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내가 가장 추웠던 날은 태어나던 날이었다.
물론 알래스카는 말할 것 없이 가장 추운 주이다. 심지어 한여름에도. 난 겨울에 태어났다. 29년 전의 새해였고, 중고 픽업트럭 뒤쪽에서 어머니의 둔부로부터 인정사정없이 밀려 나왔다. 부모님은 제시간에 병원에 도착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계셨다. 어머니는 침착하셨다. 트럭 안에는 자리가 없었기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안아 들고는 눈 쌓인 화물칸에 눕히셨다. 차가움 덕분에 고통이 무뎌졌다. 20분 뒤, 난 내 아버지의 차가운 장갑 위로 미끄러져 나왔다. 내가 울자 눈물이 얼어붙었다.
생일마다 부모님은 그때의 사진을 보여주셨다. 아기였던 나는 아직 피에 젖어있었고, 눈송이가 몸에 내려앉아 있었다. 부모님의 작은 적과 백의 천사였다.
그러고는 밖에 나가 불꽃놀이를 하곤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 삶의 첫 몇 년 동안은 별일이 없었다. 갓난아기가 으레 그러하듯 기어 다니고 울고 트림하고 똥을 쌌다. 붉은 머리카락 다발이 머리에서 자라나기 시작했고, 알래스카의 끝없는 추운 날 때문에 실내에서 많이 놀았다. 나이를 조금 더 먹고는 말을 배웠지만, 말을 할 사람은 그닥 없었다. 아버지는 종일 일하시고 난 밤새도록 잠을 잤기에 우리 둘은 서로를 거의 보지 못하였다. 어머니는 내게 재택학습용 모듈 교재로 공부하게 하셨다. 예제가 깔끔하고 알차게 들어차 있었다.
그 교재는 내가 가진 최고의 놀잇감이었다. 부모님은 당연하게도 내게 컴퓨터 게임을 사주시지 않으셨다. 뇌를 썩힌다고 하셨다. 같이 놀 친구도 없었다. 인적 하나 없는 곳에 살았으니까. 어린아이였던 내가 시간을 보낼 유일한 방법이 그 학습지들이었다.
내가 7살이었을 때 어머니는 한 주 동안 병원에 가 있으셔야 했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동안, 아버지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집에서 나를 돌보셨다. 아버지는 재택교육 프로그램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셨고, 그닥 훌륭한 선생님도 아니셨다. 우린 별로 좋은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유치원 이상까지 모든 과정의 안내 책자 같은 교재들을 작은 교재용 상자에 깔끔히 정리하여 내 방에 넣고는 전적으로 내게 맡기셨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셨을 때, 그동안 난 2년 어치의 학교 교육을 끝마친 상태였다.
어쩌면 이것이 내 삶에서 가장 주된 교육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다. 날 천천히 인도하기보다, 어머니는 내 맘대로 진행하도록 두셨다. 어머니는 항상 위층 침대에 누워계시다가 나와서 빠르게 식사를 준비하시곤 하셨다. 그동안 난 아래층에 앉아서 학습 자료를 해치웠다. 초등학교 단계가 끝나고, 난이도가 높아질 즈음에 내 진행 속도도 더뎌졌다. 난 위층으로 올라가 어머니께 다 끝낸 학습지를 자랑스레 내보이곤 했다. 어머니께 했던 말들은 지금까지도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엄마 없이도 이렇게 잘 할 수 있어요!"
난 어린아이였다. 자기 집에서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라는 데에서 오는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나이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내뱉은 말들은 아주 고통스러운 것들이었다. 미소짓고 있는 빨간 머리 꼬맹이가, 제 엄마한테 엄마가 이젠 그를 느리게 만들지 않아 기쁘다고 말하고 있다. 엄마가 발목을 잡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엄마가 이제 종일 침대에만 누워있어 기쁘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어머니는 쉴 수 있게 되었다.
