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에 들어오기 전부터 만나던 애인은 어떡하느냐고요? 그 질문 많이 하더라고요. 특히 새롭게 팀에 합류한 사람들은 더더욱.
글쎄,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솔직한 게 좋아요, 아니면 밝고 희망찬 답변이 좋아요?
알았어, 현실적인 타입이라는 거지… 좋아요, 솔직한 이야기를 해줄게요.
정말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재단에서 일하기 전의 삶에서 애인이 있던 사람은 많지 않아요. 왜? 대부분이 책벌레에 연구에 미친 종자들이라 애인은 고사하고 사람 간의 관계가 딱히 폭넓지 않거든. 그 왜, 옆에 못 들은 척하고 앉아 계신 최 연구원님도 그렇고요. 잘 지내죠, 선배?
보통은 그렇기 때문에 기존 인간관계가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죠. 우릴 알던 소수의 사람은, 혹시라도 그들이 의문을 품고 파고들 경우에만 기억소거제를 투여하는 식으로 그 접근을 차단해요. 우린 사회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셈이죠.
부모님은… 부모님은 좀 다르지. 우리도 휴가를 얻으면 돌아갈 장소는 있어야 하니까. 그런 경우에는 재단이 제공한 매뉴얼대로 대응하면 되거든요.
이제 다른 의미에서 돌아갈 곳, 기존 생활에서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은… 그러니까 곧 애인의 경우는 좀 복잡해요.
이 경우도 물론 재단의 매뉴얼이 있어요. 갑자기 해외로 전근 가게 되었다라던가, 갑자기 국가 보안과 직결된 업무를 맡게 되었다라던가… 다양한 핑계 감이 있겠죠?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솔직히 남자로 태어난 사람들은 대개 군대 다녀오면서 이런 경험하잖아? 안 그래요, 29년간 모태 솔로였던 최 선배님?
미안해.
미안하다고.
여하간, 애인과 같은 경우도 일단 매뉴얼이 있다고 할까요. 그게 통할지 안 통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왜 그렇냐고요? 생각해 보세요.
‘여보, 나 해외 전근 가게 됐어. 한동안 연락 못 할 거야. 잘 기다릴 수 있지?’
‘당연하지. 나 그동안 자기 연락 안 기다리고 혼자 알아서 잘 생활하고 있을게.’
이럴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어요? 이러는 경우는 둘 중 하나죠. 원래 둘의 사랑이 그렇게 크지 않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정말 무덤덤의 최고봉이라 이런 경우겠지요. 대부분은 전근 안 가면 안 되냐, 왜 자기가 꼭 그런 일을 맡아야 하는 거냐, 내가 더 중요하지 않으냐, 이렇게 대답할 거에요. 그렇게 싸우다가 결국은 헤어져서 원점 회귀하는 경우도 많고요.
아, 이런 대화를 나눴어요? 그래도 신입 같은 경우는 안 헤어지고 괜찮게 만나고 있나 보군요.
그래, 걱정되겠지. 당연한 일이에요.
재단의 연구원들은… 특히 상부 사람들은, 세상에서 우리를 쏙 빼내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우리는 물론 어떤 분야에서 범상치 않음을 갖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재단이라는 거대한 집단에 합류하게 된 거고, 이렇게 세상의 평안에 일조할 수 있게 된 거겠죠.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에요. 인간은… 혼자가 아니에요.
이탈될 수 없는 개인인 거죠.
우리를 뽑기 기계에서 인형을 집어 올리듯이 사회에서 가져올 수는 없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본질적으로 인간이니까. 아주 평범한 인간이니까.
우리의 삶과 정체성은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조성되는 개념이에요. 정확하게는… 만남이라고 할까요? 즐거움, 두려움, 분노, 슬픔 따위의 단발적인 감정만을 일으키는 만남도 있지만, 인생 자체의 방향키가 달라지는 만남도 있죠. 인생에 갑자기 향유가 부어지는 경험을 느껴본 적 있어요?
나는 내 애인을 만나고 난 뒤에 느낀 감정이었는데요, 그게.
