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냉장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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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묻자. 냉장고가 닫히면, 냉장고 안에 있는 것들은 어떻게 될까?”

김현주가 낡고 익숙한 취식실 의자에 앉아서 길고 지루한 식탁 맞은편에 있는 동료 박한슬에게 물었다. 동료 한슬은 소스가 묻은 닭고기를 썰다가 고개를 들었다.

“…인생론?”

김현주가 접시를 식기로 톡톡 찍는 동안 박한슬은 포크로 찍은 고기를 입으로 가져가 우물댔다.

“아니, 현실.”

질린 표정의 박한슬이 그 말에 얼굴을 조금 폈다. 그녀는 같은 박자로 고기를 썰고 입에 가져가길 반복하면서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식당 바깥에서 발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고 있는 것보다 조금… 느리게 썩겠지. 그치?”

김현주는 양념 된 마카로니 하나를 깨작거렸다. 붉은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취식실의 분위기가 산만해지고 있었다.

“아냐. 썩고 뭐고 할 게 뭐가 있어. 없어지는데. 냉장고를 닫으면 그 안에 있는 건 없어지는 거야.”

“혹시 존재에 대한 관점이 유아퇴행했니, 과학철학 자문위원-박사님?

탄소나노튜브 복장으로 중무장한 몇 명이 취식실 문을 거칠게 열고는 '김현주를 제외하고 모두 나가'라고 소리쳤다. 무장한 인원은 숙련된 솜씨로 화기를 몸에 걸친 채 김현주를 포위하고 있었다. 방금 창설된 기동특무부대가 분명했다.

“시발?”

문제의 원인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박한슬이 당황해 아무 말이나 내뱉고는 포크조차 놓지 못 한 채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코 바로 앞에 격리대상이 있었다니. 당장 일어나 양팔을 잘 보이게 위로 치켜 들으라고 지겹게 소리 지르는 무장인원들의 한가운데에서, 김현주는 그 말대로 찬찬히 몸을 일으키고 일단 눈에 보이는 부분은 무해하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갖고 있는 그 총알을 죄다 나한테 박아버리면 우주가 멸망할지도 몰라요. 하지 마요.”

그 말에 기동특무부대가 약간 움찔했다.

“게다가 아직 난 아무것도 없애지 않았어요. 무엇보다, 난 희생을 감수하고 찾아온 당신들이 굳이 희생하지 않도록 할 수 있어요.”



“너는 세 가지의 중요한 정보를 주었다. SCP-115-KO-1. 하나는 네 목숨이 우주의 존망과 직결될 수도 있다, 또 하나는 너는 아직 ‘무’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마지막 하나는 지금 우리가 잊힌 채 죽도록 하지 않을 수 있다. 모두 보고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자기를 매킨토시라고 소개한 기동특무부대원, 면담 담당은 면담실에 앉아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질문을 하고 있었다. 강화창으로 나눠진 면담실 반대쪽에서 보기에도 매킨토시의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방을 둘러싼 검은 복장의 인원들은 총구를 면담자와 김현주 모두에게 향하고 있었다. 하달된 절차인 모양이었다.

“당신이 만약 혼자 살고 아이도 없는데 집의 냉장고가 닫히면,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매킨토시는 초보가 아니었다. 그는 상관없는 말을 지껄이지 말라고 소리치거나 말의 의미를 캐지 않았다. 단지 턱을 굳히며 아무 말 없이 쳐다볼 뿐.

“너무 당연하지만, 그것들은 없어져요. 당신이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 말을 하기 전까지 오늘 단 한 번이라도 냉장고 안에 대해서 생각했나요? 무의식적으로라도?”

매킨토시는 누구라도 그렇듯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성과 김현주의 입 모양을 무의식 수준에서 배치하며 그의 단어와 문장을 인식하는 중이었다.

