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에너지 드링크를 또 입에 달았다. 선배는 신나게 깨졌을 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나는 계획을 세웠다. 새벽에, 청소부가 소장의 쓰레기통을 비울 때를 노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서들은 나를 살짝 이상하게 보긴 했지만, 다들 내가 또 이상한 짓을 하는구나 싶게 바라볼 뿐이었다. 이번에 내가 하는 짓거리가 자기들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빛이었다. 그렇다. 나는 어느 순간 이 기록보관소의 문제아가 되어있었다. 선배가 저번에 내 시시콜콜한 잘잘못을 꺼낸 것이 속 좁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시시콜콜한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은 언제나 거대한 결과를 몰고 왔다. 나는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는 싫었다. 빨대를 있는 힘껏 빨았다. 다 먹었는지 빨대는 콜콜콜콜 소리만 냈다. 청소하는 분께서 올 때를 기다린 것이었다. 하지만 평소에 청소하는 시간보다 서너 시간이 더 지났는데도 청소하는 분은 오지 않았다. 복도가 어스름하게 밝아져 올 때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 월 일 일에 누가 출근하겠어?"
선배가 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나는 소장실 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덜컹거렸다. 문을 두드렸다.
"야, 이 미친 소장새끼야! 그 공책이 얼마나 중요한 기록인데 그걸 버리냐!"
반쯤 미친 것처럼 소리 질렀다.
"이 세상에 삭제는 없어요, 기록만 있을 뿐이라고요!"
리는 반쯤 미친 것처럼 소리 질렀다.
"다시 말합니다. 삭제, 폐기? 내 앞에서 그딴 소리 꺼내보기만 해요. 이 세상에는 삭제란 없습니다. 기록만 있을 뿐이에요."
그뤼네테는 약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리를 보았고, 두 남자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리를 보았다. 나는 지쳐 나자빠졌다. 내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이러나 싶었다. 원래 그런 것이다. 예산이 부족해서 자료가 눈앞에서 부서져 내리는 꼴을 그냥 보던 그 전 직장이나 소장의 횡포로 귀한 자료가 눈 앞에서 쓰레기통에 박히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현 직장이나 똑같았다.
"내가 바보야, 내가 멍청이라고."
중얼거렸다.
삭제는 없다, 오로지 기록이 있을 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로지 기록이 있을 뿐. 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허황한 이야기이던가.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작업실로 갔다. 책상에서 몇 분이라도 자고 기록보관소에서 나온 기록물들을 보수할 것이다. 작업실 문 옆에 있는 패드에 카드를 찍었다. 스스로 위안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가능해요."
두 남자 중 한 사람이 리에게 말했다.
"그래, 불가능한 일이니까."
나는 문을 열었다.
"지금 이런 웃긴 실험결과가 '가능'하다면, 설마 이 방을 기록보관실로 만들어서 내가 관리하는 게 '불가능' 할까요?"
리가 말했다.
"이제부터 모든 기록물은 저를 통해 들어오고, 저를 통해 나갑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췄다.
"이건 불가능해."
"다시 한번 말하죠."
리가 말했다.
나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2014년 1월 2일
쪽지 밑에는 검은 표지의 공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공책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공책 위에 올려져 있던 쪽지는 옆으로 치워놓았다. 거기에서 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종이에 평범한 잉크로 인쇄된 것이었다. 인쇄된 것이다 보니 글씨체를 통해 누구인지 캐볼 수도 없었다.
모든 기록물은 나를 통해 들어오고, 나를 통해 나간다.
나는 소리쳤다. 모든 기록물은 나를 통해 들어오고, 나를 통해 나갈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 말을 끔찍하게 후회한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 DBMS가 되겠다는 것이다. 나는 슬며시 웃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공책을 급하게 덮고 책상 밑에 숨겼다.
"네, 누구세요?"
책상 위에는 위장용으로 문서 하나가 올라가 있었다.
"네놈 선배님이시다."
또 그 여편네다.
"문 열어. 네가 좋아하는 자몽주스 가져왔어."
나는 고분고분히 문을 열었다. 이 사람이 유일하게 잘 만드는 음식이 있는데, 주스다. 주스도 음식으로 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냥 과일을 가는 것 뿐인데, 맛이 좋았다.
"공책 일은 미안하다."
선배가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주스나 줘요."
"이거 봐. 눈 퀭한 것 보라고."
"주스 줘요."
"뭔 주스?"
나는 선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또 속은 것이다.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한 거야?"
선배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주스는 밖에 있어, 임마. 여기 작업실이잖아."
선배가 어깨를 툭 쳤다. 오늘따라 어깨가 고생이 많다. 아무튼 주스는 둘째 치더라도 공책 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애매했다. 아니, 그 이전에 공책에 대한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것일까? 나는 아주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선배를 쳐다보았다.
"네. 포기하게요."