이듬해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빠르게 자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아버지가 날 돌보셨다. 여전히 난 아버지를 거의 보지 못하였다. 이따금 아침에 일어나보면 아버지는 이미 그 오래된 픽업트럭을 타고 일하러 가신 뒤였다. 난 내 교재를 풀어나갔고, 때때로 지식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새 교재를 주문했다. 13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컴퓨터를 사주셨고, 난 인터넷을 접하였다. 당시 네트워크는 막 태어난 상태였다.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나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지금이 훨씬 낫다. 그때 난 컴퓨터를 학습 용도 이외에 사용할 여지가 있단 생각을 하지 못했다. 배우는 건 재밌었기에 난 계속 읽었다. 내가 14살에 난 인터넷에서…다른 것들을 찾아냈다. 내 학습 내용 안에 성교육은 냉담하고 건조한 생물학 교과서뿐이었다. 급성장하는 넷은 내 교육 진로의 다음 단계였다.
내가 태어난 지 15년하고도 반년이 지났을 때, 난 마지막 학습지를 끝마쳤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를 기억한다. 낡은 종이에 애 같은 서체로 "축하합니다!"가 쓰여있었다. 내가 처음 학습지를 시작했을 때 부모님이 글을 써놓았다. 어머니의 필체를 알아보고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단다."
16살에 대학에 들어갔다.
뭘 하고 싶은지 아직 잘 알지 못했다. 수학과 과학은 언제나 괜찮은 선택이었고, 분명 언제나 쉽게 느낀 것이었지만, 그닥 열정이 있진 않았다. 그렇지만 난 모든 것에 큰 열정을 느끼지 못했기에, 잘 하는 것을 고르는 게 합당해 보였다. 내 선택은 물리였다.
앵커리지Anchorage에서 혼자 살아야 했다. 별 문제는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거의 항상 집에 혼자 있었으니까. 혼자 있는 일에는 익숙했다. 익숙지 않은 건 혼자 있지 않은 거였다. 날마다 집을 나와, 진짜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강의실에서 진짜 사람이 가르치는 강의를 듣는 일까지도. 필기하는 것 또한 익숙지 않았다. 한 일주일 정도 해봤지만, 곧 필기한 내용이 거의 무용지물이란 걸 깨달았다. 그 대신 처음부터 수업 내용을 암기했다. 종이에 기록한 것을 보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당장 수업하는 내용을 듣고 이해하는 게 더 쉬웠기에 난 머릿속에다가 수업을 기록하며 시간을 보냈다.
첫 학기에 모든 수업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그러자 많은 이목을 끌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다른 학생보다 키가 작고, 많은 사람과 대화하지도 않으며, 동아리에 들거나 캠퍼스 내 바에 들어가지도 않는다는 걸 알아챘었다. 그들은 보통 나와의 거리를 유지했다. 성적이 나왔고, 난 내 이름이 찍혀 나오도록 내버려 두는 실수를 범했다. 얼마 안 가 동기들 사이에서 "키 작은 샌님"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자 모두가 내게 공부를 물으러 왔다.
난 그게 너무 싫었다. 난 반사회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타인에게 설명하느라 사고를 느리게 하는 건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타인의 머릿속에 내 생각을 집어넣을 일이 없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이 엄청나게 불편했다. 이런 문제와 마주한 적이 없었다. 2학기가 끝나고, 한 과목을 제외하면 또 전부 수석이었다. 그러곤 진짜 사람을 대한다는 문제를 풀어보았다.
답은 예상외로 간단했다.
사회학과 몸짓 언어, 언어학에 관한 몇 가지 연구. 사전을 통째로 읽는 데에 사흘을 썼다. 전까지는 그럴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머릿속으로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해도 언어의 한계 때문에 사고를 제한할 필요는 없었다. 언어를 일종의 그물망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격자판으로 보았고, 그런 시각에서 내 그물망을 최대한 촘촘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니 동급생들과 더 쉽게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18살이 되자 한 교수님이 수업을 맡아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셨다.
난 그를 꽤 잘 알고 있었다. 매력적이며, 약간은 괴짜 같은 인물이었다. 내가 수석을 차지한 과목 중 세 개를 담당한 사람이었다. 최고의 선생은 아니어도 능변가였고, 더 상급반에서는 세 시간 연강 동안 학생들의 집중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1학년 수업의 지도 강의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난 기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거기서 나오는 보수로 톡톡히 재미도 보았다.
수업 자료를 다시 훑어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몇 년이 지나긴 했지만 그 내용에 다시 익숙해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주마다 몇 시간 동안 수업에 필요한 메모와 학습지를 준비했다. 내겐 아주 기초적인 내용이었고 그 지식을 전달하는 걸 즐기고 있었다. 학생 중 몇보다 내가 어린 건 사실이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학기 말에 학생 78명 중 단 3명만이 낙제했으며, 그들은 내 지도 강의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교수님은 아주 기뻐하며 2학기에도 내게 비슷한 일을 제안했다.
