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긴 꿈, 혹은 아주 짧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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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

등장인물:
1. 최산해(변칙예술학부 소속 예술가, 금속 공예와 심령질 예술이 주 전공이다.)
2. 최신해(최산해의 동생으로, 기동특무부대 을호-2("잊힐 의무")의 분대원이다.)
3. 당신(이 대본을 읽고 있다.)

요약: 최산해는 머리가 잘려 죽게 된다.

탁, 탁, 탁. 가스레인지의 불꽃이 켜지고 넓은 철판이 열을 받아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양파를 반으로 가르고 껍질을 벗긴다. 새햐얀 속살을 드러낸 채소를 도마에 눕히고, 식칼로 결을 따라 썰어낸다. 내가 프라이팬 대용으로 쓰는, 안쪽이 오목한 둥근 철판에 기름을 두르고 잘게 썬 양파를 뿌린다. 양파가 갈색 빛을 띄며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미리 준비해 뒀던 베이컨과 송이버섯을 같이 넣고 1분가량 볶은 후 베이컨을 넣고 한 번 더 금속판을 돌린다. 마지막으로 밀가루 한 티스푼과 후추 조금과 우유를 자박하게 넣어 준 후 수분이 졸아들 때까지 기다린다. 자, 맛있는 크림 파스타 소스 완성.

요리는 꽤 재미있는 일이다. 제대로 요리했다는 가정 하에, 이 맛있고 달콤한 작품들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내가 ‘만들었던’ 다른 작품들과는 정반대다. 식탁에 앉아서 내가 만든 크림 파스타의 맛을 본다. 그럭저럭 괜찮네. 최근에 요리에 취미를 붙인 사람이 만든 것 치고는 합격점이라 부를 만하다.

나는 냉장고에서 꺼낸 피클과 식빵 한 조각과 함께 파스타를 끝까지 먹어치운 후, 프라이팬 대용으로 썼던 철판을 적당히 우그러뜨려서 베란다의 쓰레기통에 버린다. 변칙적 금속 공예 능력의 많은 장점 중 하나는 쓰고 남은 금속판을 설거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금속은 예술적 용도로 실컷 쓰고도 차고 넘칠 만큼 많이 있다. 이 정도의 낭비는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막 맥주 캔을 따서 소파에 앉으려던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손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한다. 화면에는 ‘신해’라는, 내 동생의 이름이 떠 있다. 나는 한 손으로 맥주 캔을 들고 다른 손으로 폰을 받치고 통화 연결 커튼을 누른다.

“어, 신해야. 잘 지냈냐?” 내가 묻자 전화선 너머로 발랄한 대답이 돌아온다. 동생의 기분이 꽤 좋은가 보군.

신해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최근에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말해 주기 시작한다. 저번 주 주말에는 경주로 파견을 가서 오백 년은 묵은 심령 독립체들 몇을 상대하고 왔구나. 그래, 심령체를 상대하는 기동특무부대가 최근 인기가 많나 보네. 이세율 팀장이 이러다 휴가는 언제쯤 나가냐면서 불평했다고, 뭐 어쩌겠어, 현장직의 숙명이지. 유진이를 최근에 만났는데 헤어스타일을 바꿨는데… 근데 걔가 누구라고? 아, 기특대 동료였던 사람. 지금은 다른 곳으로 전근 갔고. 그래, 그래.

네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야. 내 대답 속에서 묻어나오는 안도감을 신해도 느꼈는지, 그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신해는 자신의 소식을 갈무리하고는 요즘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어본다. 나는 적당한 대답을 고른다. 나? 나야 늘 똑같지, 풍소경 선배랑, 변칙예술학부에서 적당히 서류 업무 처리하고, 짬이 나면 예술 작품 구상하고. 금속은 재단에서 하도 많이 줘서 요즘 처치곤란이야, 요리할 때 일회용 프라이팬으로 쓰고 버릴 수준이라니까…

내 식상한 일상에 대한 보고는 숙소 밖에서 들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의해 중단된다. 나는 잠시 전화기를 내려놓고 창밖의 동태를 살핀다.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었던가. 나는 안심하고 다시 동생을 부른다.

"미안 신해야, 잠깐 뭐가 들려서.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폰 화면을 보니 통화는 이미 끊긴 상태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폰을 내려다본다. 얘가 이렇게 작별 인사도 없이 갑자기 끊을 애가 아닌데. 나는 전화를 한 번 더 걸지 고민하다가, 그냥 내일 하기로 하고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TV를 켜고 맥주를 입에 털어넣는다. 식도를 넘어가는 시원한 탄산에 뇌가 고양되는 느낌이다. 그래, 이 느낌이지. 너무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못했…

밖에서 다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다.

TV 속 토크쇼의 백색 소음은 내 발소리를 줄여 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손에 잡을 만한 금속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보다 탁상 위에 올려두었던 여분용 차 키를 발견한다. 차 키를 손에 쥐고 변형시켜서 길고 날카로운 펜싱검을 만든다. 얇지만 사람의 두개골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이다.

나는 지금 공식적으로 재단의 직원 소속이다. 게다가 여기는 재단 직원들이 묵는, 기지 내의 숙소이고. 비상벨을 누르면 2분 내로 경비 인원이 달려올 수 있을 정도로 삼엄한 보안이 적용되는 곳이다. 그러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내 숙소의 현관문 밖에 누군가 숨죽여서 기다리고 있다는 가설은 상당히 신빙성이 낮다.

그러나 예술은 확률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척을 진 자들은 기본적으로 단단히 미친 놈들이기도 하고. 우리는 네가 배신한 사실을 알고 있어, 그리고 네가 쓰는 그 얕은 수법은 통하지 않아. 재단의 심장부에서 목이 잘려 죽는 기분은 어때, 최산해? Are We Cool Yet? 그들의 목소리가 이미 내 뇌에서 요동치며 울린다.