심장이 요동쳤다. 요동치다 못해 목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선배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야, 이런 거 하지 말고. 나와. 주스나 마시자."
선배가 먼저 나섰다.
"아침밥 먹었냐?"
"네."
에너지 드링크였지만. 선배가 만든 음식은 죽어도 먹기 싫었다.
"그래도 먹어. 사내자식이 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문을 닫고, 잠갔다.
"그 기록을 포기했다라……. 너답지 않은데?"
선배가 봉지에서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그게 현실 아니겠나요."
"현실이라."
선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학문이 좀 많이 현실적이지. 야, 너 그거 입 대고 마시지 마라?"
"나 준다며요."
나는 선배가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유리병에 입을 대고 주스를 마셨다. 선배는 입을 비죽였다.
"오늘 흡연실 같이 가는 거 확정이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선배는 목덜미를 긁었다.
"가 봐."
"아니 그런 게 어디 있냐고요!"
나는 처절히 소리쳤다.
"아니면 지금 휴게실 갈래? 나 너 때문에 엄청 일찍 일어난 거 알지?"
나는 두말없이 뒤돌아갔다. 선배가 뒤에서 아침으로 샌드위치 싸 왔다고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미친 듯이 뛰어서 작업실로 들어갔다.
1. 29
나는 머리를 감싸고 있었고, 그 빌어먹을 연구소의 소장인 리안 케테르는 나를 빙긋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테도 그 자리에 있었다. █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후회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다.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진 곳에 가만히 앉아서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는 것을 ██ 견뎠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인 ██ 가서 그곳 안에서 날뛰며 ███ ███ 만드는 것, 그래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여기에 쓰인다면 딱 알맞을 것이었다. 게다가 누구를 가르치려 드는 그 못된 버릇! 언제나 할머니께서는 내게 "가만히 있는 방법" 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내게 "█의 말을 듣는 법" 을 가르치려고 하셨고. 하지만 █는…….
"어때요. 그냥 정식 계약하시죠."
그뤼네테가 웃으며 물었다.
리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낑낑댈 뿐이었다.
"뭐 그렇게 좋은 조건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케테르도 웃고 있었다.
리는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팠다.
"아주 멋졌어요, 리 씨."
"약 올리지 마요."
리는 침울하게 말했다.
"뭐……. 그 문서실을 관리해 주시겠다고 어제 공언하셨잖아요?"
그뤼네티의 말에 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서나 줘요. 어차피 사표는 써놨으니까."
리는 음울했다.
"의외로 화끈하시네요."
케테르가 말했다.
"그뤼네테 양?"
그뤼네테는 계약서를 꺼냈다.
"자세히 말씀드리죠. 우리는, 당신이 근무했던 대학도서관만큼 잘 해주지 못합니다. 이곳은 기밀 정보가 많기 때문에, 당신이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걸 우리가 확인하기 전까지는 중요한 일도 못 맡깁니다. 아마 당분간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서만 정리하실 겁니다."
"어, 케테르 씨. 실험 기록 한 부 읽으셨는데요."
그뤼네테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네, 실험 기록을 이미 읽었다니 다행……. 예?"
케테르가 그뤼네테를 쳐다보았다. 그뤼네테는 어깨를 으쓱 올려 보였다. 케테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131에 대한 것인걸요."
"설마 그 이상한 실험 기록 말하는 건가요?"
리가 물었다.
"좋아요, 리 씨. 당신은 방금 승진했습니다."
"정말로 여기 믿어도 되는 기관입니까?"
부럽네. 나는 여기서 근 칠 년을 일해서 간신히 1등급 올렸는데 말이다.
"극심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고, 가끔 그뤼네테 양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보고서를 읽힌다던가 하는 편법을 쓰기는 하지만, 대체로 믿을만 할겁니다. 원래 신생 기관은 좀 불안하니까 말입니다."
"이 연구소가 우리 도서관보다 날 더 혹독하게 대하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 이제 말해봐요. 여기가 뭘 하는 곳인지."
리가 말했다.
케테르와 그뤼네테는 서로를 한번 쳐다보았다. 여기가 뭘 하는 곳이에요, 라는 질문은 이 바닥에서 몇 년간 구르고 깨진 0등급 인원이 자주 하는 것이었다. 재단은 컸고, 숨기는 것은 많았다. 숨기는 것이 많은 만큼, 재단은 잘 숨겼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잘 숨긴다 해도 몇 년간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은 대충 눈치를 챈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폭발, 괴상한 단체의 습격, 이상한 시체, 반쯤 정신 나간 박사들. 여기가 뭘 하는 곳이에요, 그 질문을 했을 때 나는 죽은 선임의 지시에 따라 양피지를 세척하고 있었다. 선임이 답했다.
"책들이 피를 먹고 자라는 곳."
케테르가 답했다.
