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 제145K기지식 농담
2022년, 최진아는 1년 만의 포상휴가를 받았다. 그리고 정읍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지독하게 긴 여정이었다. 진동이 그 작은 세상을 쥐고 있다가 덜컹였고 주변 사람들도 달갑지 않았다. 물론 싫어하는 인간상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마저도 마치 수면 위에 뜬 낙엽 같아서. 물 밑과는 상관없이 살아갈 사람들 같아서 어쩌면 진아는 우습게도 질투가 생겼다.
버스는 그럼에도 빨랐다. 현대 교통수단의 귀감이었다. 진아는 창 밖을 쉴새없이 눈으로 쫓으면서, 기지에서 가지고 온 스마트폰을 쥐고 몇 차례 신경질적으로 닦았다. 액정이 더러워서가 아니다. 화풀이가 하고 싶은 것 뿐이었음을 자신조차도 이미 인정한 터였다. 심장부가 마치 뒤틀린 나무의 뿌리가 그렇듯이 점점 더 땅을 향하면서 꼬이는 기분이었다. 사이다를 한 캔 더 마셨다. 제로 슈거니 하는 당당한 언급에 상관없는 청량한 단맛이 진아의 식도를 타고 흘렀다.
감정은 더욱 꼬여서 머리카락마저 신경 쓰인다. 목에 붙는 감각이 산만해져서 홧김에 잘라버리고 싶은 기분만이 든다. 진아는 머리를 힘줘 긁었다. 손톱 사이로 희미한 머리칼이 엉킨다. 다시 기지로 돌아가면 가위를 가지고 와 싹둑 잘라버리던가. 그 정도가 가득한 불안의 공간과 교통의 진동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한숨이 그렇게 지나간다.
2022년 겨울. 제145K기지는 반향을 겪고 있었다. 봄에 있던 아마도 기지 사상 최악이었을 격리 파기가 지나고 유능한 사람들의 이어지던 소멸과, 때아닌 얼음과 불의 공기에 대한 침략의 사건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진아처럼 눈치 빠르고 외향적인 인간이 거기서 살아남는 건 별 것 아니지만, 어쩌면 견디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러던 중 이효인은 사라졌다. 명목은 휴가.
그 시절 그와 가장 가까웠던 진아를 포함해 누구도 그 남자가 휴가를 쓴다고는 감히 상상하지 않았다. 그 생각은 마치 상식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본다면 잔인한 일이었다. 기지를 들락날락하기 시작한지 이 년 남짓 되었던 진아 또한 그랬다. 이효인의 부모는 이 세상을 떠났다. 아마 그가 젖먹이었을 시절 죽었을 것이다. 조부모도 마찬가지 남자가 중학생이었을 시절 떠났다. 그래서 결국 그가 사춘기를 지나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남은 것은 재단 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밖엔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이 소식을 듣고 혼란스러워지기도 전에, 누군가 이미 진아의 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니면 자신조차도 모르는 사이 진아가 함부로 입 밖으로 꺼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그렇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그저 무시하거나 합리화하면서 조용히 예상치 못한 상황을 넘겼다. 혹은 이효인 그 남자에게 신경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드러진 무관심의 일각.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죄다 지나가도 누군가는 남았다. 람다-7의 동료 중 몇 사람이었다. 특히 류혜숙 대원이 가장 열심이었다. 이렇게 다소 당황스러운 선포를 할 정도였으니까.
"데려와."
어느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날만큼 그의 입가에 들국화처럼 핀 주름과 낮은 눈웃음이 새로워 보일 때가 없었다.진아는 그 말을 듣고 짐짓 모른 체 했거나, 사실 아예 무슨 말인지 짐작하지도 못했다. 그 기억 속의 최진아란 단지 당황스러워 하면서 자신보다 열 살은 많을 그 여자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2년간 몇 차례 합을 맞춰보기는 했어도 혜숙과 진아는 아주 친한 사람은 아니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의 외향성이 상당한 바, 아마도 진아에게 단순히 무언가를 맡기려는 생각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아님이 드러나긴 했지만.
"이효인 말야."
"예?"
"걱정되는 거 아냐? 사라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때의 진아는 몇 초간 쭈뼛거리다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간극이 끝나자 그는 확신했다. 분명했다. 진아가 지금 와서 몇 차례 더 생각하건대 기억 속 확실한 것은 본인이 지극히 당당했다는 것이었다. 어떠한 거짓말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아픔 속에서 부끄러움이 없었던 그 말투로 진아는 대답했다.
"예, 솔직히."
"……기지 사령부도, 람다-7 현장팀장도 그래. 나도 그렇지."
"그런가요, 그럼…"
"하지만 그 걱정이란 다 다르겠지, 결국. 사령부는 이효인의 이탈이나 실종을 두려워하고 있을 테고. 물론 이효인에게 위치추적기 정돈 설치해 뒀겠지만."
"정말요?"
"너도 마찬가지일걸. 혼돈의 반란이나 능구렁이나… 적백합교회 같은 단체가 인원들을 꿀꺽하는 걸 막기 위해서지. 암튼 이 말의 논점이 뭐냐하면, 현장팀장이 너더러 명령을 하나 내렸어."
"명령이라뇨, 보고받은 바 없는데……"
"인트라넷 주기적으로 확인 안 하는구나? 어쨌건 그게 뭐냐. 이효인을 잡아 오라는 거지 뭐."
"잡아… 오라고요? 제가요? 휴가 간 사람을?"
"145K기지식 농담 같은 거야. 아니면 뭐 부조리겠지만. 곧 12월 25일이잖아? 그때 한 번 제대로 챙겨주려고. 뭐… 엄밀히 말하면 이거지. '정신상 탈영이 우려되는 요원 감시.'"
"잔인하네요."
"그래서 할래, 말래?"
물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찬성할 이유야 수만 개가 넘었다. 물론 멀미에 대한 우려와 홀로 된 사람을 홀로 찾아나서는 일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한낱 흰소리일 것이지만. 그에 비해 이효인을 찾는 일이 먼저였다. 그 무엇보다도 옭아매고 있는 곤란함을, 과업을 가위로 잘라내는 것만이 그 순간 절대적인 자유로 여겨졌다. 사소하고 의미없는 것에 대한 감정 따위. 진아는 애써 모든 감정을 삼키려 하면서 단숨에 입을 열었다.
"저야 그 명령이니 해야겠죠. 간만에 외출도 하고."
"고맙다. 아니면 네가 나더러 고맙다 해야 할까?"
그 말을 들은지도 벌써 하루가 다 되어 간다. 밖의 해가 쫓아오듯이 창문을 달리고 있다. 진아는 엉킨 폐의 숨을 내쉬면서 가방을 만지작거린다. 위치 추적기, 추적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 하나, 피 몇 방울, 다 마신 사이다 캔의 누추한 양철 가죽 몇 개, 지갑과 기타 위조된 소중한 서류며 카드들. 어울리지 않는 그 물건들이 덜컹이는 도로의 파도타기에 동참한 것이었다. 진아는 눈을 감았다. 귀에 들리는 다른 승객들의 수다와 웃음, 조용한 노래와 요란한 벨소리.
이효인이 어디 있는지는 안다. 그 남자는, 그 분명히 못 믿을 법한 인상의 여리고 또 날카로운 남자는 지금 서울에 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또다시 생각했다. 이효인이 정말 탈영이나 배신을 저지를 것 같은 그런 정신의 소유자인가, 하고서. 어쩌면 맞고 어쩌면 틀렸다. 효인에겐 말했듯 재단이 고향이고 제145K기지가 삶이다. 탈출해봐야 이효인이 기지 어느 한 구석에서 격리 파기를 기도하는 어느 현실조정자보다 행복할지 확신할 수도 없다. 배신은 더 아닌 방향이었다. 물론 최진아의 독자연구였지만 이효인이 어느 조직으로 투신한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았다.
나름의 근거가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최진아는 그것만큼은 믿었다. 이야기하려면 지독하게 긴 날을 새워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토록 불온하게 요약할 수 있었다. 효인의 인생은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아기 시절부터 소년 그리고 청년. 그 이십 몇 년의 삶이 그랬다. 적백합교회라는 그 작은 종교 집단 하나에 의해서 바퀴처럼 굴러갔다. 진아의 자연수로 아로새겨진 인가가 그리고 오지랖도 무관심도 추구하지 않는 영혼이 이해하는 한은. 그 교단과 재단의 싸움 속에서 그의 일가족이 붉은 안개로 흩어져 버렸다.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여자는 확신할 수 없었다. 진아가 재단에서 그리고 이전에 겪은 일들마저 효인의 앞에 서면 죄다 조악한 불행의 모조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마다 불행을 비교하고 헤아려 보고 또 남들의 죽음마저 가늠해 보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달았다.
오래 전에 진아의 동료들이 죽은 적이 있었다. 기지에 들어오기 보다 이전의 일이기는 했지만, 그 모든 불시의 죽음은 정밀히 동작하는 어느 기계장치 변칙존재의 소행이었다. 그 장치는 한때 진아에게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는 끝의 끝까지 그것을 추격해서 결국에는 몸체에 불을 붙이고 관절에 못을 박아 산산이 깨부수어 버렸다. 복수가 끝난 뒤로 진아의 삶은 한때 해파리처럼 방향성이 없었다. 다만 지금은 일련의 부정적 과거라 요약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사람을 죽인 것을 죽인 이후로 모든 것은 단순해졌다. 그게 아니라면 허무해졌다. 너무도 명백하게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미 끝났고 진아에게 복수해올 것은 없다는 믿음은 견고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아무 것도 살아 돌아와 불과 피의 복수에게 잘 해 주었다고 말해주지도 않았다. 죽은 자들은 동등하게 말이 없었다. 유령이라는 개념조차도 거짓말에 가까운 그런 처절한 허무. 무엇도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잔인한 믿음.
그는 어쩌면 효인은 자신보다 이를 백 배로 겪고 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있었다. 적백합교회는 이효인을 근본적으로 모든 알고 지내던 이들을 파괴시킴과 동시에 머나먼 어둠 쪽으로 추락시켜 버렸다. 마치 젠가 놀이에서 아랫부분을 칼로 토막내 버리듯 잘려나간 관계 속에서 이효인이 떨어졌을 거리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의 최진아는 지독한 혼란과 동정과 그러한 감정에 대한 증오 속에 휩싸였다. 이효인은 너무 어렸다. 소년처럼, 심지어 중학생만큼이나 앳된 남자였다. 까만 머리와 창백한 얼굴, 항상 입고 다니는 흰 셔츠를 보면서 언제나 복잡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 사람은 내가 아니야. 그 사람이지. 그런 마음. 근본적으로 서로 의지하거나 이해하거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알량한 기대와 자석의 양극이 서로 붙듯이 당연한 일일 것이라는 예상. 그런 것들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최진아는 그때, 2020년의 선홍색 가을에는 전혀 몰랐다. 객관화와 미디어화의 클리셰에 기반한 편협한 인식에서는 죄악이 부글대며 썩은 문어처럼 끓고 있었다.
진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내렸다. 속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멀미일 리는 없었다. 늙은 가을의 찬 바람이 얇은 코트 새를 뱀처럼 파고들었다. 그는 기기를 꺼내 이효인의 위치를 다시 새겨 두면서 사실상 그쪽으로 걸어가려다 멈췄다. 재미있게도 꼴이 꼭 불길로 마구잡이로 나아가는 불나방 꼴이었다. 불나방이라. 물론 불꽃이 적당히 괜찮다면야 불나방 역할이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을 것이었다.
"후."