하늘이 맑고, 바람은 낮게 불었고, 나무에서는 생의 냄새가 나고 있었는데요.
흰 티를 입고 청바지를 입은 채, 누가 보면 껄렁댄다고 말할 정도로 반항적인 자세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는데요.
그와 반대로 말갛게 웃음 지으면서 나를 쳐다보는 게, 그러면서 손목에 걸린 팔찌가 눈썹 위에서 흔들거리는 게.
지금은.
헤어졌지요.
아아, 그렇게 막 당황할 필요는 없는데. 한참 됐거든요. 한 2년 됐나.
2년 됐지? 선배. 어 그래, 상냥한 무관심 고마워.
드라마틱한 이유는 없었어요.
막, 행방불명된 나를 찾기 위해 그가 재단을 파헤치다가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을 알게 된 것도 아니고요. 나를 만나기 위해 이 기지로 오다가, 무슨 탈출한 변칙 개체를 만난 것도 아니고요. 우리와 적대하는 요주의 단체가 그를 인질 삼은 것도 아니었죠.
그냥…
그러게, 왜 헤어졌더라?
어떤 건 이유가 눈 위에 흩뿌려진 피처럼 명확하고, 어떤 건 눈 아래 죽어 있던 참새의 시신처럼 보이질 않아요. 우리 관계는 늘 전자였는데, 끝에서는 후자였어요.
거짓말이에요, 명백하게 내 잘못이었어요.
사실은… 다퉜죠. 내가 한 세 번인가 나가기로 한 날에 못 나갔을 때였을 거예요. 그 해에 두 번인가 기념일을 놓쳤는데, 하루는 그 사람 생일이었고 다른 하루는 4주년 기념일이었네요. 평소에 내 일정으로는 절대 화를 안 냈던 사람인데, 그날은 불같이 화를 냈었죠.
만나기로 한 날이 내 생일이었거든.
그러게, 웃기지. 본인 생일은 넘어갔는데.
어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어떤 마음을 갖게 되면 말예요. 그 사람을 볼 때마다 그 마음이 들불처럼 일어나요. 언젠가 난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두근거림을 느꼈고, 언젠가는 사랑을 느꼈어요. 언젠가는 평안과, 언젠가는 안온과, 언젠가는 둘이 가꿔갈 미래를, 언젠가는…
지랄맞죠.
그래서 그 사람에게 떠나라고 말했어요.
그러고 나선… 뭐 짐작 가는 대로. 싸우다가, 또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싸우고. 다시 마음 잡아보려고 간 부산에서는 밤바다에서까지 싸웠죠.
서로 많이 지쳐갔지요. 그 피로가 우리를 냉담하게 만들었고요.
점점 싸우지 않았어요. 싸움이 소강된 자리에는 사랑이 아니라 황야만이 펼쳐졌지요. 모든 걸 태운 땅은 비옥해지지 않았고, 우리의 작물은 이미 다 타버리고 살아나지 않았는데.
다시 휴가를 나간 서울에서는 싸워보려고도 했는데, 잘 안됐어요. 그즈음 그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았고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리 둘은 갈라섰죠.
하하, 표정이 많이 안 좋네. 미안해요. 겁주려고 하는 말은 아니었는데.
음, 좋은 다짐이에요. 헤어지지 않고 끝내 행복해지겠다는 소망… 좋은 소망이에요. 바람직한 소망이고요.
얼마나 갈 것 같아요?
아니, 아냐. 그런 의도가 아니라… 실제로 지금도 잘 만나는 사람 많거든? 그런데 그 사람들도 이걸 인정하면서 만나요. 이 사람을 언제고 우린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고. 이 사람과 영원을 바라볼 수는 없을 거라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알 수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의 상부는 이걸 걱정해주기엔 너무나 인간이 아니고.
신입도 이걸 생각해 줬으면 해요. 재단은 별의별 기괴한 것들이 우리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곳이지만, 동시에 아주 평범한 것이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곳이기도 해요. 혼자서 대비해야 할 밤들이 많을 거예요.
마음 단단히 먹어요.
오래 가길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