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대 악역 영애 새내기가 전용 노예를 분양받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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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사슴대에 입학하기로 했을 때 비대면 강의한다고 해야 했다. 해저에서도 버틸 수 있는 전자기기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강의를 제대로 못 들었을 게 뻔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가 연구 목표가 되는 상황을 분명 인식해야만 했다. 적어도 코스믹 호러 서적 몇 권 읽고 내가 크툴루와 크기를 제외하고서는 생태적으로나 표상적으로나 흡사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이 나를 바라보는 관점을 예정해서는 안 됐다.

예를 들어, 낼캐들에게 나의 신체는 기적이나 다름없다. 육신을 주무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에게는 영혼과 지성이 이런 극단적인 신체에서도 존재 가능하다는 실증 사례인 것이다. 여기에 종교적 신념이 합쳐진다면 나는 바다에서부터 친히 강림해온 영적 대상이 된다. 방금 들어온 내 새로운 룸메이트인 융의 경우가 바로 나를 그런 낼캐 영적 연구 목표로 삼는 좋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날 보자마자 엎어져서 자비를 구하는 건 좀 심하지 않나.

"보살님, 죄송해요!"

"저기, 일단 좀 떨어지고서…"

"제게 과분한 걸 바라는 게 아니었어요!"

"아니, 잠깐, 그러니까,"

"경전 말씀대로만 해도 잘 됐는데, 기적학과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요!"

"제발, 이제, 살려…."

그때 스완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나는 틀림없이 의식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어, 어. 야! 너 거기서 떨어져!"

갑작스러운 스완의 개입을 명백히 꺼리는 융의 모습을 보니 지금 하는 것이 자기 나름의 종교적 의식이었나 보다. 나는 제사상에 모셔진 신상(神像)인 거였고.

"네? 방해해주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급성피부건조증이야. 건기가 과도하여 일정 압력을 유지하지 못해 급성수축이 발생하여 기도가 폐쇄되고 있다고! 분명 제때에 수분을 보충하지 못하여 발생한 거야. 원래라면 표피흡수가 가능하지만 지금 너는…."

"무슨 의미이죠?"

"목욕하러 가는 인간 붙잡는 바람에 못 씻어서 쓰러졌다고!"

"아앗! 제가 보살님께 폐를 끼쳐버렸다니!"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욕실로 기어가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수돗물…. 한동안 짤 테니 쓰지 마…."

"너무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룸메이트가 오늘 들어온다는 걸 깜빡하고 미리 쟤한테 말도 안한 내 잘못이 있으니까."

"그렇군요. 보살님의 제자이신 건가요?"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그 문 앞의 사르킥 경전은 책장에 꽂아두면 되지?"

"죄송합니다만,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니거라고 바로 욕을 박아버린 스완은 융의 팔의 살갗이 하얗게 일어나는 것도 모른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그 피 냄새 나는 책 잔뜩 쌓인 거 어떡할 거냐고."

"아아, 그건 알아서 해주세요. 이제부터는 스완님이 제 노예이신 거니까요."

"어?"

"원래 저는 낼캐였지만, 제가 사르킥이라면 그래도 노예 하나쯤은 있어야겠지 않겠어요?"

이제는 아예 아메리카 원주민 앞에서 머릿가죽 달고 다니는 인디언이라고 욕을 바로 박아버리는 멍청이를 뒤를 하고서, 나는 드디어 안심하고 욕실 문을 닫을 수 있었다.


"읖, 읖, 읖,"

나는 스완이 저런 꼴이 되어도 싸다고 생각하지만, 나에게도 융이라는 존재를 대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저는 정말 경전에서 이르는 지경에 닿은 걸지도 몰라요. 온 힘을 다해서, 아니, 온 혈을 짜내서 해낸 것이었으니까요. 사슴대에 들어왔지만 제가 기적학과에서 배운 거라고는…."

"나도 알아. 무슨 양자역학 같은 소리겠지. 첫날부터 교재 받아보고 나서 그대로 겁에 질린 거고."

