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8일, 그 날은 추위도 바람도 무시한 채 똬리를 틀고 앉은 무진의 안개가 차갑게 피부를 자극하는 날이었다. 브릴러는 급하게 달려온 탓에 가빠져오는 호흡과, 트라우마 때문에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침착하게 억누르며 리볼버의 조준을 가다듬었다.
"마지막 경고다. 그 손 놓고 그들을 풀어줘라."
"웃기지 마…! 내가 여기서 얌전히 관둘 것 같아?!"
이바노프가 발악하듯이 분기를 뿜어내며 사납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브릴러에게 쏠린 틈을 타, 유리는 두 다리를 동시에 위로 뻗어 그의 팔을 걷어찼다. 통증으로 신음하며 이바노프는 잠시 균형을 잃고 몇 걸음을 휘청이며 물러났다.
"이…런 젠장할!"
"쯔산, 유리! 둘 다 무사합니까!"
"헉! 헉, 네! 덕분에요."
둘의 상태를 확인하는 브릴러에게, 유리는 입을 움켜잡혔던 것 때문에 몇 차례 콜록이고 대답했다. 브릴러는 이바노프에게 총구를 계속 겨눈 채로 천천히 이동해서 주머니칼로 유리를 묶고 있는 줄을 잘랐다. 줄은 그대로 힘 없이 풀리며 바닥에 늘어졌다. 오랜 포박 때문에 저릿저릿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운 유리는 브릴러에게서 주머니칼과 마스크를 건네받고 쯔산의 속박을 풀어주러 달려갔다. 이바노프는 이를 박박 갈면서 통신기에 고함을 쳐댔다.
"정!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침입을 허용했어?!"
"뭐라고? 무슨 일이야! 그쪽 애들한테선 아무 말도 없는데?"
"뭐야?!"
이바노프는 금방이라도 분노에 겨워 날뛰고야 말 것 같았다.
"자기들 꾀를 그대로 되돌려받는 감상이 어떠신가? 수면 가스를 피워 뒀다. 안개 덕분에 들키지 않고 잘 퍼지더군. 이미 네 동료들은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고 주변은 가스로 가득하다. 시간을 계속 끌면 이 안까지 들어올테지. 어차피 네게 승산은 없다. 투항해라."
브릴러가 권고하자 이바노프는 비틀거리다 쓰러지듯 탁자에 기대고는, 핏줄이 불거질 만큼 꽉 쥔 주먹으로 탁자를 짚으며 몸을 떨었다. 그가 발악하듯 말했다.
"대체 어떻게, 여길 이렇게 빨리 찾아낸 거지?!"
"도청당한 걸 방금 눈치챘으면서 모르겠나? 여수반도에서 꽤나 떨어져 있으면서 해안에 접해있고 컨테이너를 눈에 안띄게 숨길 수 있는 곳은 이곳 무진항 뿐이다. 그것만 알면 수상한 컨테이너를 찾아내는 것 정도는 쉽지."
"왜냐…! 왜 날 방해하는 거냔 말이다!"
"배신자 주제에 당돌한 질문이군."
"아니, 저년과 재단이 날 배신한 거다! 너도 똑같이 버려질 걸 왜 모르지?! 나는…!"
"거기까지. 굳이 다시 말해주지 않아도 네 헛소리는 오면서 다 들었다. 재단이 널 버렸다고? 개소리 마! 너와 네 동료들이 위험에 처했던 건 지금의 네놈처럼 혼돈을 추구하는 작자들 때문이지 다른 누구의 탓도 아냐! 네놈은 죽음과 상실의 공포에 굴복해 비이성적인 선택을 해 놓고, 뻔뻔하게 남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비겁자다!"
"네가 동료를 잃는 고통을 알기나 해?!"
"…누구보다 잘 알지."
그렇게 말하는 브릴러의 목소리가, 유리는 왠지 쓸쓸하다고 느꼈다. 같은 순간, 쯔산은 저린 몸을 끌고서 컨테이너의 개폐 컨트롤러에 막 손을 얹은 참이었다.