리의 표정은 그 대답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표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열한 시였다. 휴게실에서 챙겨온 음식을 먹고, 이제 기록보관실에 들어가서 문서들을 확인해야 한다.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앞이 흐릿하게 보였다. 안경을 다시 쓰고, 공책을 안전한 곳에 집어넣었다. 다행이 책상 서랍은 열쇠로 잠글 수 있었다. 책상 서랍에 공책을 집어넣고, 한 번도 잠가보지 않은 서랍을 잠갔다. 열쇠를 찾는데 한 삼십 분이 걸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마스크를 꼈다. 아침에 선배에게서 받은 자몽 주스를 다 마셨다. 기록보관실 안에서 화장실이 급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이미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번엔 50년대 기록이다. 저번에는 10년대 후반에서 20년대, 이번에는 50년대. 30년대까지는 기록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40년대에 기록이 점차 많아지다가 50년대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먼저 들어갔던 사서가 알려준 곳으로 가니, 자석이 붙어있었다. 그것을 떼고 케비넷을 열었다. 그리고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생각했다. 여기는 기록보관소고, 무엇보다 사건 기록 색션이다.
나는 한 시간 일찍 일을 끝냈다. 하던 곳에 자석을 붙이고, 책수레를 끌고 열심히 기록보관실 안쪽으로 달려갔다. 50년대, 40년대 후반, 40년대 중반, 40년대 초반, 30년대, 20년대 후반, 20년대 초반. 나는 수레를 멈추었다. 10년대. 보안 카드를 긁었다. 그 열에 있는 케비넷이 모두 열렸다. 나는 10년대 기록 문서는 기껏해야 케비넷 하나도 안 되었다. 양이 적었다. 그것도 초반 뿐이었다. 나는 20년대 초반 기록으로 넘어갔다. 1920년, 1921년, 1923년에 해당되는 문서는 거의 없었다.
"역시……. 너무 초반인가."
요주의 단체를 생각해 보았다. 혼돈의 반란. 뱀의 손. 그 이상은 아는 것이 없었다. 혼돈의 반란은 선임때문에 들었고, 뱀의 손은 도난 사건 때문에 한번 발칵 뒤집힌 적이 있어서 들었다. 1924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위에는 문서가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1924년은 기록 문서가 많이 있었다. 1924년만 케비넷 하나였다. 1925년. 1925년은 케비넷 두 개 분량, 1926년은……. 1925년보다 약간 적었다. 나는 케비넷을 다 열어젖히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기록은 1925년부터 서서히 줄기 시작했다. 1930년에는 적은 편이었지만, 1931년부터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1934년, 1935년, 1936년……. 기록은 더 많아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케비넷을 다 닫으며 다시 앞으로 갔다. 1924년 문서를 집어 들었다.
사건 기록 ███ - ██
개요
본 문서는 1924년 █월 █일 알렉스 도킨스(Alex Dokins) 외 다수가 SCP 재단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주요 SCP 격리실을 공격하였으며, 안전, 페르마, 데카르트 급 SCP를 탈취하였다…….
조금 뒤의 문서를 꺼냈다.
사건 기록 ███ - █
개요
본 문서는 1924년 █월 ██일 알렉스 도킨스(Alex Dokins)를 수장으로 하는 단체, 혼돈의 반란이 SCP 재단에 대해 테러를 가한 것에 대한 문서이다. 이들은 협상을 위해 그들과 접촉한 리안 G. 케테르(Ryan G. Keter)와 그의 호위를 책임진 특무부대 요원 ██ ████에게 총격을 가했으며, 리안 G. 케테르는 현장에서 사망, 특무부대 요원은 중상을 입었으나 재단으로 무사 복귀하였다. 이 기록은 특무부대 요원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해당 요원에 대한 인적 사항은 후술함. …….
방금 본 문서를 다시 꺼냈다. 알렉스 도킨스라는 이름이 겹쳤다. 알렉스 도킨스 외 다수. 재단에서 일어난 반란. 명시된 등급이 많이 다르긴 했지만 여러 SCP를 탈취함. 나는 문서들을 책수레에 올려놓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오 일. 그 검정 공책의 두께와, 하루에 쓴 일기 분량을 보면 대충 1년짜리 일기장일 것 같았다. 지금은 1919년 1월. 이 시기는 1924년의 모월 모일. 나는 1924년부터 1936년까지 문서를 모두 꺼냈다. 1936년 이후는 문서양이 만만치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연도, 아무리 정치적, 국가적 중립을 지키는 재단이라 해도 세계대전은 피해 갈 수 없었나 보다. 하지만 이건 일단 내버려두기로 했다. 내게 필요한건 10년대와 20년대의 자료다. 나중에 필요하면 더 보기로 하고. 하지만 여기는 사건기록 색션이다. 그것도 요주의 단체와 관련된 사건 기록이다. OR-IG. 나는 고개를 돌렸다. 빼곡히 서 있는 케비넷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책수레를 돌렸다. 다들 초기 기록부터 시작하니까, 저쪽으로 가도 사람은 만나지 않을 것이다. SCP 탈주 기록. OR-Es. 똑같이 10년대와 20년대 기록을 꺼내보았다. 10년대 기록은 아예 없었다. 20년대 기록은 혼돈의 반란이 기지를 습격한 뒤 탈주한 기록이 대부분이었다. 잠시 고민을 하고 이것들은 그냥 놓았다. 다음은 행정 기록. AR. 지금은 대부분 컴퓨터로 다루지만, 보안을 위해서 원본은 무조건 종이 문서이다. 그럼 컴퓨터가 아예 없었던 10년대, 20년대는? 예상을 했지만, 언제나 재단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10년대 케비넷으로 갔다. 10년대만 케비넷이 열 개였다. 책수레는 이미 반쯤 차 있었다. 나에게는 재단 데이터 배이스 접근 권한이 없었다. 임시 등급을 받기는 했지만 문서 열람에 대한 임시 등급일 뿐이었다. 데이터 배이스 접근.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선배."
