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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E-1488-ARC
면담 일시: 2025년 4월 20일, 제202K기지 제1연구관 205호
면담자: [데이터 미입력]
면담 대상자: [데이터 미입력] (이하 A로 지칭)
서문: 서문에 들어갈 내용입니다. 면담의 경위, 관련된 변칙 개체의 간단한 특성, 기타 중요 내용에 대해 작성하십시오.
의미 없음.
면담 시작
(달칵이는 소리, 종이가 서로 부딪히며 사부작거리는 소리.)
A: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거든요.
평범한 내용은 아니니까요. 여기로 면회 오는 절차가 워낙 복잡하기도 하고.
A: 그렇죠. 그래서 언제 시작하면 되나요?
지금 바로요.
A: 그래요? 아, 이거 녹음기 켜진 거구나. 알겠어요.
(목을 가다듬는 소리.)
A: 이야기를… 처음부터 시작하는 게 맞겠죠? 그러니까 제가 겪은 입장에서 처음이요. 그게 편하시지 않나요?
상관없어요. 편하게 얘기해 주시면 돼요.
A: 알겠어요. 그러면… 시작할게요.
잠시 침묵.
A: 제 자취방 옆에는 젊은 부부가 살았었어요.
A: 사실, 그 부부 얼굴을 본 적은 몇 번 없어요. 기껏해야 마트에서 가끔씩 장을 볼 때 마주치거나 빌라 단지 분리수거 날에 종량제 봉투를 들고 가는 모습 정도만 봤던 게 다에요. 얼굴을 안 까먹을 정도로만, 몇 주에 한 번씩 보게 되는 사이… 뭐, 요즘 빌라 이웃들이 다 그런 관계긴 하지만 말이죠.
A: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수수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예쁘지도 않고, 너무 못생기지도 않고 평범하게. 선남선녀라고 하면 딱 적당할 거에요.
외모 외에 기억날 만한 다른 특징은 없었나요?
A: 참. 딱 하나 기억나는 게, 남편 쪽은 키가 엄청 컸었어요. 제 남동생이 중학교 농구부 출신이라 키가 나랑 머리통 하나 차이 날 정도로 큰데, 그 남자는 동생이랑 키가 비슷해 보였어요. 한, 190cm 초반쯤? 지금 와서 확인할 방법은 없겠지만.
A: 그 부부는 아마 그 집에서 꽤 오래 살았던 것 같아요. 제가 처음 원룸을 계약할 때 집주인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이웃들도 굉장히 착하고 조용해서 살 만하다고 했었거든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집 아기가 태어난 이후로는 죽 거기서 살지 않았을까 싶어요.
A: 하필 제가 그들의 마지막 이웃이 되어 버리긴 했지만요.
그 부부와의 첫만남은 어땠었나요?
A: 음. 여기서 말할 게, 전 그 원룸이 첫 자취방이었어요. 1학년 때는 기숙사에서 살았고, 군대에 갔다가 복학해서 잡은 곳이 거기였거든요. 그래서 자취할 때 지켜야 할 예절이나 매너에 대해 많이 무지했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현대판 떡돌리기가 남아 있다는 친구의 거짓말에 깜빡 속아서 이사했던 날 빼빼로를 잔뜩 사들고 이웃들을 돌아다니면서 하나씩 나눠 줬을 정도로.
그날이었나 보네요.
A: 맞아요. 전 그때 그 부부를 처음 봤어요.
A: 초인종을 누르니까 인터폰이 바로 켜졌어요. 아내 쪽이 내게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내가 살짝 긴장한 목소리로 옆집에 새로 이사 와서 빼빼로를 돌리고 있다고 하니까, 잠깐 조용하더니 문 앞에 놓고 가 달라고 했었어요.
A: 이렇게 전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리기는 하는데, 쌀쌀맞다거나 차가운 어투는 아니었어요. 그보다는 오히려 다정한 말씨였어요. 그래서 나도 별 생각 없이 그냥 알겠다고 했고요. 문이 열릴 때 치이지 않도록 문 옆에 빼빼로 한 봉투를 조심스레 놨었죠.
A: 근데 그 순간 안에서 아기가 웅얼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A가 작게 한숨을 쉰다.
A: 저는 평소에 어린애들을 많이 귀여워하는 성격이었거든요. 게다가 당시에 막 내 사촌 형이 첫 아들을 봤을 때기도 했고요. 그래서 집안에 애가 있다는 사실이 왠지 반갑더라고요, 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A: 그래서 제가 말했죠. “저기, 애가 우는 것 같아요.”
A: 그건 그냥, 떠오른 그대로 뱉은 말이었어요. 안부 인사 비슷한 거였다고요. “그러게요. 이제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따위의 말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잖아요?. 그것도 귀찮으면 “아, 잠깐만요” 정도로 짧게 말할 수도 있고요.
근데요?
A: 근데 그 여자는 “아니요.”라고 하더라고요.
A: 전 당황해서 “네?”라고 되물었죠. 여자는 대답 없이 바로 인터폰을 끊었고요. 전 그냥 그 집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참 예의바르기도 하다고 투덜대면서 다른 이웃들에게 남은 빼빼로를 마저 돌리러 갔죠. 그날은 이게 끝이었어요.
다음 만남에 대해 말해 주세요.
A: 이제 말하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시간이 좀 흐른 뒨데… 맞다, 아마 중간고사 친 뒤였을 거에요. 보통 자취방 있는 애들은 기숙사 사는 애들의 표적이 되잖아요.
