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이게 맞을 거다.
SCP는 확보되었고 (곧 죽을 것 같지만) 가족끼리도 다 화해됐고 모든 인원도 안전하게 구조되었다. 그것도 내 명령을 무시한 외부인원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SCP를 퇴역시킬 수 있었던 지극히 위험한 결정은 분심부 소속이 아닌 오로지 나의 결정에 의해서만 이뤄졌기 때문에 적어도 저 부서에는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확실히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과인 건 맞는 거 같다.
그러니까 이게 가능한 일이었구나 싶었다.
저기서 일어났던 행운이 조금씩만 일어났어도 살아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저런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어머니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입양 보내지지 않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저렇게 입이 무거운 가족 구성원이 있었다면 오빠가 어느 나라 정보부 고위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세트 메뉴로 정보부에 잡혀 살지 않았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렇게 끝까지 자길 기억해주는 가족이 있었다면 자아를 잃어버린 자기 오빠에게 조종되지 않았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제서야 서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로 확인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 가해진 충격이 너무 커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가만히 둔다면 서로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헤어지는 결말밖에 안 나올 것이다. 분심부는 바보같이 마음이 통했으니 됐다고 좋아하겠지만 나는 그런 거 제일 싫어한단 말이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을 하라고.
그렇지만 이 영화에는 빌런이 있으니,바로 내가 멋지게 퇴장해주고 자극을 주는 역할까지 제대로 수행한다면 다른 결말이 나올 수 있다. 마침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결말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운이 좋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적어도 세 사람이 죽었을 일이 나 하나에만 일어났고 무엇보다 나는 살아있긴 하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그 운을 저들에게 조금 떼어주는 것이다.
원래는 이 순간에 짜증을 부리고 위협을 가할 생각이었다. 아직도 이 SCP의 격리에 대한 모든 권한은 나에게 귀속되어 있고 지금 이 상황 전체가 나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결과였다.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을 명령 불복종으로 쏴죽여도 될 거다. 위협사격 정도를 한다면 모두 나에게 달려들 거고 그러면 나를 딛고서 모두들 만족감에 한마디씩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순간에 나마저도 마음속이 차갑게 식으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흥이 죽었다고 해야 하나. 언젠가 오빠한테 이런 점이 나의 단점이라고 들었던 게 생각난다. 결국 너는 마지막 순간에 감정이 사라져버리고 결국 자기도 잃어버릴 것이라고 경고했었는데 그게 요원으로서 단점인지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단점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적어도 자기 여동생에게 오빠로서 건네주는 선물 같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웃기게도 나는 그걸 오빠가 해준 소중한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런 본성이 여러 가지로 쓸모가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말 실제로 사람에게 방아쇠를 당겨야 할 때가 와서야 나는 누굴 싫어할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고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칠 수 있었다. 어찌 저 찌 다시 오빠와 만나게 되었지만…. 그건 좋은 가족을 만나고 못 만나고를 떠나서 운명 수준에서 좆된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걸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누굴 못 죽인다는 건 실제로 상냥하다고 평가받는 요소 중 하나니까 말이다. 나는 그 이유가 좀 꼬여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 순간에 와서야 이게 단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제는 기념품 정도로는 생각해줄 수 있을 거 같다.
"권준환 씨. 지금 이 상황 무엇으로 책임질 거죠? 아니, 진짜로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제가 원상태로 복구시킬 거니까. 분심부 분들은 남겨두어도 SCP 포함해서 권준환 씨의 기억만큼은 소거 처리를 수행할 거에요."
준비된 대사를 지걸이면서 나는 무대에서 어떻게 퇴장해야 할지 고민한다. 뒤늦게 찾아온 감찰부에게 잡혀가야 하나? 아님 윤금선 박사님께 말을 끊기고 완전히 반박돼서 쭈그러져 있어야 하나? 지금 보니 권준환 씨가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아저씨…. 그렇게 주먹을 세게 쥐시고 제 눈을 째려보시면 벌써 얼굴이 뭉개지는 느낌인데요…. 그냥 나는 눈을 감아버리고 턱을 살짝 들어 어딜 맞아도 1m는 나뒹굴어도 혀 안 씹게 준비한다.
"방금 전 화해하는 기억은 남겨 드리죠. 그래도 장례식 때 남겨야 할 추억은 있어야 할 거 아니…."
너무 세게 맞은 거 같다. 그냥 주먹에 턱을 갖다 대서 깔끔하게 뇌진탕으로 의식상실하는 걸로 할 껄 그랬나?
"어흑, 말이 안, 허억."
아니 진짜 너무 세다. 진짜 격투기에 재능 있는 거 아니야? 일단 일어나야 할 거 같다. 못 일어나면 파운딩 자세로 더 맞을 거 같다.
"감히… 이럴 수가 있어…?"
아무래도 코피가 제대로 터진 거 같은데, 살짝 뇌도 흔들렸는지 중심이 안 잡혀서 좀 더 누워있으면서 대사를 생각해내야 할 거 같다.
"어차피…. 너네들도 아무것도…. 몰랐잖아….?"
결국 나는 흘러나온 코피가 고이다 못해 숨을 들이마실 때 피도 함께 코인지 입인지로 들이마시게 돼서야 몸을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분심부 당신들…. 윗분들이 이걸 어떻게 볼지 생각이라도 해봤어? 결국 책임지는 건 나밖에 없잖아."
이걸로 시말서를 몇 장이나 써야 할까. 분심부 몫까지 대신 써주는 것도 계산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정말이지, 난 당신들을 이해 못 하겠어…. 내 오빠는 이런 상황에서 진짜 죽어버리는 걸 골랐다고…."
아마 지금 굉장한 꼴일 거다. 일어나면서 피가 옷에만 묻은 게 아니라 입까지 흐르고 있을 테니까. 너무 굉장한 꼴이 돼버려서 또 이것들은 말도 못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이런 분위기를 끝까지 끌어모아 보기로 한다.
"혼자 착한 척하는 동안 다른 요원들은 어떻게 되는지 생각을 해봤으면 좋겠어…."
나중에 반드시 사과해야할 거다. 하지만 지금은 입을 털어야 한다. 혀 안 씹길 잘했다. 지금 나까지 아무 말도 못 한다면 앞으로 영영 저 둘은 말할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다. 아까 전 내가 기억을 지운다고 협박을 하자 반응을 보였던 것을 기억해낸다. 한 번 더 건드리면 다시 뭐라고 반응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권준환씨 당신…. 딸에게 잘 대해줘요, 응? 무슨 뜻인지 알겠지?"
할아버지는 남겨두기로 하자. 시간도 없는데다가 처음부터 주인공은 저 둘이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주인공은 한 명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패착이었다. 하지만 역시 나는 이런 모든 계획과 행동이 철저하게 뭉개지는 것으로 패배가 확인되는 악역을 좋아한다. 이제 도망치기만 하면 모두의 반응이 터져 나올 것이다.
"저는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그동안 알아서 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세요들…."
그러니까 이게 맞을 것이다. 처음부터 맘대로 안되는 업무였는데 그래도 마지막에는 제대로 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더 좋은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그냥 저 상황에서 진심으로 공감하고 울어버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지 못해서 나는 저 좋은 사람들에게 협박을 가하고 얻어맞고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해버렸다.
이러니까 내가 악역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