"브릴러, 언제든 컨테이너를 열어버릴 수 있습니다."
"…들었지?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둬라."
"아이브… 제발, 돌아와. 과거는 흘려보내고…"
유리의 간절한 호소를 들으며 이바노프는 아무 말 없이 탁자에 기댄 채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엔 눈물과 증오가 한데 섞여 흘러내리고 있었다.
"말했지… 후회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고. 나의 복수는 멈추지 않아. 내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아무도 나의 정당한 분노를 망각으로 지워버릴 순 없어!"
이바노프는 실성한 듯이 외치더니 카론 바이러스가 든 주사기를 거칠게 집어들었다.
"멈춰, 이바노프!"
"그를 쏴요, 브릴러!"
유리가 다급히 외치자 브릴러는 이바노프의 팔을 겨눴지만, 식은 땀에 젖어있는 그의 집게 손가락은 덜덜 떨기만 할 뿐 마치 굳어버린 듯 방아쇠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브릴러의 어릴 적 기억 깊숙이에 남은 아버지와 조국, 그리고 폭력에 대한 혐오가 트라우마처럼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낸 탓이었다. 그 사이에 이바노프는 주삿바늘을 자기 목덜미에 푹 꽂아버렸다.
"하하… 어떠냐…? 이제 아무리 너희의 잘난 기억소거 기술이라도… 나를… 난… 어…?"
체념에 가까운 비웃음으로 세 명을 조롱하던 이바노프는 곧 말문이 막힌 채 웃음을 멈췄다. 어지러움과 혼란스러움에 이바노프는 휘청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망연히 유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분노도 슬픔도 아닌, 당혹과 절망이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아냐! 사실이 아냐!"
"아이브!"
"저… 저거 대체 무슨 일이지?"
"으아아악!! 아냐!! 아니라고, 난… 난 도대체… 나는!!"
"아이브… 설마, 기억해낸거야…?"
유리의 물음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이바노프는 그녀의 얼굴을 홱 돌아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브릴러와 쯔산은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둘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바노프가 떨고만 있자 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도 넌 그랬어… 내가 말하려고 했지만 듣지 않고 화만 냈지."
"마리아…"
"정말 미안해. 너한테만큼은 그렇게 미루지 말고 바로 말했어야 했는데…"
"마리아, 제발…"
이바노프가 벌벌 떨면서 유리를 올려다봤다. 그 자신은 들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 다툼의 기억 속에 파묻은 채 까맣게 잊어버렸던 그 말. 방금 망각의 감옥이 부서진 순간부터 미친 듯이 뇌리를 헤짚고 뛰어다니고 있는 그 말. 그가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던 바로 그 말을 유리가 꺼내지 않기를 그는 간절히 바랐지만, 현실은 매정했다.
"그래. 그때… 난 네 아이를 가졌어."
이바노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이바노프에게, 유리는 말할 기회가 없었던 그녀의 묵은 감정을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난 기뻤어… 소련 패망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신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고 자살해버린 후로, 처음으로 진짜 내 가족을 가진 거였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아이브 너와… 우리의 아이라서… 나는 정말로 행복했어."
"…"
"하지만 또 두렵기도 했어. 고아가 되고 비정규군에 거둬져서 수많은 목숨을 뺏어왔던, 우연히 재단에 거둬지고 나서는 인류를 위해서라며 또 사람을 죽여왔던 나였으니까. 그때까진 너에게서 위안을 얻어으며 잊어왔지만, 아이가 생기니 덜컥 겁이 났어. 내게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너란 사람이 내게는 과분한 축복인 것 같았어… 난 시간이 필요했어."