선배는 흡연실에 있었다. 저 여자는 하루 종일 담배만 입에 물고 있는가보다.
"네가 웬일이냐? 흡연실에 다 찾아오고."
선배는 입에서 파이프 담배를 뗐다. 냄새가 독했다.
"선배, 데이터 배이스, 어디까지 접근 가능해요? 열람 가능해요?"
"워 워. 진정 해."
선배는 다시 담배를 물었다.
"무슨 일인데?"
"찾아야 할 자료가 있어요."
"분실 문서?"
선배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온몸이 굳었다. 생각해 보니 이유를 붙여놓지 않았다. 선배는 연기를 뱉었다.
"내 보안카드 가져가."
선배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던졌다.
"선배 사실은 말이에요……."
"변명하지 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고마워요."
선배 지갑에서 보안카드만 꺼냈다.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담배는 좀 끊어요."
"닥치고 꺼져 임마."
선배는 픽 웃었다. 나는 카드를 들고 흡연실을 나왔다. 묘하게 낡은 카드였다. 선배 사진, 2등급 요원, 선배 이름, SCP 중앙 기록관리소 일반 사서, 직원 번호.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문으로 선배가 보였다. 지친 모습이었다. 단순히 내 욕심 때문에 저 사람까지 고생시키는 것 같아서 미안했다. 터벅터벅 걸어서 작업실까지 갔다. 이럴 필요까지 있는 것일까? 왜 그 일기장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 일기장이 정말 우리 재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난 왜 이러는 것일까.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의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컴퓨터로 기록 데이터 배이스에 접근했다. 보안 인가 번호를 입력하시오. 도대체 나는 왜 이러는 걸까. 나는 선배의 카드를 쳐다보았다. 열세 자리 숫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환영합니다.
본 데이터 배이스에 접근한 기록은 모두 기록으로 남습니다.
리는 연구소 관사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집은 이 연구소에서 너무 멀었다. 관사에 들어가 봤다. 교사들 숙직실과 학생 기숙사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는 곳이었다. 학교 건물을 개조한 것 같았다. 하긴. 이 연구소는 전체적으로 학교처럼 생겼다. 폐학교를 갖다 만든 곳일까. 아무튼 리는 본격적으로 업무에 들어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리는 그 시대에,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다.
나에겐 책임질 가족이 없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남기신 유산을 갖고 사시면 될 것이다. 도서관에서 할머니에게 지원해 주는 돈도 있고 하니 아마 내가 없어도 잘 사실 거다.
"그래서, 이번에 일하는 곳은 어디라고?"
리의 할머니가 물었다.
"연구소에요. 작은 연구소."
리는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옷과 옷과 옷. 리는 그때 새삼스럽게 자신에게는 검은색 드레스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옷.
"그냥 네 할아비 도서관에서나 일하지 그러냐."
늙은 여자는 자신의 손녀가 안정적으로 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리는 이제 이 모든 것에 염증이 나 있었다.
"편지 보낼게요."
리가 말했다.
필수적인 것은 다 챙겼다.
"남은 짐 가지러 몇 번 더 올 거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요."
"그이는 나와 생각이 달랐지만, 나는 네가 이러는 게 싫구나."
할머니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제 좋은 남자 만나서 내 팔에 아이도 안겨주고 하면 안되겠니?"
리는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 노인은 슬퍼 보였다. 리는 생각했다. 할아버지.
"도착하면 편지 보낼게요."
"나도 편지 보내마."
할머니는 영 아쉬워 보였다.
"어쩌면 답장을 못 받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편지는 보내지 마세요."
"어째서니?"
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외근이 잦거든요."
"그럼 어디로 가는지만 알려다오."
"찾아오시게요?"
"찾아가진 않으마, 하지만 네 동생이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하겠니."