A: 1학년 때는 내가 선배들 집에 몇 번 놀러갔었으니, 이번에는 내가 후배들이랑 친구들을 초대할 차례였죠. 2학년 1학기가 반쯤 지나는 동안 우린 몇 차례 내 집에서 술 파티를 했었어요.
A: 우린 나름 예의를 지키면서 했어요. 원룸이라는 게 워낙 소음에 취약하다 보니까, 최대한 소리를 낮추면서 술을 먹었죠. 그래도 계속 알코올이 들어가면서 우리들끼리 놀고 떠들다 보면… 이제 이웃에게는 고통스러운 소음이 되죠.
A: 네 번째였나? 그 정도 됐을 거에요. 한창 술판을 깔고, 애들이랑 중간고사에서 누가 얼마나 틀렸는지 시시덕거리면서 웃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 크게 초인종 소리가 나더라고요. 귀가 아플 정도였어요.
A: 우린 다 얼어붙었죠. 그때 하필 매번 참석하던 정윤 선배가 이번엔 빠져서, 모임 중에 최연장자가 저였어요. 나머지는 새내기거나 군대에 안 가고 바로 2학년으로 올라온 애들이라. 거기다 전 집주인이기도 했고요.
그렇죠.
A: 전 속으로 ‘뭐됐다’를 한 50번 중얼거리면서 인터폰을 켰죠. 옆집 부부가 둘 다 나와서 인터폰을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무표정한 얼굴로.
A: 서비스직 알바를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동네방네 소리지르면서 나 화났소 하고 광고하는 진상보다 무표정으로 따박따박 클레임 걸어오는 진상들이 훨씬 더 무서워요. 그런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이 안 가거든요. 그때 기분이 딱 그 느낌이었어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A: 일단 사과는 해야 하니까, 제가 먼저 운을 뗐죠. 자세힌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는 내용이었을 거에요.
A: “옆방까지 소음이 들리네요. 조용히 좀 해주세요.” 라고 남자 쪽이 대답했어요. 전 계속 사과하면서 앞으로는 조용히 하겠다고 약속했고요. 부부는 계속 단답형으로 대답했어요.
A: 근데 말을 하다 보니까, 뭔가 이상한 점이 보이는 거에요. 보통 사람이 말을 하면 입술을 움직이고, 표정을 바꾸고 그런 게 조금씩은 다 존재하잖아요?
A가 잠시 말을 멈추고 목을 매만진다.
A: 특히 감정이 북받쳤을 때는 더더욱이요. 근데 그 부부는… 계속 무표정인 거에요. 말을 할 때도 무표정. 고개를 끄덕일 때도 무표정. 찡그림이나 눈썹을 치켜세우는 행위는 절대 안 하고요.
A: 처음엔 그냥 숫기 없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보다 했어요. 거기에 그 사람들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요. 근데 부부가 뒤돌아서 가는 걸 인터폰으로 봤을 때, 위화감이 장난 아니게 오더라고요. 그제서야 부부가 계속 무표정했던 이유를 알게 됐어요.
A: 두 사람 다 긴 검은색 끈을 몇 개씩 뒷머리에 감고 있더라고요.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묻힐 정도로 얇은 고무줄이었어요. 귀 밑으로 하나, 귀 바로 위에 하나, 정수리를 관통하는 경로로 하나. 그 테이프들이랑 부부 얼굴에 씌워진 뭔가랑 이어져 있었고요.
A: 둘 다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거에요. 그것도 자기들 얼굴을 정확하게 본따서 만들어진 가면을. 그래서 저랑 대화할 때 계속 무표정인 것처럼 보였던 거였어요.
그 가면을 그때 처음 인지했었나요?
A: 네, 밖으로 나올 때는 정상적으로 다녔으니까요. 저랑 대화할 때는 급해서 미처 벗지 못하고 나온 것 같더라고요.
A: 이게 생각해 보면 소름돋는 일이잖아요. 자기 집에서, 굳이 자기 얼굴이랑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쓰고 생활하는 부부. 딱 봐도 정상적인 사람들은 아닐 것 같지 않아요? 근데 그때는 제가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이미 소주 몇 잔이 들어간 상태기도 했고, 부부를 잘 달래서 돌려보냈다는 것만 머리에 남았죠.
A: 그래서 전 부부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다시 술자리로 돌아와서 애들이랑 조용한 목소리로 술판을 다시 벌였어요. 한 새벽 1시까지 했을 거에요. 그때쯤에 민찬이가 제 싱크대에 토했으니까.
저런.
A: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다들 술에 절여진 상태로 일어나서 해장용 국밥 한 사발씩 때리고 술자리를 파했어요. 저야 집주인이니 다시 집에 와서 평소보다 더 어질러진 집을 열심히 청소했죠.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고 더러운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는 동안, 왠지 모르게 계속 그 부부 생각이 나더라고요. 가면을 썼던 이유가 뭘까? 애초에 그런 가면이 왜 집에 있는 거지? 같은 질문이요.
A: 그때부터 옆집이 뭔가 수상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창문에 항상 블라인드를 내려 둔다던가, 항상 밤에 둘 중 한 명이 어딘가로 사라진다던가, 문앞에 붙은 광고지들을 몇 달 동안 방치한다는 시시콜콜한 것도 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문제는 그거였죠.
A: 애가 너무 조용해요.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A: 그러니까, 보통 애 키우는 집은 항상 시끌벅적하고 요란해야 하잖아요. 배고프다고 떼쓰는 애기 밥 멕이고, 기저귀 갈아 주고, 낮잠 재워 줘야 하고, 장난감 갖고 싶다고 펑펑 우는 거 달래 줘야 하고, 또 동화책 읽어 달라고 조르면 밤늦게까지 잡혀 있어야 하는 게 부모의 숙명이거든요. 제가 사촌 형 하는 걸 봐서 잘 알아요.