"읖, 읖읖,"

"그래서 그대로 축 처진 상태에서 기숙사에 들어왔더니 저희 가문 본당의 불상과 똑같이 생긴 분이 계시지 뭐에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아마 내 할머니일지도. 한 번 소환당하신 적이 있긴 하시거든."

"그럼 진짜 보살님인가요?"

"아니 그렇게 너무 논리를 뛰어넘지 말라고…. 그런 과거가 진짜였다고 해도 내가 너의 주인이 된다는 논증이 근거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솔직히 저는 보살님에게 먹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읖! 읖, 읖,"

"그게, 그 뜻이 아니고 그러니까…."

"정말 보살님은 자비로우셨던 거군요! 아아, 저는 천상의 존재들이 어째서 자비를 베푸는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서 보게 되니 어떤 마음가짐인지 알 것 같아요!"

"일단 난 천상의 존재가 아니고…. 됐다. 그냥 이제 저기 스완 좀 풀어주면 안 되겠니."

"그게 보살님의 뜻이라면요. 대신 앞으로는 쓸모있는 노예가 되도록 가르쳐줘야겠어요."

융은 스완에게 눈앞까지 다가갔다. 스완은 왠지 융의 눈길을 피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융의 눈길은 자기를 사람으로 보는 눈빛이 아니라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다루는 요리사의 눈빛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말고….. 차라리 그냥 좀 뜯어먹는 걸로 끝내면 안 되려나….?"

사실, 그때 나는 인간 요리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정말로 융이 스완을 요리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네?"

"지금 스완은 혀가 목구멍으로 뒤집어 들어간 거잖아. 그럼 뜯어먹을 때 비명도 안 들리지 않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읖! 읖! 읖!"

"어…. 저는 그냥 혀에 복종 문신 좀 새겨주는 걸로 끝내려고 했는데요…."

"그니까 차라리 먹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 나는 스완이 융의 노예가 된다면 그 영향은 영구적이겠지만 그래도 스완의 살점을 뜯어먹는 정도라면 나중에 다시 회복이 될 테니 그 영향도 회복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하는 논리였다. 그때 인간의 근육 조직의 회복은 좀 어렵다는 것도 아직 모를 때였다. 절대로 전에 스완이 내 앞에서 낙지였나 주꾸미였나 그런 내 모습을 닮은 해산물을 생으로 먹고 싶다는 소리를 지껄인 것에 대한 복수는 아니라 그래도 내 육지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에 하는 말이었다.

"그니까, 그것보다는 복종 문신이 더 낫지 않을까요?"

"하긴 악역을 자처할 거면 그편이 더 나으려나."

"아니, 식인보다는 복종 문신이 더 옳다는 뜻이었어요!"

융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그러니까 복종 문신 쪽은 다치지 않고 끝나는 거잖아요. 이왕이면 그래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도 제 밑에 두는 것이 더 세련되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얘기였어요."

"그게 네 미의식이라면 나도 말리지는 못하겠네."

"미의식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보살님하고는 정말 조심할 게 많네요…."


스완은 비록 표정은 차라리 포기한 건지 차분해 보였지만 숨이 계속 막히는지 얼굴이 퍼레진 걸 보아 나는 인간의 섭식기관은 호흡기관과 기능을 공유한다는 인간에게 중요한 생리학적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융은 다시 낯빛을 가다듬으며 가볍게 팔을 털어내어 그 안의 살덩이를 드러내 보였다. 처음 융이 들어왔을 때 차고 있던 시계 속에 비치는 기어를 세어보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때 보니 융의 피부밑에 있던 살덩이는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해 보였다.

새하얗다 못해 투명해진 피부밑으로 끊임없이 펌프질 따위의 동작을 하는 작은 조직과 혈관과 힘줄 사이로 엮여 만들어진 막 밑에 있는 또 다른 미세 조직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은 융이 차고 있던 시계보다 훨씬 더 미세한 부품들로 이뤄져 있고 또 훨씬 더 복잡한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쨌든 스완 양은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돼요."

