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 1월 5일, 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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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의 개인 기록

 

넘어가지 않는 아침을 먹고 나서 휴게실에 앉아 다른 연구원들과 TV를 봤다. 공식 발표 이후로 뉴스는 전쟁 소식 빼면 거의 하루 종일 재단 이야기밖에 없다. 하기야 기자들 입장에서 이만한 특종 덩어리가 어디에 또 있겠냐마는, 하고 풀그림 연구원이 덧붙였다.

샐 박사가 업무 복귀 명령을 내렸지만 기지에 낮게 깔려진 공포는 거둬지지 않았다. 다들 일은 하는둥 마는둥 휴대전화나 만지작거리면서 바깥 소식을 갈구하고 있다. 기밀이라곤 해도 라인 제국이 미쳐 날뛰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일이고, 저쪽이 447-KO로 모든 것을 날려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 누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화면에 기어스 박사가 잡혔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를 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기어스가 침울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는 걸 어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제, 해 질 녘 북방열차에 몸을 싣고 나타난 기어스 박사는 여기저기에 긁힌 상처로 성한 곳이 없었다. 차분한 색깔의 정장 차림이었지만 그리 차분한 하루를 보내지 못했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급히 전신 센터로 가서는 이곳저곳에 연락을 취하던 그는 2시간 동안 무전기와 자판을 붙잡고 씨름했지만, 아무래도 잘 풀리지 않은 듯 했다. 밤 늦게 공항으로 향하던 그는 마지막으로 나를 돌아보고선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차에 탔다. 그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상황이 그리 잘 풀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어스 박사의 눈은 마치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암울한 예측들이 인트라넷을 장악했다. 업무 문서는 자취를 감추고 19기지의 최후와 평화 협정의 실패 등의 소식만이 화면에 가득했다. 손 요원과 새벽 관리관이 손을 놓아 상태는 최악이다. 079-KO의 자료를 찾다가 노트북을 집어던진 진수 연구원이 내게 투덜댔다. "맘먹고 일을 하려고 해도 이래선 아무것도 못하겠는데요," 맞는 말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보안부대 요원들은 쉬지 못하고 있다. 바깥에 몰려든 군중을 저지하는 것 만으로도 벅찬데 연구원들은 계속 패배적인 이야기로 사기를 떨어트린다며 불평하는 글이 한두 개 올라온 게 아니다. 나도 가만히 앉아서 그런 비난을 듣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담당 격리실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내가 봐야 하는 SCP는 몇 개 없다. 캐비넷은 오전에 점검했고 이제 금속 개미랑 만능 열쇠만 점검하면 된다. 하지만 경계령이 내려있는 이상 아무리 업무를 끝내도 기지를 나갈 순 없다. 연지 걱정이 눈앞을 가린다.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왜 못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을 텐데!

 

연지가 메일을 받지 않는다. 이레 전에 보낸 메일을 아직 읽지 않았다니,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게 된 건가? 아직 한국에 공격이 있었다는 소식은 없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돌아갈 때 까지, 제발 건강히 기다려 줘, YJ.

 

금속 개미의 점검을 마쳤다. 지금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 열심히 턱을 부딪혀대는 모습을 보니 차라리 부러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더 무서울까? 파멸로 달려가는 세상을 지켜보는 게 무서울까? 나라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재단에 들어오게 된 것이 저주스럽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나와 재단의 악연은 참 신기할 정도로 질기다. 태어나기를 재단 연구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SCP의 이야기를 듣고, 철들 무렵부터 변칙 현상에 이상하리만치 잘 휘말리곤 했다. 그때마다 재단은 날 찾아왔을테고… 학위를 따고 아버지의 권유로 직원으로서 재단에 발을 들이고 나서도, 나의 삶은 그저 재단 뿐이라 해도 될 만큼 난 나의 직장과 잘 맞았다. 이제 연지를 만나 달라지나 싶었는데 이렇게 다시 재단이 날 붙잡는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난 재단의 박사다. 재단이 나를, 내가 재단을 끌어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럴듯한 이유였다. 그럴듯하다는 것은 곧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다른 재단 박사 모두가 나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들은 민간인이었지 않은가?