A: 근데, 제가 그 원룸에서 살면서 단 한 번도 애기 울음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단 말이에요. 아니면 웃음소리라도. 그때 인터폰 너머로 들은 아기 신음소리랑, 부부가 가끔씩 마트에서 기저귀랑 어린이용 시리얼을 잔뜩 사 가는 모습을 못 봤다면 전 그 사람들이 아기 없는 부부인 줄 믿었을 거에요.
A: 그쯤 되니 정말 이상하잖아요. 전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니까요. 사실은 부부의 친척 아이를 걔들이 잠시 맡아 준 건가? 아니면 뭔가 아기에게 이상이 있어서 숨어서 키우고 있는 건가? 혹시 집에 아기 대신 기저귀가 필요할 정도인 초고도비만 환자가 있고, 부부는 그 남자를 케어하려 고용된 간병인들일까? 이건 너무 나갔지만요, 어쨌든.
흥미롭네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A: 이 이야기를 제 친구들한테 들려주니까, 대부분은 너무 과민반응하는 거라고 말했었어요. 그 집 애가 원체 조용한 아기일 수도 있고, 부부가 소음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으니 조용조용하게 산다면 제가 소리를 못 들은 것도 있을 수 있다고 했죠. 가면이야 뭐, 그때 술에 취했으니 잘못 본 걸 수도 있고.
A: 하지만 그래도 뭔가 불안했어요. 가끔씩 우는 아기는 있을 수 있어도, 아예 안 우는 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사촌 형을 도우면서 느낀 경험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솔직히 부부가 아기를 학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더라고요.
A: 그래서 전 결정을 내렸죠. 못 참겠다, 한 번 봐야겠다.
집 안을요?
A: (웃으며) 아니, 집 얘기는 아녜요. 집에 함부로 침입하면 주거침입으로 쇠고랑을 찰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제가 생각한 건 쓰레기 봉투였어요.
A: 우리 빌라의 분리수거 시스템이 어떻냐면, 일단 이른 아침에 각 호에서 종량제 봉투를 들고 나와서 단지 중앙에 열린 임시 분리수거장으로 가져가요. 거기서 일반쓰레기, 철, 플라스틱, 기타 등등을 분류해서 놓고 나면, 직원들이 모두 종합해서 쓰레기차에 싣죠.
A: 근데 가끔씩 경비 아저씨가 일반쓰레기 봉투를 슬쩍슬쩍 확인하면서, 다른 게 섞여 있으면 다시 가져가서 빼고 묶어서 가져오라고 봉투를 빠꾸 먹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봉투에 뭔갈 잘못 넣은 것 같으면 분리수거장에서 봉투를 다시 가져가기도 해요. 그리고 다시 내리는 거죠.
A: 전 그걸 이용할 생각이었어요. 부부가 종량제 봉투를 갖다 버리고 나면 제가 위치를 기억해 뒀다가, 조금 뒤에 안에 플라스틱을 같이 넣은 것 같으니 들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리겠다고 말하는 거죠. 그때까지 그 부부는 분리수거 날이면 항상 비슷한 시간에 분리수거장에 왔으니, 난 타이밍만 잘 맞추면 되는 거였어요.
제 사견이지만, 실제로 아동 학대가 이뤄지고 있었다고 해도 쓰레기 봉투에서 쓸 만한 증거를 발견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A: 글쎄요, 전 그때 봉투 안에서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당장 신고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차 있었어요. 예를 들어 피 묻은 휴지조각들이나, 부러진 회초리, 토사물의 흔적 같은 거요. 지금 생각해 보면 멍청한 아이디어죠, 안 그래요? 그래도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해서 정말로 다행이었지만요.
A: 대망의 분리수거 날. 전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마치고 시간에 맞추어 분리수거장으로 내려갔어요. 예상대로 그 부부가 조금 앞에서 종량제 봉투랑 철,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들고 가더라고요.
A: 커다란 쓰레기 공터 주위로 경비 아저씨가 사람들을 통제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부부는 임시 분리수거장 가장 앞쪽에 종량제 봉투를 버리고, 나머지 쓰레기들을 재빠르게 분류해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어요.
A: 그때는 유리병들을 모으는 장소가 종량제 봉투 바로 옆쪽이었어요. 전 일부러 유리병들을 질질 끌다시피 분류하면서 시간을 벌다가, 경비 아저씨가 잠깐 한눈판 사이에 부부의 쓰레기봉투를 잽싸게 손에 들었어요. 그리고 경비 아저씨한테 말했죠. “아, 이거 안에 섞인 것 같은데요? 다시 갖고 갈게요.” 라고요.
A: 경비 아저씨가 귀찮다는 듯이 손짓했어요. 알아채지 못한 거죠. 전 계획이 성공했다는 거에 들떠서, 부부의 봉량제 봉투를 손에 든 채 빌라 계단을 재빨리 올라갔어요. 그러다가 부부랑 다시 마주칠까 봐 계단 끝부분에서 다시 속도를 늦춰야 했죠.
A: 그리고 전 봉투를 제 집 안으로 끌고 왔어요. 생각보다 가볍더라고요. 전 기대에 차서, 봉투 끝부분을 커터칼로 조심스럽게 자르고 윗부분부터 도로 꺼내기 시작했죠. 지독한 냄새에 대비해서 마스크도 쓰고요.
뭐가 나왔는지 대충 짐작이 가네요.
