않으면, 그러면, 화를 낼 거야. 나한테 실망하게 될 거야."
"승연이는 분명 그러겠지. 너는 착한 성품을 가진 아이니까.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걸 두려워하는 아이였으니까. 승연이는 네 성격을 이용해서 널 조종하고 있는 거야." 나루는 이제 단호한 목소리를 되찾았다. "소연아, 네 성품은 그걸로 끝이 아니야. 수 년 동안 승연이가 널 세뇌시키려고 별 짓을 다 했지만, 지금 너를 봐.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해치라는 그 녀석의 명령을 네 정신이 거부하고 있잖아. 난 오래 전부터 그럴 거라고 예상했어. 너를 오랫동안 보아 왔으니까."
"갈 곳이 없어. 오빠가 나를 내치면, 난 다시 재단한테 끌려가게 될 거야." 소연이 총구를 내리며 힘없이 말했다.
"재단은 널 다시 가두지 못 할 거야. 내가 예전에 약속했었지? 꼭 달빛을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그때 기억나? 너는 내가 가져온 검은색 베일로 몸을 덮었고, 나는 네가 강제로 맺었던 계약을 해제하려고 시도했었지."
소연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때 승연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든 무시하고 널 구하는 거였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미안하다."
"나루 오빠, 날-"
그때 긴장이 풀린 나루의 시야가 넓어지면서, 지붕 위에서 라이플을 조준하고 있는 파스칼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경보가 울리며 나루로 하여금 뜻모를 외마디 소리를 지르게 만들었다. 소연이 놀라 나루의 시선을 따라 지붕 위를 보았다. 소연은 주저하지 않고 지붕을 향해 들고 있던 권총을 난사했다.
파스칼은 잽싸게 지붕에 난 구멍 사이로 떨어졌다. 이번에는 하역장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한 그는 라이플에 끼워져 있던 검은색 물체를 빼냈다. 그 검은 상자 한 쪽에 작은 초록색 불이 들어왔다.
소연이 다시 몸을 돌려 나루에게 총을 겨눴다. 그녀의 눈은 실망과 분노로 이글거렸다.
"배신자!"
"소연아, 잠깐만……!"
소연은 나루의 항변을 듣는 대신에 마구 총을 쏘았다. 나루는 가까스로 몸을 흙바닥에 다시 내던져 총알을 피하는 데는 성공했다. 혼란과 억울한 감정이 교차하는 탓에 나루는 제대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평생 후회할 만한 짓을 했다.
나루의 손에서 은색의 빛이 터지듯 쏟아져 나와 소연을 비췄다. 소연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치다가, 빠른 속도로 달아나 나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숨을 몰아쉬는 나루 앞에 파스칼이 라이플을 들고 걸어나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루는 할 말이 많았다.
"왜?" 나루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거야?"
파스칼은 여전히 침묵을 유지한 채로 앞서 나루가 부딪혔던 차의 뒷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검은색 가방을 꺼낸 파스칼은 가방을 차 보닛에 올려놓고 라이플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마치 등 뒤에 자신의 행동으로 수 년만의 기회를 날려버린 사람이 서 있지 않다는 듯이, 그는 무심하게 분해한 라이플을 가방에 집어넣고 폰을 꺼내 무언가 전송했다.
나루는 다른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자신에게 아무 해답도 제시하지 않는 파스칼 때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꼈다. 마침내 나루의 정신 속에서 마지막 끈이 끊어지며 만년필을 꺼내 캡을 분리하려고 하는 순간, 파스칼이 빠르게 뒤로 돌아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
나루는, 이번에는 진짜로, 몸이 굳었다.
"……한 가지만 대답해 줘, 파스칼. 난 친구를 잘못 고른 건가?"
"굳이 말하자면 친구의 의도를 잘못 파악한 거지." 파스칼이 대답했다. "어디까지나 940KO와 PoI의 동선을 파악하는 게 내 임무였다. 둘을 찾으려면 네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에 너와 협력 관계를 맺었을 뿐이야."
"그러면 지금은?"