2학기 말에, 내 열아홉 번째 생일 직전이자 학부생으로서의 마지막 해 직전에 교수님은 연구 일을 제안하셨다.
마지막 학년 때 들었어야 하는 수업 대부분이 연구로 대체되었다. 반년간 이론 양자역학의 대부분을 들었다. 획기적이기는 했어도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거의 날마다 도서관 기록 보관소에서 과학 논문을 읽어보며 나노 범위의 세계가 돌아가는 방법을 이해하고자 했다. 1학기 말 즈음에 내 연구 방향을 크게 바꾼 논문을 발견하였다.
논문은 타자기로 쓰인 것이었다. 서식화된 것도 아니고, 도서관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것도 아니며, 당연하게도 출판된 적 없는 것이었다. 난해한 열두 쪽짜리 과학 산문을 오래된 것 같은 종이에 친 것으로, 나만큼 자세하게 읽지 않는다면 결코 이해하지 못할 작품이었다. 저자의 이름은 없었다. 한심할 정도로 미완성이며, 설사 완성된 것이라도 초기 습작인 것이 분명한 글이나 제안된 개념은 아주 이질적이었다. 이질적이며,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1. 서문 [쓸 것]
2. 과거의 수학 및 과학적 사고 [쓸 것]
3. 현대의 수학 및 과학적 사고
3.1. 현실에 대한 현대의 이해 [수정할 것]
3.2. 물리학적으로 실증적인 비공리성 수학 모델
3.3. 비공리성 물리학 모델
4. 계 독립성 [쓸 것]
5. 철학적 논점
5.1. 비공리성 생물학적 생각에 내재된 편견 [수정할 것]
5.2. 인식론에 미치는 영향
5.3. 현대 비공리성 "순진한 과학"에 관한 분석
5.4. 편견의 해명과 제거 [쓸 것]
5.5. 공학 분야에 미치는 영향
5.6. 밈공학 도덕률 [편집할 것. 쳐낼 수도 있음]
6. 결론 [쓸 것]
실증적 수학. 비공리성 물리계. 수학적 개념이 기본 가정에 위배되기는 하나, 개념이 만드는 빈약한 구조가 여전히 홀로 설 수 있는 것 같았다. 논문은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우연한 단순성을 통해 제기하고 있다. 직관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나, 논문이 내보이는 몇 안 되는 예시를 보면 간단한 구성은 아니어도 가능한 것이긴 한 것 같았다.
그래서 해보았다.
처음 실제로 작동하는 영구 기관을 만드는 데에는 열이틀이 걸렸다. 기어와 도르래로 만든 괴랄하면서 적당적당히 만들어진 기계였다. 기계의 동작이 이미 팽팽한 고무줄에 계속해서 장력을 주어, 기계는 계속해서 작동할 수 있다. 내가 한 거라고는 다른 누군가가 설계한 것로 만든 것에 불과하기에, 난 구조물을 분석하였다. 투입하는 에너지보다 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추출하도록 수정하기까지 나흘이 걸렸다. 점점 더 빠르게 돌다가 힘을 못 이긴 고무줄이 결국에는 끊어져, 장치가 망가져 버렸다는 것은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작동하긴 작동했다. 고전 물리학적인 사고와 지난 몇 년간 이게 불가능하다는 말들과는 달리, 영구 기관을 제작하는 일은 가능한 일이었다.
몇 주가 지나자, 난 종이 두 장과 고무줄 하나로 영구 기관을 만들 수 있었다.
2학기 말에 난 학위를 마쳤고, 완성된 논문 두 부를 제출하였다. 하나는 내 원래 연구 주제에 대한 것으로, 내 학문 성취 중 최고의 업적이었다. 그 논문은 《아메리칸 저널 오브 피직스(American Journal of Physics)》에 올라갔다. 다른 논문은 내 학과 지식 없이 시작한 사이드 프로젝트로, 이 프로젝트 때문에 질타를 받거나 미친놈 취급을 받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진짜 미쳤다는 가능성도 온전히 존재하기에, 꽤 걱정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었다. 내 논문은 '논문'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고유명사 취급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바로 그 이름 없는 논문 말이다. 이 논문은 《레터스 인 매스매티컬 피직스(Letters in Mathematical Physics)》로 보냈다. 좀 더 자주 출판되는 저널이고, 파격적인 연구를 빠르게 보급한다는 목적을 가진 저널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던 최악의 시나리오는 내 논문이 몇천 마일 떨어진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이었다.
