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가을의 한적한 거리를 걷다가 바람에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낙엽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수백의 갈색, 붉은색, 노란색 낙엽들이 무리를 이루어 마치 목자를 따라가는 양떼처럼, 바람의 인도를 받아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어떤 신비한 땅으로 날아가는 모습은 사람들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런데 그 수많은 낙엽들 중 내 눈을 끈 것은 단 한 개뿐이었다. 갈색도 붉은색도 노란색도 아니라, 차라리 검은색이라고 불리는 쪽이 더 적합할 칙칙한 색을 하고, 쪼그라지고 오그라든 채로 아무런 생기도 활기도 없이 날아가는 모습을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낙엽이라고 불렀다가는 다른 낙엽들에게 미안할 것 같은 그런 것이 어떻게 내 걸음을 멈추게 했을까.
5월 중순이었다. 방랑자의 도서관을 몇 달 만에 방문한 나는 예전에 없었던 상자가 내 책상 한복판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공된 나무 재질의 아주 조그만, 정육면체 상자였다. 자물쇠는 달려 있지 않았다. 도서관 사람들 말로는 휘영이 전날에 가져다 놓았다고 했다. 휘영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다. 그 애는 내가 언제 어디에 있을 지 플러스마이너스 24시간의 오차 범위 내에서 예측할 수 있다. 이 도서관에서 마법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은(나 포함해서) 여럿 있지만, 휘영은 그 중에서도 특이한 아이였다. 나는 그 작은 나무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 상자 안에 있는 것은 내가 살면서 보아 온 것 중 가장 초라하고, 지저분하고, 추한 나뭇잎이었다. 나뭇잎에다 이런 수식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그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 것 같다. 처음에는 내가 휘영에게 뭔가 잘못해서 그 애가 나한테 저주를 걸려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휘영이 진짜로 그런 괴악한 짓을 저지를 리는 없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휘영이 대체 왜 이런 걸 내 책상에 가져다 놓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이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선물이라면 선물받은 사람의 오해(또는 적의)를 사기 딱 좋은 물건이고, 그렇다고 뭔가 실제적인 쓰임이 있는 물건일 리는 없었다.
그렇게 나뭇잎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다가,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는 조금 다른 어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저 나뭇잎 하나에 불과할 뿐인데도 나는 나뭇잎을 계속 들여다보는 동안 무언가 대단한 것이 사라지고 남은 껍데기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언젠가 휘영을 만나면 나뭇잎의 정체를 물어보기로 했다.
휘영은 바로 그 다음 날 도서관에 찾아왔다. 나는 마음먹은 대로 휘영에게 그 나뭇잎의 정체가 뭔지, 왜 나한테 주었는지 물어보았다. 사실 그것은 내 개인의 당혹감을 해소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왠지 휘영이 엄청난 이야기를 해 줄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말하자면 이야기에 환장하는 작가의 고질병이랄까. 휘영은 우연한 계기로 바람에 날리던 나뭇잎을 보게 되었고, 그걸 '강 작가님'에게 선물하려고 상자에 넣어 두었다고 했다. 선물로는 조금 이상하지 않냐고 내가 물어보자, 휘영은 비록 썩은 나뭇잎일지 몰라도, 다른 어떤 나뭇잎보다 더 특별하고, 귀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무는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푸른 잎으로 치장한다. 그러나 차가운 겨울이 닥치기 전에 나무는 자신의 치장을 떼어내고, 뿌리와 가지만 남은 본연의 모습으로 눈과 바람의 시련을 묵묵히 견딘다. 그렇다면 나뭇잎은 나무에게 있어 하나의 치장물에 불과한 것이다. 나뭇잎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신이 만들어 낸 생명의 메타포지만 결국 나무의 의지에 따라 그 생명의 유무가 결정된다.
어떤 이름 모를 병원 옆에 심겨진 나무도 마찬가지로, 나뭇잎에 대한 절대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뭇잎의 경우, 나뭇잎으로서는 아주 특이하다 할 만한 잎 하나가 가지에 달려 있었다. 외견상으로 자기 동무들과 특이할 것 하나 없는 초록색 나뭇잎이 그렇게 특이하다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나뭇잎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나뭇잎 따위가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겠어?" 라고 말하겠지만, 답은 간단하다. 나뭇잎만큼도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사람만큼 사랑을 할 수 있는 나뭇잎도 있을 수 있다. 마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에게는 자명한 진실이다.