최진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걷기 시작했다. 계획이야 원래 머릿속에 있었으니 충동에 붙잡히지 않는 간단한 작업으로 곧 이효인을 붙잡을 수 있을 터다. 물론 서울은 명천이나 해원처럼 작은 동네가 아니었다. 어디서든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길들이 퍼져 있는데다가 마법적인 길들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을 터다. 그렇다면 효인은 왜 서울에 온 것일까.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사실 내가 그 답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포상 휴가로 떠나는 먼 거리 여행이라. 최진아나 이효인이나 결국엔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단어 아닌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 모든 결착을 짓는 데 성공했던 때조차 둘 다 떠나지는 않았는데. 더구나 이런 싸구려 방랑이라면.
최진아는 제21K기지에선 잠깐 일해본 적 있었다. 무호-17 소속 요원으로서 잠깐. 지금에 비하면 빛처럼 짧은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느낀 것은 길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서울, 이 도시에서 최진아라는 개인과 친화적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것이었다. 혼자 다닌다는 것조차도 가느다란 선과 실에 의존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일단 오늘 찾지 못하면 그의 편은 아니지만 그의 적도 아닌 제21K기지 측에 어느 정도 연락을 취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그쪽 요원들까지 수색에 나가면 정말 '정신상 탈영이 우려되는 요원 감시'라는 그 명분이 더 이상 명분만이 아닐 것이니까.
설령 최악의 일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여자는 다시 한 차례 이효인의 위치를 더듬었다. 위경도가 어느 정도 표시되어 있다. 그가 알기로는 안심할만한 수준이었다. 아직 도시였고, 묘하게도 아직 버스가 내린 이 터미널로부터 멀지도 않은 곳이었다. 설령 여기와 위상적으로 겹쳐진 어느 재수 없는 외부차원에 있대도 이 정도로 뚜렷하게 보일 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아까 그랬듯이 계속해서 눈으로 쫓으며 걸어나갔다. 대략 여기서 오십 미터 북서쪽으로 걸어가면 이효인이 있을 것이라고 기계는 공허하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는 동안 다른 승객들이 내리고 최진아의 곁을 스쳐갔는데, 저마다의 표정을 짓고 또 저마다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리라, 그는 감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자신의 표정은 예측할 수 없었다. 우습게도, 곰곰히 생각해 보면
걷고, 마침내 걸어서, 갈색 머리의 여자는 결국에는 그쪽을 향했다. 오십 미터를 걸은 그곳에는 빈터가 있었다. 공허한 공간, 잡초가 피고 귀뚜라미만 우는 그곳에 고작 낡은 벤치 하나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순간 그는 속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분노고 당혹이고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힐 시간이 없었다. 달려들어 벤치 위를 뒤졌다. 가방 하나만이 놓여 있다. 효인의 것이다.
하늘 위로 공허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새 몇 마리가 뜻 모를 노래를 하며 허공의 배처럼 흐른다. 최진아는 마른 세수를 하며 중얼거린다. 이효인,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한 대 때려 주겠다고. 죽을 만큼 아프게, 쓴맛을 남기고 데려오겠다고. 여자는 나무가 쓰러지듯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차가운 감각이 전해지는 그 냉혹한 온도에서 한참 침전하는 감정을 응시하던 진아는 그날 결국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돌아와, 이효인.
B : 회고록 금서 지정
"이효인, 어딨어?"
몇 달 전 최진아는 기지 격리동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말을 앞세워 문을 열었다. 그떼만큼 당황했던 적은 어쩌면 많지 않았으리라고, 진아 본인 또한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큰 소리와 느낌표를 더 닮은 물음표가 박힌 질문을 앞세웠던 것이다. 그는 식은땀을 닦으면서, 가장 근처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다. 불행히도 그 근처에 앉았던 사람은 이효인이 아니었다. 알고 지내던 기지 기록보관소 인원이었다. 그 남자는 키가 크기는 했지만 몸이 여리고 얇은 안경을 썼다. 진아는 잠시 문 앞에 멈추어 서서 매처럼 그를 응시했다. 그는 난데없는 여자의 방문을 받고서는 당황하여 일어났다만 대강 상황을 짐작해내고는 침착한 표정이 되었다. 알고 지내던 이들끼리의 용납되는 무례. 최진아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효인 요원이 여기 있었지?"
남자는 목을 가다듬고는 눈앞의 여자에게 애써 설명을 이어갔다. 남자의 흰 목 뒤로 까만 머리칼이 땀에 눌러붙은 것이 보였다. 최진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응. 잠시 일 얘기로."
"무슨 일 얘기?"
그 순간 남자는 침묵했다. 진아는 거침없이 네 걸음을 더 걸어서 남자의 앞에 다다랐다. 남자가 만일 아직도 그 이야기를 회고해낼 수 있다면, 분명 여자의 두 갈색 눈에서 시뻘건 그날의 불꽃이 튀었다 묘사했을 것이다. 최진아는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호흡이 너무나 거세서, 누가 봐도 분노를 삭이는 인간처럼 느껴졌으리라. 그는 응답을 원하고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할 것만 같은 그 인상. 남자는 맥없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이어졌다.
"…… PoI-2315 이야기."
"적백합교회 놈들 중에 하나잖아. 지금 재단에 잡혀 있는. 그게 누군지는—"
"그 빨간 머리 남자. 3등급 기적술사로 분류된."
"뭐?"
최진아는 버릇처럼 마른 세수를 했다. 적백합교회가 2020년 효인과 진아의 손에 완전히 무너진 이후, 작전 당시 사망한 하나를 빼고는 이미 재단의 엄중한 요주의 인물 취급 방침에 따라 각각 운명이 요구하는 감옥으로 흩어졌다. 몇몇은 D계급으로 소모되었을 것이고 몇몇은 변칙개체로 분류되어 어느 지하 격리실에 격리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다섯째, PoI-2315. 빨간 머리 남자. 혈마법사. 남자는 진아의 눈치를 보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기지에 격리된."
"이 새끼가."
최진아는 이렇게 내뱉고는, 뭐라 설명할 수 없이 굳은 표정이었다. 파일이야 그도 본 적이 있었다. PoI-2315. 이름 주영수. 3등급 기적술사로서 자신이나 다른 동물의 혈액을 매개로 강력한 기적학적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놈에 비하면 최소한 진아가 생각하기로는, 다른 놈들은 어중이 떠중이였다. 최진아는 이효인이 그 해 가을 그 남자와 싸웠던 날을 기억한다. 사령부가 이효인의 옷에 심어뒀던 녹음기의 기록을 기억한다. 말한다, 그 기계는 그렇게 말한다. 그 망할 자식이 이효인더러 이렇게 속삭였노라고. 과거에 얽매여서 원수를 갚는 건 헛짓거리야. 이효인. 우리들의 주홍왕은 그런 것 따윈 원하지 않아.
그 이전에는 그렇게. 그렇게 속삭였다고. 네 어머니는 멋진 사람이였어. 네 얘기도 조금씩은 해 줬지. 네 아빠는 재단 요원이였고 어머니도 그랬어. 단지 선택지가 달랐거든. 네 아빠는 우리에게 죽었어. 그리고 너희 어머니는 우리와 하나가 되었어. 왜 너희 어머니가 우리 중 하나 교인이 되었는지는 나도 모른다고. 어쨌든 간에…… 지금은 둘 다 죽었고 너만 남았구나. 이렇게. 이효인의 과거를 그 누구보다도 알고 있는 인간이라고.
이효인이 이렇듯 자신의 과거를 궁금해한 것은 사실 처음은 아닐 것임을 안다. 적백합교회가 이효인의 모든 가족 관계를 가지고 갔던 그날 애초에 그 남자더러 모든 것을 궁금해하지 말고 현실을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 모든 날들, 심지어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이효인은 너무나 어렸다. 최진아는 그럼에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치 피가 굳어서 자신의 동맥을 베고 혈관을 찌르는 것 같은 그 유쾌하지 못한 감정이, 과거를 그 집째로 산산이 부숴버려도 그 돌무더기 아래서 기어나올 것 같은 그 혐오가 순간 마음을 지배하고 만다.
"……이효인이 뭐래?"
진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묻는다. 그리고 입술을 깨문다. 남자는 적잖이 당황한 듯 제 앞머리를 쓸면서 이렇게 대답하고야 만다.
"다시 한 번 PoI-2315를 만날 수 있겠느냐고…"
"뭐?"
그 순간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음이 들린다. 번데기에서 흉한 모습의 나비가 모습을 드러내듯이, 그 추한 주홍빛 날개의 맥이 펴지고 악마 같은 비웃음으로 풀벌레가 울듯이. 진아 또한 더 이상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최후의 방어기제다. 그 대신 통제되지 않는 감정들이 인간의 뜻에서 쏟아져 내리고 만다. 가슴 한쪽이 뜨겁다. 뜨겁고, 무엇인가 울컥 하는 기분이 전선의 북처럼 울리기 시작한다. 뜨겁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입술에서 찢겨 흘러 나온 피가 순수한 기적학적 화염으로서 화하는 것이었다. 기적사의 쓰라린 점이었다. 그리고 보다 더 운 나쁜 것은 그 기적사가 효인을 찾고 있다는 점. 오지랖이 넓고, 그리고… 이효인의 불행을 지독히 증오한다는 점.
그리고 제145K기지에 흔해 빠진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모르는 인간이라는 점도.
"이효인 어딨어."
최진아가 날카롭게 묻는다. 다시 질문은 수미상관으로 돌아간다. 남자는 겨우 표정을 유지하며 어느 쪽의 어디에 있다고 이름을 댄다. 그는 작별 인사도 없이 그쪽으로 향한다. 머릿속에서 PoI-2315가 이효인더러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과거에 얽매여서 원수를 갚는 건 헛짓거리야. 이효인. 모든 것은 네가 주홍색 운명에 따라 여기로 왔기 때문이야. 아마 우리를 쫓기로 명령을 받았을 때, 네가 어디든 다쳤을 때, 너는 모든 운명을 놓아버리고 그냥 일상을 살아가버릴 수 있었어. 이 모든 것. 모든 것이 지금 이효인을 압박하고 있는 거야. 사람은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최진아는 이효인을 다시 조우한다. 이효인은 기지 기록보관소 어귀에서 멍하니 서 있다. 최진아는 입술의 피를 닦는다. 피와 붉은 재 같은 무엇이 섞여서 묻어 나온다. 진아는 최대한 상냥하게 다음 말을 건네기로 하지만 결국에는 움트는 분노와 격정이, 그리고 깨어 나오는 나비의 상징이 도통 그렇게 두질 않는다. 나오는 말은 지독하게 무심하면서 날서 있다. 결국에는. 결국에는 모든 대화는 이렇게 되는 건지.
"이효인."
그리고 보인다. 이효인의 모습이. 새카만 머리칼, 창백한 얼굴, 가느다란 선으로 그린 듯한 그 일련의 모습과 검은 코트. 그 모든 것이 보인다. 어린 사람, 동시에 어떠한 북방의 너머에서 넘어온 그런 귀족 소년의 인상마저도 담겨 있는 듯 하다. 최진아는 숨을 들이쉰다. 날서 있는 분위기에 효인은 뒤를 조심스레 돌아보았다.
"…왜 갑자기 꽂힌 거야?"
"뭘?"
"PoI-2315를 찾고 있다 들었어. 아니면 이미 찾았니?"
"2315?"
"그 빨간 머리 남자 말야."