현관문의 도어락을 연다.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된다. 나는 바깥에 있을 자가 그 소리를 듣고 준비할 틈을 주지 않도록, 곧이어 문을 힘껏 열어젖히며 잠재적인 위협 분자에게 검을 겨눈다.

그러나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텅 빈 복도만 남아 있다.

나는 땀에 젖은 손을 천천히 펴고 펜싱검을 바닥에 떨어트린다. 그래. 최근에 너무 신경과민 상태였나 보다. 별것 아닌 일에도 너무 긴장하게 되는 걸 보면. 여기는 안전한 곳이다. 난 괜찮아. 모든 게 잘 풀리고 있어. 깊은 한숨을 쉬고 바닥에 놓인 차 열쇠였던 그것을 다시 손에 든다. 내일 경호부에 가서 열쇠를 하나 더 달라고 해야겠군. 그리고 신해한테 안부 전화도 다시 하고.

곧이어 이어져야 할 생각은 내 머리가 목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중단된다. 흐릿해지는 시야 너머로 머리를 잃은 내 몸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것이 보인다. 어라, 이상하다. 팔이 안 움직여. 턱이 벌어지고 눈이 멋대로 감긴다. 누군가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ACT 2

등장인물:
1. 최산해(변칙예술학부 소속 예술가. 머리가 잘렸다.)
2. 풍소경(변칙예술학부 부장.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가치 있다고 한다.)
3. ???(최산해의 머리를 잘랐다.)
4. 당신(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져 있다.)

요약: 최산해는 (또다시) 머리가 잘려 죽게 된다.

따르르르르릉. 알람 소리와 함께 나는 깨어난다.

일어나자마자 내 목을 확인한다. 내 머리랑 목은, 최소한 지금은, 몸에 잘 붙어 있다. 기분 나쁜 악몽이었던 모양이다.

눈곱이 낀 눈꺼풀을 연거푸 깜빡여 시야를 맑게 한다. 나는 소파에 거꾸로 누워 있고 양복 슈트를 이불 대신 덮고 있다. 와이셔츠는 풀어헤쳐진 채고, 입가에는 침이 말라붙은 자국이 있다. 깜빡하고 샤워를 하지 않고 잠들었던 건가? 지금이 몇 시지? 폰을 들어 확인해 보니 아침 8시 반이다. 세상에, 늦잠이야.

정신을 차리기 위해 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가서 세수부터 한다. 찬물이 닿자 아직 남아 있던 잠이 확 깨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 악몽은 빨리 털어 버리고 가서 일해야지. 오늘도 해야 할 게 산더미야. 양치와 머리 감는 것까지 마친 후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이제 출근 시간까지 12분 남았다. 나는 풍소경 선배한테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덜 마른 머리를 맹렬하게 헤어드라이어로 말리고 있는데 선배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나는 긴장하며 전화를 받는다. 예상대로, 풍소경 선배의 의구심 가득한 “너 출근하고 있지?”라는 질문이 가장 먼저 들려온다.

“크흠, 그게요, 사실은 저 아직 집이에요.” 나는 거짓말을 포기하고 이실직고한다.

“그래, 왠지 그럴 것 같더라. 맨날 10분 전에 사무실로 출근하는 놈이 웬일로 얼굴을 안 비춰서 말이지. 기왕 늦은 거 천천히 와. 서류 업무는 나 혼자서 처리해도 괜찮으니까. 오후에 프로젝트 회의만 같이 하자.”

선배가 하품하며 말한다. 나는 그의 귀찮은 듯한 말투 속에 숨겨진 배려심을 읽고 감사를 표한다. 그런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배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뚝 끊는다. 나는 잠시 당황한 얼굴로 폰을 내려다본다.

어라, 안 그런 듯하셨는데 역시 화나신 건가? 당황감에 이어 약간의 불안감이 마음속에 자리한다. 많이 화내시면 어쩌지, 출근해서 풍소경 선배에게 사과의 의미로 뭐라도 드려야 할까. 잡생각을 하면서 양말을 발에 욱여 넣고 정장 구두를 신는다. 변칙예술가라도 직장에 출근할 때는 양복을 입는 것이 낫다. 물론 양복이 하와이안 셔츠보다 아방가르드함은 떨어지지만, 어차피 직장은 예술적 영감의 표출 공간이 아니다.

출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인한다. 보일러 꺼 놨고, 형광등 꺼 놨고, 지갑, 휴대폰, 이어폰, 휴대용 금속 판 5개 모두 있고, 내가 가스레인지 밸브를 잠궜던가? 고개를 돌려 보니 밸브가 열려 있다. 나는 혀를 차고 구두를 다시 벗은 뒤 밸브를 잠근다. 나 참, 이런 거 하나하나가 다 관리비인데. 어젯밤부터 열어 놨으면 분명…

어라, 내가 어제 요리를 했었나?

손이 우뚝 멈춘다. 내가 언제쯤 곯아떨어졌었더라. 분명히 저녁을 먹기 전이었을 거야. 양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크림 파스타를 요리했던 건 그 악몽 속에서였다. 하지만 그러면 밸브는 누가 연 거지?

침착하자. 나는 깊게 심호흡하고 휴대폰을 열어 최근 통화 기록을 본다. 그래, 어제 신해와 통화한 기록은 없다.

그럼 그게 꿈이었던 건 맞는 거군. 됐다. 신경과민이 되면 안 돼, 가뜩이나 요즘 예술 작품도 잘 안 만들어지는데. 그건 그냥 악몽이었을 뿐이야. 이상하고 기분 나쁜 악몽. 밸브는… 그냥 내가 어제 아침에 깜빡하고 열어 놨었나 보지.

문득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그 놈의 형상이 스쳐지나간다. 내 악몽에서 단골 손님로 나오는 것. 신해와 나의 원수. 그 면상을 떠올리자 떨리던 몸이 오히려 안정을 되찾는다. 무슨 악몽을 꿔도 그 시절보다 더 끔찍할 수는 없어. 목이 잘리는 것쯤이야 견딜 만하지.