"답하지 마요."
차갑게 돌아섰다.
"하지만 편지는 보낼게요."
리는 천성이 개척자였다. 평화가 아닌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안정이 아닌 혼란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리가 집을 떠나온 이후로, 리는 문서실에서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았다.
행정 기록 AR-10s 1159-00
개요
SCP 보고서를 각각 SCP 보고서, 확보 기록, 사건 기록, 면담 기록 등으로 나누는 것을 제안. 면담 기록과 확보 기록은 SCP 보고서와 같이 보관할 것을 결정.
행정 기록 AR-10s 1164-19
개요
SCP 연구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회의를 기록할 것을 제안.
행정 기록 AR-10s 1177-25
개요
SCP 연구소 문서실을 기록보관소로 개명, 폐가제로 운영할 것을 제안. 더불어 출입 기록 및 대여, 열람 기록을 남길 것을 주장.
나는 스크롤을 내리기를 그만두었다. L. Lee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하니 수십 개가 떴다. 개요만 읽어도 지치는 분량이었다. 가장 최근 기록은 무엇인지만 확인하려고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날짜 : 1950. 5. 6
오십년대라. 19년에 대충 서른 살이라고 잡는다 쳐도 오십에서 육십 세는 될 것이다. 이 재단이 그렇게 오랫동안 일할만한 곳은 아닌데 말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여자였다. 리는 확실히, 안정적인 것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나는 별 의미 없이 오십년대 기록을 클릭했다.
행정 기록 AR-50s 6091-94
==주의! 5등급 미만은 열람이 금지되어있습니다!==
*ID : _ _ _ _ _ _ _ _ _
*보안 인가 번호 : _ . . .
5등급이라. 내 임시 보안 등급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문서였다. 하긴, 저 정도로 오래 근무했으면 4등급이나 5등급 정도는 달았겠지. 5등급. O5……? 정말이지 대단한 여자였다.
"리, 정말이지 당신은 참 대단해요."
그뤼네테가 생글거렸다.
"뭐가요?"
리는 수많은 문서에 파묻혀있었다.
"남자도 꺼리는 곳에 여자가 나서서 들어오다니."
"당신도 여자예요."
리가 빙긋이 웃었다.
"그나저나, 여기 왜 온 거예요? 놀러 온 건 아닐 테고."
"음……. 리는 속기도 가능하고, 타자도 잘 치고, 전보도 보낼 줄 아는데."
그뤼네테가 뜬금없이 말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여기서 문서 분류 작업하는 건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아요?"
"무슨 소리죠?"
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런 건 일반 사서에게 맡기란 뜻이에요."
그뤼네테가 편지봉투를 건냈다.
"축하해요, 관장님."
리가 재단에 들어온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행정 기록 AR-M-10s 1342-98
회의 참가자 : 리안 G. 케테르(Ryan G. Keter), 제 17 기지 관리자 알렉스 도킨스(Alex Dokins), 수석 연구원 미켈란젤로 스킹크(Michelangelo Skink; 통칭 데미안 박사) 박사, 클로이 그린(Chloe Green; 통칭 그뤼네테)
개요
SCP 연구소 기록보관서 관장 선출에 대한 건.
나는 일기장을 다시 펼쳐보았다. 7월 9일. 일기는 여기서 끝나있었다. 그러면 종이가 상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손가락으로 종이를 빠르게 넘겼다. 바람이 일었다. 일기장이 왜 저 기록보관실에 떨어져 있었는지는 아무도 설명을 못 해주었다. 책 사이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나는 공책을 놓고 그것을 집었다. 사진이었다. 여섯 명이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옛날 사진이라 많이 흐리기는 했지만, 대충 생김새는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가 둘. 하나는 새까맣고 펑퍼짐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수녀복 같았다. 거기에 머리는 깔끔하게 묶고 있었다. 정말이지 꼬장꼬장한 학교 선생님 같았다. 다른 한 여자는 자그마하니 옷이 화려했다. 머리는 짧았지만 그 시대 사람처럼 띄워놓았다. 흑백사진이라 색은 볼 수 없었지만, 아마 알록달록한 옷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저 새까만 여자가 리일 것 같았다. 나머지 넷은 남자였다. 하나는 키가 무지막지하게 컸다. 선이 굵었고, 뭐가 불만인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옆의 사람은 인상이 좋게 웃어 보이고 있었다. 여자들과 비교해보니 그도 꽤 컸을 테지만, 옆의 큰 남자에 비해서는 별것 아니었다. 또 그 옆에는 피곤해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다 늘어진 스웨터에 머리카락은 엉망이었다. 정말이지 이 사람은 딱 봐도 연구원이었다. 그 옆에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의 키는 두 번째 남자와 비슷했다. 짖궂어 보였고, 다른 다섯 명보다 늙어 보였다. 나는 사진을 뒤로 돌렸다.