효인은 잠시 침묵했다. 아니, 그 침묵은 잠시의 범주를 넘어선다. 이 초간 침묵은 제법 길지만 용납의 범위이다. 삼 초간은 극도의 긴장. 사 초간은 무시. 그리고 오 초 간을 돌파했던 때, 그 오 초의 시간 동안 진아는 효인의 표정만을 살필 수 있었다. 당황, 그리고 고해. 그 중간에 있는 모든 표정들의 합계나 평균. 진아가 결코 좋아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차원 간에 그인 선처럼 남은 모든 감정을 들켰을 때와 털어놓았을 때의 차이점은 수만 가지가 넘겠지만 공통점은 꼭 집어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결국에는 그것이 들켰다는 점. 그리고 결국 그것이 존재했으며 결말을 맞기 전까지 감정을 품었던 당사자는 결코 괴로움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
"……그래. 찾고 있었어."
"왜? 너, 아직도… 거기서 못 빠져나온 거야? 다 끝났는데. 적백합교회는 두 번 다시 부활할 수 없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그때마다…… 너랑 같이 싸울 때마다 그 새끼들 목을 직접 부러뜨려 놓을 걸 그랬어. 이효인 너는…"
그리고 무자비한 침묵은 덮쳤다. 각오, 그리고 멍에. 이효인은 아무 말 없이 최진아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모두 흘려보낸 차다. 아니, 사실 알고 있다. 어떤 긴 시간이 주어져도 진아의 감정을 모두 토해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고 으레 이런 감정적 열변이 그러하듯이 뾰족한 날붙이처럼 그런 말들이 먼저 나온다는 것을. 최진아는, 세로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오른쪽 눈에서 맺혔던 이슬이 파르르 떨며 수직을 그리고 입술에서 채 아물지 않았던 붉은 것이 턱까지 흘렀다. 이효인은 조용히 다가가, 손수건으로 진아의 입술을 닦았다. 이 행동에는 어떠한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날붙이라 해도.
"미안해. 아직 헤어나오지 못해서."
이효인은 습기 찬 음성으로 속삭였다. 최진아는 굳었다.
"하지만 복수하려는 건 아냐. 다 끝난 거 나도 알아."
"그럼."
"과거를… 알고 싶었어. 내 아버지나 어머니가 누군지. 어디에 있었는지… 다 설명할 수 있어."
침묵. 효인은 말을 조용히 이어나갔다. 진아는 더 이상 그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의 거리는 그 순간 근접해 온 유성과 지면처럼 가깝고도 멀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은 거의 속삭이면서 이야기했다는 것. 그리고 그만큼이나 결국 그들은 그리도 가까웠다는 것.
"아버지를 봤어. 파일으로. 그때, 막 태어난 교회에 잠입하셨다가 돌아가셨어. 어머니는 투항하셨고. 솔직히 알고 싶었어. 왜 두 분은 그리도 다른 선택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문제가 아냐. 근거부터 잘못되어 있었어."
"근거라니."
"아무도 선택권이 없었어. 그때 그놈들은 기적술으로 나를… 그때는 고작 갓난애였던 날 겨누고 있었거든.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없었어. 내가 적백합교회 작전에 참여했던 그때보다도 더. 말 그대로."
침묵.
"미안해, 최진아. 또 쓸데없는 일로 걱정시켜서. 하지만 이제 더는 신경 안 쓸게. 네 말마따나 이제 더 이상 복수할 일은 없으니까. 모든 일은 재단 인원의 의무로 할 테니까."
최진아는 그날 침묵했다. 그날, 이효인이 모든 것은 자기네 부모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라 했을 때 더 이상 진아가 오지랖이나 다른 감정적인 것으로 개입할 수 없는 문제임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사실 원래부터 이효인의 서사이자 인생이었고 진아는 불시착한 인간인 셈인데, 왜 그렇게 분노했는지. 지독하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이효인이 다시 적백합교회와 싸우겠다고 나서서 적의 피와 불에 불나방처럼 몸을 내던지다 죽든, 그것은 결국 진아로서는 어떠한 상관도 없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건지.
그 모든 것을 최진아는 기억했다. 지금, 서울의 어느 공터. 진아는 조용히 이효인의 가방을 쥐어 올렸다. 그렇게 그때 걱정시키지 않는다 해놓고 이렇게 사라져 버리다니. 최진아는 가방을 뒤적였다. 사령부가 평소답지 않은 짓을 했다. 칠칠맞고 어리숙한 짓을. 평소라면 위치추적기는 신발 깔창이나 아니면 피부 아래에라도 숨겨 두었을 인간들인데. 효인이 어디로 갔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었다. PoI-2315와 어떤 이야기를 나눈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서울 어디에서 그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걸까. 확신할 수 없는 문제 아닌가. GOC의 기적사들은 피 한 방울, 머리카락 한 가닥 가지고도 표적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못 하는 과업일 뿐이었다.
최진아는 생각했다. 2315를, 그 인간을 어서 우리 기지에서 치워 버렸어야 했는데. 제19K구역처럼 다시는 나오지도 입을 놀리지도 못할 그 어두운 곳에 박아 두었어야 했는데. 제145K기지에서 영원히 이효인과는 마주할 수 없게. 오래된 과거를 지우듯이……
최진아는 다시금 선다. 이제 어디 가야 그를 쫓을 수 있을까. 도무지 답을 알아낼 수 없다. 짐작 가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그곳에 효인이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마치 마음에서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염증처럼 지독한 답답함이 찾아온다. 그는 괜스레 나무 등걸에 발길질을 했다. 나무 껍질이 뜯겨 나가고 흰색 속살이 드러났다. 신발 끝에 톱밥이 묻었다.
"저기."
그때, 그의 뒤로부터 어느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감각의 속에서 울림에 따라, 최진아는 무엇을 느꼈다. 이 목소리, 최진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심장이 종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보았을 때 그는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를, 그 이효인을 마주하고 만다.
"너….?"
"……왜 여깄어?"
그리고 또다시 정적. 이번엔 그 정적이 흔들리는 핸드벨처럼, 그 상태로 둘 사이에서 울리고 있다. 최진아의 표정이 클리셰적인 놀라움과 당황이 섞인 얼굴로서 굳었다. 이효인은 마치 주방에서 호랑이를 본 사람처럼 놀라서 가뜩이나 핏기 없는 얼굴이 정말로 굳어 있었다. 재회다. 어느 간이역이나 만남의 광장에서의 조우가 아니라 텅 빈 어느 공백에서 그들은 만났다. 진아는 막 뭐라 터져 나오는 말을 억누르려는 듯, 주먹을 꽉 쥐다가, 이렇게 내뱉는다.
"내가 할 말이야."
이효인의 표정이 다시 변했다. 이번에는 다르게. 이해했다는 듯 눈이 가늘어졌다. 최진아는 그 눈을 응시했다. 속이 들여다보인 것 같아서 가슴이 끓었지만 동시에 안심했다. 이효인을 만난 장소가 당장 어느 붉은 유적의 도서관이나, 어느 음침한 넥서스나 혹은, 시신보관소나 영정사진이 아니여서. 적어도 무언가 무모하고 불나방 같은 행위를 하기 전에 이번에도 만날 수 있어서. 효인은 머리를 긁고는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휴가."
C: 일곱
일련번호: SCP-2315-KO-ARC
등급: 유클리드 (Euclid)
특수 격리 절차: SCP-2315-KO-ARC는 제145K기지 인간형 개체 격리실에서 격리해야 한다. 개체가 혈액을 기반으로 한 광범위한 기적술 사용이 가능하기에, 격리실에는 상시 반(反)기적학 문양이 새겨져 있어야 한다. 또한 개체가 혈액에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자해나 살해 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감시한다.
설명: SCP-2315-KO-ARC는 신장 170cm의 한국계 남성으로, III급 기적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개체는 포유동물의 혈액을 이용하여 이러한 기적학적 능력을 발휘하는데 이 능력의 예시로는 발화점 없는 화염의 즉각적인 생성과 조작 및 높은 광도의 적색광 발산이 대표적이다.
SCP-2315-KO-ARC는 기적학적이고 외과적인 수단을 통해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으나, 이는 노화의 감속에만 제한된다. 예컨대 정상적 상황에서는 대상은 외관상 50세 정도의 나이여야 하나 지금은 대략 30대 중후반 정도로만 관찰된다. 이러한 노화 방지가 제한적이고 재단 격리 하에서 변칙적 수단을 사용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상은 비변칙적 인간과 다름없이 노화하여 사망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언제나 일주일 전이 있다.
하루 전이라기엔 애매하고 한 달 전이라기에는 꼭 막을 수 있었던 과거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이효인은 격리실에 앉았다. PoI-2135. 아니, 이제는 SCP-2315-ARC인가. 적백합교회의 모든 포로 중 가장 늙은 그 존재다. 이효인의 앞에 그 남자가 있다. 처음 싸웠을 때는 머리를 때아닌 적색으로 염색했었는데, 지금 보니 우습게도 검은 머리가 다시 뿌리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날카로운 미소를 짓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효인이 움직인다. 방탄 유리를 사이에 두고. 물론 남자는 무력하다. 이 방 전체에 강렬한 방화 시스템은 물론이고 애초에 기적술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절차가 상시 가동 중이니까. 이효인이 그를 죽일 수 있다면, 그러라고 기지 상부가 충동질하기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목을 부러뜨릴 수 있다.
부러뜨린다라. 2020년 가을 적백합교회는 끝났다. 처음에 효인의 아버지가 죽고, 이에 대한 응보로 적백합교회는 박살났으며, 이에 대한 복수로 효인의 조부모님들이 죽었고, 그리고 이번에는 효인이 적백합교회의 잔당을 모두 재단의 손아귀에 던져넣었다. 아마도 지금은 뿔뿔히 흩어져 있을 테다. 이 남자, 제145K기지 인간형 개체 격리동에 있는 이 남자만 빼고.
"왔니."
남자가 말한다. 이효인은 무감한 얼굴로 그를 지켜본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다. 사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효인이 지금 2등급 보안 인가를 가지고 있다 해도 사적인 권리로 SCP 개체와 면담을 신청할 수는 없다. 배후에 검은 그림자가, 어느 한 도시 만큼이나 큰 그림자가 지금 이효인의 뒤에 있고, 이 점은 기지 상부와 이효인의 목적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기침 한 번이 바이러스와 숙주의 목적을 모두 충족시키듯이. 지금 이효인은 재단 인원이다.
"뭐가 궁금해서 왔지?"
"….김연지 요원의 행방을 알고 계십니까?"
김연지. 연지. 이 말에 남자는 살모사처럼 웃는다. 비릿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남자의 기대와 달랐던 것은 이효인은 완벽하게 무감정하고 냉정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남자는 확신하지 못한다. 김연지, 그 사람은 이효인의 어머니인데. 적백합교회 쪽으로 넘어갔던 그 사람을 이효인이 지금 냉정한 목소리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 전이라면 분명 감정의 줄다리기가 되었을 텐데.
"연지?"
성이 붙지 않은, 이름의 의문이 되물어 온다. 이효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 남자는 이효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렇게 착각할 정도로 남자는 놀란다. 이효인의 두 눈이, 아래가 붉어진 그 검은 눈이 흑철처럼 빛나면서 남자를 노려본다.
"초조해하지 않고 있구나. 이효인."
침묵. 단지 현장 중계일 뿐임에도 효인은 압박을 느낀다. 그럼에도 눈을 감거나 돌리지 않는다. 직면하고, 또 마주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장소가 바로 격리실에 딸린 작은 면담실 아닌가. 상대는 기적사이자 지금은 변칙개체이며, 이제는 주홍색 앨범일 뿐이다.