열여드레 후, 내 스무 번째 생일로부터 일주일 전에, 다른 최악의 시나리오가 내 문을 두드렸다.
빠르고, 체계적이며, 군사적인 두드림이었다. 딱 다섯 번의 노크가, 거의 완벽한 간격을 유지하며 두드려졌다가, 잠시 시간을 두고는 또 다섯 번의 노크가 울려 퍼졌다. 난 문으로 향하여, 체인 록을 걸어둔 채로 문을 조금 열었다. 키는 나보다 약간 더 크고, 갈색 머리는 짧게 깎고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문밖에 서 있었다. 그는 문틈으로 날 보더니, 미소를 짓고는 말하였다.
"스탠리 버든Stanley Burden 씨?"
"전데요."
"안녕하십니까 스탠리. 제 이름은 맥스 그린Max Green입니다. 스프링거 미디어Springer Media에서 나왔는데, 레터스 인 매스매티컬 피직스에 투고하신 논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어, 네, 물론이죠. 잠깐만요."
난 문을 닫고는, 체인 록을 풀고 문을 열었다. 그린은 다시 미소를 짓더니, 작은 흰색 직사각형 물체를 꺼내 들었다.
"고맙습니다, 스탠리. 여기 제 명함입니다."
난 그 종이를 가져와서는, 거기에 평범한 검은색 잉크로 인쇄된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요원 맥스웰 CT-B05
알래스카 앵커리지 지역 그린-타입 변칙존재 요원
세계 오컬트 연합
"당신 스프링거에서 온 게 아니잖아요."
나는 다시 그를 보았다. 그린은 능글맞게 웃으며, 똑같은 명함을 손에 들고는 반대쪽으로 뒤집었다. 반대편에는 내가 '논문'의 밈공학 도덕률 항목에서 이미 본 것과 비슷한 프랙털 이미지가 있었다.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태양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앞으로 넘어졌다. 그린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는 우습다는 듯한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미안하군, 스탠. 거짓말을 한 거야."
그리곤 세상이 멀어져갔다.
눈을 뜨자, 심장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난 가슴을 움켜쥐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양팔이 내가 앉아있는 의자에 묶여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초점이 흐릿한 시야 오른쪽에 점차 "맥스 그린"의 형상을 갖추는 인영이 있었다. 그가 계속해서 화학 혼합물을 주사하면서 모습은 점차 또렷해져 갔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날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 주사기를 비우고는 거칠게 뽑아냈다. 내 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내 몸속에서 약물이 순환하는 동안, 그린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탁자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심장이 흉강에서 뜯겨나갈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었다. 허파에 얼음장 같은 숨을 채울 때마다 따끔거리면서 내부를 긁어댔고, 숨을 내쉴 때마다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뇌는 꼭 저가 잘못된 자리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목이 가볍게 발작하는 게 느껴졌고, 머리가 경련할 때마다 세상이 계속 돌았다. 그린은 내 몸이 반항을 멈출 때까지 날 바라보다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자네에겐 억제제를 주사했다네. 전에 자네가 어떤 비정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젠 막혔지. 부디 이게 예방책에 불과하며 절차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주게나."
"뭐요?"
"집중하게, 스탠. 딱 한 번만 주저리주저리 설명할 테니까. 자넨 지금 지하 200피트에 있는 세계 오컬트 연합 유치장에 있네. 형이상학적인 것들의 위협을 처리하는 기구지."
다시 목이 경련하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형이상학(metaphysics)이라는 건, 이상하고 뭐라 말하기 힘든 철학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네. 우리 현실의 근본적인 작동 방식을 전복하려는 아주 현실적이며, 위험한 시스템이지. 용어를 어원으로 쪼개보자면, 말 그대로 형태를 갖춘 물리적인 것(physics) 이상(meta)의 것이네."
목의 경련이 멈추었다.