"그만…"
"마침 그때 내부보안부 수사관직을 제안받았던 거야. 내부보안부로 들어가면서 요원을 관두고 과학부 연구원 직에 자원했어. 안정이 필요하기도 했고,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기 싫었거든. 일이 적성에 맞으면 너와 함께 과학부로 완전히 옮겨서 함께 연구하며 오붓하게 살고 싶기도 했고…"
"그만해…"
"임신했단 사실은 내가 자신감을 갖게 될 때까지 숨기려고 했어. …설마 네가 내 전근을 배신이라 생각할 줄은, 그렇게 화를 낼 줄은 정말 몰랐어. 정말… 언제나 진심으로 그때를 후회해."
"나… 나는…"
"아이는… 2개월을 채운 그 날에… 날 떠났어."
"난 대체…! 으… 으아아아아!!"
이바노프는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버린 것인지 뒤늦게 깨닫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통곡했다. 떠오르는 기억 하나하나가 자신의 죄악을 낱낱이 지목하고 있었다. 이기심을 증명하고 있었다. 자신과 자신이 사랑한 사람을 어떻게 망쳐버렸는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그것을 그는 버텨낼 수가 없었다. 눈물과 목소리가 차라리 말라버리길 바라며 그는 울었다. 어느새 안개에 섞여들어온 수면제를 한껏 들이쉬며, 그는 쓰러져 잠들어버릴 때까지 계속 울었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는 때늦은 사죄만을 하염없이 되뇌었다.
"마리아… 미안해…"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어서… 유감이네."
"비극이로군요…"
"아뇨, 괜찮아요… 이제라도 바로잡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정신을 잃은 이바노프를 바르게 누인 두 남자가 심정을 말하자, 눈물 범벅이 된 눈가를 손으로 훔치며 유리가 대답했다. 자신에게서 최악의 형태로 떠났다가 최악의 형태로 돌아온 어리석은 한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싶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쇳소리 같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발을 멈춰세웠다.
"이야~ 축하해, 축하해. 잘도 해줬구만."
"멈춰. 움직이지 마라!"
"너희야말로 죽고싶지 않으면 꼼짝 마라. 개새끼들."
방독면을 쓴 정이 신호하자 컨테이너의 천장이 반으로 쪼개지더니 벽과 함께 옆으로 완전히 열렸다. 주변에는 BE의 세포원들이 소총으로 무장한 채 브릴러와 쯔산, 유리를 일제히 노리고 있었다. 셋은 주머니칼과 권총을 모두 떨어트리고 천천히 두 손을 들었다. 그들의 항복을 확인한 정은 얌전히 엎어져있는 이바노프를 보며 투덜댔다.
"이런 망할 자식, 어떻게 모으고 숨겨온 총기들인데 이딴 타이밍에 꺼내게 만들어? 혼자 맡겠다고 지랄을 하더니 지가 알아서 당해주시고 이 꼴이네. 썩을 놈. 죽어."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주저없이 이바노프의 머리에 납탄을 갈겼다. 이바노프의 몸뚱이가 격하게 꿈틀거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넌 이제 필요 없어. 뭐 듣지도 못하겠지만.
"아이브!! 안돼!!"
"닥쳐 여자! 어이, 주사 챙겨. 미적대고 있을 시간이 없으니 이놈들은 시설로 끌고 간다."
"오케이."
"이봐, 얌전히 따라와!"
세포원 하나가 위협적으로 말하며 유리의 팔을 잡아챈 순간, 총성과 함께 어디선가 안개를 가르고 날아온 총알이 그 세포원의 어깨에 깊숙히 박혔다.
"끄아아악!!"
"뭐야?!"
"적의 공격이다!"
"둘 다 머리 숙여요!"
쯔산이 자세를 낮추며 둘의 옷가지를 잡아당기자 유리와 브릴러도 황급히 몸을 숙였다. 곧이어 하적장 곳곳에서 재단 전투원들이 튀어나와 엔트로피 조직원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브릴러가 공유한 위치 정보를 받자마자 기존 수색 현장을 보안부에 맡겨둔 채 급히 달려온 지역특무부대 뮤-39 "등대지기"의 현장 요원들이었다. 권총으로 무장하고 방독면을 착용한 그들은 철저히 엄폐를 갖춘 채 교대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교차 사격으로 적을 몰아 붙여갔다. 정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토끼지 마! 어차피 경무장한 떨거지들이다! 침착히 엄폐하면서 빠져!"