"가르쳐 주지. 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솔직히 놀라운데, 20년 하고도 2년… 아니면 3년이나 지났는데도 이걸 몰랐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끝. 이효인은 더는 가치 있는 질문을 캐묻지 않는다. 김연지라는 사람은 죽었다. 이효인이 기억도 못하는 그 먼 시점에 죽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더 많은 사람이 죽었기에 까마득한 세월이다. 하지만 몰랐느냐고, 이 질문에 효인은 대답할 수 있다. 알았노라고. 이미 진작에 짐작해 놓았노라고. 적백합교회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날, 스퀴테 작전 당시 기동특무부대 람다-7이 그 소굴을 박살냈을 때, 불에 탄 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사인은 방화. 물론 보통의 방화일 리 없다. 기적학적 불꽃이다. 발화점 없는 그 불꽃이라고 법의학과는 진술했다.
그리고 주홍왕 숭배자들은 죽으면 장례의 불길 속으로 간다. 이효인은 그 두 가지 사실을 이 년간 지독하게 외웠다. 삼 대 째의 자손들은 내게 축복하고 감사하며 나를 성화로 인도하였다. 나의 잿더미에서 들꽃이 피었다. 그렇다면 이미 그 사람은 죽은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지경이다. 적백합교회는 이미 두 번 죽었으니까.
이효인. 과거를 살지 마.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다 끝나버린 일에 더 이상 어떤 시작을 바라지 마. 그냥 이 순간만 봐. 최진아의 목소리다. 하지만 효인도 그도 결국에는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인간은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다. 그 누구도. 도망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다. 죽거나 그에 준하게 되는 것.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것. 간단하다. 그리고 절대로, 이효인이 선택하진 않을 방식이다.
이효인은 복도로 나와 주저앉는다. 상대는 앨범이라고,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결국에는 이따위 진실을 알아내게 되었다고. 그리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책장 어딘가에 누구나 자기 색으로 칠해진 커버의 앨범이 있다는 말을, 누군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앨범을 십 년 후에 펼쳐보면 단지 빛 바랜 사진들 뿐이다. 어느 해변, 유원지와 푸른 하늘과 맑은 구름, 무지개, 아름다운 사람들의 예쁜 웃음. 그 앞에서 이기고 졌다는 개념은 무의미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이효인도 몇 번을 이질적인 주홍 커버의 앨범을 펼쳐 보았다. 아니면 펼쳐보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에 간과한 점은 앨범은 끝난 일들의 사진첩이라는 것. 그리고 몇 차례나 독백한 대로 인간은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첫 장을 넘길 때마다 끌려들어가는 차원의 길을 부리는 마법사와 싸우고, 칼과 무기를 휘두르고, 주홍왕의 사제 되는 이를 찾아내고, 사람을 총으로 쏴 쓰러뜨리고. 그리고 지금은 어머니의 소사(燒死)를 맞닥드렸다.
그래서, 이제 사는 법은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본다. 효인은 다시 진아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과거를 살지 말라고. 이 말을 내심 틀렸다고 생각해오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로 작동하기 때문에, 앨범은 언제나 차고 다녀야 한다고. 그러나 감히 진아더러 과거에서 벗어나지는 않겠노라 말할 수 없는 까닭은, 이제 결국에 앨범 한 장을 모두 보았다는 점. 그 대가가 양친의 사망과 어머니의 주홍왕식 장례라는 정보를 재확인하는 것일지라도. 효인은 눈가 아래를 소매로 닦는다. 무언가 짠물이 왼쪽 눈에서 흘렀다고 생각했는데 묻어 나오는 것이 없다.
이제 삶을 선택해야 한다. 효인은 일어섰다. 그리고 머리를 가다듬고, 검은빛의 셔츠를 다듬었다. 이제 조금만 더 걸어가면 SCP-2315-KO-ARC의 격리실에서 꽤나 벗어난다. 더 걸어가면 기지 인간형 격리동에서 거의 이탈한다. 거기서 고작 일곱 걸음 더 걸으면 신원 확인 기능이 있는, 그 문이 나올 것이다. 문에 도착해 키카드를 찍고 나가면 공백이다. 문 앞에 포식자처럼 서 있던 삶이 다시금 현재를 부르면서 들이닥칠 것이다.
그리고 효인은 이제 앨범 커버를 열어서, 삶의 사진을 찍고 업데이트하는 법을 알고 있다.
2022년, 이효인은 1년 만의 포상휴가를 받았다. 상관인 특무이사관보도 간만에 흔쾌히 허락한 것이었다. 그리고 정읍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지독하게 긴 여정이었다. 게다가 처음 맞는 휴가이자 제145K기지에서의 일탈이다. 그날— 조부모가 적백합교회의 칼에 쓰러지고, 까만 바가지머리의 중학생이 재단 위장 가게로 뛰어가 울먹이던 날 이후로 효인은 제145K기지에서 거의 일생을 보냈다. 휴가로서의 교통수단. 그 공기 속에서 효인은 마치 거대한 운명에 탑승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도착하자마자 재단 관리 하에 있던 호스텔에 체크인을 하고, 그 안전가옥에서 하룻밤을 묵고 났더니 그날 오후 보는 얼굴은… 효인은 속으로 당황했다. 아니, 어쩌면 당황을 넘어 인지부조화의 경지에 다다른 듯 싶었다. 마치 소설 속 어느 세계에만 있어야 할 인물이 독자를 쫓아 세계를 넘나드는 장면처럼 눈앞에 나타난 최진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서쪽으로 아주 슬쩍 기우는 태양빛을 맞으면서,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갈색 머리의 여자. 마치 영화 포스터 같은 그날의 풍경과 바람이 효인을 간지럽혔다.
"그냥, 그냥…… 휴가."
"휴가?"
최진아가 즉시 되물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휴가 같은 소리 한다, 그런 강렬한 비꼼을 담고 있는 듯 싶었다. 이효인은 차차 상황을 이해했다. 기지 사령부가 분명 개입했으리라. 빨간머리 남자— SCP-2315-KO-ARC과 이효인은 분명 면담 아닌 면담을 했고, 항상 쳐박혀 있을 면담실의 녹음기가 이효인네 가정사에 깊이 물든 불꽃을 다른 인원들에게 전파했을 것이다.
최진아가 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인가가 있든 아니든 간에 효인이 정신적으로 불안해 보이기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마음이고 앨범이고 간에 알 리가 없었으니. 그렇다고 해도 서울까치 버스를 탈 줄이야, 하고 효인은 생각하려다 이 또한 그만뒀다. 잠시나마 자신을 추격하기 위해 서울로 겁없이 올라온 최진아가 미아나 물가에 내 놓은 소녀처럼 느껴지려다 최소한 자신보다는 서울의 제21K기지와 기타 환경에 익숙할 이가 진아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닥쳐온 삶을 살아보겠답시고 휴가를 떠나온 자신이 도리어 형 누나들 손을 놓친 미아 꼴이다. 효인은 피식, 아주 오랜만에 미소했다. 덕분에 진아의 눈은 더욱 날이 섰다.
"웃어?"
"아."
이효인은 탄식했다. 진아는 짝다리를 짚고서, 손가락을 꺾었다. 효인의 표정이 의식적으로 다시 굳어졌다. 진아는 그 자세 그대로 입을 다시 열었다.
"그래서…… 그냥 여행 온 거다?"
"응. 그리고 그날… 말했잖아. 너한테. 더 이상 복수할 일 없고 모든 일은 재단 인원의 의무로 한다고."
"……그랬지."
최진아가 마른 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창백한 습기가 잠시 묻어 나왔다가 사라졌다.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도 했어."
"왜?"
"또 불나방 같은 짓을 했을까봐. 또 이상한 곳에 포류되어 있을까봐. 무서웠어. 그때처럼."
효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근거 없는 걱정은 아니며, 잘못된 걱정은 더더욱 아니다. 2020년 이효인과 최진아가 적백합교회를 죽였던 날 효인은 그들보다 먼저 죽을 뻔 했다. 여러 번. 발목이 잡혀 어두운 차원의 영역으로 추락하거나, 붙잡혀 목에 닿은 칼날을 느끼거나, 혹은 불에 타고 사람들에게 찢기고 날붙이에 베일 수도 있었다. 효인은 그럼에도 살아 있다. 행운이다. 그리고 동시에 작용이다.
"이제 안 그런다고 했잖아. 못 믿었구나."
"정말…… 너는…"
여자는 말을 멈춘다. 효인 역시 입을 닫는다. 누구나 과거가 있고 그래서 남의 과거를 어림잡을 뿐이다. 진아 역시 당연히 그랬으리라 이효인은 믿는다. 하지만 어림잡는다는 것은 당연하고, 그 부정확한 것일지라도 남을 걱정하고 공감해주는 인간. 그리고 함께 싸워 준 인간. 그것이 최진아였다. 이효인은 영원히, 몸에 불을 붙이면서까지 자신을 도왔던 여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만은, 자신을 어림잡아서 부정확한 계산을 내놨대도 결코 탓할 수 없다.
"……다행이야."
죽지 않아서, 하고 이번에도 최진아는 말을 다 내뱉지 못한다. 이효인은 머뭇거리다 한 발짝 나아가 진아의 가까이에 선다. 바람이 확 불어온다. 푸른 바람이 둘의 얼굴을 스친다. 진아의 뺨에 말라붙은 공포의 해소와 안심의 흔적이 짠 기운이 되어 증발한다. 효인은 손수건을 찾다가 없음을 깨닫는다. 다시금 고요한 분위기는 공터를 메우고, 죽지 않은 자 이효인은 그렇게 서서 다음을 기다리다가 애써 말을 꺼낸다.
"최진아."
진아는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과 다음 말에 대한 종용을 대신한다. 효인은, 어렵다는 듯이 혹은 속에서 막 끓어올라 내뱉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을 건넨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고 또 은은하게 공터를 횃불처럼 밝힌다. 이 말에 진아 역시 고개를 든다. 그리고 다시금 밝은 눈과 갈색 빛의 앞머리가 하나가 되어 세상을 응시한다.
"그럼… 휴가 온 김에 같이 있자."
"응?"
"둘이서만 기지 밖에 있는 건 오랜만이잖아. 그때 이후로…"
진아는 눈을 크게 뜨고 효인을 지켜보다가 피식 웃었다. 정말로, 2020년 이후로는 단 두 명이서 있었던 적은 없다. 여자는 생각한다. 적백합교회를 완벽히 이 세상에서 해체시킨 이후로도, 기동특무부대 요원으로서 제145K기지의 총 역할을 해 온 사람들이다. 그 후로도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이와 수단이 일치하는 방식으로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분주했었고… 지금 서울의 하늘은 쾌청하니까. 가을에도 여름에도 이렇게 차가운 푸른 색의 하늘은 보지 못할 것이니까.
"좋아."
효인의 하얀 얼굴이, 미세하게 색이 변한다. 마치 어느 창백한 얼음의 과실이 익듯이. 진아는 웃는다. 또 한 번 바람이 그 머리칼을 쓰다듬고, 자유로운 인간의 머리털처럼 갈색으로 춤을 추는 형상이 있다. 성공과 실패, 이기고 짐의 개념은 추억이란 이름의 앨범에게 무관하다. 그리하여 이제 삶이 들이닥치면 이 순간의 사진을 찍어서 앨범에 두었을 때 미래에도 아름다운 앨범으로 남기를 기원하면 된다.
"어디로 갈래?"