"물리라는 놈은 사유를 통해 작동하는 법이지. 인간이 물리법칙을 따르면서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위험한 짓은, 원자를 쪼개는 것이야. 그런 시스템을 전복할 수 있는 인간들은 훨씬 더 위험한 일을 할 수 있지. 산더미 같은 방사성 물질이나 입자 가속기 같은 것 없이도 말이야."
그린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한 개비를 손에 든 뒤, 다른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어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그는 담배 연기가 섞인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구역질 나는 독극물을 내 얼굴에 내쉬었다. 난 기침을 했고, 다시 허파를 핀으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을 타입 그린 위협이라 부르지. 다른 말로는 '현실 조정자'라 하고. 만약 자네가 투고한 논문에 서술한 것 같은 실험을 할 수 있다면, 자넨 분명 그중 하나라네. 물론, 자네는 일단 '예외적'이긴 하지. 타입 그린들은 유년기에 패턴이 존재한다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주변의 세계를 변화하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는다든가 해서 비극적인 배경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영원히 다른 이들보다 '나은' 고통에 한탄하지. '신비로운 외톨이'가 되고자 한다면 오만의 수준으로, 정상성의 범위 내에서 놀고 싶다면 겸손함의 수준으로 재능이 촉발한다네. 자네의 인생사는 지극히 정형화되어있고, 너무 상투적이며, 통계적으로 있음직하지 않은, 꼭 재능 없는 작가가 자네의 삶 전체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 같아. 자네는 주의를 끌었어."
그린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담배를 또 한 모금 빤 뒤, 허공에 담배 연기로 도넛을 몇 개 만들어냈다.
"앵커리지 지역 그린 타입 요원으로, 자네를 감시하는 게 내 임무였다네. 자네 아버지가 4년 전에 자네를 데리고 도시 경계로 운전해온 그때부터 해온 일이지."
그린은 내가 반론이라도 제기하길 원하듯이 날 바라보았다. 허파는 여전히 차가운 불이 붙은 것 같았고, 머릿속은 여전히 흐리멍덩하면서 느렸다. 만약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면 뱃속이 비틀리면서 내용물을 책상 위에 쏟아낼 것 같았다. 그 대신 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꼭 또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린은 말을 계속했다.
"타입 그린 위험에는 네 가지 발달 단계가 있다네. 첫째는 부정이지. 제 형이상학적 능력을 거부하거나 합리화하지. 최근까지 자네는 이 단계에 있었어. 내 생각에는 올해 전까지는 자네의 능력을 의식적으로는 알아채지 못했을 거야."
"'논문'."
난 그 단어를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그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 논문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 이야기하지."
난 내 논문이 아니라, '논문'을 말하는 거였다. 다시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뱃속에서 반쯤 소화된 샌드위치의 잔해를 무릎과 책상 위에 토해냈다. 그린은 역겹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젓고는 말을 계속했다.
"억제제가 신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효과는 곧 사라질 거라네. 그러고 나면 말을 해도 돼. 내가 말하던 것처럼, 자네는 1단계에 있었다고 생각되었네. 1단계 타입 그린 위협에 대해서는 우리 기관에서도 딱히 반응하지 않고, 그저 가끔 관찰만 하고 말지. 그런 사람들이 딱히 위협되지 않는다면, 우리도 꽤나 기쁘게 내버려 두거든. 2단계는 조금 더 위험하지. 2단계는 보통 실험을 하고, 자신의 능력을 탐구하지. 지금 자네는 2단계에 있다네."
그린은 내가 《레터스 인 매스매티컬 피직스》에 보낸 논문 사본을 꺼내 들고는 휙휙 넘겨보았다.
"자네가 여기에 담은 내용은 우리가 2단계들의 실험에서 흔히 보는 것과 같다네. 차이점이 있다면 조금 더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거지. 자네의 형이상학적 광기에는 아주 분명한 방법론이 있는데, 다른 2단계들은 자신의 형이상학적 현상에 대한 고찰 없이 그냥 '하거나' '느낄' 뿐이야. 자네는 자신이 인지하는 걸 수학과 물리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적어놓았어. 자네가 깨닫지 못한 건 자네 같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내용이 전부 틀린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지."
그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뒤의 방구석으로 걸어갔다. 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유지하려 했지만, 구속구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린은 부드러운 걸레를 들고 돌아와, 책상 위의 토사물을 닦아낸 뒤 다시 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곧 그린은 수도꼭지를 닫았다.