A: 짐작하시는 게 아마 맞을 거에요. 첫 3분의 1은 보통 가정에서 나올 법한 일반쓰레기들만 나왔어요. 그 위장을 다 덜어내고 나자 진짜가 나오더라고요. 부부의 찢어진 얼굴 가면, 총 28개.
A: 가면을 만져 보니까 약간 뻑뻑한 게 공연용으로 쓰는 인조 피부로 만든 것 같았어요. 얼굴은 모두 똑같이 부부의 얼굴이었고요. 가면 특성상 내구도가 많이 떨어지니, 하루마다 쓰고 교체하는 식으로 살아 온 모양이에요. 가면이 찢긴 이유는 혹시라도 얼굴이 그대로 쓰레기봉투에 비칠까 봐 그런 것 같고요.
A: 그리고, 더 끔찍한 게 있었어요. 그 가면들 밑에.
A가 말을 멈춘다. 그가 보안 요원에게 물 한 잔을 요청한다.
A: 이것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맞죠?
아기용 가면이었겠죠?
A: 예. 너다섯 살 먹은 아기에게 꼭 맞을 것 같은 크기에, 얼굴은 무표정이고… 그것도 서른 개 넘게 있었어요.
A가 물 한 잔을 마신다.
A: 소름돋는 게 뭔지 알아요? 전 그때 그 애 얼굴을 처음 알았거든요. 그 아기 가면은, 그러니까 전후 사정을 모르고 보면, 귀여워요. 그냥 평범한 아기 같아요. 밖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간 피곤해 보이는 아기들. 근데 그 표정 서른 개가 동시에 저를 지켜보고 있으니까, 심지어 눈구멍은 훤히 뚫려 있고… 그걸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밀려오더군요.
A: 전 떨리는 손으로 다시 봉투를 쌌어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었어요. 경찰에 신고해야 할지, 신고한다면 부부를 어떤 죄목으로 신고할지, 아기에게 가면을 씌우는 게 죄기는 한지 등등. 그래도 증거품은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대충 조각을 맞춰서 완성된 부부의 가면 한 개씩이랑 아기 가면 하나를 찬장 어딘가에 처박아 두고 나머지는 다시 봉투에 쌌어요.
A: 이제 다시 내리기만 하면 됐었는데, 그 순간 문제가 생겼죠. 초인종이 다시 울렸거든요.
A: 일단 인터폰을 받으면 저희 집 안 풍경이 그쪽에도 보여요. 그러니까 널부러진 봉투와 가면 조각들을 그 부부가 볼 수 있었단 소리죠. 전 급한 대로 쓰레기봉투만 제 방 안에 집어넣고, 간신히 시간에 맞춰 인터폰을 받았어요.
A: 인터폰을 봤어요. 부부 둘이 인터폰에 얼굴을 바싹 붙이고 절 보고 있었어요. 가면을 썼는진 모르겠지만 그때도 무표정한 얼굴이긴 했어요. 전 놀라서 뒤로 물러섰고, 그 부부가 먼저 말하더라고요.
A: 자기 쓰레기봉투 가져갔냐고. 첫 마디가 그거였어요.
A가 숨을 몰아쉰다.
A: 머릿속에 하얗게 변했죠. 뭐라고 적절하게 대꾸할 만한 말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는데, 제 얼굴색이 변하는 걸 그쪽에서도 느꼈나 봐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겠죠.
A: 빌라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더라고요. 왜 자기들 봉투를 가져갔냐, 당장 내놔라, 사생활 침해로 신고하겠다… 인터폰에 입술을 붙이다시피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전 너무 무서워서 바로 인터폰을 꺼 버렸어요. 그리고 제 방에 있던 부부의 쓰레기봉투 대신, 화장실에 있던 제 종량제 봉투를 끌고 왔죠.
잠시만, 봉투가 두 개였나요?
A: 아까 내려갈 때 전 유리병만 들고 내려갔었잖아요. 제 봉투는 일부러 집 안에 놔뒀었어요. 바로 그때처럼, 혹시라도 부부가 눈치채고 따져 물으면 제 거를 들고 왔다고 말하면 되니까요. 마침 경비 아저씨가 소란을 듣고 올라오길래 전 문을 열었어요. 열자마자 남편 쪽이 종량제 봉투를 확 채 가더라고요.
A: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그거 제 거에요." 제가 말했죠. 남편 쪽이 또 험한 말을 쏟아내길래, 경비 아저씨가 부부를 진정시키고 자기들 봉투가 맞는지 안을 열어서 확인해 보라고 하더라고요.
A: 안은 당연히 제 쓰레기들로 차 있었죠. 이번엔 아내 쪽이 봉투를 바꿔치기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길래, 제가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봉투를 꽉 채울 만큼의 쓰레기를 넣을 수 있겠냐고, 헛소리 좀 그만하라고 마주 소리쳤죠.
A:결국 경비 아저씨가 부부한테 계속 소란을 피우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협박한 후에야 사태가 끝났어요. 부부는 씩씩대면서 옆집으로 돌아갔고, 전 제 집 문을 걸어잠그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죠.
A: 예, 그 날은 그게 끝이에요. 결국 경비 아저씨가 경찰은 안 불렀거든요. 이제 이야기도 거의 끝나가네요.
힘드시다면 잠시 쉬었다 하실 수도 있어요.
A: 아뇨, 빨리 끝내고 털어 버리는 게 낫죠. 안 그래요?
면담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A가 입매를 비튼다.
A: 근데 되게 침착하시네요. 표정 변화도 잘 없으시고.