D: 시티팝 (주홍색)
겨울은 빨리 해가 지고, 또 어두워지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진아는 밀려오는 찬바람에 옷깃을 세웠다. 하여간,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냉정을 잃어버릴 일만 있었다. 바람을 마주보고 걷는 일은 술마저 깨게 한다고들 하는데 이렇게 냉정해질 수 있음을 두고 하는 말일까. 하지만 냉정이니 이성이니 해도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순간이다. 효인은 앞장서 걷는 진아의 뒤를 따랐다. 어쨌건 진아가 그보다는 서울 지리에 익숙할 것 같아 내린 결론이었다.
차 몇 대가, 고요하게 거리를 스쳤다. 낮의 서울치고는 적당히 고요했다. 일부러 그런 지리를 골라 걷고 있는 것도 있었다. 위장회사 사무소나 위장 재단의 손길이 몇 초 내로 미칠 수 있는 구역들을 진아는 걸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서울의 이면은 정읍의 몇 배나 되는 초상적인 것으로 들끓고 있기도 하고, 이로 인해 정말 벼락 맞을 확률으로 변칙적인 무언가에 휘말릴 가능성을 배제해야 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니어도 요주의 인물이 된 이효인의 신병을 확보했다는 무언의 과시였다.
둘 다 그닥 좋지 않았다. 하나는 재단 인원의 휴가가 어려움을 똑똑히 보여 주는 것이었고 하나는 효인을 정말로 죄수 취급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휴가다. 제145K기지에서 흔치 않은 계절이다. 그렇기에 피를 흘려 불을 피울 상황은 가능한 한 기피하고 싶었다. 진아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어디서 느릿하게 유행가가 흘러 나오고 있다. 그 순간 진아는, 두 사람이 어느 대화도 없이 몇십 분을 걸었음을 깨달았다.
"저기."
진아는 말했다. 굳이 일종의 직함이자 애칭인 '효인 요원'이나 실명인 '이효인'을 피하기 위한 시가지 전용의 애칭이었다. 효인은 응, 하고 반응했다. 아무래도 이 휴가 도중 저기, 하고 서로를 불러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나쁘리라고 생각했는진 종잡을 수 없지만.
"지금 어디 가는진 알고 있지?"
"아니."
"……그냥 따라오는 거야?"
진아는 가볍게 웃었다.
"한강으로 가고 있어. 정확히는 원효대교로."
"강에는 왜?"
"뭐, 그냥 구경이지. 바다처럼 넓으니까."
효인의 눈이 커졌다. 복합적인 의미에서였다. 하나는 물론 바다처럼 넓다는 데서 온 것이었다. 한강이 넓은 줄은 알고 있지만, 바다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니. 그러고 보면 효인은 큰 강은 본 적이 없었다. 바다 그 자체라면 모를까. 제145K기지의 업무가 내천과 같이 물 흐르는 곳을 따르는 일이 잦기는 했지만 한강의 크기와는 다를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상징적 의미였다. 휴가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그저 구경이라는 비생산적인 행동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 무언가 맞서 싸우고, 시간을 아껴서 효율을 좇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런 생각을 하니 어쩐지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뭐, 가서 라면이나 먹자. 춥기는 한데 네가 하필 겨울에 가출한 업보라고 생각해."
"가출 아니야. 기지에 제출하고 나왔으니까. 네가 내 부모님…은 아니잖아."
"말 잘했다."
진아는 피식 웃으며, 걸음 속도를 늦춰서 효인의 곁에 붙어 걸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가까이 붙어 걷기 때문인지 바람은 덜 불어오는 듯 했다.
"너 혼자 서울 와서 어디 갈 생각이었어? 길도 모르면서."
"글쎄. 어…… 그냥."
잠시 침묵.
"뭔가 그냥 돌아다니려고 생각했어. 돌아올 수 있는 거리 내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진아의 표정이 잠시 어이없다는 듯이 굳다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가출 소년 같은 말이다. 하지만 수없는 가출 소년들의 말로가 이렇게 좋은 방식으로 끝나지 않음을 가정하면 운이 좋은, 어느 가출 소년의 생각일 터. 한 바탕 암바라도 걸어서 혼을 내 주고 싶건만 이효인은 바람처럼 자신과 가깝지도 친하지도 않은 대상 아닌가. 그저 전우이자 마음을 일부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일 뿐. 마치 멘토와 멘티, 혹은 단순히 선후배나 동료처럼. 목숨을 걸고 같이 싸운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진다더니, 그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지금 최진아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사실 이미 알고는 있었다. 류혜숙 대원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정읍에서 서울로 인고를 견디며 도착한 것도 그 기저에는 애초에 하나의 마음이 있음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최진아는 계속 걷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이효인을 바라보았다.
"이효인. 다시 시작한다는 거 있잖아.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당연히. 현재를 살아가라고… 그 말 고마웠어."
"2년이 지났는데도 기억하네. 하여간 다시 시작할 계획은 생겼어?"
"응."
"말해 줄 수 있어?"
이효인은 옷깃을 세웠다. 긴 옷깃으로 인하여 마치 효인의 표정 일부가 마스크를 쓰듯 숨겨졌다.
"재단 인원으로서 살기.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기, 그런 거."
"재미없네. 뭔가 더 급변하겠다는… 그런 다짐은 없어?"
"음… 그런 중요한 건, 차차 생각해보게."
최진아는 직감적으로, 이 상황에서 효인의 내면적 협조를 기대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처럼 아마 모든 일을 혼자서 해 나가기 시작하면 진아의 역할이란 단지 일종의 관찰자거나 난입자가 될 뿐이다. 그게 골치 아픈 점 아니겠는가. 진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런 건 있어. 미래에 대한 생각이나 소원, 계획… 그런 거."
"물어봐도 될까?"
"얼마든지."
바람이 몰아쳤다. 어디서 들려오던 유행가의 음율이, 이제는 그들의 곁에 있는 어느 잡화점의 스피커에서 나왔음이 명백해질 정도의 길을 걸어왔다. 최진아는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다시 한 차례 효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랑 가까워지는 거. 이 기지엔 좋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현장팀장님, 류 대원님… 그리고 너도."
"나?"
효인 역시, 진아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둘은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잠시 바라보게 되었다. 차가운 햇살이 거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래, 너. 우린 이미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말 놨다고 해서."
"이미… 그러게. 애매한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이효인은 머리를 가볍게 긁었다. 말 그대로. 둘의 관계는 20년 가을 최고의 격변 즉 만남을 맞았다가 서서히 느슨해졌다. 아마도 어떤, 적백합교회와의 충돌에 준하는 사건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둘은 친구였는데 그렇게 가까운 친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보자면 이효인은 기지 내에서 친구라고 부를 사람이 없었다. 오직 일방적인 동정이나 감각을 주거나, 그보다 더 많이 받았다. 그렇기에 최진아라는 여자를 친구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관계의 증명일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2년간 확인도 발전도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효인은, 다리를 꼬면서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아는 실소했다. 저 진지하고 애처로운 표정만 보면, 분명히 그 누구라도 스무 살 하고도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저 가출 소년더러 무어라 따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모르겠어. 너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린 적이 없으니까."
"그래?"
"그래서, 부끄럽지만… 네가 정의해 줬음 하는 생각도 있어. 너에게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 선을…"
"선? 우리 둘 사이에?"
"아직 모르겠어서 그래. 감히 너한테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감히'라. 최진아는 한숨을 쉬었다. 효인이 줄곧 진아에게 미안하다거나 혹은 과분한 일을 해 주었다거나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진아는 효인이 자기가 안고 가져가려 했던 작전에 나타난 난입자이자 동료였고, 결국엔 효인의 목숨도 몇 번 구했다. 그리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은 아마 그 도중에 진아는 스스로를 여러 번 부상으로 유도해야 했다. 전술 상의 문제지만 결국 누군가 자기를 위해 몸에 상처를 내거나 불을 지르면서까지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과분하니.
하지만 이런 태도를 즐기는 인간은 아마 지독한 사람일 것이지, 최진아 같은 인간은 아니었다. 진아는 자신이 효인의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이해하려 들다가 자책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애초에 누가 누구더러 너는 나에게 과분하다느니 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복수를 염원했던 사람들이고, 피에 가까운 사람들이며, 같이 싸웠던 사람이니까. 가까운 존재지 한쪽이 더 본질적으로 결백하지 않다. 그저 부서진 여자와 깨진 남자가 걸어갔던 행적일 뿐.
"너한테 나? 참 말은…"
물론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일기장 한 켠이라면 몰라도. 어떤 관계냐는 것은, 혈연이 아닌 이상 무한정의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단어니까.
"그냥 이렇게 하자.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를 같이 말하는 거야. 어때."
이효인은 그 말에, 잠시 눈을 내리깔다가 고개를 끄떡였다. 먼저 총대를 맨 사람은 역시 진아 쪽이었다.
"나 먼저… 그러니까, 우리가 알게 된 지 2년은 됐지. 그래서 말하는 건데 우린 일단 솔직히 아주 친한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두 번 다신 안 볼 사람도 아니었잖아?"
진아는 말했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찬 바람이 이따금 불어서 어느 정도의 냉정을 심신에 주입하고는 있었지만 이제 고작 그따위 기후가 해결해 줄 문제도 아닌 듯 싶었다. 취기 따위와는 다른 그런 감정. 이를테면— 고백.
"그러니까… 우리,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 그게 전부야."
"가까워진다고?"
"뭐, 업무 이외의 시간에 같이 있는다던가 그런 거. 간단하잖아… 넌 원래 혼자 다녔고. 그러니까… 뭐, 됐다. 그냥 간단하게 말하면, 연애 같은 거지."
그리고 침묵이 찾아온다.
바람은, 저 한강에서부터 달려와서 육지 쪽을 차갑게 쓸고 간다. 채 죽지 못한 낙엽이 겨울 바람에 뒹군다. 최진아는 마른 세수를 한다. 글쎄, 간단하게 말할 일은 아니었네, 하는 목소리가 비꼬듯이 머릿속에서 울린다. 실패했다. 반쯤은. 강한 열감이 얼굴로부터 손에 닿는다. 효인은, 잠시 굳었다가 이내 창백한 얼굴이 조용히 그러나 명백히 달아오른다.
"연애?"
효인이 읊조린다.
"그… 어… 잠깐만. 아무래도…"
그 순간 진아는 다시 고개를 든다. 눈에서 칠흑의 불꽃이 튀는 듯, 다시 그 표정은 당당하게 돌아간다.
"너, 나 안 좋아해?"
"아니… 어, 좋아한다 싫어한다로 치면 좋아하는 거지. 근데 음… 고백이었지? 그거."
"어."
효인의 눈이 커진다. 마치 진아를 서울에서 처음 난데없이 만났던 그날처럼.
"네가 좋아서… 신경쓰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리고 뭐, 네 대답도 듣고 싶어."
"그건… 고백을… 음, 근데 한 가지 알아 둘 게, 나 연애가 처음이야. 애초에 누굴 사랑한다는 것도 모르겠어. 평생 적백합교회를 쫓았으니까…"
"그건 상관없어. 내가 사랑하면 되니까. 너도 사랑만 하면 돼. 아무 것도 할 필요 없어."
진아는, 타개책을 찾은 도망자처럼 웃었다. 마치 당황을 극복한 듯이 경직된 의미의 웃음이었다. 그럼에도 후련했고 달가웠으며 또 당당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쐐기를 박을 때가 왔다는 듯이 진아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래서, 네 대답을 듣고 싶다고."
"……정말, 괜찮겠어?"