"납치한 놈들은 어쩌죠?"
"끌고 와! …저항하면 여자 빼곤 죽여버려!"
"허, 누구 마음대로!"
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쯔산과 유리는 자리를 박차고 BE 전투원을 하나씩 덮쳤다.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특무부대원에 신경을 뺏기고 있던 그들은 손쉽게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유리는 소총을 멀리 차버린 뒤 정신없이 이바노프에게 달려갔고, 쯔산은 소총을 뺏어들고 조종간을 단발로 놓은 채 작은 몸으로 반동과 씨름하며 총탄을 쏘아댔다. 멀리서 뮤-39의 분대장 기선이 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게 들려왔다.
"인질에 주의해라! 보호 대상은 소년과 금발 남성! 그 외에 현장에 있는 자는 전부 사살해도 상관 없다!"
그 지시를 듣고 쯔산은 경악했다.
"잠깐, D-3325도 보호해야 한다!"
"D계급까지 일일이 챙길 여유는 없다! 이의는 작전이 끝나거든 제기해라!"
기선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결정이었다. 주목을 피하려 언제나 총포법을 준수해 왔던 BE가 드물게도 중무장을 하고 있던 탓에, 서둘러 구출을 끝내고 이탈하지 못하면 역으로 권총 따위로 무장한 그들이 궁지에 몰릴 판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뮤-39는 원래 전투부대가 아닌 변칙개체 대응 전문 부대이기에 이렇게 정면에서 맞붙는 총격전은 아무래도 불리했다.
상황을 파악한 브릴러는 다급히 유리에게 달려갔다. 유리는 피웅덩이 위에 누워있는 이바노프의 싸늘한 주검에 손을 올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라도 지켜내기 위해선 전황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그녀를 이곳에서 빼내야 했다.
"유리! 지금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요! 특무부대 쪽으로 갑시다."
"…"
"그래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불가피할 때의 이야기지, 우리랑 같이 가면 전부 지켜줄 겁니다. 자, 어서!"
"…아뇨. 아직 못 가요."
"뭐라고요?"
유리는 브릴러의 권총을 집어들며 쯔산에게 질문했다.
"쯔산, 빼앗겼다는 당신 코트. 어딨는지 알겠어요?"
"예? 컨테이너에 가두기 직전에 놈들이 근처에 버렸습니다만,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유리, 지금 저쪽으로 가면 엔트로피한테 잡혀 죽든가 특무부대에게 총 맞고 죽든가입니다. 어서…!"
그렇게 말하던 브릴러는 그에게 고개를 돌린 유리의 얼굴을 보자 순간 말을 잃었다. 유리의 간절하면서 단호한 눈빛, 더이상 소중한 것을 잃을 수 없다는 의지가 담긴 그 강렬한 눈빛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브릴러는 몇 시간 전에 최두익 박사가 자신의 눈에서 같은 것을 보았으리라는 것과, 자신 역시 그녀를 막을 수 없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시선을 돌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결연히 유리를 정면에서 마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막을 수는 없겠군요."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브릴러는 자신 역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렇다면 나도 같이 가겠습니다. 내가 함께 있으면 적어도 특무부대는 섣불리 먼저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고마워요!"
"미쳤어요? 둘 다 죽고 싶은 겁니까?!"
"쯔산, 이걸 부탁합니다. 방금 이바노프의 자백을 도청한 것이 녹음되어있으니, 혹시 일이 잘못되더라도 이걸 증거로 쓸 수 있을 겁니다."
"네? 이, 이봐요, 브릴러 박사! 기다려요!"
쯔산이 얼떨결에 녹음장치를 받아들자, 그가 뭐라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유리와 브릴러는 그대로 달려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