아, 원래 그런 성격이라서요. 불편하시다면 면담자를 바꿔 드릴 수도-
A: 아뇨,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요.
A가 헛기침을 한다.
A: 아무튼, 다음 이야기. 그 소동 뒤에 부부는 절 경계하기 시작했어요. 집 보수 공사도 하고, 밤에 나갈 때도 일부러 시간대를 다르게 하고, 쓰레기봉투는 안쪽 깊숙한 곳에 갖다버리고.
A: 어이없는 건 반상회에 제가 자기들 아기에게 수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신고까지 했더라고요? 참, 자기네는 어떤 짓을 하고 있는데.
그건 좀 이상하네요. 이때까지 들은 정보로는 그 부부는 굉장히 조심스러워 보였는데. 반상회에서 공개적으로 그랬다고요?
A: 예, 그치들 생각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때는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고요. 온 마음이 그 상태로 아기를 놔두면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어요. 지금도 확신해요. 그건 아동 학대였어요.
A: 하지만 마땅히 방법이 없잖아요? 저한테 자물쇠를 옷핀으로 뚫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기를 직접 본 적도 없고, 친구들도 내 말을 안 믿어 주고… 다들 화만 내더군요. 아니면 무표정하게 위로하거나.
A: 그래서, 한 번 최후의 수법을 써 보기로 했죠. 잠복근무.
신기하네요.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해도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은데.
A: 고맙네요. 아무튼, 혹시 소설책 많이 보세요? 제가 예전에 읽은 책에 그런 내용이 나와요. 주인공이, 여주인공인데, 미세한 가루를 터치패드 위에 뿌려서 지문이 묻은 번호를 알아내요. 그리고 유력한 패턴 몇 개를 추려서 결국 암호를 알아내는 데 성공하는 장면이에요.
A: 이 방법을 쓰려면 일단 부부가 비밀번호를 누르는 장면을 대략적으로라도 봐야 해요. 근데 남편이든, 아내든 매일 다른 시간대에 집을 나서니 첫 단계부터가 문제였죠.
음. 부부가 집을 나가고 나서 따라 나간 다음에 문 앞에서 다른 일을 하는 척 대기하는 건 안 됐나요?
A: 해 봤어요. 제가 문 밖으로 나서면 집 안에 있는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보고하는 것 같더라고요. 절대 집을 같이 비우지는 않는 거죠. 그래서 돌아오는 사람은 문에 바싹 붙어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더라고요.
A: 결론은, 제가 집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서 그들을 봐야 했다는 거죠.
A: 우리 빌라 근처에는 고층 건물이 많아요. 그 중 한 건물 2층에 커다란 카페가 있고요. 그 카페로 올라가는 계단 가운데에 작은 창문이 있는데, 그 창문 정면으로 빌라랑 우리 집이 보여요. 자세한 풍경은 안 보이지만.
A: 근데 도구가 없으면 옆집까지는 아예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쿠팡에서 작은 거울이랑 망원경을 사서, 거울을 빌라 창틈에 끼워넣고 카페 계단에서 망원경으로 거울에 꺾인 빛을 봤어요. 정확하게 옆집 키패드가 보이더군요.
그, 말을 끊어서 죄송하지만, 굉장히 열정적이셨네요. 왜 그렇게까지 하신 건가요?
A: 이유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그래야 하니까. 그 이유인 것 같아요. 사실 그때는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류의 자기성찰 자체가 안 떠오르더라고요. 과몰입 상태였던 것 같아요.
A: 그리고 솔직히, 그런 일을 누가 참을 수 있겠어요.
그렇군요. 과정은 너무 자세히 말씀하시지 않아도 되고, 그 집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중점으로 말해 주세요.
A: 아, 네. 그래서 전분가루랑 거울을 이용해서 비밀번호를 어찌어찌 알아내는 데 성공했죠. 그리고 아내랑 남편, 둘 중 하나는 항상 집 안에 있으니 그들을 집 밖으로 꾀어내는 법도 생각해야 했는데, 이건 경비 아저씨를 이용해서 해결했어요. 그들 집주인이 부부를 찾고 있다고 속여넘겼거든요. 아내가 의심 없이 집 밖으로 나가더라고요.
A: 그리고… 비밀번호는 6861이었어요. 잠금장치가 열렸죠. 저는 드디어 그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A: 제일 먼저 느껴진 건 냄새였어요. 가정집에서 날 법한 음식 냄새가 전혀 안 났거든요. 대신 집 전체에서 소독약 냄새가 진동을 했어요. 코가 뻥 뚫릴 정도였죠.
A: 그 다음으로 느껴졌던 건 소리고요. 주변이 완전히 고요했어요. 벽지를 방음 벽지로 발라 놓은 건지, 제 집 쪽에서 들려오는 약간의 소음만 빼면 소리가 하나도 없었어요.
A: 아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요, 물론.
A: 거실 풍경은 제 집이랑 거의 비슷했어요. 가전도구들 몇 개랑, 소파랑, 큰 책상 하나. TV는 없었고. 책상 위에 종이들이 흩어져 있던 건 기억하는데, 그 내용은 미처 못 봤어요.
A: 다음으로 주방을 봤었어요. 싱크대는 사용한 흔적 없이 깨끗하고, 대충 훑어보니 무언가를 먹은 흔적도 없었죠. 결벽증까지 있는 가면도착증 부부라니, 이 집 안에서 뭔가 나와도 나오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A: 참. 화장실은 못 봤어요. 나머지 공간을 생각하면 거기도 곰팡이 하나 없이 깨끗했겠지만. 사실 처음 계획은 집 안의 모든 공간을 다 뒤져보는 거였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많이 부족할 것 같더라고요. 이미 경비 아저씨랑 아내가 올라오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A: 그래서 전 마지막 방인 침실만 보고 빠져나오기로 했어요. 아마 그 안에 아기도 있을 테니, 아기 상태가 어떤지만 확인하려고 했어요. 만약 애가 괜찮으면 일단은 그냥 돌아가려고 했죠.
