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것들은

네온사인이 즐비한 거리. 커다란 남자가 두 팔을 펼친 광고판과 그 주위의 무수한 간판들 사이로 흐르는 물의 수면은 무수한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오사카의 도톤보리를 걷는 수없는 밤의 여행객 사이로 윤성재는 난간에 기대어 조용히 수없는 인파와 거리를 구경하고 있다. 방금 전에 본 거대한 게 간판에 비해서도 신기한 모습들이었다.

여행의 근간이 먹을 것이라지만 누가 초를 꽂아서 제사라도 지내줄 리 없으니, 윤성재의 여행은 이제 풍경만을 쫓아갈 모양새였다. 물론 계획에서 틀어진 것은 없었다. 만족스러웠다. 이국의 찬란하고 푸른 야경은. 이런 곳에 다른 사람과 함께 올 수 있었다면… 싶었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그 생각 속에는 또다시 그 사람이 있다.

고향의 눈 내리는 계절. 까만 머리카락의 눈부신 소녀. 이금희와 이런 모습을 보고, 관광지의 음식을 먹고, 전철을 타고 순환선을 내달려서 지구본 전체를 횡단할 수만 있다면 참 좋을텐데. 이제는 지나간 일이지만……

그런 꿈을 끝내자 다시 무수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여행지의 한복판. 세계 곳곳에서 모인 이들의 음성과 잡담, 웃는 소리, 셔터 소리. 행복한 소리의 총집합에 윤성재 자신까지 흐뭇해진다. 심야클럽의 설립을 직접 보았을 그 무렵에도 지금도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어울릴 수 있다면, 정확히 그 생각에 마음을 모두 쏟고 있다.

그런 날이 언제 올 것인가.

그 찰나, 윤성재의 귀에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무수한 술렁임의 파도에 섞이지 않는 어떤 가느다란 소리. 그는 풍경에서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가랑비처럼 얇지만 무거운 그런 소리. 너무나도 익숙한 가락이다. 유령에게는 너무나 익숙할 수 밖에 없는 감정적인 흐름. 왜 그러한 울음소리가 이곳에 왔을까.

성재는 주위를 살핀다. 붐비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단 한 순간 한산한 틈을 만든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또렷한 형체가 보인다. 한 남자아이가 인파의 중심에서 울먹거리고 있었다. 노란 반바지에 멜빵을 두르고 둥근 모자를 쓴 유치원생 정도의 아이였다. 울먹이는 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윤성재는 그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놀랄 정도로 서늘하고 강한 위화감이 윤성재를 덮쳤다.

눈이 마주쳤다.

방금까지만 해도 이런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온통 개나리 꽃처럼 노란 옷을 입은 꼬마가 그것도 한밤에 가까운 도심지에 홀로 울고 있다는 것을 성재가 놓쳤을 리 없다. 아무리 여행에 눈이 팔렸어도 그런 것조차 구별하지 못할 수는 없다. 적어도 구십 년의 눈치 속에서는 말이다.

아이가 울먹임을 넘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윤성재는 즉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누구도 아이를 돌아보는 이가 없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일에만 열중하고 있다. 사주팔자가 있다면 또다시 이 여로를 가만두지 않을 셈일까. 성재는 성큼성큼 다가가 자세를 숙이곤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니? 혹시 길을 잃은 거야?"

말은 그리하면서도 성재의 표정은 굳었다. 이 아이에게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몹시 익숙하고 차가운 망자의 기력만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도. 아이는 천천히 눈물을 머금은 표정으로 성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쌓인 것들이 폭발하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황급하게 등을 토닥이던 성재는 그제서야 또 다른 위기를 깨달았다.

이 아이와 자신의 모국어가 다르다.

"……아."

1950년 사망한 한국인 윤성재는, 결국 아이가 겨우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1시간도 안 되어서 다시 만났네요."

난감하다는 미소를 지은 사토 나나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웃었다. 성재 역시 머리를 긁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반박을 할 방법도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한편 꼬마 아이는 불안하다는 듯 옛 교복을 입은 남자와 이상하리만치 흰 기모노를 입은 여자의 얼굴을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사토 씨…"

"우리도 심야클럽이거든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는 말아요."

성재는 한숨을 삼켰다. 심야클럽의 동료가 있다는 것은 크나큰 위안이었지만 여즉 자신만의 책임은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계속해서 최전선의 일들에 뛰어들었다. 저번에도, 그 저번에도. 그리하여 이 책임을 외면하는 것도 뜯어내는 것도 불가능함을 안다. 그저 답습할 뿐이다.