"방금 940KO의 신체 데이터 계측을 완료했다. 이제부터는 재단이 대상의 실시간 위치를 알 수 있어. 어찌됐든 곧 PoI와 합류할 테니, 두 사람의 동선은 파악이 끝난 셈이지."
"하지만 아마테라스 프로젝트는-"
"아마테라스 프로젝트는 내 알 바 아냐." 파스칼의 어조는 차가우면서도 씁쓸했다. "내가 받은 임무는 두 사람의 동선 파악이지, 아마테라스 프로젝트를 막는 게 아니야. 그밖에 할 말은 없어."
나루는 눈을 꼭 감고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 파스칼? 소연이가 하지 못한 일을 마저 끝내게?"
"그러고 싶지 않아. 그럴 이유도 없고. 하지만 네가 미적거리면 그렇게 해야 돼. 지금 다른 요원들이 상황을 수습하러 오고 있다. 그 전에 떠나는 게 좋아."
나루는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얼굴로 파스칼을 잠시 쳐다보다가, 온몸에 붙은 흙먼지를 털어내고 폐공장 앞에 뻗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걸어가며 파스칼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10분 뒤, 세 대의 검은색 차량이 나루가 걸었던 비포장도로를 달려 폐공장에 도착했다. 흰색 차에 기대 선 파스칼 앞에서 차들이 멈추더니, 그 안에서 재단 요원들과 공작관 에드워드 덴브래스가 내렸다. 요원들은 공장 안으로 온갖 장비들과 함께 들어가고, 에드워드는 초록색 군용 컴퓨터를 든 요원과 함께 파스칼에게 다가갔다.
"데이터는?" 에드워드가 물었다.
파스칼은 손에 쥐고 있던 검은색 물체를 건넸다. 에드워드는 그것을 받아들고 자기 뒤에 서 있던 요원에게 손짓했다. 요원이 다가와 차의 보닛 위에 컴퓨터를 올려놓고 열었다.
잠시 후 검은색 물체는 컴퓨터에 연결된 채로 940KO의 정밀 데이터를 전송했다. 곧이어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지도 위에 붉은색 점이 하나 나타났다.
공작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GPS 정보를 정상적으로 수신하고 있네. 수고가 많았군, 클라인 요원."
그러나 파스칼은 여전히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앞서 전송한 다른 정보에 대해서는요? 상부에서 아무 얘기 없었습니까?" 그가 물었다.
"아마테라스 프로젝트 말이지." 에드워드는 컴퓨터를 종료하고 파스칼처럼 흰 차 보닛에 몸을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스칼은 공작관의 그런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재단은 아무것도 안 할 겁니까?"
"나한테 화내지 말게. 상부에서 결정한 사항이니까. 그쪽에서는 이 프로젝트 전체가 하나의 사상누각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아. 우리가 굳이 다른 단체들을 자극하면서까지 손을 쓰지 않아도, 프로젝트 자체의 결함으로 결국 최종적인 목적 달성을 실패할 거라고 예상하는 거지. 내가 보기에는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것 같지만…… 그 쪽이 아는 게 우리보다 많으니까 아마 큰 문제는 없겠지."
파스칼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자네와 동행하던 그 요주의 인물은 어떻게 됐나?"
"전투 중에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큰 위협은 되지 않을 겁니다."
나루는 풀밭 위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고다 박사가 건네준 종잇조각에 적힌 주소지를 다시 읽어 보고, 자신이 잘못 찾아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사실 그는 살면서 길을 잘못 찾아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자기가 보고 있는 게 거짓이기를 바랬을 뿐이었다.
나루는 종잇조각을 떨어뜨리고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애써 옮기며 걸어갔다. 종이는 흰 연기를 내며 풀밭에 떨어지기 전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마침내 어느 작은 비석 앞에 이르러 그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읽었을 때, 그는 균형이 잡히지 않은 석고상이 무너지듯, 앞으로 기울어지다가 몸에 힘이 빠지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지연이의 이름이 적힌 자그마한 무덤 앞에서, 강나루는 밀려오는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