A: 근데, 침실 문이 안 열리는 거에요. 다시 보니까 부부가 침실에도 자물쇠를 달아 놨더라고요. 안에 아기가 있는 채로.
A: 저는 거기서 진짜 빡돌았어요. 아기가 있는 방에 자물쇠를 둔다는 건, 그것 자체만으로 이미 학대거든요. 거기다 전 이 모든 신비주의적인 행태에 신물이 난 상태였어요.
A: 그래서 전 거기서 몰래 들어왔다가 빠져나온다는 계획을 버리고, 주방에서 작은 프라이팬 하나를 가져왔어요. 그리고 프라이팬 손잡이로 있는 힘껏 자물쇠를 내리쳤죠.
A: 쾅. 쾅. 쾅. 전 자물쇠가 부러지기를 기다리며 계속 내리쳤어요. 속으로는 아내랑 경비 아저씨가 오기 전에 끝낼 수 있을지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어요. 실제로 걸린 시간은 아마 2분 정도였을 텐데, 체감상 거의 한 시간을 내려쳤던 것 같아요.
A: 그리고 자물쇠가 부숴졌어요. 전 앞뒤 잴 겨를도 없이 바로 침실 문을 활짝 열었죠. 생각해 보면 멍청했던 거에요. 이때까지 봐 왔던 모든 광경을 생각하면, 열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던 게 분명한데.
A가 입을 닫는다. 침묵이 길어진다.
괜찮으신가요?
A: 아뇨.
A: 누구라도 괜찮을 수가 없을 걸요. 제가 어떤 광경을 봤는지 아시잖아요.
급할 건 없습니다. 시간에 쫓기는 사안은 아니니까요.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할게요.
A: 아뇨, 그냥 한꺼번에 다 털어놓을래요. 여러 번 되새기는 게 더 마음 아프니까.
A가 심호흡을 한다.
A: 일단, 침실은 집의 다른 곳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방의 모든 면이 두꺼운 방음재로 덮여 있고, 흰색 천으로 마감이 되어 있더군요. 덕분에 그 안은 마치 병원… 정신병원 같은 이미지였어요. 거기에 가구라고 할 만한 건 가운데 있는 어린이용 책상밖에 없고, 그 외에는 텅 빈 공간이었어요. 저와 아이들밖에 없었죠.
아이'들'이요?
A: 네. 안에는 아이 두 명이 있었어요. 둘 다 너다섯 살쯤 돼 보였고,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어요. 그 위에는 완구점에서 팔 법한 장난감 음식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소꿉놀이 중이었던 것 같아요. 전 그때까지 아이가 한 명이라고 생각해서 그걸 보고 살짝 놀랐었어요.
A: 근데 다음 순간, 아이 중 한 명은 목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나자 구역질이 나오더군요.
A: 둘은 얼굴이 똑같았어요.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일란성 쌍둥이인 줄 알았을 거에요. 얼굴에 난 작은 점부터 속눈썹, 콧등, 모든 게 다 같았어요. 차이점은 목밖에 없는 아이의 머리 뒤쪽에는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고, 다른 아이는 손에 모형 포크를 쥐고 있었던 거죠.
A: '포크를 쥐고 음식의 가운데를 꾹 누르세요.'라고 목만 남은 아이가 입을 열었어요. 저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목만 남은 아이가 일종의 스피커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3D 프린터로 아이랑 닮은 골격을 인쇄해서, 그 안에 블루투스 스피커를 넣고 위에는 가면과 가발을 씌운 거에요. 진짜 인간을 모방하기 위해.
A: 반대편 아이, 그러니까 포크를 쥔 아이가 입을 열었어요. "퐄, 을 쥐, 고음식 강데, 누, ㄹ."
A: 그 애는 그냥 웅얼거리기만 했어요. 그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도 못한 것 같았어요. 그 애는 포크를 땅바닥에 떨어트렸어요.
A: '포크를 손에 감듯이 쥐세요.' 목만 남은 스피커가 말했죠. 아이는 가만히 앉아서, "포글 산네 감 쥐이." 라고 답했어요.
A: 전 거기서 더 참지 못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목만 남은 아이를 들어올렸어요. 생각보다 가벼웠어요. 한 6kg? 그 정도도 안 될 것 같더라고요. 진짜 아이가 제게로 시선을 돌렸어요.
A: '포크를 손에 감듯이 쥐세요.' 그 [욕설] 스피커가 또 한 번 말했어요. 전 그걸 있는 힘껏 바닥에 내팽개쳤고, 스피커는 산산조각이 났죠. 전선은 여러 줄로 바닥에 흩어졌어요.
A: 그러고 저는 진짜 아이를 봤어요. 걜 구하기 위해서 그 고생을 했는데도, 그 눈을 보니까 소름이 쫙 끼치더군요. 보통 아이들은 큰 소란이 일어나면 일단 울어재껴요. 아니면 엄마를 찾거나. 근데 그 애는… 절 가만히 바라보고 있더군요. 그러고는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A: "포글 산네 감 쥐이, 쾅". 아이는 앉은 채로 그렇게 말했어요.
A: 그때 알았죠. 그 애는 말이라는 거 자체를 몰라요. 책상이 부서지는 소리와 인삿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똑같이 받아들여요. 그리고 감정도 몰라요. 그 아이가 집 안에서 보는 모든 것들은 무표정하니까.