█이 있█면, ████ 만██ 않았█ ███. 하██ 나는 바란다. ████, █단을 ██ ███.
신이 있다면, SCP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란다. 신이시여, 재단을 보호 하소서.
리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바랍니다, 신이시여, 재단을 보호 하소서. 리는 신을 믿지 않았다. 사실, 신이라면 아주 진절머리를 떠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리는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재단을 보호 하소서. 리가 지내는 방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리는 방 벽을 모두 흰 종이로 감쌌다. 벽에는 수많은 글이 써 있었다. 수많은 계획이 벽 위에서 잠자고 있었다. 계획은 매우 방대했고, 매우 길었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이편에는 설계와 관련된 책이 놓여있었고, 저편에는 자물쇠와 관련된 책이 놓여있었다. 분류와 관련된 책은 수십 권이 쌓여있었고, 책상에는 DDC가 쌓여있었다.
"빌어먹을 듀이!"
리가 갑자기 소리 질렀다.
"충분히 동감해요."
나도 중얼거렸다.
한 일 년 치 내용이 들어있을 줄 알았는데, 기껏해야 육 개월 남짓이었다. 그 이후의 기록은 어디서 찾아보아야 할지 막막했다. 리는 고개를 들었다. 누가 방문을 두드린 것이다.
"네."
"리, 저 그뤼네테인데요, 혹시 실험 기록 도와주실 수 있나요?"
"네."
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엔 누구예요?"
"도킨스 박사요."
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이제 점점 고급 자료들로 나아가고 있네요. 축하해요."
"축하할 것까지야."
"가요. 손 잡아끌어 봐도 되나요?"
"안 될 거야 있겠나요."
그뤼네테는 리의 손을 잡아끌었다.
"언젠가 꼭 한번 언니 손을 잡아끌어 보고 싶었어요."
그뤼네테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내가 당신보다 어린데요."
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 둘은 도킨스의 실험실까지 아무 말 없이 걸어갔다. 실험실 안에는 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았다. 좋은 의미도 있긴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별로 안 좋은 의미로 알아보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폐허 위에서 날뛰는 사람을 좋아할 이는 거의 없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을 챙기는 사람이 아닌, 진짜 순수하게 날뛰는 사람은 더더욱 좋아할 이가 없다.
"도킨스 박사는 처음이시죠?"
그뤼네테가 물었다.
"그렇죠. 보고서를 항상 개떡같이……. 아, 죄송합니다. 형편없이 쓰는 사람인걸요."
"재단에 들어오면 다들 입이 거칠어지죠."
"아무튼, 이번에는 무슨 실험이랍니까?"
"기억을 없애는 실험이요."
"무슨 SCP인데요?"
"SCP가 아니에요."
그뤼네테가 실험실 문을 두드렸다. 요즘은 당연히 보안카드를 찍고 들어가야 한다.
"진짜 실험인걸요."
문이 열렸다. 키가 무지막지하게 큰 사람이 서 있었다. 눈썹은 짙었고,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었다.
"클로이."
도킨스가 반겼다. 그뤼네테가 도킨스를 슬쩍 노려보았다.
"아, 그뤼네테."
"이쪽은 리 씨에요."
그뤼네테가 말했다.
리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속기 하실 줄 안다고요?"
도킨스가 물었다.
"네, 그렇다만."
"타자기는. 다룰 줄 알고?"
"네에, 그렇습니다만."
리는 좀 언짢아 보였다.
"그럼 저기 앉아서 시작하시죠."
"뭘요."
도킨스는 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기록 말입니다."
"뭘……."
그뤼네테가 리의 등을 슬쩍 찔렀다.
"뭐라도 열심히 해야죠, 네."
리는 입을 비죽이며 의자에 앉았다.
"실험기록인 겁니까 아니면 면담기록인 겁니까?"
리가 챙겨온 종이를 꺼내며 물었다.
"둘 다요. 약물을 주입한 뒤 면담을 할겁니다."
"실험 목적."
리가 종이 위에 썼다.
"실험 목적이 뭐죠?"
"기억 소거."
도킨스가 답했다.
"실험 대상, 미켈란젤로 스킹크 박사, 실험 내용, 약물 Amnestics-051을 스킹크 박사에게 주입, 그러니까 주사기를 사용해서 주입하는 겁니다. 알아들었어요?"
"말 끝내기 전에 다 받아적었어요."
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도킨스는 언짢은 듯 헛기침을 했다.
"스킹크 박사!"
도킨스가 유리창에 뚫린 구멍으로 소리쳤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깐."
유리창 안쪽 방에 혼자 앉아 있는 남자가 투덜거렸다. 부스스한 머리에 다 늘어진 스웨터를 입고 있는 사람이었다. 리는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 이 연구소의 박사들이 다 멋지게 차려입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저 정도로 추레하게 입고다니지는 않았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저 거대한 도킨스 박사만 봐도, 엄, 체크무늬 와이셔츠를 입고 있지 않던가.