“당신이 그러지 않았다는 걸 내가 알아요. 왜냐하면 당신이 없앨 뻔한 냉장고 안을 인식의 빈틈 내내 제가 인식하고 있었거든요. 나한테 감사하세요. 오늘도 당신은 그냥 생각 없이 집으로 가 냉장고를 열어서 그 안의 다이어트 주스를 꿀꺽꿀꺽 집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매킨토시가 양미간을 좁히는 동시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뭣보다, 다이어트 주스를 마신다는 건 가족도 친구들도 모르는 자기만의 일이었다.

“모든 게 마찬가지예요. 내 옆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저 친구가 사흘 전에 딸쳤다는 사실을 잊으면 그냥 이 세계에서 없는 사실이 되지만 미안한데 그걸 잊은 순간부터 내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남아있어요. 매킨토시 당신 뒤에 있는 그 친구의 어릴 적 인형은 그 사람 빼면 기억해줄 사람이 없어서, 잠깐 잊으면 그 순간 세상에서 사라지지만 그 잠깐잠깐의 순간을 내가 보완해서 기억해주고 있기 때문에 불쌍한 그 녀석은 오늘도 창고 깊숙한 푸른 상자 안에 고이 모셔져 있지요. 이게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이에요. 인식이 전부라고요.”

매킨토시는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세상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된 것들은 관념에 상관없이, 아니 구성되지 않은 것들이라도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인식은 그 이후일 뿐이다. 모든 것은 단지 ‘발견’되며…….

“그 생각을 버려요. 재단에서 일하면서도 사물을 인식하는 주된 주체가 인간일 거라고 여기는 그 안일한 생각을 언제까지 가지고 있을 건가요?”

매킨토시가 기겁했다.

“아니 씨발 그게 무슨.”
“아니 씨발 그게 무슨.”

매킨토시가 기겁의 결과로 음향학적 구성을 내뱉자 김현주가 고개를 쭉 기울이며 매킨토시의 말을 동시에 따라 했다.

“내 생각을 어떻게 읽었지?”
“내 생각을 어떻게 읽었지? 만두가 썩었을 거야! 오늘 치약을 너무 조금 짰어. 오늘 난 안전할까? 휴지! 7년 전에 빌려준 지우개는 소중한 거였는데. 과자 봉투! 옆구리가 왜 가려운 거지? 만두! 내 인식? 아니야, 손톱깎이! 난 읽혔어! 사고의 단순화라니 나는 너무 뻔하잖아. 엿! 트럼펫!”

매킨토시의 다음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한 김현주는 그치지 않고 문장과 단어들을 각각의 높낮이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냥 보면 모두 진실한 걱정과 충동과 감정을 담고 있는 것처럼 충실하게.

“그만해, 제발 그만해!”
“그만해, 제발 그만해!”

전혀 예상치 못한, 그러나 언제나처럼 평범할 뿐이었던 스스로의 인식을 빈틈없이 읽히는 감각에 매킨토시는 잠시 정신에 갈라진 틈이 생긴 기분이었다. 소총을 쥔 기동특무부대의 팔에 새삼 힘이 잔뜩 들어갔다.

“모두 당신이 예전에 했다가, 잊고 있었다가, 방금 다시 했던 생각들이에요. 당신은 잊고 있던, 만두! 씨발! 말하자면 내게 위탁했던 생각들을 다시 내게서 빼가죠. 하지만 난 잊지 않아요. 잊으면 그 생각은, 그만해! 영원히 사라져 버리기- 좆까 개새끼야! ……때문에.”

매킨토시는 잠시 침묵하다가 넋이 빠진 표정으로 헛웃음을 한 차례 웃었다.

“그러니까, 네가 우주의 도서관인지 뭔지 그런 거라고?”

“아니 이 머저리 새끼야! 우주가 인식 때문에 존재한다니까! 난 아무것도 아니야! 나도 그냥 잊히면 서럽게 죽을 새끼란 말이야! 그리고 내 기준으로 북북서 방향에 있는 친구는 방금 엄마가 죽었으니 휴가를 받으세요!”