빠르게 뛰던 심장이 완전히 평소의 심박수를 찾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나는 현관문을 연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나를 반긴다. 다른 직원들은 이미 다 출근했는지 남은 텅 빈 복도만 남아서 나를 반긴다. 나는 문을 닫고 도어락이 잠긴 걸 확인한 뒤 걸음을 옮겨서…

바스락.

빠르게 고개를 돌리지만 상대가 훨씬 더 빠르다. 내 목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하얀 구름이 내 시야를 가린다. 입에서 피 특유의 철분 섞인 메스꺼움이 느껴진다. 내 머리가 바닥으로 착지하는 순간 나는 이미 생명을 잃은 하나의 시체로 변해 있다.

비웃지 마. 다 들린다고.


ACT 3

등장인물:
1. 최산해(변칙예술학부소속 예술가.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2. 최산해(그 유명한 ‘무디 블루스’를 만든, 악명 높은 Are We Cool Yet 소속 변칙예술가. 자신의 능력으로 유령들을 이 세상에서 제거하는 것이 목표이다.)
3. 최산해(최산해의 머리를 잘랐다.)
4. 당신(이 글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한다.)

요약: 당신은 최산해가 왜 죽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좋아,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어.

눈을 뜨자마자 목을 확인한다. 다시 잘 붙어 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해가 막 지고 있고, 시계는 오후 6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정상적인 생활이었다면 퇴근해서 막 저녁을 만들어 먹었을 시간이었겠지.

지금 내가 무슨 시간 변칙 현상에 갇힌 건가? 아니면 꿈 관련? AWCY 놈들이 오네이로이와 손을 잡았나? 신해는 어떻게 된 거지? 조요의 인도자 놈들이 뭔가 수를 썼나?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에 초점이 잡히지 않는다. 입에서 단내가 나는 걸 보니 오랫동안 굶은 모양이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서 아무 음식이나 섭취하고픈 욕망을 애써 내리누른다. 밥을 먹는 것, 출근하는 것, 죽는 것조차도 이 반복되는 꿈 속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건 여기서 빠져나올 단서를 잡는 거다.

기억상으로는 분명히… 그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었다. 두 경우 모두에서. 현관문 밖을 나서는 순간 목이 잘렸고. 바깥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어. 시간은 여기에 관련이 없나? 내 의식은 어떻게 된 거지?

가장 먼저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폰을 능력으로 부숴 버린다. 이게 일종의 의식 같은 거라면, 가장 먼저 없애야 할 건 전화를 받는 상황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내가 아는 인물에게 전화가 걸려 왔었어. 그 연결고리를 끊어야 해.

그 다음으로 현관문에 손을 대고, 문 자체를 변형시켜서 날카로운 가시가 달린 방패로 만든다. 문을 문짝에서 떼어내고 몸 뒤에 밀착시킨다. 지금까지 놈은 항상 뒤에서 기습해 왔으니, 이러면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지, 아예 문을 통과하지 말고 뒤로 돌아서 기습을 시도해 볼까? 재단의 모든 건물은 침입을 대비해 철근을 빡빡하게 박아넣은 구조다. 이 철근들을 조금 휘게 만들어서, 건물의 붕괴는 막으면서도 내가 벽 틈새로 빠져나갈 수 있게 통로를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시험 삼아 벽에 손을 대고 건물의 철골 구조를 변형시킨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벽은 꿈쩍하지 않는다.

뭐지? 분명 벽지 안에 금속이 있는 게 느껴진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통짜 건물이니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금속을 뽑아내 무너뜨릴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거기 간섭할 수가 없다. 무슨 결계라도 있는 것마냥.

두어 번 정도 더 변형을 시도해 보다가 포기한다. 좋아,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나는 고민 끝에 몸에 줄을 묶어서 바깥의 베란다 창문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한다. 로프 강하는 취향이 아니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과감한 선택이 필요한 순간도 있는 법이다.

방패로 쓰려 했던 문을 다시 변형시키고 길게 늘여서 밧줄로 만든다. 밧줄 끈의 한쪽은 베란다 너머 거실의 소파에 묶어 놓고 한쪽은 내 허리에 동여맨다. 내 몸무게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줄을 한 번 세게 당겨 보자 소파가 아주 살짝 기우뚱하더니 다시 중심을 잡는다. 음, 이 정도면 괜찮겠어.

망설임 없이 끈을 묶은 채로 베란다 난간 밖으로 넘어간다. 찬 바람에 귀가 시리고, 몸은 추락에 대한 공포로 팽팽하게 긴장해 있다. 순간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올라서 몸이 멈칫한다.

정신 차려, 최산해. 넌 그때 그 어린애가 아니야. 당장 여기서 탈출해. 이를 악물고 줄을 조금씩 풀며 강하를 시작한다. 내 손에 닿은 철줄은 이리저리 휘어지고 물렁해진 채로, 조금씩 늘어나며 나를 아래로 계속해서 내려보낸다. 1층에 도착하자 나는 한때 문이었던 얇고 긴 줄을 벗어던지고 숙소의 로비로 들어선다.

아냐, 건물 구조가 이렇게 될 수는 없어.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다시 로비가 있다고? 내 의문은 뒤따라오는 더 큰 의문에 덮여 사라진다. 내 눈앞에 있는, 재단 직원 숙소 로비에 당당하게 전시되어 있는 저것 때문에.

익숙한 물건이다. 내가 만든 것 중 꽤 유명한 놈. 어디에 전시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던 건 기억난다. 내가 과거의 망령을 쫒아 변칙예술가로 활동하던 당시에 만들었던 것. 잘못된 신념을 가지고 만들었던 것 중에 가장 단단한 것. 그 이름은…

“무디 블루스.” 내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건다. 나는 고개를 돌린다. 옆에는 최산해가 서 있다.