A: 그 부부는, 아이의 인생을 거세시켜 놓은 거에요. 인간의 의식을 산산조각 내 놨다고요.
A: 솔직히 그쯤 되니까, 제가 영화 속에 있는 건지 현실인지 구분도 안 가더군요. 그 모든 게 꿈만 같았으니까. 차이점이라면 꿈 속과 달리 제가 엄청나게 빡쳐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그때 타이밍 좋게 도어락이 돌아가더군요.
A: 전 숨으려는 마음도 없었어요. 문이 열리고, 아내와 경비 아저씨가 집안으로 들어왔어요. 경비 아저씨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얼이 빠졌는지 그대로 굳었어요. 아내 쪽은 상황을 파악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신발도 안 벗고 성큼성큼 제게 걸어오더군요.
A: "당신, 지금 뭐하는"이라고 여자가 말했어요.
A: 아마 뒤에 더 할 말이 있었겠지만, 듣진 못했어요. 제가 그 년의 죽빵을 후려갈겼으니까요.
A: 여자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면서 넘어졌어요. 그 소리에 경비 아저씨가 정신을 차렸는지, "지금 뭐하는 짓거리야"라고 포효하더라고요.
A: 전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어요.이게 다 무슨 수작이냐고. 저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고.
A: 여자는 그냥 계속 꺼지라는 말만 반복했어요. 자기 집에서 나가라고. 무슨 수를 써서든 고소한다고. 어차피 그때 전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어서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요.
A: 경비 아저씨가 저한테 붙어서 절 여자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려고 시도했어요. 우리 셋은 잠시 육탄전을 벌이다가, 결국에는 제가 떨어져 나갔죠. 여자는 목을 문지르면서 침실 쪽으로 물러났어요. 저는 경비 아저씨에게 제압당해서 버둥거리고 있었고.
A: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여자가 악에 받쳐서 외쳤어요.
A: "죽으 벌거, 죽블걸고!" 뒤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따라 들렸고요. 저는 저항을 잠시 멈추고 침실을 바라봤어요.
A: 아이가 포크를 들고 침실 문턱에 서 있더라고요.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이게 다 무슨 난리인가 싶은 자세로. 그 뒤로 조각난 스피커도 보였고요.
A: '포크를 쥐고 음식의 가운데를 꾹 누르세요.' 스피커가 희미하게 말했어요.
A: 여자가 아이를 향해 뒤를 돌아봤어요. 봤는데, 저는… 그 얼굴을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그 짜증스럽다는 표정. 실패작을 보는 듯한 눈빛.
A: "좀 닥쳐!" 여자가 아이에게 소리질렀어요.
A: "조닥츠!" 아이가 마주 소리쳤어요. 손에는 여전히 포크를 들고 있었죠.
A: 전 아마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달았던 것 같아요. 본능적으로 아이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던 걸 보면 말이에요. 경비 아저씨가 워낙 저를 꽉 제압하고 있던 탓에 그러지는 못했지만.
A: "누가 사람 좀 불러와!" 경비 아저씨가 열려 있던 집문 밖을 향해 소리쳤죠. 안 그래도 아까부터 이게 무슨 소란인가 하고 빌라 사람들이 점점 모이고 있었거든요.
A: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그냥 꺼지라고!" 여자가 악을 썼어요.
A: 저는 "저 좀 놔 봐요, 아저씨"라고 소리쳤어요. 아저씨는 절 향해 굉장히 험한 말들을 쏟아냈고요. 밖에서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죠.
A: 지금 생각해 보자면… 그때 아이는 혼란스러워했었던 것 같아요. 그 짧은 인생에 처음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들어온 셈이니까. 아기 입장에서는, 기존의 하얀 벽으로 만든 세상이 갑자기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겠죠. 그래도 아기들은, 원래 모험을 좋아하잖아요. 새로운 세상을.
A: 아이가 갑자기 앞으로 걸어나가더라고요. 문밖을 향해서. 저희를 향해서.
A: 여자가 그걸 보고는, 아이의 팔을 비틀어 쥐고 다시 격리실 안으로 확 당겼어요. 아기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뒤로 넘어졌고요. 저는 더 크게 발버둥쳤죠.
A: "뒤로 들어가 있으라고!" 여자가 아이에게 소리쳤어요.
A: 아이는 가만히 있었어요. 대답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리고 그때 뒤에서 스피커가 말하더군요.
A: '포크를 쥐고 음식의 가운데를 꾹 누르세요.' 스피커가 마지막으로 말했죠.
A: 그리고 아이가 저를 봤어요.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군요. 저도… 마주, 그 눈을 마주봤는데… 그 순간에 생각이 났어요.
A: 그 짧은 만남에서 제가 아이에게 가르쳐 준 건 단 한 가지밖에 없었잖아요. 물건을 패대기치는 법. 팔을 들어서, 있는 힘껏 내려치는 법. 그렇게 해서 물건을 파괴하는 법.
A: 아이는 그걸 배웠었어요. 전 그걸 깨달았고요.
A: 어떻게 알았냐면, 아이가 뛰어올라서 저와 정확히 같은 자세로 손에 있던 포크를 아내의 눈알에 박아넣었으니까요.
긴 침묵. A는 남은 물을 조심스럽게 다 마신다.
A: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기억이 잘 안 나요. 여자는 바닥에 쓰러졌고, 경비 아저씨는 실신하고, 저는 그냥 계속 비명을 질렀어요. 마침내 경찰들이 와서 이 모든 난장판을 수습하고 절 병원에 데려다 줄 때까지.