“그럼 ‘최초의 인식’은? 빅뱅이 벌어지고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 그 최초의 순간에는 어떤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탄생이 가능했던 거지?”

“넌 변칙 개체가 벡터 좌표계에 종속된 것들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물론 넌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간 얼마 안 돼서 뒤질 거야! 정신 차려!”

“…그러고보니 넌 세 가지를 말했어.”

매킨토시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상념을 털어내고 다시금 문답을 이어가려 애썼다.

“하나를 틀렸어요. 내가 ‘무’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 우주는 인식되지 않은 것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내게 맡겨놔요. 장의사가 묻은 시체, 밟아 죽인 벌레, 폭발한 항성, 관측되지 않은 물체, 사용되고 잊힌 상념, 망각된 비명, 물체의 자전과 공전, 우주의 어떤 텅 빈 곳, 자아가 없는 어떤 우주의 생물, 은하좌표, 제4의 색깔, 물리법칙, 발판 개념, 어제 죽은 신문 배달부, 당신이 뿌리고 잊은 분무기의 물 분자, 반 존재, 시각적 비시각, 공간적 허구, 만들어지지 않은 우주, 붉은빛 초록, 프랙탈의 끝, 증명의 증명법, 패러독스의 답.”

“네 말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인식한다는 사실 때문에 ‘무’란 존재할 수가 없잖아?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김현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없을 수밖에 없는 것들은 제 인식 속에만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인식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후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게 됩니다.”

“대체 네가 갖고 있는 것들의 용량은 얼마야?”

“그게 ‘무’를 ‘안다’는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모순적이야. 어쨌든 무한한 ‘시간’이 흐른다는 전제하에 그 논리는 모두…….”

“씨발 그놈의 ‘시간’, ‘시간’! 내가 말하는 ‘이후’가 모두 시간을 전제한다고 생각하지 마, 그 좆만한 건 이 좆만한 우주에서 그나마 정렬된 지 수십억 년밖에 안 지났다고! 비유하자면 버려진 태아야! 엄마는 몰라! 내 북북서에 서 있는 새끼의 엄마는 방금 전에 죽었지만!”

“최초의 인식은? 과연 최초에 무엇이 있어서 인식이 처음 생긴 거지? ‘무’에서 왜 처음 무언가가 존재하기 시작한 거지?”

현주가 한숨을 내쉬며 삐딱하게 턱을 괴었다.

“그건 인식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런 최초의 뭐시기들은 칼로 벤 듯이 끊겨서 반은 우리에게 맡겨지지조차 않았고 나머지는…. 나머지는….”

매킨토시는 마치 자기가 우주의 비밀을 쥔 기분이었다. 그는 그 기분에 취해 앞에 있는 김현주에게 소리를 질렀다.

“나머지는 뭔데?”

“찰나라도 잊힌 적이 없는 것들이라 우리가 접근할 수 없어요.”

“…신 같은 건가?”

“문제는 여기서 생겨요. 난 그게 뭔지 몰라요. 개념인지 생물인지 절차인지 현상인지 몇 개인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구요. 그런데 만약 그것이 움직이는 궤적을 느낄 수 있고, 왜 움직이는지를 알고 있다면 인간의 정신은 얼마나 버틸 것 같아요?”

매킨토시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래서 대체 가치 있는 정보가 있기는 한 거냐구!”

김현주가 질세라 격리창을 매킨토시가 한 것처럼 갈겼다.

“잘난 듯 뻐기지 마 개새끼야! 넌 존나 우주의 티끌이고 의미 없이 죽을 거야! 문제는 ‘그것’이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난 미치거나 하진 않아요. 미치는 건 너희겠지 아마. 혹시 그 교수를 기억하나요? 마지막의.”