"야, 연애가 무슨 작전인 줄 알아? 대답해. 내가 좋냐 아니냐부터 시작해서…"
"난… 네가 위험해질 줄 알았어. 그래서 혹시 모르잖아. 그때 네가 피로 불을 태운 것도 나 때문이라… 나는 결국 네가 더 안전하고, 더 나은 사람이랑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모르겠어."
이효인은, 고개를 숙인다. 강한 정적의 요구를 무언으로 발산하는 듯. 새카만 머리의 하얀 얼굴을 가진, 검은 셔츠를 입은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왼쪽 눈으로부터 아스라이 하얀 빛이 새겨져,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효인은 울고 있다. 정말로, 처음 적백합교회 일당을 붙잡았던 그날처럼. 진아는 다가가서 효인의 손을 잡는다. 차가운 여자의 손이 차가운 남자의 손과 닿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진아는 알 수 없지만 결국, 남자는 현재를 살기로 결심했으니 앨범 밖에선 슬프기만 한 게 아님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 몇 초가 흐르고 효인은 말한다.
"널 좋아했어… 그때 모든 게 다 끝난 이후로. 그냥 이 년간 그렇게 생각했어. 근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진아는 효인의 눈물을 닦았다. 상기된 얼굴에 차가운 손이 닿자, 마치 평형 같은 감각이 맞닿았다. 차가운 온도의 터치. 눈에서 흐르는 창백한 빛을 닦는 행위. 그런 아픔에 있어 여자는 다시 한 차례 오지랖을 부리기로 한다.
"어떻게 해야 하다니. 넌 그냥 있으면 돼. 믿고, 현재를 사는 이효인으로."
"그렇게 되면…"
"넌 내 남자친구가 되는 거고. 오글거리지만 이게 방법이니까… 고개 들어. 눈물 닦고."
효인은 눈을 뜬다. 짠물이 빚어낸 흐린 시야가 이내 찬바람과 진아의 낮은 말로 벗겨지고 나면, 이제 효인은 자신들이 이내 파도치는 강이 보이는, 어느 길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한강의 검푸른 물이 거세게 뒤채고 바람은 불며, 하늘이 푸르게 펼쳐져 땅에 닿으려는 경계 위에 세워진 높다란 빌딩들이 보이는 곳. 바야흐로 서울의 대동맥에 온 것이라고. 효인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다시 커진다. 바람이 분다. 가슴이 가볍게 뛰면서 열이 심장으로부터 퍼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결국에는 이 강을 최진아와 함께 온 것이다. 한때는 친구였고 한때는 전우였다가 이제는 반쪽이 되었노라고 생각하면, 마치 원래부터 있던 절취선처럼 심장은 뛴다.
"그럼 뭐, 뻔하긴 한데… 오늘부터 1일인가 하는 그거지?"
진아는 웃었다. 그 웃음이, 오래 전 들었던 그 웃음처럼 퍼진다. 상쾌하고 억압되지 않은 불꽃 같은 웃음이 커져서 마치 돌개바람처럼, 그리고 웃으며 효인의 어깨를 몇 차례 치는 그 다정한 동작처럼 퍼져나간다. 효인 역시 웃는다. 비록 울다가 웃은 터라 표정은 묘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해보면 오늘 만큼 기쁜 날도 인생에서 몇 없었다. 자유로운 사람. 자비롭고, 또 다정하며 강하고, 불을 닮은 사람. 그 사람이 오늘부터 옆에 있을 거라는 생각. 그 생각 자체가 애당초 꿈만 같아서 효인은 웃는다.
겨울은 빨리 해가 지고, 또 어두워지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넘엉가는 중이다. 진아는 밀려오는 찬바람에 옷깃을 세웠다. 하여간,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냉정을 잃어버릴 일만 있었다. 그래서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결과 말고는. 고백은 생각보다 성대하게 망쳤고 인과마저 뒤엎어 버렸지만 결국에는 결과만은, 그것만은 좋았다. 어쩐지 밤을 몰고 오는 남서풍이 지독하게 얼굴을 훑고 지나가서 진아는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울다가 웃는 것만큼 초라한 일도 없겠지만.
E: 그리고 삶이
들이닥칠 것이다.
저녁의 강은 아름다웠다. 노을을 그들은 한참 바라보았다. 붉은 색으로 저무는 해가 다시 한 번 효인의 몸 전체를 선명한 적색으로 물들이는 듯 했다. 검은 옷 덕에 그리 깊게 물들지는 않았건만, 효인은 적백합교회를 상기했다. 붉은 색. 피. 주홍색. 한때는 피가 정말로 무서웠고, 불도 두려웠으며, 적색을 혐오했다. 그러나 진아가 피웠던 불과 피의 마법을 회상해 보면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운 좋게도 극복할 수 있었던 공포로 보이는 것이었다.
윤슬이 주황빛으로 물들고 분주히 차량들이 움직이던 때. 어느새 저녁은 찾아왔고, 이제 밤이 닥칠 참이다. 진아는 효인을 곁눈질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오래 되었다. 이 년. 그동안 일터였던 제145K기지 역시 변했다. 기지 사상 최악이었을 격리 파기. 세상의 끝을 노래하는 악기들. 그리고 하고 많은 자잘한 변화 속에 누군가는 기지에 왔고 누군가는 갔다. 그리고 둘은 그 중간에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삶은 이어질 것이다. 애당초 당연한 일이다. 둘 중 누구도 삶을 포기하진 않았으니까. 대신 복수와 작전이라는 동의어를 가지고 부서질 듯이 살아갔을 뿐이지. 최진아는 세계 오컬트 연합에서 일하던 자신을 기억했다. 그때의 생기 없는 무력과 반복되는 마술의 결핍은 마침내 모든 동료들이 기계 나비에게 죽으면서 끝났고 이제는 이렇게 사랑하는 남자와 마술 같은 태양의 빛을 보고 있다. 진아는 눈을 감았다. 효인을 앞으로도 걱정할 것이고 사랑할 것이며 어쩌면 가출했다 귀가 꼬집힌 채 끌려 들어온 애처럼 대할 것이지만 그래도. 상호 간의 사랑이란 달콤한 법이었다.
갈매기 몇 마리가 하늘을 스쳤다. 바다에서나 볼 법한 새들이 강을 날고 있다. 효인은 눈길로 저 먼 하늘을 좇았다. 낯선 것을 조각해놓은 듯한 모습. 효인처럼. 이십 년 넘는 삶이 적백합교회의 칼로 시작되고 칼로 반환해서, 그동안 인생의 모든 다른 요소들— 로맨스 영화나, 수다나, 고된 업무가 끝난 후의 술자리나. 그런 것들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거나 유리컵을 엎어 놓아 만든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제 삶이 앨범 밖에서 시작된다면 이효인 자신도 그런 것들을 보고 멀리서 슬퍼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고 있다.
"우리."
최진아가 입을 열었다. 가볍지만 진지한 목소리. 평소의 그 어투였다.
"하나씩 알아가자.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도, 좋아. 기다리고 있었어. 이런 거…… 커플끼리 하는 거."
최진아는 피식 웃으며, 무슨 이런 걸 기대했대, 하고 읊조렸다. 효인이 어쩌면 생각보다 더 과거부터 이런 행위를 기다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건 한참 후 밤이었으니 지금에서는 딱히 의미 없는 혼잣말이었다.
"그럼 뭐부터?"
"글쎄… 잘 모르겠지만 보통 좋아하는 걸 공유하거나 그렇지. 뭘 좋아하지? 우리는. 주홍왕 이야기 말고 좀 더 정상적인 걸로."
진아는 주변을 힐끗 보면서, 접근하는 사람이 없는지 본능적으로 살피고는 웃었다. 효인 역시 그랬다. 물론 재단 위장회사가 바로 근처지만, 어쨌든 낭만적 시간에 다른 것을 마주해 줄 여유는 없었으니.
"노래 어때?"
"노래…… 노래 좋지. 누구나 노래 안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 새로 봤어, 뭔가… 대화를 이끌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효인은 눈을 감은 채 따라 웃었다. 진아는 속으로 나름 놀란 눈치였다. 긍정적인 의미로, 이제 효인 역시 무언가 거대한 세상에서 분리된 인간은 아닐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정말로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나 먼저 할게. 데이비드 보위 노래 좋아해. 잔잔한 거로…… 예전에 많이 들었어."
"외국 노래 좋아하는구나. 좀 의외다. 너처럼 당당하고… 뭔가 활력 있는 사람들은 아이돌 노래 같은 거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내가 그런 인상인가? 글쎄, 뭐…… 너는?"
효인은 잠시 쭈뼛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노래를 잘 못 듣기도 하고, 그렇긴 하지만 일단 좋아하는 노래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 잔잔한 노래 좋아해."
"너도 의외다. 뭔가… 아닌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최진아는 미소를 지었다.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잔잔하고 쓸쓸한 사색을 이효인에게 대비하여 보니 그 순간 선홍색 가을에 홀로 서 있는 남자가 생각나서 놀라울 정도의 비슷함을 느꼈다. 효인의 머리카락이 바람으로 인해 헝클어졌다. 진아는 이를 다듬어 주고는 말했다.
"그럼… 그거 불러 줘. 기지 돌아가면."
"어?"
"나도 불러줄게. 보위 노래."
효인은 잠시 굳었다가 이내 난간에 턱을 괴고 미소를 지었다. 제145K기지로 돌아간다는 건 아마도 휴가가 끝나고 삶이 시작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효인에게 결국 제145K기지는 재단에서의 삶의 전부였으니까. 그러므로 지금과 같이 서울에서 낯선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 강과 하늘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노을을 보는 것은 마치 비현실의 일각과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지금 순간을 되도록이면 직면해두어야 하는 것이다. 삶이 닥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에.
"그럼 다음 건?"
효인은 조용히 묻는다. 옆에서 진아는 연신 미소를 짓고 있다. 뺨이 추위로 발갛게 상기되고, 코끝이 붉어져도 결국에는 외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그러게, 음악이라는 주제보다 낭만적인 게 없네. 패션이야 뭐 우리한텐 의미 없고."
"아니면 계절은 어때."
"난… 계절은 다 좋아. 아니면 다 싫을지도 모르지. 이젠 겨울에 더 추억이 많기는 하지만."
"나도 그래. 따지자면 물론 가을이 좋기는 하지만, 그날그날 다른 것 같기도 하고…"
효인은 웃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좀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
"응?"
"생각해봐도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되게, 낯선 일인 것 같아."
효인은 통감했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공백은 거의 십 년간 있었다. 중학생 시절 조부모가 죽은 이후에 그 공백 속에서 살다 보면 사무치는, 거친 외로움이 닥치는 법이었다. 그때는 그게 외로움인지 잘 몰랐겠지만 한 번 이렇게 최진아란 여자를 사랑하다 보면 그걸 알게 되고, 마치 긁힌 상처를 인지하는 순간 아픔은 시작되듯이 지금부터 아마 그때의 외로움이라는 것을 간혹 생각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죄다 과거로 치부 가능하다는 것만은 정말 달콤했다.
"그렇지. 뭔가… 처음이야. 모든 게. 고백하는 것도… 단 둘이서 뭔가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리고 좋아.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 같아서."
"그것도 동감."
이런 면에서는 제145K기지라는 삶으로 돌아갔을 때, 사랑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리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비록 벚꽃도 유원지의 매력도 반감되는 죽음의 12월 한가운데에 있지만 찬 바람을 같이 맞아 줄 사람이 있다는 것 역시 정말로 상당한 행복이 아닐 수 없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그게 반복되면 이제 새해가 올 것이다. 이제 미래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과거가 아니라.