그는 책상으로 걸어 돌아와서는 물 한 잔과 종이 한 뭉치, 고무줄 한 상자와 내가 스프링어에 보낸 논문 사본을 올려놓았다. 그린은 내 옆에 서서는 날 묶고 있는 매듭을 풀었다. 그러고는 책상 반대편 의자에 다시 앉아서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에 손짓했다.
"자네는 논문에서 영구 기관의 아주 간단한 예시를 명시하고 있지. 종이 두 장과 고무줄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몇 분 안에 만들 수 있는 영구 기관을 말이야. 지금 자네의 기억을 바탕으로 하거나 자네가 써놓은 종합적인 설명문을 보고 하나 만들어보게나."
"물은요?"
"그냥 물이야. 방금 토했잖는가. 한 잔 마시고 더는 토하지 않도록 해보게."
난 잔을 잡고는 목구멍에 내용물을 쏟아 넣었다.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심장이 제 속도를 되찾았다. 난 종이 두 장과 고무줄 하나를 집어 들고는, 다시 그린을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썹을 치켜떴다.
"해보게나, 스탠."
난 종이 뭉치로 시선을 돌렸다. 가장 먼저 만들 받침대 부분은, 두 부분 중 조금 더 쉬운 부분이었다. 난 받침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먼저 어느 정도까지 종이를 접었다. 그러고는 별 문제 없이 기반 쪽에 고무줄이 걸쳐질 부분을 접었다. 완성한 기반을 한쪽으로 치우고 또 한 장의 종이를 집어 든 뒤, 처음에 만든 조각 위에 놓일 조각을 접어 나갔다. 난 두 조각을 한데 놓아 시험해보았고, 기반 위에서 회전자가 훌륭하게 돌아갔다.
다음 단계는 회전자 조각을 접어, 고무줄이 회전자를 계속 회전시킬 수 있게 해주고 회전자가 회전하면서 다음에 튀어나온 부분에 길을 내면 고무줄이 그 튀어나온 부분을 잡아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와 마찬가지로 튀어나온 부분이 고무줄을 토대 상에서 재정렬하고, 장치에 감긴 고무줄이 계속해서 회전자의 움직임과 정반대로 장치를 추진할 것이다.
더는 그 방식대로 접을 수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접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직관적으로 가능해야 했다.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접어왔으니까. 난 반쯤 접은 회전자를 옆으로 치운 뒤, 새 종이를 집어들었다. 눈을 감고 근육 기억에 의존하기로 했다. 접고, 접고, 접고, 접고, 접고…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종이가 없어야 할 곳에서 길을 막고 있었다. 난 눈을 뜨고 내가 접은 회전자를 보았다. 제대로 된 모양이 아니었다.
난 내 논문 사본을 집어 들고는 접는 방법에 관한 내용이 있는 부분으로 넘겼다.
그리고, 별 회전자의 가장 바깥쪽을 잡아서 시계 방향으로 인접한 지점을 통과해 비틀어 종이 반대쪽으로 접는다.
난 탁자 반대편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린을 보았다. 내가 말했다.
"이건 말이 안 돼요. 어떻게 접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는데, 없어야 할 자리에서 종이가 길을 막고 있어요."
"타입 그린들은 형이상학적 효과를 발현하는 법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지. 그런 개념이 자네에겐 얼마나 말이 되든 간에,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세상에 적용시켜 인지하고 있던 간에, 자네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려. 이러한 발상은 자네의 머릿속을 벗어나면 작용하지 않기에 타인과 공유할 수 없지."
그린은 완성한 종이 영구 기관을 꺼내 들더니, 고무줄을 걸고는 작동시켰다. 장치가 제 운동량만을 가지고 추진되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걸 자네 집에서 가져왔다네. 분명 자네는 보는 것만으로 장치가 작동하는 원리를 알겠지. 하지만 자네가 아니라면 다른 이들은, 다른 타입 그린이 아닌 이상,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없다네. 자네가 내면에서 이상화한 현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그린이 불붙은 담배를 아직 돌고 있는 종이 장치의 중앙 부분에 밀어 넣었다.
"집중하게나."