“개념을 지우고 격리돼서 굶어 죽은?”

“네. 이 우주는 여러 개념이 사라진 결함품이에요. 구멍이 뻥뻥 뚫려 있어요. 개념을 지운 접촉자가 그 교수 한 명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죠? 맞아요. 이미 이 우주는 너덜너덜한 누더기고 너희는 간신히 살아 있지. 완전함과 행복은 셀 수 없는 시간 전에 이미 죽어 사라졌어.”

“그나마도 좀비 같은 재 접촉자들이 꼬이는 상황이지. 왜 꼬이는지는 알고 있나?”

“아뇨. 그들도 그 이유를 잊은 적이 없어서 몰라요. 재접촉자들이 전부 죽지 않는 한 알 도리가 없어요. 하지만 최근에 생긴 것들이고, ‘그것’이 움직인 것과 비슷한 시기에 첫 재접촉자가 보고됐었지요. 아마?”

“오는 대로 죽고 있지만.”

“여튼. 이 우주는 완성도가 꽤 높거든요. 특등급이에요. 그래서, 그 녀석은 이 상등품이 구멍 나 있는 걸 더 못 견디겠나 봐요.”

“창조자인가?”

“그딴 걸 물을 때가 아니잖아 이 얼간이새끼야! 너 담당자 누구야? 아. 이 새끼 담당자도 왜 엄마가 뒤져있는 거야? 줄초상이구만!”

“그분 어머니는 삼십 년 전에 돌아가셨어 개자식아!”

“내겐 의미 없어! 대가리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이 흐려져 가는 마당에 누가 언제 뒤졌고 누구는 언제 뒤졌고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어쨌든 뒤졌잖아!

“그래서, 말을 계속해. 그것이 원하는 게 이 우주를 없애는 건가?”

“아니요.”

“되돌려? 다른 모양으로 만들어?”

“더 끔찍하죠. 고치려고 해요.”

“잘 된 거 아닌가?”

“원재료가 접촉자들 때문에 북북서에 있는 친구랑 당신 담당자 엄마처럼 죄다 없어져 뒤졌으니 최대한 ‘비슷’한 대체품을 쓰겠죠. 그런데 그 ‘비슷’이 인류가 생각하는 ‘비슷’이랑 과연 얼마나 ‘비슷’할까 난 모르겠네?”

“그럼, ‘그것’은 언제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나?”

“이제부터 그걸 ‘최초의 인식’이라고 부르도록 하죠. 그리고 이미 움직이고 있어요. 재접촉자들이 그 시작이에요. 난,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어요.”

김현주는 손가락 다섯 개 중 네 개를 펴며 말했다.

“우주는 별 이상없이 보완될거예요. 고치는 도중에 많이 아파하겠지만.”

김현주가 손가락 하나를 또 펴며 말했다.

“하지만 다른 건 약속하지 못해요. 인류의 안전 같은 거요. 아마 높은 확률로 인류는 좆될거예요.”

김현주는 의자에 기대 한숨으로 성대를 긁으며 고개를 뒤로 늘어뜨렸다.

“으어아아! 이제 날 죽이고 소각로에 좀 던져줘요. 당신들 덕분에 살아있는 게 짜증 나고 있어요. 이 우주의 티끌들아. 왜 씨발 다 자살하지 않는 거예요?”

매킨토시는 경계 조치를 해제한 뒤 김현주에게 말했다.

“너와 네 정보가 필요해.”

“우리가 뭘 할 수 있나?”
“우리가 뭘 할 수 있나?”

매킨토시를 따라 한 김현주가 고개를 바로 해 도리도리 저었다.

“많지는 않고, 없지도 않아요. 다만 세상이 우스워지는 중이라는 걸 확실히 느낄 일들은 많이 겪겠죠. 해볼래요? 당신들 발버둥 치는걸 보는 맛은 있겠어요.”

김현주는 마음껏 모두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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