류혜숙은 최진아를 서울로 보내며 '145K기지식 농담 같다'고 했다. 그때는 그 상황의 모순성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애초에 사실 이미 혜숙은 두 남녀 사이의 긴장을 완벽히 이해했기에 충동질했을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항상 제145K기지식 농담이란 삶과 과거에 대한 자질구레한 접목이 아니던가.
천천히 지는 해가 은빛과 청색의 빌딩 아래로 지면서 다채로운 절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황금빛과 주황색이 섞인 하늘이, 뜬구름을 삼키듯이 빛나며, 갈매기들은 그 물감 같은 유쾌한 혼란의 아래를 가로지른다.
사랑이란 상태이며 장소일 리 없다. 밤이 한강에 찾아오기 전에 야외를 떠났다. 그리고 이윽고 재단 위장회사 옆의 안전가옥에서 밤을 보내기로 한다. 밤은 언제나 동등하고 평등히 내린다고는 하지만 서울의 야경이란 감당할 수 없는 성단과 별자리들의 연회 같았으니, 효인은 이를 창문으로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데이비드 보위 노래를 듣는다. 잔잔한 어둠 속에서 한 번도 듣지 못한 목소리가 울리면, 효인은 이 노래가 좋든 싫든 결국엔 좋아질 곡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마도 옆방에 있을 그 여자도 지금 노래를 듣게 될지도 모르고.
효인의 마음은 고작 희미한 웃음 가지고는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곧이 곧대로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도 명쾌한 답안일 것이었다. 가면보다는 더욱.
어둠 속에서 남자는 리모컨을 쥔다. 가늘고 흰 손이 검은 리모컨을 쥐고, 버튼을 누른다. 방이 이윽고 텔레비전의 빛깔로 환해진다. 텔레비전에서는, 로맨스 영화를 방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제145K기지 휴게실에서도 종종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는 방영했지만 사실 남들에겐 웃음거리였으며 효인에겐 별세계 이야기였다.
로맨스를 정말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그랬더라면 최진아에게 그 이전부터 호감을 갖지도 못했을 것이며, 기지 서버 인공지능 이상의 상호작용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기억 저편의 부모가 자신을 낳은 이유도 몰랐을 것이다. 따돌려지는 기분, 소외되는 기분, 그저 세상에서 열넷 짜리 가출한 중학생으로서 비를 맞는 기분이 어렴풋이 있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속 남녀가 입맞춤을 한다. 정적.
그리하여, 사랑이라는 개념에서 멀어지다 보면 머릿속으로나마 자신을 낳은 두 사람이 언젠가 사랑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얼굴도 직접 본 적 없지만 어쨌든 그게 기본 골조였다. 로맨스, 장르와 대중의 경외를 받는 가장 숭고한 클리셰에게 소외감과 두려움을 느끼다니. 효인의 세상은 거기서부터 망가졌을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에야 큰 의미 없는 것이다. 로맨스는 장르와 대중의 경외를 받지만 지금은 무려 그 이효인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그럼 최진아도 로맨스 영화는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효인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세상을 사등분하여 춘하추동으로 나눠 보면 아무래도 그 여자는 봄과 여름의 모습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겨울과 가을이 유독 어울리는 사람이므로 쓸쓸한 느낌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할지도.
그렇다고 미래에 볼, 봄과 여름의 최진아를 보지 않겠노라는 말은 아니다. 사복 잠입으로 청바지와 반팔 셔츠를 입은 키도 팔다리도 긴 갈색 머리의 여자를 상상하면 효인은 그저 희미한 웃음과 함께 제 얼굴을 가리고픈 애정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감정이 고백 받았다고 무에서 유로 치환될 리 없다. 그 전까지는 고마움, 경외, 아득함, 미안함 따위의 감정이었던 것에서 분화했던 것일 테다.
"…최진아."
효인은 혼잣말을 한다. 기쁘다. 삶의 한 조각을 떼다가 이렇게나 다정하게 낭비할 수 있다니. 저 벽 너머에 최진아가 자고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달콤한 오개념 같고, 그러므로 꼭 작전 중 실패처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영화는 끝을 향하고 있다. 재밌게도 영화에서 애인끼리 싸우는 기간이 늘어날수록 끝은 달아지는데, 마음을 확인한다는 것. 긍정적으로 양측이 서서 첨예한 대립으로 마음을 알고 싶어한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물론 최진아와 이효인이 싸운다면 이효인은 그날 말 그대로 불이 붙은 채 쓰러질지도 모르는 것이고. 둘 사이에선 그 힘과 의지력과 반발력이 2년간의 숨바꼭질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순식간에 끝나버리고 엔드 롤이 나올 때 쯤 효인 역시 등을 기댄 채 어중간한 자세로 잠이 든다. 잠에 빠진 후 단 몇 분 후 창밖을 하얀 눈이 적시기 시작한다. 그 눈은, 새하얀 재처럼 몰아치면서 바닥을 적시고 공중의 어둠을 번개처럼 찢어 놓는다. 아마도 길게 내릴 눈은 아니다. 심해에서 내린다는 해중설처럼 덧없이 쌓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지 않을 것이다. 삶으로 돌아갈 때 얼어붙은 백색이 처음 만나는 것이라면 잔인한 현실이니까. 버스가 정읍까지의 여정을 시작하려 할 때 두 사람은 미끄러져 돌아갈 필요가 없으니까.
2022년, 두 사람은 1년 만의 포상휴가를 받았다. 그리고 서울에서 정읍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지독하게 긴 여정이었다. 진동이 그 작은 세상을 쥐고 있다가 덜컹였다. 버스 안의 공기는 건조했고, 밖은 바람이 불어 버스를 맹렬히 추격하는 듯 했다. 도로마다 얼어붙거나 눈이 쌓인 곳은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이, 버스 좌석에서 랑데뷰를 나누다가 또 낮잠을 자고, 내려서 제145K기지로 가는 길에 직면했을 때는 눈이 온 산을 이미 덮은 채였다.
그들이 서울로 향했던 동안 제145K기지 주변에는 소복히 눈이 쌓여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하얀 세상이 펼쳐진 것이었다. 최진아는 눈 위를 걸었다. 옆에 멀끔한 길이 있음에도 눈을 밟으며 걸어간다는 것은, 여유의 표상이었다. 최진아는 그의 옆을 걸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야, 이효인."
"응?"
"류혜숙 대원님이 나보고 너 잡아오라 시켰던 거 알지."
"아니? 전혀…… 몰랐는데. 이상하진 않아."
"그분 성격은 알아주니까. 뭐… 이제 보면 이미 대원님이 우리 사이 눈치챈 것 같기도 하고. 그 긴장을 파악하는 힘이라는 게 있잖아."
"그럴 것 같기도 해. 소문은 안 났으면 좋겠는데."
"그러게."
공기는 차가웠다. 눈발이 날리고, 산새가 눈 쌓인 소나무 위로 몸을 내던졌다. 제145K기지까지 단 백 미터. 그리고 생각해보면, 류혜숙이 말했던 대로 성탄절까지 고작 열두 시간. 어쩌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기지 사람들에게 예쁘게 싸맨 기화하는 폭발물을 주는 느낌이 들어 즐거웠다. 진아는 묶은 머리를 뒤로 넘기고, 금방 차게 식을 땀을 닦았다.
"아마 내일 밤에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릴 텐데, 올 거지? 아니, 와."
"뭐…… 올 수 있으면. 물론 올 수 없으면 람다-7 사람들 중 아무도 같이 못 오겠지만."
"그렇겠지. 어느 변칙개체가 크리스마스 밤이라고 얌전히 쉬어 줄 리가 없으니까."
발자국 소리가 고요한 산을 울렸다. 염원, 그리고 고백의 마음. 어쩌면 현실의 골조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지고 변형한다는 재단 과학적인 대외비 사항은 제145K기지의 삶을 지독하게 따라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밤까지는, 봄의 격리 파기를 인고한 제145K기지에서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F: 앨범에 대해서
제145K기지는 기본적으로 겨울에 적막하다. 기지를 둘러싼 수림의 잎은 떨어지고, 연못은 얼어붙으며, 격리 중인 개체 일부는 인공 월동 상태로 돌아가고는 한다. 유령들은 밤이 긴 겨울을 선호하지만, 그마저도 종종 과도하게 긴 밤에 길을 잃는다. 그러므로 웬만해선 시끌벅적한 일이 일어날 리 없다.
그래서 어떤 외향적이고 업무에 지친 인간들이 만들어낸 관습이 바로 크리스마스 파티였을 것이다. 분명 조선은 성탄절을 쇠는 국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마 서양 기지에서 살다 온 어느 유능하고 다채로운 인간들이 이런 영역의 불씨를 가지고 와 정읍의 기지에 박아 두었을 것이다. 물론, 격리 파기 사건 이후 웬만한 행사의 흐름은 지독히 꺾였다.
그리하여 2022년에는 크리스마스 파티의 단 한 글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기실은 적막했다. 제145K기지 기동특무부대들은 지쳐 있었다. 일 년을 버텨 온 대가였다. 물론 람다-7우 오랫동안 말살당하거나 해산되는 일이 없이 유지되어 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행복의 징표일 수는 없었다.
류혜숙 대원은 다리를 꼰 채 커피를 들이켰다. 옆에는 조승태 팀장이 졸고 있었다. 물론 위계질서의 이름 아래 적합한 풍경은 아니었으나, 결국에 모두 지쳐서 주체와 객체마저 의미가 없어져버리면, 이렇게 되는 것이었다. 문득 두 사람 생각이 났다. 이효인과 최진아.
돌아왔다고는 했다. 하나는 유능한 추적 전문가이고, 하나는 전술 기적사니 위험에 처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지에 돌아왔다는 문자는 받았지만 본 적은 없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으레 제145K기지의 클리셰대로 기지 앞 부지까지 나가서 잘 돌아왔다고 해 주었을텐데, 한동안 람다 7 부대는 요주의 인물을 추격하느라 바빴으니까.
그게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 하고 혜숙은 생각했다. 어느새 이로 빈 종이컵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긴장인지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치 가설을 세우기 직전의 기록자 같은 마음이었다. 혜숙은 뭔가 좋은 결과가 있으라고 진아를 설득한 것인데, 아니라면? 그게 모두 처참한 결과만을 낳았다면?
가설 하나. 정말로, 옆에서 졸고 있는 현장팀장이 우려한 바와 같이 이효인은 뭔가 적백합교회나 주홍왕을 쫓아 서울로 갔다는 것이다. 서울은 변칙 활동의 중심지다. 셀레스트와 같은 단체나, 명천구와 같은 요주의 위치 내에서 어떤 주홍빛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효인이 아직도 증오에 차 있다면, 이 진실에 혼자 맞서 싸웠을 것이고, 지든 이기든 최진아가 이를 발견했을 것이다. 가장 최악의 가설이었지만 신빙성은 없었다. 서울 기지로부터의 회신이나 발신, 이효인의 부상, 혹은 특정 요주의 단체 출몰 같은 긴급 신호 역시 싸그리 없었기 때문에 분명 불안에 가까운 생각이다.
가설 둘. 최진아와 이효인의 사이가 굉장히 틀어졌다. 가설 셋. 둘의 사이가 굉장히 틀어졌는데 이는 이효인이 적백합교회나 주홍왕을 쫓아 서울로 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다치거나 책임질 일은 없지만 좋은 일일 리는 없는 가설들이다. 동료로서 돈독해지라고 제안한 것인데 지금 보니 타지에서 대판 싸울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 경우 이효인은 그나마 있던 인맥이 끊긴 것이고, 기동특무부대 람다-7의 작은 조각 하나가 뭔가 굉장히 불안정한 상황이 될 것은 뻔했다. 그렇다면 혜숙은 자기가 한 자신만만한 제안을 감당할 수 있을까?