회전자에 불이 붙었으나, 계속해서 돌아갔다. 불길이 토대로까지 퍼졌고, 구조물 전체가 무너지며 기이한 방향으로 말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고무줄이 움직임을 멈추고 천장으로 날아갔다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러고는 커다란 콰직 소리가 나더니, 남아있는 구조물이 폭발해 한 줌의 재로 변했다.
"그게 바로 공간이 펼쳐질 때 나는 소리라네. 정상적인 현실로 되돌아올 때 나는 소리야."
그린은 책상 위의 재를 쓸어버리고는 담배를 다시 한 모금 깊게 빨았다. 방에 담배 냄새가 가득 찼다.
"이 이후로도 두 단계가 더 있지. 3단계 타입 그린은 안정 상태라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지. 보통 가장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들이고, 자네 또한 그쪽이 되길 바라고 있다네."
"4단계는요?"
"4단계의 타입 그린은 자신에게 한계라는 게 없다는 걸 깨닫고, 보통 자신이 신과 같다는 망상에 빠지게 되지. 두 가지 이유로 난 자네가 이 단계에 도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네. 먼저, 자네는 아주 엄격하며 자기 무모순적인 형이상학적 이해 체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어. 예컨대 자네는 생각만으로 물건을 들어 올린다던가, 기억을 조작한다던가, 우리가 타입 그린을 처리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다른 이상한 것들을 할 수 없어. 자네가 이상화한 현실 내에서도 자네에겐 한계가 존재해. 두 번째 이유는 자네가 4단계에 도달할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거지. 자네의 이런 학업 능력을 당연하다 여기면 우월감에 빠지는 건 필연적인 일이네. 실망스럽게도 자넨 그걸 깨닫지 못하고 경솔하게 행동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분명한 건 자네는 설득할 수 있다는 거야. 자네는 무해하게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을 조작하려 들지도 않아. 개인적으로는 그럴 능력도 없다 생각하지만 말이야. 자넨 자신을 신격화하기에는 너무 순진해. 좋은 일이지. 우리에겐 상대할 신이 차고 넘치니까 말이야."
내가 심술부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법한 대답이 딱히 없었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럼 자넨 이 기관이 왜 존재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걸세. 저 밖에는 자기가 신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있어. 타인의 정신을 잡아다가 비틀고, 주물럭거리고, 간단하게 부숴버릴 수 있는 이들이 있지. 그런 이들은 자네처럼 합리적이지 않지. 설득할 수가 없어. 자기가 갖고 싶은 건 가지고, 갖고 싶은데 없는 건 만들어버리니까.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세상이 알아서는 안 되고, 우린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도록 둘 수 없다네."
그린은 담배꽁초를 땅바닥에 버리고는, 발로 비벼 불을 껐다.
"그런 사람들을 죽이거나, 애초에 그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게 내 일일세."
그린이 또 한 개비에 불을 붙이는 동안 난 조용히 있었다.
"우리 기관에서, 나 같은 그린 기관원들에게는 보통 오렌지 기관원들이 붙는다네. 일이 잘못 돌아갈 때를 위한 중포병과 같은 거지. 오렌지 요원들은 보통 타입 그린 위협들의 능력에 저항성을 가진 장갑 외골격 '오렌지 슈트'를 입었거나, 다른 현실 조작자들과 대면할 수 있는 타입 그린들이지. 이제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의 요점으로 갈 수 있겠군."
어떤 말을 할지는 당연했다.
"자네가 예비 오렌지 기관원이 됐으면 하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앵커리지에 오렌지 기관원이 세 명 있다네. 오렌지 슈트는 비싸고, 도시 환경에는 맞지 않으니 세 명 전부 믿을 수 있는 타입 그린들이야. 위협이 별로 없어서 내가 이 지역의 유일한 그린 기관원이고."
"이름으로 색깔을 쓰는 기믹이라니, 《저수지의 개들》 같아서 그닥 놀랄 것도 없네요."
그린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예 아니오로 답해주기 바라네."
"전 이론물리학자에요. 당신은 제 의지와 관계없이 절 납치해다가 여기에 구속하기도 했고요. 아니오라고 말하도록 하죠."