“내 걸작 중 하나지. 내 신념의 표현이기도 하고. 솔직히 인정해, 너도 저거 모양은 꽤 잘 빠졌다고 생각하고 있잖아? 비록 속은 완전히 잘못됐지만, 지금의 네 방식대로 뜯어고치면 괜찮은 리메이크가 나오지 않을까… 하하, 네 생각이 다 보여.”

“넌 누구지?” 내가 쏘아붙이자 최산해는 미소를 짓는다.

“왜 이래, 눈이 삐인 거야? 최산해잖아. 심령 학살자. 모든 유령을 제거하는 게 목표인 사람. 변칙예술가, Mt.Sea. 만나서 반가워.”

“AWCY 놈들이 보냈나? 이런 식으로 날 협박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뭔지 모르겠는데. 난 이미 풍소경을 죽이는 데 실패했어.”

최대한 방어적으로 나간다. 저쪽이 내 상황을 모르고 있다는 전제 하에. 순진한 척, 자신의 모자란 실력에 분노에 휩싸인 변칙예술가인 척. 상대가 뭘 숨기고 있는 건지 파악해야 해.

“밤하늘에 별이 참 예쁘지 않아? 한 번 봐봐, 오늘 은하수가 한국에 뜨는 날이야. 마침 달도 그믐달이고. 너랑 풍소경이 처음 만나던 날이 딱 이랬는데.”

최산해는 내가 뭐라고 말하거나 말거나 딴소리만 하고 있다. 손을 뻗어서 녀석의 목을 조를까 고민하다가 그만둔다. 폭력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단계는 오래전에 지났을 뿐더러, 그를 죽인다고 일이 잘 풀릴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대신 녀석을 지나쳐 로비의 유리문으로 향한다.

“지금 나가게? 별로 좋지 못한 생각이야.” 뒤에서 녀석이 소리친다.

“왜?”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묻는다. 이제 유리문이 코앞이다. 나는 문에 오른손을 얹고 힘껏 밀 준비를 한다.

“다음엔 신해가 좀 슬프게 될 거거든.” 녀석이 말하는 순간, 나는 손에 들어가 있던 힘을 푼다.

“너 지금 뭐라고-“

바스락.

뒤를 돌아보는 순간 목이 날아간다.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다. 위아래가 뒤집힌 시야 사이로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내 몸이 보인다. 그리고 웃고 있는 최산해의 모습도. 피칠갑을 한 놈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다.

귀가 아파


ACT 4

등장인물:
1. 최산해(고통스러워한다.)
2. 당신(고통스러워한다.)

요약: 최산해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눈을 뜨고 한숨을 내쉰다. 목을 매만질 필요는 없다. 어차피 잘 붙어 있을 테니까.

이 꿈인지 시간 변칙인지 뭐시기에서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죽음이 루프의 조건인가? 그러나 섣불리 자살했다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젠장, 재단은 내 상태를 언제쯤 파악하는 거야?

굼뜬 몸을 일으켜서 냉장고로 향한다. 시간대는 아마 아침인 것 같은데, 어차피 여기선 더 이상 의미가 없겠지. 나는 냉장고를 열고 맥주를 들이켰다가 얼굴을 찌푸린다. 딴 지 이틀은 지난 것 같은 밍밍하고 탄산이 다 빠진 맛이다.

맛없어. 나는 한 입 먹고 남은 맥주를 전부 싱크대에 버린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소파에 털썩 누워 손으로 눈가를 덮는다.

이 꿈인지 루프인지로 들어오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풍소경 선배랑 제 2회 변칙예술 전시회의 구역별 테마를 정하는 일이었다. 제 1회 전시회가 성공적으로 끝난 이후 지속적으로 2회 요청이 들어와서 선배는 21K기지와 일정을 조율하고 있었고, 나는 이번 전시회에 각 구역별로 적용될 소규모 테마에 대해 다른 인원들과 토론하고 있었다. 그게 다였고,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다. 내가 뭔가 기적술의 트리거를 누를 만한 행동을 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생각하자. 생각하자. 예전에 이 비슷한 일을 겪었던 변칙예술가를 들어 본 적이 있어. 자신이 창조해 낸 무한한 꿈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결국 스스로 손목을 그어서야 잠에서 깨어났지. 하지만 나는 최근에 꿈과 관련된 예술 활동을 해 본 적이 없다. 애초에 내 전공은 금속 공예와 심령질 조작이고.

고민을 거듭할수록 이 무간지옥은 내가 스스로 굴러떨어진 실수이 아니라 누군가가 정교하게 만든 함정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아까 만났던 ‘다른’ 최산해도 그렇고, 날 지켜보고 있는 것들이 이 안에 있다. 후보자는 둘 중 하나겠지. 자신들의 신을 되찾으려는 조요의 인도자 놈들이거나, 아니면 배신자를 처단하려는 AWCY 놈들이거나. 어느 쪽이든 좋지 않은 상황이다.

소파에서 다시 몸을 일으키고 주위를 둘러본다. 좋아, 이 루프인지 꿈인지 모를 배경은 분명히 내 심상을 반영하고 있어. 그러면 내 마음 상태가 주변 환경에 변화를 미칠 수도 있다는 뜻일까? 나는 창고에서 금속 판을 하나 찾아서 망치 모양으로 변형시킨 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TV를 향해 힘껏 휘두른다.

TV 화면은 잠깐 움푹 파였다가 다시 원래대로 복구된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대로 이 시공간이 어느 정도는 조절이 된다는 거군. 미약하기는 하지만.

이것 참, 가면 갈수록 모르겠네. 그냥 재단 직원 누군가가 날 발견할 때까지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게 최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곧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해 봐야겠다는 집념이 그 나약함을 덮어 버린다.

거실을 넘어 침실로 들어간다. 어제 먹다 남은 과자 봉투와 널부러진 옷들, 첫 페이지만 읽고 던져 놓은 책들이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다.