"스킹크 박사를 데미안으로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도킨스가 리에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리는 종이에 받아적었다.
"그래, 데미안 박사. 내가 준 종이는 외웠나?"
도킨스가 소리쳤다.
실험기록 Am-NSCP-51-arc.
개요 : 본 실험은 기억소거제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한 간단한 테스트이다. 사용한 기억소거제는 Amnestics-051이다.실험자 : 알렉스 도킨스(Alex Dokins)
피실험자 : 미켈란젤로 스킹크(일명 데미안Demian 박사)
실험 참관인 : L.리(L.Lee)
보고서 작성자 : 알렉스 도킨스(Alex Dokins)실험 과정 : 스킹크 박사에게 종이에 쓰여진 내용(첨부 문서 Am-NSCP-51-AP-arc. 참조)을 외우게 시킨 뒤 기억소거제를 투여함. 투여는 주사기로 했다. 효과는 면담으로 확인함.
<면담 기록 시작>
"그래, 데미안 박사. 내가 준 종이는 외웠나?"
"오-십-육-사-십일-에이-에이,비-사."
데미안이 말했다.
"아, 관련 자료는 저쪽에 있습니다."
도킨스가 책상 저편을 대충 가리켰다. 나는 첨부 문서 파일을 클릭했다. 무작위로 늘어놓은 숫자와 알파벳이 보였다. 5-10-6-4-11-A-AB-4.
"주사기 있지? 그걸로 네 팔뚝을 찌르면 될 거야."
도킨스가 지시했다.
"꼭 내가 해야 하나……. 내키지는 않는데."
데미안은 주사기를 들고 고민했다. 면담 기록을 보면 데미안이 자기 팔뚝을 스스로 찌를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대신 찔러줄지를 갖고 십 분 동안 싸우고 있다. 하긴, 주사기로 자기 팔뚝을 찌른다니. 좀 무섭기는 하겠다마는, 리는 턱을 괴고 두 남자가 투닥거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요들. 영 안 되면 내가 할까요?"
리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간호사요?"
도킨스가 물었다.
"사서입니다만."
"그러면서 무슨……."
"스킹크 박사님은 간호사나 의사인가요?"
"허, 남자가 무슨 간호사……. 아무튼 둘 다 아니오."
"그럼 결정 났네요. 내가 가서 주사를 놓으면 되는 거죠?"
"사서라며요."
"전쟁 중에 잠깐 교육은 받긴 했어요. 영 적성에 안 맞아서 전보 받는 쪽으로 옮겼지만."
리는 그 와중에도 그들 사이에 오간 대화를 받아적고 있었다. 도킨스는 리와 데미안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간 뒤, 바로 옆의 방문을 열면 될거요."
그리고 리는 바늘을 두 번씩이나 잘못 찌르고, 세 번째 간신히 성공했다.
"간호 교육받았다며요?"
기진맥진해서 돌아온 리에게 도킨스가 물었다.
"잠깐 받았다고 했잖습니까."
리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참 나……. 하긴 저 애송이보단 낫군요. 이제 오 분 기다리면 될 겁니다. 알람 시계가 울릴 거요."
실험 결과 : 실패. 약물은 생각보다 강력했고, 미켈란젤로 스킹크 박사(일명 데미안 박사)는 한 달간의 기억을 잃어버림. 실패의 이유는…….
불쌍한 데미안. 나는 숨죽여 웃었다. Am은 단어 모양을 보니, Amnestics, 그러니까 기억소거 약물을 사용한 실험을 뜻하는 청구기호이리라. NSCP는 지금까지 쓰이는 청구기호인데, SCP와 관련되지 않은 실험이 이에 속한다. 비교적 수가 많은 것은 아니라 잘 쓰이지는 않는다. 나는 검색창에 쳤다. Am-NSCP-*-arc. 총 194개의 결과가 떴다. 마지막 실험이 Am.-NSCP-193-arc.였다. 기억소거제는 193번의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마지막 실험은 1974년에 끝났다. 1919년에 51번째 실험을 했고, 그 뒤로 142번의 실험을 거쳐 결국 완성된 약물! 나는 첫 번째 실험 기록을 읽었다. 의외로 이 기억소거를 생각해 내고 기획한 사람은 데미안 박사였다. 그리고 그 계획에 극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도킨스 박사였다. 데미안은 피실험자가 없자, 자기 자신을 혹사시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194개의 결과 중 193개의 실험 기록이 아닌 것을 찾아냈다. Am.-NSCP-███-arc. 제목부터 시커먼 검열딱지가 붙어있는 걸 보니 또 내가 접근하지 못하는 자료인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클릭을 했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그 기록에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잠시 눈을 깜빡이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실험 날짜는 1959년 모월 모일. 제목에 걸맞게 실험 내용과 실험 기록은 죄다 [데이터 말소]로 채워져 있었다. 몇몇 문장은 읽을 수 있었다.