이런 고민이 부질없다는 생각을 해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지금 시간이 넘쳐난다 해도 36년 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 따위에 버리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열쇠 쪽의 점검을 끝마치려 걸음을 떼었다.

 


 
일기는 끝나고 적지 않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형식의 제한은 의미없는 것이 된다.

 


 
082번 만능 열쇠는 여전히 고리에 걸려 있었다. 한때 연구원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존재였건만 이제 아무도 이 녀석을 신경 쓰지 않는다. 브릴러 박사는 열쇠로서는 기구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열쇠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의 결론은 성급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 여겨지는 사람이 방문을 열고 나타났으니까.

"기, 기어스 박사?!"
"PB,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기어스 박사가 예의 태연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는 정중히 박사에게서 082를 받아 열쇠 구멍에 꽂고 문을 열었다. 건너편에는 버려진 남극 캠프가 연결되었는지 매서운 눈 폭풍이 방 안으로 불어닥쳤다. 기어스 박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몇 번을 시도했지만, 문의 건너편은 단 한번도 재단 건물로 이어지지 않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브릴러에게 열쇠를 돌려주며 기어스 박사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재단의 문으로 통로가 이어지는 것을 082의 특성으로 정의 내렸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틀린 결론입니다. 열쇠 자체에는 그런 특성이 없어요. 오히려 이 세계에 존재할 수백억 개의 문에서 재단 기지의 문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보면 그게 더 힘든 일이겠죠."
"그렇지만 실험 데이터는 분명히 그렇게 나왔습니다."
"아직도 모르겠습니까? 그건 당신의 능력입니다. 재단이라는 존재에 필연적으로 이끌리는 것 말입니다."
"그, 그런."
"당신은 태어나고 36년 동안 재단에서 떨어져 본 일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민간인이었으니 기억을 소거했기에 당신은 알 수 없었겠지만, 당신은 입사하기 전부터 수많은 사건에 휘말린 기록적인 인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 아버지에게 당신을 입사시키길 종용한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기어스는 브릴러의 말을 자르고 손가락으로 브릴러의 가슴팍을 찌르며 말했다.

"의심하고 있을 시간은 없습니다. 난 어제 당신을 보고 나서도 확신하지 못한 채 헤맸지만, 이제 당신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당신의 결정입니다. 날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브릴러는 갈팡질팡하며 되물었다.

"지금 재단에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아닙니까? 여기서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뭐란 말입니까?"
"간단합니다. 26기지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브릴러 박사가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기어스가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한다.

"프로이센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기 바랍니다."
"26기지…라면, 447-KO입니까?"
"바로 맞추었습니다. 라인 제국은 오늘 그 장치를 다시 가동시킬 생각이지만, 그랬다간 자칫 이 우주 전체가 위험합니다. 우리는 그 장치를 파괴할 겁니다."
"우리?"
"이미 이 기지의 박사들과 인원들이 동참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들과 내가 26기지로 갈 수 있게 해주면 됩니다."

브릴러는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만감이 교차한다. 방금까지 고민하던 정체성은 이 사람이 답을 줘버렸다. 연지를,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간단하지 않은가? 어째서 고민하고 있는가? …그러나 그는 두려웠다. 목숨 바쳐 재단에 헌신한 그의 아버지가 두려워한 유일한 존재였던, 그 자신의 핏줄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또한 두려움의 근원이기도 하던 나라를 막으러, 그는 용기를 낼 수 있는가? 열쇠가 될 수 있는가? 자신에게 아무리 물어도, 답은 자신의 몫이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박사는 조심스럽게 열쇠를 집어 들었다.

"시도해 보겠습니다. 대신…"

박사는 침을 삼키고서 결심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대신,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도저히 알 수가 없군. 아무도 기록하지 않은 이야기가 어떻게 출력될 수 있다는 거지? -O5-7


 
 
 


SCP-447-KO 배출 문서 기록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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