어차피 꿈 속이니 정리는 포기하고 대신 옷장을 연다. 옷장의 맨 아래 서랍, 안쪽에 있는 다 해진 와이셔츠 안쪽, 손을 밀어넣으니 딱딱한 무기질의 촉감이 느껴진다. 그대로 붙잡아 밖으로 끄집어 내자 무광택의 검은빛을 자랑하는 글록 17 권총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

원래 이 권총에는 총알이 없다. 재단 숙소에 몰래 이걸 갖고 올 수 있던 이유이자, 내가 맨 처음에 호신용 무기로 이 놈을 택하지 않은 이유다. 나는 눈을 감고 온 심상을 집중해서, 안에 총알이 가득 차 있는 권총의 이미지를 상상하려고 애쓴다.

눈을 떠 보니 한결 묵직해진 권총의 모습이 보인다. 어디 쓰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권총을 한 손에 든 채로 화장실로 들어간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유난히 수척해 보인다. 다크서클도 좀 꼈고, 최근에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이런 상황에서도 신해 생각이 난다. 신해는 잘 지내고 있어야 할 텐데. AWCY 놈들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구오도령의 광신도들이라면 나뿐만 아니라 신해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아주 높지. 어쩌면 우리 둘을 동시에 납치할 계획을 짠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거울을 쳐다보며 머리를 굴린다. 문 밖으로 나가면 목이 잘려 죽는다. 나보다 훨씬 빠르니 전투할 생각은 접어야 한다. 아까처럼 베란다로 탈출하면 건물 로비까지는 갈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 밖을 나서려 하면 죽는다. 철근을 뚫고 벽 속을 이동하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고.

아니지, 잠깐만. 내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재단 직원 숙소는 모두 비상시를 대비한 벙커와 연결되어 있고, 반대로 말하면 이 벙커를 통해 재단 내의 다른 건물로 이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하실로 가서 계단을 쭉 내려가기만 하면 벙커가 나오니 길을 잃을 우려도 없다. 정문과 베란다를 통하지 않고 숙소를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유일한 단점은 빛도 없는 좁고 어두운 길을 혼자서 내려가야 한다는 거지만. 나는 그 생각에 잠시 몸서리치지만,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 권총을 허리춤에 매단 다음 화장실을 나선다.

아까처럼 문을 뜯어내서 밧줄로 만들고, 소파와 몸에 연결한 다음 강하를 시작한다. 줄이 아까보다 더 얇아지고 약해진 듯한 느낌이 든다. 문득 아까 마셨던 냉장고의 상한 맥주가 떠오른다. 설마 이 심상 속 물건들에도 내구도가 있나? 불길한데.

바닥에 내려서자 아까처럼 숙소의 1층 로비가 날 반겨 준다. 이번에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 ‘무디 블루스’도, 최산해도. 유리문으로 한 번 더 걸어가 볼까 하는 충동이 들지만, 어차피 모가지가 썰릴 것을 알고 있으니 몸을 돌려서 비상계단으로 향한다.

계단 문을 열자마자 습하고 꿉꿉한 공기 냄새가 확 들어온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계단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층마다 켜져 있는 작고 푸르스름한 비상등 표지판만이 내 유일한 광원이 되어 준다.

계단을 빠르게 걸어 내려간다. 그러고 보니, 과거 미국 지부에 계단과 관련된 유명한 SCP가 있다고 들었다. 끝도 없는 무한히 이어지는 계단 속 나타나는 이상 현상들. 그 시대에 자주 발생했던 간단하면서도 위협적인 변칙 개체였다. 하지만 다른 방면에서 보자면 그것은 일종의 예술 작품이기도 했다. 악의적이고 정교한, 순수한 이들을 제물로 삼아 자신의 이상을 표현하는 비틀린 작품.

…나와 그것은 뭐가 달랐던 거지? 그 유령들은, 결국…

지하 3층, 벙커로 이어지는 입구까지 도착한다. 이 너머는 철창으로 막혀 있지만, 내 손짓 한 번에 녹아내려 웅덩이로 변한다. 나는 가볍게 철창이었던 것 너머로 들어가 벙커의 문을 연다.

바스락.

순간적으로 완전한 어둠이 나를 덮치자, 본능적으로 목을 감싸고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다.

과연 아무도 없나?

분명 누군가가 있다.

벙커의 불이 서서히 켜진다. 아니, 여기는 더 이상 벙커라고 부를 수 없다. 저 앞에는 콘크리트를 뜯어서 만든 무대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나무판자로 만든 관객석에 앉아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무대의 천장에 조악하게 만들어진 백열등과 스피커가 달려 있다. 각양각색의 분장을 한 배우들이 무대 위에 한 줄로 서서, 단장의 큐를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그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다.

이곳은 극단이다. 당신이 납치당했던, 구오의 광신도를 위한 극단.

당신의 뇌가 경기를 일으키고, 몸은 통제를 잃고 발작하면서 입은 제발 여기서 내보내 달라고 울부짖는 동안, 연극은 마침내 막을 올린다.


막간

형, 형은 살면서 뭐가 제일 무서웠어?

난 말이야, 죽는 건 별로 무섭지 않았어. 그게 두려웠다면 기동특무부대 같은 것도 못했겠지. 다들 정말 좋은 사람들이야. 내 등 뒤를 맡기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난 예전에 나 자신을 잃는 게 싫었어. 내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것, 그 말에 휘둘리려는 내가 무서웠어.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 버텼어. 버티는 동안은 나로써, 최신해로써 존재할 수 있었으니까.

나 자신을 믿어라… 이세율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 그게 정말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아.



그런데 있지, 형.

꼭 그 속삭임에 저항해야 할까?

내가 굳이 나로써 존재해야 할까?

어쩌면…

……

하하, 지금 형 얼굴 좀 봐.

겁먹은 거야? 내가 더 이상 형의 동생이 아닐까 봐?

이런 게…

…너의 두려움이구나.