[데이터 말소]는 의식 불명이 되었지만, [데이터 말소]. 이는 SCP-00█의 영향인 것으로 보이며, O5 평의회 회의를 통해 [데이터 말소]를 결정했다.
SCP의 영향을 받은 사람을 갖다 기억소거 실험을 했다가 [데이터 말소]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나는 이 실험 기록과 다른 실험 기록 간의 관계를 봤다. 단 두 건이 검색되었다. 검색된 것이 어디겠는가. 하나는 1960년에서 1970년 동안 진행한 대규모 프로젝트였고, 나머지 하나는 SCiPNET에 관한 것이었다. SCiPNET은 최근의 것이었다. 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먼저 클릭해 보았다. 역시 여기저기가 [데이터 말소]이다. 읽을 수 있는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Am.-NSCP-███ 실험을 하다 벌어진 사고로 인한 희생자 [데이터 말소]의 신경망을 이용.
나는 기록을 빠르게 내렸다. 새까만 검열 블록과, 수많은 [데이터 말소], [편집됨], 4등급 이상 접근 가능, 5등급 이상 접근 가능……. 맨 마지막에 읽을 수 있는 두 번째 문장이 있었다.
성공.
#첨부 : Dr. ████ 가 본 서버를 발전시킨 새로운 서버 제안. 실험 기록 S.-NSCP-arc. 참조.
S.-NSCP-arc.는 SCiPNET의 실험 기록 청구기호였다. 기억소거제를 SCP-00█의 영향을 받은 사람에게 투여했다 그 사람은 의식 불명, [데이터 말소] 되었고, O5 위원회는 이 사람의 신경 조직을 갖다가 훗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서버인 SCiPNET의 전신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것도 근 10년 동안. 이것이 내 보안등급, 아니 선배의 보안등급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였다. 나는 SCP-00*로 검색을 했다. 그래봤자 SCP-002에서 SCP-009 까지다. SCP-002는 선배의 보안등급으로 격리 절차까지밖에 볼 수 없었다. 흠, 괜찮아. 뭔가 무진장 위험하고 정신 감정까지 받아야 한다는 걸 봐서는 일단 후보에 올려놓았다. SCP-003 역시 격리 절차까지 볼 수 있었다. 이건 왠지 아닌 것 같아서 후보에 올리지는 않았다. SCP-004, 이것도 패스. SCP-005는 전문을 다 읽을 수 있었다. SCP로 자기 집 문을 따거나 자판기를 따려는 사람이 있다는 신기한 사실을 제외하면, 이것도 후보에 올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다음, SCP-006.
재단 설립자의 직접 명령에 의해, 감독관 승인을 받지 않은 요원은 본 항목에 접근이 제한됨.
젠장! 역시 이런 게 하나 껴있을 줄 알았어. 나는 동물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금 나는 일시적으로 등급이 오른 상태이지만, SCP 문서 자체에 접근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제길, 이거 완전히 올라 봤자잖아. SCP 문서에 접근하려면, 안전 등급 문서는 2등급에서 일시적으로 보안 등급이 상승한 사람이, 그 이상은 3등급에서 일시적으로 보안 등급이 상승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고 유클리드나 케테르 등급 문서를 관리하는 사람 중 몇 명은 이번 일주일이 끝난 다음 기억소거를 받아야 했다. 뭐……. 거기서 훼손된 문서도 결국 나한테 오기는 한다. 그러니까 형식이 그렇단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 문서를 보수해 본 적은 없다. 그 [데이터 말소]라는 사람의 보안등급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SCP-006에 접근할 정도라면 이런 괴상한 실험의 피실험자로 쓰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만, 그런데 이 사람 신경망으로 네트워크의 전신이 되는 무언가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 뭔가 '보존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톡. 톡. 톡. 그러고 보니 재단 초창기에 미켈란젤로 스킹크, 그러니까 데미안 박사가 피실험자로 직접 나서지 않았던가. 톡. 톡. 톡.
"그래, 후보에 올려보자."
나는 영 내키지 않았지만, 혹시나, 라는 게 있으니 한번 올려보기로 했다. SCP-002, SCP-006. 그다음 SCP-007, SCP-009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SCP-008은 4등급이 허가하지 않아서 볼 수 없었다. 그래, 나한테 4등급 허가가 내려올 리가 만무하지. 그래도 이상한 것이니까 후보망에 올리기는 했다. SCP-002, SCP-006, SCP-008. 하지만 이 세 후보 중 내가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어."
나는 혀를 찼다. 다시 일기장이나 봐야겠다. 리의 일기는 51번째 기억소거 실험에서 끝나있었다. 나는 다시 앞으로 넘겼다. 리는 죽을 것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신나게 문서를 정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