"에이 씨….."
그는 머리를 긁었다. 그 움직임에 조승태 현장팀장이 눈을 뜨더니, 마치 허공을 노려보듯이 눈을 가늘게 감았다.
"뭐가 문제지?"
"이효인 요원 말입니다."
"휴가에서 돌아왔다더니."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돌아왔다고 한지 벌써 다섯 시간인데… 아직 코빼기도 안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 기지가 12구역만큼 넓은 것도 아니고 손바닥만한 곳인데."
조승태는 한숨을 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휴가를 갔다 왔으니 피곤하겠지. 그게 아니라도 어떤 변화를 겪었으니까……"
"저는 설마, 둘이 싸웠거나 아니면 나쁜 일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둘 다 누구랑 싸워서 상대를 다시는 안 볼 사람은 아니고. 최진아 요원이 특히 그렇지… 이 요원을 끔찍하게 아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휴가 겸 추격도 찔러 본 거고 말입니다."
"충분히 다정한 사람이니까. 내 동생도 저 반만큼만 속이 깊었으면 좋으련만."
남자는 스트레칭으로 목을 꺾었다. 우두둑 하는 소리는 단말마로서 그들이 겪는 피로의 표상을 나타내는 듯 했다. 혜숙은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잇자국이 어느새 외피에 가득 박혀 있어서, 여간 흉물스러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몸을 일으켰다. 어쨌건 업무 도중이 아닐 때 찌그러져 있는 것보다야 몸을 움직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충실하였다.
그때, 그는 입구 쪽에서 막 들어오던 다른 여자와 마주쳤다. 직속 후임이자 역시 람다-7 대원인 황수경이었다. 그는 동료 둘보다 더 깨끗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는데, 이는 업무가 끝난 후 한 차례 씻었다는 표상으로서 누적된 피로는 현장팀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류혜숙은 자리를 가볍게 비켜서 지친 자가 소파에 앉을 수 있도록 배려를 베풀어 주었다.
"죽겠다."
황수경이 허(虛)를 토해내듯이 탄식했다.
"혼자만 임무 나갔던 거야?"
"예. 어떤 단체가 광흥전자 지점을 기습했다길래, 지원으로 좀 멀리까지요. 근데 뭐…… 좀 일방적으로 털렸죠."
"어디가? 그 단체가?"
"아아뇨. 저희가요. 그 단체라는 게 하필 그…… 유령 집단이여서. 조요의 어쩌구 하는 걔들요. 그래서 그쪽 대응팀 올 때까지 계속 밀렸죠."
"하이고. 현장 요원 애들이 보고를 잘못 올렸나."
황수경은 손가락을 꺾으며 한숨을 푹 쉬다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몸을 일으켰다.
"효인이는요?"
"이효인 대원? 돌아왔지."
"어딨는데요? 또 걱정인데… 뭐, 걱정을 항상 시키는 애긴 한데 최진아가 갔으니까 괜찮겠지."
"어딨긴."
이번에 말을 받은 것은 조승태의 낮은 음성이었다.
"기지에 있겠지. 좀 있다가 얼굴 비출 거다."
"뭐….. 그렇겠죠."
혜숙은 헛기침을 했다. 현장팀장이라면 몰라도, 황수경은 자신이 엄숙한 표정으로 최진아에게까지 서울행을 종용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이런 데서 개인적 오지랖이 발동하는 것이야말로 피해야 할 습관의 일순위임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제145K기지식 농담이라고.
제145K기지식 농담은, 혜숙이 단순히 안심시킬 겸 한 말이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사실 너무도 단숨에 튀어나온 말이었기에 본인도 알지 못했다. 어림잡자면 삶에 대한 농담, 혹은 사랑에 대한 농담이겠지만 어쩌면 재단식 유머의 상징인 불합리와 부조리의 농담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를 총집합한 것이 제145K기지이고, 기지에서 근무하는 것이 곧 삶이라면, 삶을 이어나가는 행위라면 아무래도 말이 된다만, 어떻게든 실제로의 타개책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의미 없을지도 모른다. 농담이 다 그렇듯이.
"그래서…… 정말 크리스마스 같지 않은 밤이네요."
"크리스마스가 뭔지도 잊어버리겠다."
수경의 말에 혜숙은 대답했다.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린다는 소문은 매해 있었지만, 실제로 열릴 리가 없는 것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내년에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고 보니 최진아를 보낼 때 이렇게 말했다. '곧 12월 25일이니까, 그때 한 번 제대로 챙겨주려고.' 이효인을 두고 한 말이었는데, 챙겨주긴 커녕 다들 챙김을 받아야 할 몸 상태가 아닌가.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22년이란.
밖에는 눈이 한창 내렸다. 산을 덮고 연못을 덮는 눈은 밤새 유지 보수 인원들이 기지 앞을 치우는 원인이 되었고, 이쯤 되니 오가는 사람들이 잘 왔을지도 걱정이 되는 백색 계절의 잔해로 남게 되었다. 불꽃을 닮은 사람들이니만큼 어쨌건 잘 살아가겠지 싶었지만, 혜숙은 아직도 몇몇 건에는 납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똑똑똑.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혜숙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굳이 여기에 찾아올 사람이라면 부대원일 텐데, 또한 부대원 중 굳이 문을 벌컥 열지 않고 노크를 할 사람도 몇 없다. 그렇다고 키카드로 인증을 하고 여는 편리한 수법도 아니다. 지친 탓인지 셋 중 누가 걸어가 문을 열어 주겠느냐 하는 긴장이 공기에 맴돌았다.
"혹시."
황수경이 건조한 웃음을 지었다.
"연구, 내근 쪽에서 크리스마스 파티 하자고 부르는 거 아닐까요?"
"그럴 리 없다. 차라리 혼돈의 반란군이 문앞에 서서 노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조승태가 딱 잘라서 말했다. 황수경 역시 농담이었기에, 원하는 반응을 얻고선 키득거리며 웃었다. 크리스마스 밤에 문 앞에 서서 두드리는 방문자라면, 기독교적 천사나 유명한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을 떠올리게 했다. 그럼 문 앞에 있는 것은 스크루지 영감을 보러 온 크리스마스 유령이겠고… 셋 모두 유령을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지금은 더욱.
"내가 열지."
조승태는 몇십 초의 긴장을 버티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리곤 성큼성큼 걸어가, 둥근 문고리를 쥐었다. 그리고는 돌리고 열어젖혔다. 남자의 말마따나 정말 혼돈의 반란군이었다면 보다 끔찍한 일이 일어났겠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진갈색 머리를 묶어 내린 키 큰 여자였다. 그는 검은 셔츠와 검은 청바지를 입었는데, 이는 여자로 하여금 정말로 크리스마스 유령처럼 보이게 하는 패션이었다.
류혜숙은 그의 얼굴을 보자, 긴장했던 입꼬리를 홱 올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최진아 요원."
"안녕하세요, 다들."
갈색 머리의 여자는 모두에게 인사하고는, 들고 있던 것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콜라 몇 병과 도넛 두어 박스였다. 가장 지쳐 있던 황수경마저도 반색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서울엔 잘 다녀왔어?"
"네, 수경 대원님. 춥더라고요, 여전히."
"하기야 최 요원은 21K기지 출신이긴 하지."
수경은 콜라를 종이컵에 따르면서 그럼 이게 크리스마스 파티인가, 하고 웃었다. 혜숙은 그에게 지긋이 눈길을 주었다. 이를 알아챈 조승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최 요원. 물어볼 게 세 가지 있는데, 대답해줄 수 있겠나?"
진아는 잠시 멈칫한 후,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떡였다.
"예."
"우선 하나. 우리가 사복 경찰 역할을 종종 하고, 복장 불량이란 개념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그 옷에 대한 것인데, 아직 대답하진 말게."
그 말에 두 여성의 눈빛이 최진아에게 집중되었지만, 꼭 저승사자처럼 어두운 패션이란 것 이외에는 무엇도 눈치채지 못한 황수경과 달리, 류혜숙은 눈이 커졌다.
"둘. 이효인 요원은 왜 서울에 갔는지, 셋. 이효인 요원은 왜 여기까지 들어오지 않는지 해서 총 세 개."
이 말이 끝나자마자, 복도에서 이효인이 들어왔다. 그 걸음은 평소보다도 느리고 조심스러웠는데 곧 이들 모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새카만 머리칼과 하얀 얼굴의 그 남자는 베이지색 셔츠와, 청바지의 표본과 같은 차림을 한 채, 한 손에는 간식 더미를 쥔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쯤에서, 모두가 특징적인 사항을 눈치챘다. 심지어 황수경마저도.
"그거…… 최 요원 옷 아니야?"
"맞네, 맞아."
"옷 바꿔입은 거야?"
그리고 일순간 침묵이 찾아왔다. 최진아는 크리스피 도넛을 하나 집어 베어 물고는 피식 웃었다.
"커플티 같은 거예요."
황수경은 몸을 용수철처럼 일으켰다.
"커플티는 커플끼리 입는 거, 아니…… 잠깐만."
류혜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웃었다. 그 소리가 경쾌하고 유쾌한 방식으로 소용돌이치면서 공간 전체를 울렸다. 조승태는 못 살겠다는 듯 단지 희미하게 웃었고, 오직 황수경만이 당황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됐어요. 이건 비밀."
최진아는 짐짓 능청을 떨었다. 이효인은 영 부끄럽다는 듯이, 아니면 이건 역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는 듯이 앉아서 볼이 상기된 채 고개를 숙였다. 그날, 일종의 크리스마스의 유령보다도 더 과도하고 갑작스러워서 역전의 부대원들까지도 눈치챌 수 없었던 이벤트가 한 차례 일어났다.
"그래서 세 가지 질문은 대답해드려야겠죠?"
"아니."
현장팀장은 말했다.
"이걸로 된 것 같군."
그리고 그들은 웃었다. 제145K기지는 삶의 비화이다.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갈 때, 삶을 이어나갈 때, 그리하여 미래를 생각할 때 어깨를 기댈 인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지 이효인은 깨닫는다. 피와 어둠의 바다를 건너면 눈이 쌓인 기지가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살아가면서 눈을 밟는 것은 제법 즐거운 일임을 천명하게 될 것이다. 최진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울리고 웃었다. 살가운 감촉이 전해지고 있다.
밤. 크리스마스의 하루가 저문다. 효인은 난생 처음 미래 어느 순간에는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려서 최진아와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다짐한다.
이효인. 과거를 살지 마.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다 끝나버린 일에 더 이상 어떤 시작을 바라지 마. 그냥 이 순간만 봐. 최진아의 목소리다. 그럼에도 정말로 인간은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다. 하지만 직면할 수는 있고, 그걸 어떻게든 참아내다 보면 앨범의 표지를 덮은 자신을 보게 된다. 앨범을 십 년 후에 펼쳐보면 단지 빛 바랜 사진들 뿐이다. 어느 해변, 유원지와 푸른 하늘과 맑은 구름, 무지개, 아름다운 사람들의 예쁜 웃음.
하지만 앨범에 결코 기쁜 것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기원이 되는 사람들의 죽음, 사고, 그러나 결국에는 앨범은 나아가고자 하며 팽창주의적인 그 날개를 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장을 어떻게 채울지를 결정해두어야 한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진아는 조용히 효인의 등을 감싼다. 어디서 다시 데이비드 보위의 곡이 들려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선홍색 가을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