ACT 5

등장인물:
1. SCP-370-KO, 또는 이름 없는 신의 광신도
2. 어린 최산해
3. 어린 최신해
4. 최산해

요약: 어린 최산해와 최신해는 단장의 학대로부터 고통받다가 우연한 계기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연극의 막이 오르기 직전이다. 다른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일 동안, 단장은 의상을 점검하다가 눈쌀을 찌푸린다.)

SCP-370-KO: (화가 난 목소리로 낮게) 흠, 여기 이 소품은 누가 준비한 거죠?

엑스트라: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아, 단장님, 그건 제가 만들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SCP-370-KO: (옷을 손에 들고 흔드며) 옷감이 구겨졌고 마감도 똑바로 안 돼 있군요. 이건 나중에 주인공이 입을 의상인데 말이죠. 제작자들 간 협조가 되지 않았던 건가요?

엑스트라: (화들짝 놀란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더 세심하게 준비를…

SCP-370-KO: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며)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단원들의 열정은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실수는… 더 나은 성공을 위한 발판이고요. 연극이 곧 시작되니,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엑스트라는 황급히 무대에서 퇴장한다.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한 SCP-370-KO 뒤로 어린 최신해가 머뭇거리며 무대에 등장한다.)

어린 최신해: 어… 단장님?

SCP-370-KO: 아, 우리 꼬마 주인공 님. 무슨 일이신가요?

어린 최신해: (겁먹은 어투로) 아, 아뇨! 별 일은 아닌데, 그게… 좀 물어볼 게 있어서요. 혹시 지금 물어봐도 돼요?

SCP-370-KO: 당신의 탐구하는 태도는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지금은 연극이 곧 시작할 시간이라서요. 우리 신해도 어서 그동안 연습했던 실력을 관객들에게 뽐내고 싶지 않나요? 사소한 질문이 있다면 나중의 뒤풀이 때로 미뤄도 될 것 같아요.

어린 최신해: 아, 그렇지만… 아니에요. 알았어요, 단장님. (신해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무대 아래로 내려간다.)

(배경이 전환되고, 어린 최산해가 대걸레를 들고 무대로 올라온다.)

어린 최산해: (기침소리) 목이 아파… 하지만 빨리 이걸 다 끝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어린 최산해는 대걸레를 들고 무대를 청소하기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걸레가 두 동강나고 만다.)

어린 최산해: 아! 안 돼! 이럴 수가, 이를 어쩜 좋지?

(최산해가 무대에 등장한다. 욕지거리를 하며 몸부림치고 있다.)

최산해: 씨발 당장 이 짓거리 그만둬 구오의 개새끼들아, 눈깔을 다 퍼먹어 버리기 전에-

(최산해는 어린 최산해를 발견하고 욕을 멈춘다. 어린 최산해는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최산해: 내가 어떻게 여기로 올라왔지?

어린 최산해: (한 발짝 물러서며) 아저씨는 누구에요…?

(최산해는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한숨을 쉬고 무릎을 꿇는다. 어린 최산해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최산해는 어린 최산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최산해: 이게 다 꿈이란 건 알지만, 이 때의 나는 너무 불쌍하단 말이지. 괜찮아, 얘야. 곧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최산해는 두 동강 난 대걸레를 발견하고 어린 최산해를 쳐다본다.)

최산해: 이것 때문에 울상이었던 거야?

어린 최산해: 네, 네. 여기를 빨리 다 청소해야 하는데… 안 그러면 무서운 아저씨들이 와서, 저를… 많이 때릴 거에요… 아저씨, 혹시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최산해: 그래, 당연히 도와줄 수 있지.

(최산해는 금속 공예를 통해 즉석에서 금속을 변형시킨 후, 대걸레 자루를 접착시켜 원래대로 복구한다. 어린 최산해가 탄성을 내지른다.)

어린 최산해: 우와! 아저씨, 그거 어떻게 한 거에요?

최산해: 어? 무슨 소리야, 너 이때도 능력 자체는 가지고 있었을 텐데.

(최산해가 어린 최산해와 더 대화를 나누려는 순간, 무대에 한 무리의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모두 험악한 인상에 군화를 신고 있다.)

엑스트라 2: 꼬맹아, 아직도 바닥 청소를 다 안 끝낸 거냐? 거기다 농땡이나 피우고 있다니.

엑스트라 3: 아무래도 본때를 보여줘야겠군. 얘들아, 이리 와라!

최산해: 이런….

(최산해는 일어서서 그들을 제지하려 하지만 엑스트라 무리는 산해의 몸을 유령처럼 통과한다. 산해는 욕지거리를 한다.)

어린 최산해: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아악! 살려주세요!

(엑스트라 무리는 어린 최산해를 둘러싼 다음 일련의 구타 행위를 시행한다. 어린 최산해의 온몸에 멍이 들고 피가 나기 시작한다.)

최산해: 멈춰! 이 씨발 새끼들아 멈추라고!

(엑스트라 무리는 그를 무시하고 구타 행위를 이어나간다. 최산해는 금속 공예를 응용한 무기로 그들을 참살하려 하지만, 역시 허공을 통과하고 만다.)

최산해: 아, 아, 아…

(무대 위로 SCP-370-KO가 등장한다. 최산해는 즉시 금속으로 만들어 낸 창을 그에게 겨눈다.)

최산해: 감히 그 면상을 내 눈앞에 들이밀다니.

SCP-370-KO: (최산해를 무시하고) 그래, 바로 그거에요. 더 세게 때리세요.

최산해: 뭐 이 씨발아?

어린 최산해: (비명)

최산해: 아 씨발, 그만…! 단장님! 단장! 그만해요!

(최산해가 절규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어린 최산해의 비명이 점차 잦아들고 흐느끼는 소리로 변한다.)

(그때 어린 최신해가 무대 위로 등장한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집단 구타를 당하고 있는 어린 최산해를 발견하고는 몸을 숨긴다.)

최산해: …신해야.