"읖, 읖…. 읖?"

"어머, 기회를 달라는 건가요? 저는 그런 자비로운 성격은 아니어서 죄송하네요."

융의 손이 스완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앞으로는 이렇게 혀가 목구멍을 막아버리는 일도 없을 거에요. 이제부터는 제 말만 듣게 될테니까요."

어쨌든 융은 스완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융에게 스완은 자기 가문의 주머니 차원 영지에서는 농노나 아니면 건강식품이나 뭐 그런 비슷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 존재가 감히 자기에게 기어오른다는 것은 융에게는 본능적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영지에 나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그리고 스완도 딱히 참을 이유는 없었다.

그때 융은 손 쥔 것을 그대로 뜯어내려고 시늉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아마도 육공예의 일부일 것이다. 내가 추정만 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기적학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완이 아직 자기 목 속에 있는 융의 손목을 붙잡아버렸기 때문이다.

"원래 내가 기적 못 쓰는 이론충이긴 한데…."

스완은 융의 손을 아예 몸속으로 더 깊숙히 집어 넣어버렸다.

"지금은 내가 기적이 된 거잖아!"

그러고 스완은 자기가 당했던 영창을 그대로 서융에게 읊어주었다. 원래 기적학의 등가교환에 의해서 반발 효과가 일어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았지만, 인간에게 직접 사용하는 기적의 반발은 그 사람 안에서 발생하는 모양이다. 따라서 이렇게 기적의 대상자는 기적에 당하는 순간만큼은 기적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기적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다른 기적이 발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테다. 특히 기적의 대상자와 기적의 시전자가 육체적으로 연결되는 순간에는 말이다.

그보다 한번 들은 영창을 어떻게 외운 걸까?

"읖, 읖, 읖,"

"꼴받는 건 이제 좀 풀렸긴 한데…."

스완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야 이거 어떻게 풀어야 되냐."


"둘이 너무 친하게 지낸다?"

"아니거든!"

"아니에요!"

나로서는 할 수밖에 없었던 말이었다.

그때 나는 당황하는 스완을 위해 교내 경찰에게 전후 사정을 잘 설명해줬다. 스완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그때 내가 스완에게서 도망친 사건 이후로 사슴대에서도 나름 신경 써서 낼캐의 영애쯤 되는 융을 내 룸메이트로 짝지어준 것 같았다. 그런데 융은 사실 악역 영애였고 스완은 자기가 받은 광기를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어쨌거나 교내 폭력은 교내 폭력이니 교내 경찰 위원회는 융과 스완이 서로에게 한 짓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8시간 사회봉사와 함께 육공예로 서로의 손목을 꿰매버린 것이다.

"신경계의 연결이 정신적인 연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군. 이건 인류학 연구에 중요할 것 같네."

내가 이 말을 하자 동시에 나를 증오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아무래도 내 가설은 아마 틀렸던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딴 얘기로 시선을 돌리는 게 정석이다.

"생각해보니 그 때 스완 네가 융한테 기적을 걸 때 너는 이미 복종 문신이 새겨져 있던 상태 아니었어?"

융의 얼굴이 붉어지는 걸 보니 융은 아무래도 자신의 복종 문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 그거."

스완은 융에게 혀를 내밀어 여전히 자기 혀에 새겨져 있는 복종 문신을 보여줬다.

"그렇게 나쁜 사르킥 주인님은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고. 그래서 주인님 말 듣는 것보다 주인님 행동 교정이 주인님을 위한 행동이라고 믿기로 했어. 아, 여기에 보호 주문 걸려 있는 거 알아? 만능은 아니지만 적어도 주인님도 나를 함부로 다루다가 내가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나봐."

나는 아직도 그 때 융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이유가 스완의 혀 내미는 동작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여 분노한 것인지 아니면 스완 같은 노예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분노한건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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