한편 아이는 사토 나나에게 무어라고 말을 걸었다. 둘은 일본어로 무어라고 말을 주고받았다. 윤성재는 그들의 대화를 그 어느 때보다도 경청했지만 단어 하나하나만을 주워섬기기에도 바빴다. 결국 청해의 경험은 포기하고 둘의 표정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끝을 내야 했다.

"사토 씨, 뭐라고 합니까?"

"한참 울었는데 아무도 안 와서 무서웠다고 그러네요. 윤성재 부장님이랑 말도 안 통하고…… 거기다가, 음."

사토 나나의 표정이 어두웠다. 윤성재 역시 직감적으로 거기서 나오는 불길함은 알아챌 수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여자는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누나가 아픈데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누나요?"

"글쎄요. 이 아이가 죽고 나서 쭉 누나를 지켜봤던 것 같은데……"

윤성재는 고개를 갸웃했다.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아마도 이 아이는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었을 것이었다. 그러다가 가족들, 그 중에서도 누나의 곁에 붙어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기자 자기 나름대로 도움을 구하러 뛰쳐나온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비어 있는 조각이 아직도 많다고, 생각하던 성재를 두고 다시 아이는 사토 나나에게 말을 걸었다.

"음…… 윤성재 부장님."

"예?"

"이거 아무래도, 그 누나라는 아이가 아프다는 건 예삿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사토 나나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았다. 윤성재 역시 눈을 내리깔았다. 오직 둘의 사이에서 한 아이만이 오래된 두 넋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이의 누나가 심하게 아픈 건, 어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때문이라는 것 같습니다. 더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감히 추측하자면—"

윤성재는 다시 한 번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질병을 가져다 주는 여자. 분명 자신히 알고 있는 존재다. 일본 정부의 경시청 공안부 특사과 끄나풀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들었던 그 존재. 키타구내 이상병원체 감염사건의 어느 주범. 그 그림자를 이렇게나 우연하고 갑작스레 마주할 줄이야.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사람이군요."

"아마도. 너무 많은 정황이 일치해요. 윤성재 부장님도 아시겠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성재는 한숨을 쉬었다. 심야클럽 일본출장부가 얼마나 여력이 있을지는 모른다. 게다가 일본 열도는 정상성 유지기관의 끄나풀이며 다른 단체들이 가득하다. 재단이 있고, 세계 오컬트 연합 극동지부의 본체도, 공안부 특사과도 있다. 다른 이름 모를 무수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 이런 일을 겪은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떻게 잘도 모든 것을 잊고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이미 성재는 스스로 현장에 다시 몸을 던진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단지 예전처럼 모국의 어딘가냐 아니면 지금 외국의 이곳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특사과가 흘린 정보는 우리 다 알고 있으니까, 저도 혼자서 추적해보겠습니다."

성재의 말에 사토 나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떡였다.

"찾아가실 생각인거죠?"

"예. 직접 만날 예정입니다. 이건…… 스스로도 분명 자기를 깎아먹고 있는 거니까요. 재단이 개입하면 가차없겠죠."

"잘 될까요?"

사토 나나는 말했다. 윤성재 역시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었다. 원귀와 대면해서 설득한 적은 꽤나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향이 꽤 다르다. 역병신. 역귀. 자신의 원한을 휘둘러 날카롭고 치명적인 병을 앓게 하는 부류와는 아직 스스로 상대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앞서 이미 되새겼듯이 다른 생각의 여지가 없다.

"해 봐야죠."

그렇게 생각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는 없다. 비록 계획에서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지만, 이미 인생에서 계획대로 된 것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 순간마다 마음먹었으니까. 옳은 쪽으로 가기로.




오사카시 내 어느 병원

밤은 길었다. 여즉 아침은 꿈을 꾸고 있었다.

그 빛은 병원의 북방, 화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치 안개처럼 퍼져 나갔던 그 희미한 형상은 간혹 번쩍이는 번개처럼 곳곳에 나타났다. 마치 아주 천천히, 그러나 조금씩 확실히 그 거리를 좁혀 오는 어느 밤중의 새처럼. 여름에 차가운 공기를 끌어들인다.

병원 옥상에 내려앉은 그 실체는 몸을 숙였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면서 조심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병원이란 본질적으로 유령이 있어서 좋을 곳도 아니고 동시에 무언가 괴담으로 고이기 쉬운 불온하고 슬픈 공간이다. 만국의 병원은 모두 그럴 것이었다.

윤성재는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병원 앞에 차량은 많지만, 경찰차가 둘. 정체 모를 승합차 하나. 혹시 공안과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쨌든 당당해서는 안 된다. 불가시한 존재가 얼마나 스스로를 지켜줄 수 있는지는 모르니까. 그러나 멀리서 단서를 찾는 것이야 충분히 가능하다.