어린 최신해: (벌벌 떨면서) 어떡해, 어떡해… 형이 저런 꼴을 당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최산해: 아냐, 넌 여기 있으면 안…

어린 최신해: (혼잣말로) 화장실에 간다고 거짓말하고 형을 보러 오길 잘했어… 여길 탈출해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엑스트라 무리의 폭력이 끝나자, SCP-370-KO는 어린 최산해의 입을 벌리고 정체불명의 액체를 투약한다. 최산해는 헛구역질을 한다.)

최산해: (구역질) 저 맛… 아직도 기억나. 꿈에서도 기억나…

(마침내 엑스트라 무리와 SCP-370-KO가 모두 무대에서 퇴장한다. 어린 최신해는 눈치를 보다가 어린 최산해에게로 뛰어간다.)

어린 최신해: 형! 형, 괜찮아?

어린 최산해: (신음)

(어린 최신해는 형의 몸을 잡고 부상의 정도를 살핀다. 어린 최산해가 입은 부상은 상당히 심각해 보인다. 최신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어린 최신해: 형… 미안해. 내가 조금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미안해. 우리 여기서 나가자…

(어린 최산해가 눈을 살짝 뜨더니, 비명과 발작 사이 중간쯤 되는 소리를 지르며 어린 최신해를 밀어낸다.)

어린 최신해: …형?

어린 최산해: 느어… 느어 느그야. 즈리 가!

어린 최신해: 형, 나야! 최신해! 형 동생이라니까!

어린 최산해: 느언… 내… 동스앵 아야! 즈리 가! 즈리 가!

(어린 최산해는 몸부림치다가 갑자기 기절한다. 어린 최신해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린 최산해를 등에 업고 무대에서 퇴장한다. 이제 무대에는 최산해 혼자 남아 있다.)

최산해: …그만.

(막이 내려가지 않는다.)

최산해: (독백) 그만해, 이 개새끼들아. 이미 충분히 보여줬잖아.

휴지(休止).

최산해: (소리를 지른다) 이 좆 같은 연극 당장 멈추라고!

(최산해의 앞에 책 한 권이 나타난다. 최산해는 절규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제풀에 지쳐 털썩 주저앉고서야 그 책을 발견한다. 그는 책을 펼친다.)

최산해: ACT 1. 등장인물, 최산해, 최신해, 그리고… 당신?

(그는 책을 펼친다. 그가 이때까지 겪은 ACT의 내용과, 앞으로 겪을 ACT의 내용이 죽 펼쳐져 있다. 최산해는 대부분 경우에서 목이 잘려 죽고, 가끔은 물에 잠겨 죽고, 산 채로 불에 태워지고, 생매장당하고, 목이 매달리고, 사지가 잘리고, 질식당하고, 독에 중독되고, 과다출혈로 죽게 된다.)

최산해: …하.

(그는 책의 마지막 ACT를 펼친다. 총 427개의 ACT가, 이미 겪은 것을 제외하면 앞으로 422개의 ACT가 그에게 남아 있다.)

최산해: (혼잣말로) 427개… 427번의 죽음. 거 참 씨발 되게 구체적이네… 대체 날 얼마나 싫어했으면…

(최산해는 중얼거리다가 눈을 크게 뜬다.)

최산해: 잠깐, 427… 이거 익숙한 숫자인데.

(그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미소를 짓는다.)

최산해: 그래, 이제 알겠어.

(그는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 그의 이마에 정조준한다. 그리고 눈을 감는다.)

……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


막간

검을 휘두른 자는 그 감촉을 기억한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의 크기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 검에 육신이 찢긴 자는, 영이 부숴지고 비틀려져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이들의 원한은, 그림자 속에 숨어 그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그 복수심은, 핏발이 선 채 치켜뜬 두 눈은, 으스러져 조각난 채로 그의 목을 조르는 두 손은, 닿지 못할 공간 너머로 외치는 그 증오의 함성은 미처 알지 못한다.

……

증오는 시간이 지나며 응축된다. 바깥의 선명했던 감정은 휘발되어 사라지고,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의 허무함만이 남는다. 그들은 지쳤다. 그리고 현실을 깨달았다.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복수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기다린다. 함정에 빠진 맹수가 반항을 멈추고 포기하기를, 그리고 언젠가 그의 입에서 나오게 될 단 한 마디를 위해서.

그러나 계획은 항상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ACT 6

등장인물:
1. 최산해

요약: 최산해는 목이 잘려 죽게 된다. 누구 마음대로?

긴 꿈에서 일어날 시간이야.

눈을 뜨자마자 곧장 현관문을 향해 걸어간다. 문을 여는 순간 바스락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한다.

“너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그리고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목이 잘리기를 기다린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던 3초가 지나고, 내 등 뒤의 무언가가 나를 당장은 죽일 생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숙소의 복도를 지나, 계단을 타고 1층까지 내려간다. 내 발소리에 섞인 이질적인 소리가 귀를 타고 올라와 나를 뒤따르는 포식자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나는 그 소름 돋는 느낌을 무시하고 1층 로비까지 도착한다.

로비는, 아까와 똑같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등 뒤에서 비웃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칼날이 목에 닿으며 서늘한 한기가 전해진다. 나는 눈을 감고 온 신경을 집중한다. 상상한다. 떠올려 낸다. 예술가의 눈으로.

로비 바닥에서 전시품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바스락거리는 천의 질감, 윤활유의 냄새, 금속성 뼈대의 끼긱거리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느껴진다. 공간을 건너뛰어, 내가 창조해 낸 물건과 공명한다. 만족할 만큼 그것이 구체화되었을 때 나는 눈을 뜬다.

1층 로비에는 흰색 천을 뒤집어쓴 어떤 물건이 ‘전시’되어 있다. 등 뒤의 무언가는 흥미롭다는 듯한 쌕쌕 소리를 입으로 낸다.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미리 준비해 뒀던 말들을 내뱉기 시작한다.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느껴질지 잘 알아.”