그래서, 그 초록빛(나뭇잎이니까) 사랑의 대상은 바로 한 여자였다. 그 특이한 잎이 달려 있는 나무 옆의 병원 창문을 통해서 바로 보이는 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던 그 여자는 좀처럼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이 없었다. 침대를 다녀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머무르는 사람들은 적었다. 하지만 나뭇잎은 머무르기 싫어도 뭘 어떻게 할 수 없었으므로, 그 여자를 계속 바라보는 일 밖에 할 것이 없었다. 병실 침대 위의 여성은 아무리 봐도 심각한 병에 걸린 것 같았다. 그녀도, 찾아오는 사람들도 웃는 얼굴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뭇잎은 자신만이라도 웃어 줄까 생각하다가, 생각해 보니 나뭇잎이 웃는 얼굴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해서 그녀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 하나는, 침대 위의 그 여자도 바로 그 나뭇잎을 계속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애초에 아무 할 일이 없던 나뭇잎이 그녀를 바라보고 사랑하게 된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나뭇잎은 피어나고 나서 처음 겪는 일에 놀라워하며, 자신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나뭇잎들은 갈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한 잎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나무를 떠나 바람을 따라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는 여행을 일찍 시작했다. 여자를 바라보던 그 나뭇잎도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자를 떠나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끌고 있었다. 여자는 떨어지는 다른 나뭇잎들을 한 번 보고, 다시 그 나뭇잎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그 한 번의 한숨으로 인해, 나뭇잎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치료될지 확실하지 않은 병을 앓고 있었고, 병원에서 잠드는 날이 늘어날수록 완쾌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갔다. 가을이 되고 생명으로 만개하던 나뭇잎들이 말라서 굳어버린 채 나무에서 떨어지게 되자, 그녀는 그 낙엽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예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이 증명되는 날은 바로 그녀가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그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그녀 역시도 나뭇잎처럼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나뭇잎은 이제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 지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알고 있었다.
이제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나무에게는 참 당혹스럽게도, 한 나뭇잎이 떠나지 않겠다고 뻗대고 있었다. 나무는 그런 반항의 이유를 이해할 마음도, 능력도 없었기에 나뭇잎을 떼어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나뭇잎은 정말 끈질기게, 거의 영웅적이라고 할 정도로 저항했다. 그 굳어져 가는 조직으로 가지를 꼭 붙잡고, 비도 바람도 버텨내는 동안 나뭇잎은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버티는 와중에도, 나뭇잎은 계속해서 병실 침대의 여자를 돌아보며, 그녀가 여전히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확인하고는 했다. 그녀는 아직 거기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무에게는 시련에 불과하지만, 아직도 버티고 있는 나뭇잎에게는 재앙이라고 할 만한 겨울이 닥쳤다. 추위가 나뭇잎을 흔들고 눈이 나뭇잎을 타고 내리눌렀다. 그래도 나뭇잎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이제 거의 사라져 가는 생명의 힘을 애써 붙잡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뭇잎은 검게 변하고 쪼그라든 모습을 하고서도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나의 나뭇잎에게는 분명 놀라운 위업이 아닐 수 없을 테지만, 그러한 저항이 그녀를 살릴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어쩌면 저기 다녀가는 저 의사가 시한부 판정을 내린 뒤일지도 모르고, 그녀 옆을 지나쳐가는 사람들은 한때 활기찬 친우였던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뭇잎은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알 수 있어도 알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뭇잎이 한 가지 아는 것은, 자신이 지금 나뭇가지를 붙잡는 일을 그만두면 그녀 역시 그만두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나뭇잎은 계속해서 붙어 있었다. 이제는 병실에 아직 그녀가 있는지 볼 힘도 없었다.
기진맥진한 나뭇잎이 시선을 돌린 사이에, 병실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나뭇잎이 아직 그녀가 있는 방향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다면, 병실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두 웃고 있었다는 것도.
나무는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푸른 잎으로 치장한다. 올 여름에도 잎은 푸르게 피어나고, 그리고…… 경악했다. 그때까지도 붙어있던 검은 나뭇잎을 보고 나서 새로 돋아난 푸른 잎들은 조용히 몸을 떨었다. 이 나뭇잎은 더 이상 자신이 태어난 날도, 자신이 지나온 날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붙잡고 있는 이 가지를 무슨 일이 있어도 놓아선 안 된다는 사실, 그 하나뿐이었다.
갑자기 이 지역에서는 드문 강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검은 나뭇잎을 그것이 간신히 붙잡고 있던 나뭇가지로부터 떼어놓았다.
절망 속에서, 바람에 힘없이 날리면서도, 검은 나뭇잎은 최후의 노력으로 자신이 한때 참으로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던 병실에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그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은 나뭇잎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곳에 원래 있었던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 다행이다, 라고 검은 나뭇잎은 생각했다.
이윽고 여름날의 뜨거운 바람이 검은 나뭇잎을 안고 어디로 가는지 모를 긴 여정을 떠났다.
검은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다른 낙엽들과 함께 하늘 저 멀리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언젠가 비슷하게 하늘 속으로 사라진 또다른 검은 나뭇잎을 추억하는 일을 끝내고 걸음을 다시 옮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