그렇군요.
A: 그리고 나중에 재판 때, 전 제가 알고 있는 걸 그대로 다 말했어요. 도움이 됐을지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재판 중에 안 사실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그 부부가 모종의 실험을 위해 아이를 납치해서 우리에 가두고 키웠다는 거였어요. 무슨 실험인지는 감도 안 잡히지만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이었고요.
A: 재판이 끝난 뒤로는 제 자취방으로 돌아가 본 적이 없어요. 거기로 가는 순간, 남편 쪽이 저를 어떻게든 죽일 것 같아서요. 친구 집이랑 모텔을 전전하다가… 결국 여기로 오게 됐죠. 그 뒤로는 쭉 여기서 살았어요. 그쪽이 절 찾아오기 전까지는요.
가족 분들과는 대화하셨나요?
A: 제 가족들은… 아뇨, 다들 절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더라고요. 말로만 위로해 주고, 그냥 다들 귀찮아하는 듯한, 무표정한 얼굴이니… 솔직히, 그냥 말을 꺼내지 말 걸 그랬단 생각도 해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렇군요.
A: …예. 아무튼, 이게 진짜 마지막이에요. 제 이야기는 끝났어요.
수고하셨어요. 어려운 기억이었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털어놓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A: 그러면, 마지막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나요?
네, 말하세요.
A: 그 사람들. 침묵
A: 그 사람들, 어디서 온 사람들이에요? 검사가 끝끝내 그것만은 안 알려주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저런 정신 나간 실험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이상한데, 심지어 뒷배가 있었다니. 그게 너무 궁금했어요.
그건… 보안 규정 상 위배되는 내용이라서, 어렵겠네요.
A: 어차피 제 기억 지우신다면서요. 면담하기 전에 경비들한테 그렇게 들었어요. 마지막 자비인 셈 치고 말해 줄 수도 있잖아요?
…우리는 아마 셀레스트, 아니면 그 하위 단체에서 벌인 일로 추정하고 있어요. 자세한 건 조사를 더 해 봐야 알겠지만요. 셀레스트는 학업과 관련된 변칙 물품에 깊게 관여된 단체에요.
A: …그래요. 어차피 들어 봤자 뭔 말인지 못 알아듣겠네요.
자, 그럼-
A: 잠깐만요. 하나 더 있어요.
뭔가요?
A: 그 아이. 정상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까요?
잠시 침묵. 펜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
재단의 재사회화 교육과 적절한 치료를 받는다면,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오를 수는 있을 거에요. 평범한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르고요. 그래도, 자국은 남을 거에요.
A: 자국이요.
네. 그 기억은 아이의 삶에 영원히 남을 거에요. 기억소거제로도 지울 수는 없겠죠. 유년기의 추억은 너무나 강력하니까. 하지만…
A: 하지만?
결국, 그 애는 좋은 아이가 되겠죠.
왜냐하면 결국 셀레스트가 목표로 하는 건 그거니까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순종적인, 공부 잘하는 아이를 양성하는 것. '좋은 아이'를 만드는 것.
A: …그건 별로 좋은 의미 같지 않은데요.
맞아요. 하지만 우리 쪽에서도 최선을 다해 볼 거에요. 또래들과 잘 놀고, 잘 웃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진짜 좋은 아이가 되도록. 여기는 특히 재단 기지 중에서도 청소년들을 위한 복지가 활발하니, 더 좋고요.
A: 다행이네요.
A가 미소를 짓는다.
A: 혹시 마지막 부탁을 해도 될까요?
아, 지금 시간이 거의 다 되서… 더 궁금한 내용이 있다면-
A: 아뇨, 진짜 간단한 거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뭐죠?
A: 혹시 웃어 주실 수 있나요? 많이 웃을 필요는 없어요. 그냥 미소 수준이기만 하면 돼요.
침묵.
A: …이상한 의도는 아니에요. 그냥,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요. 여기 사람들은, 다들 너무… 너무… 다들 무표정해서.
침묵.
A: 웃어 달라고 해도, 다들 절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더라고요. 그게 뭐 큰 일도 아닌데… 정말, 정말 작은 일인데… 왜 나만 여기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죠? 왜?
침묵.
A: 왜 여기 사람들 모두,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까요?
경호 요원, 기억소거제 투여해 주세요. 면담은 끝났습니다.
경호 요원들이 A를 제압하고 경구형 기억소거제를 투여한다. A는 잠시 몸부림치다가 쓰러진다.
…미안해요.
경호 요원: 여기 그대로 두면 될까요?
소파에 올려 둬요. 그럼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래야 의심당하지도 않을 테고.
경호 요원 …벌써 5시, 퇴소해야 할 시간이네요. 참 시간이 빨라요.
정신병원은 면회 제한 시간이 다른 병원보다 빠르니까요. 그래도 우리는 가족 면회로 신청해 놔서 그나마 5시에 끝난 거죠.
이제 가죠. 간호사들한테 말 잘 전해 주는 거 잊지 말고.
경호 요원: 녹음 자료는 어디 둘까요?
일단 제 연구실에요. 굳이 필요할 것 같진 않지만… 뭐, 유일한 현장 목격자였으니. 망상증 환자가 됐다고 해도 일단 보관은 해 두려고요.
A가 잠결에 발작적인 마른기침을 몇 번 한다.
…그쪽도 빠르게 병이 나았으면 좋겠어요.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기를.
당신이야말로 정말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녹음기 버튼이 달칵이는 소리. 녹음이 끊기는 소리.
면담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