왜냐하면 너희는 나를 가장 오랫동안 증오해 왔을 테니까.

“예전의 나는 심령체에 내 분노를 쏟았어. 내 어린 시절과 과거 때문에, 잘못된 신념 때문에. 그들을… 이 세상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이제는 잘 안다.

목적조차 온전하지 않은 로봇 같은 존재들. 산 자를 사칭하는 존재… 내게 유령이란 그런 존재였어. 그런데 만약, 정말로 유령이 그런 이들이라면, 내가 죽어서 유령이 되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가 내게 묻더군.”

그 날 어두운 밤하늘에 처음으로 별이 비추었고, 나는 풍소경 선배를 만났다.

“나는 그저 나 같은 사람이 더 생기지 않기를 바랐어. 죽은 유령을 제거하는, 산 자들을 위한 예술품. 하지만 그건 이기적인 바람이었지.”

떨리는 손으로 천을 잡고 벗겨낸다. 흰색 천 너머로 찬란한 빛을 내뿜는 금속 갈까마귀가 로비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는 알아.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그래서 나는 대신 이걸 만들었어… 예술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서로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머리카락은 곤두선다. 전시회의 큐레이팅을 맡을 때도 이보다 긴장되진 않았는데. 하지만 지금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이건 내가 AWCY 소속 변칙예술가, Mt.sea로써 만들었던 것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물건이야. 증오가 아니라 화합을 위한, 배제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전시품이지.”

한 박자 쉬고,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고. 드디어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차례야.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이 작품은 실수였어."

나는 손에 든 흰 천을 늘어뜨린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나 강렬해서 내 몸을 녹이고 척추를 부술 수 있을 정도다. 나는 침을 삼키고 뒤를 돌아본다.

“너희에게 이 작품을 직접 보여주지 않은 것. 그게 내 가장 큰 실수야.”

창백한 몸, 피가 묻은 얼굴, 흐느끼는 시선, 기이한 눈동자. 아마 600쌍쯤 될 듯한, 그 수많은 우울한 시선들.

내가 작품을 만들며 비틀고 으스러뜨리고 부수었던 모든 유령들의 원한이 내게로 집중된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립니다. 제 작품으로 피해를 받았던 모든 유령 분께, 잘못된 신념으로 인해 사라졌던 당신들께 말씀드립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Mt.sea는 AWCY에서 440여 개의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그 중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물품은 심령을 포획하고 그것을 가공해서 만든 작품이었다. 심지어 한 작품에 여러 개의 심령체를 갈아 넣은 적도 있었고. 그들은 아마 내가 똑같은 횟수의 고통을 받기를 원했을 것이며, 끝나지 않는 꿈 속은 복수극을 진행하기 최적의 환경이었을 거다. 이해한다. 그들에게는 권리가 있었으니.

427번의 원한. 단 한 번의 화해를 위한 손길. 갈까마귀는 얼마의 시간이 걸려야 그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눈을 질끈 감고 칼이든, 총이든 무언가가 내게 날아오기를 기다린다. 처음 한 번의 시도로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눈을 뜨자 빛이 보인다.

고개를 들자,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내가 과거에 만들었던 작품들이다.

유령들은 내가 만든 작품에서 빠져나와, 로비를 떠나서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유영한다. 그들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아까와는 다르다. 청량하고 아름다운 소리. 후련하다는 듯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 환호성. 관객석을 가득 메운 박수 소리.

그들의 몸이 투명하게 빛난다. 밤하늘의 별처럼. 은하수가 되어 천장을 가득 메운다. 빛나는 선율의 흐름이, 내 마음을 채우고 눈 밖으로 흘러넘쳐 한 줄기 눈물이 된다.

그동안 정말 미안했어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가슴 속에 묻어 둔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건드리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돌린다. 눈앞에는 평범하게 생긴 한 남자가 서 있다. 얼굴의 반쪽이 없어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위화감 없이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흔한 인상이다. 그가 한 손에 칼을 든 채로 내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안녕히 가세요.” 이 말은, 해도 되겠지.

남자는 서서히 투명해지며 미소를 짓는다. 그가 왼손으로 내 목을 톡 건드린다.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에 나는 눈을 감고 몸의 힘을 푼다.

…이번에는 아프지 않다.


눈을 뜨자 찬란한 아침 햇살이 보인다. 이마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려와 손으로 확인하니, 형태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부적 하나가 나를 반긴다. 그 물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잘 접어서 침대 옆 탁상에 놓아 둔다. 침대에서 일어나 폰을 확인한다. 시간은 9시 10분. 이미 출근 시간을 10분이나 넘겼군. 풍소경 선배와 신해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한 통씩 와 있다. 나는 씩 웃고는 기지개를 편 다음 선배에게 먼저 전화를 건다.

“오, 일어났냐?”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미안해요, 선배. 좀 긴 악몽을 꿔서.”

“그래 뭐, 늦잠 잤다고 너무 미안해하진 말고. 서류 업무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진짜 오후에 오면 안 된다?”

“넵, 얼굴만 씻고 지금 바로 올라갈게요.”

“올 때 메로나~”

능청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진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화장실로 향하며 이번에는 신해에게 전화를 건다.

“어 형! 어제 저녁에 안부 인사차 연락했었는데 안 받아서 걱정했어.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거야?” 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언제나처럼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동생이다.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피곤해서 일찍 잤거든.”

“그래? 다행이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아, 이세율 팀장님? 네, 지금 가겠습니다! 형 미안, 나중에 통화하자.” 동생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뭔가 일이 생겼는지 급하게 전화를 끊는다. 그 모습이 자동으로 머릿속에 상상되어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푹 자서 그런가, 얼굴에 빛이 나네.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웃으며 거울에 손을 갖다 댄다. 거울 속의 나도 따라서 웃는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어. 하지만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가장 어두운 밤하늘에도 별은 뜨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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