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 했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 생각하지만 뭐, 좋네. 그럼 이제 일이 어떻게 될지 말해주지.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고, 이 일을 자네 혼자만 알고 있다면, 우린 앞으로 볼 일이 없을 걸세. 더는 형이상학적 현상을 묘사하거나 알리고 다니려 하지 말게. 영구 기관도 이젠 만들지 말고. 관련된 건 전부. 혼자만 알고 있게나. 대학에서 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계속하게나. 만약 앞서 말한 것 중 하나라도 지키지 않는다면, GOC가 어떤 기관인지를 똑똑하게 보여주도록 하지. 필요하다면, 자네의 목숨마저 앗아갈 수 있어. 내 말을 이해했고 받아들였는지 말해보게."
"이해했어요."
"좋아."
그린은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억제제는 이번 한 주 동안 계속될 거라네. 우리처럼 느끼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게나."
그린은 명함을 꺼내어 프랙털 이미지를 보여주었고, 세상이 다시 멀어져갔다.
난 내 집 안락의자에서 정신을 차렸다. 은은한 통증이 머리에 감돌고 있었다. 난 천천히 눈을 뜨고, 눈을 깜빡였다. 방은 어두웠다. 방 반대편에 놓인 LED 시계 붉은 숫자 23:37을 비추고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전등 스위치로 걸어갔다.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켜자,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왼손으로 눈을 가렸다. 시야가 회복되고 나서, 난 나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주삿바늘을 찔러넣을 때 난 피가 굳어 아직도 팔에 나무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난 부엌으로 향해, 수도꼭지를 열어 나온 찬물에 순간 움찔하며 핏자국을 지워냈다. 굳어진 핏자국은 붉은 나선으로 녹아내리며 싱크대 아래로 사라졌다. 난 얼굴에 물을 조금 튀기며 정신을 차리고자 했다. 그러곤 욕실로 향해 샤워한 뒤, 겨울용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이전에는 영구히 돌아가는 종이 모형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던 방이었다.
이젠, 침묵만이 존재했다.
난 책상에 앉아, 철한 종이뭉치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첫 번째는 내 논문이었다. 난 페이지를 넘기면서 내가 써놓은 걸 전부 들여다보았다. 말은 되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공허했다. 난 이게 뭔가 대단한 위업이고, 하나의 돌파구고, 적어도 일종의 진보가 되어주리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내 정신이 날 속여넘긴 것이었다. 여기엔 뭣 하나 새로운 게 없었다. 하지만 교수님은 이 내용을 극찬하고, 뛰어나다 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 앞길의 장애를 없애려고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고를 비틀었을까? 내가 진실이라 생각하던 것 중에 자기기만이 몇이며, 내 성공 중에 눈속임이 얼마인가? 내 삶의 얼마가 정형화되고 예측 가능한 패턴으로, 다른 모든 '타입 그린' 이상성들과 같이 틀에 박힌 형태를 띠고 있는가?
두 번째는 내 파생 논문으로, '논문'을 서툴게 따라 한 것이었다. 거기엔 내가 보편적인 것이라 생각했던, 지극히 개인적인 이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이디어 자체는 내 머릿속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단어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저자가 쓴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작품에 다른 이들에게 전달 가능한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 못하는 그런 저자다. 내가 한 것 중에 내게서 떨어트려 놔도 의미가 있는 게 있을까? 살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쉬운 길을 택해왔으며, 무엇을 얻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격이 있는지 어떻게 알까?
애초에 내게 자격이란 게 존재했을까?
아마 아니겠지.
난 정신을 차리고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네 삶 전체가 하나의 연극이야. 넌 사람들을 배우로 만들고.
난 헛구역질을 했다.
네 삶은 하나의 연극이야. 네 어머니는 네가 고른 배역에 따라 죽은 거고.
부엌 싱크대에 검누런 색이 잔뜩 쏟아졌다. 토하고 또 토했다. 위액 때문에 혀가 따끔거리고 곧 코까지 따끔거렸다. 구토를 멈출 즈음 눈물이 흘러내렸다. 토한 것이 하수구로 내려가는 걸 보며 헐떡였다. 금속 싱크대 표면에 비친 내 모습이 담즙에 뒤덮인 유리창 너머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핼쑥한 턱에는 붉은색 수염이 까칠하게 자라있었다. 난 입을 씻고, 손을 닦은 뒤 울음을 터트리고는 침대로 돌아갔다.
우리처럼 느끼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게나.
내 잠은 망가지고 악몽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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