눈을 가늘게 떴다. 도시 곳곳을 덮은 야경의 사이로 흐르는 무수한 길들이 보인다. 그리고 다시 그 풍경을 담아둔 채로 병원을 바라보면, 시드는 듯한 냉기와 함께 어느 공간에서 알 수 없는 영(靈)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한다. 창문으로부터 새어나오면서 촉수처럼 흔들리는 알 수 없는 그 탁류.

잔류사념이었다. 탁한 보랏빛의 이글거림으로 남겨진 저주를 윤성재는 유령 대 유령의 영역을 넘어 보고 있었다. 병실에 남겨진 그 사념이야말로 역병을 휘두르는 이질적인 권능의 그것. 윤성재는 한숨을 푹 쉰다. 확인했으니 이제 외면할 수는 없다.

윤성재는 눈을 감는다. 몸을 이룬 사취의 냉기를, 망령된 힘을 심장이었던 곳에서 집중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의 힘을 터뜨렸다. 수렴. 발산. 폭발의 끝에서 희미한 검은 섬광이 그림자처럼 터진다. 그리고 단 몇 초 안에 윤성재의 형체는 병원 안 복도로 이동해 있었다.

"……이런 것도 되다니. 좋다고 해야 할지……"

그는 조용히 혼잣말한다. 밝지만 창백하고 고요한 복도의 한켠에서 성재의 형상이 드러난다. 분명 윤성재의 힘은 2022년, 점점 여유가 생겼을 때 이후로 명백히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원귀가 지닌 강력한 권능처럼. 복잡한 일은 맞겠지만 그 근원은 참으로 알 수 없었다.

성재는 벽 안으로 몸을 조심스럽게 통과시켰다. 병원 전체에 이상한 기운이 퍼져 있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핏기 없는 벽지와 냄새가 섞이면서 오싹한 기분은 들었다. 아마도 죽은 자로서 가진 그런 기분일까.

감을 집중한다. 특이하게 이질적인 기운은 없었다. 공안부 특사과가 분명 환자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니 성재로서는 불편할 따름. 둘의 관계는 아주 위태롭고 느슨한 중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성재는 신속히 벽과 복도를 넘나들었다. 그러면서 창밖에서 보았던 기운을 좇았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했을 때.

그곳에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병원복을 입은 소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눈을 감고 가래 낀 숨을 내쉬는 입술은 파랗고, 볼은 열이 났는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윤성재는 천천히 방 안으로 발을 들이밀면서 손을 흔들었다. 서류 더미가 날아들어 CCTV를 가리자, 그제서야 그는 아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오늘 보았던 그 남자 아이와 닮은 얼굴에는 어두운 질환이 드리워 있었다.

"…….아…"

아이의 가늘게 떴던 눈이, 성재를 향했다. 순간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그를 보았다. 성재의 얼굴이 굳었다. 아이가 분명 망자를 보고 있다. 보이면 안 되는 자신을 열병 도중에 응시하고 있었다. 명백히. 그 눈동자에 모습이 비추이고 있는 순간이었다. 입술이 달싹였다. 윤성재는 애써 아는 일본어를 입 밖으로 꺼냈다.

"저는 윤성재입니다."

아이가 눈을 깜빡였다. 성재는 이마에 조심스레 손을 댄다. 냉기가 가까워지면서 열을 식힌다.

"할 수 있는 말은 없지만……"

성재는 생각한다. 심야클럽의 이념을. 모든 유령에 대하여 같은 사람으로서 대해야만 한다는 그 곧은 마음가짐을. 그리고 그런 마음가짐은, 다시 새로운 길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본 여행의 밤이 꺼져가고 있었다.




"이 근방에 한국어가 통하는 유명한 정보책이 둘 있어요."

새벽. 사토 나나는 손가락으로 '둘'을 만들어 보이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윤성재는 그런 그녀와, 그녀의 무릎 위에서 잠든 꼬마 아이를 바라보면서 경청을 시작했다.

"재단이나, 다른 기업 같은 것과 연관 없는 사람이요."

"확실히 그렇다면 괜찮겠군요."

성재는 고개를 끄떡였다. 나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그리고는 옷소매 안에서 사진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자신들이 있는 도톤보리를 찍은 조감도였다. 윤성재는 그 사진이 대체 언제부터 여자의 소매 속에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하나는 영매사 겸 브로커로 활동하는 남자고요. 하나는 음……"

여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하나는 썩 신용이 가지 않아서."

성재는 둘 모두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곳에 남겨 놓은 인맥이야 전무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연히 전자가 더욱 믿음직한 수식언이라는 것이야 천하 누구에게 따져보아도 당연할 노릇. 그러나 성재에게는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사토 씨. 분업하죠."

그의 담담한 말에 나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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