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XCninety입니다.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수많은 번역을 읽었고, 수많은 번역을 직접 했습니다. 그렇다고 딱히 번역을 잘하는지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번역 때문에 하고 싶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생겼고, 지금도 많이 쌓여 있습니다. 그것들을 모아서 저는 번역 에세이를 쓰고 싶었습니다. 이 페이지는 그 결과입니다.
그런데 저는 번역 에세이를 쓰기보다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번역 하고 비평 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야기들을 정리도 못한 채 그냥 내버려뒀습니다. 그러다 문득, 정리 안된 짧은 이야기를 살짝 다듬어서 하는 정도는 저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짤막한 에세이들을 여러 번 쓰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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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잃은 21편 — 또 다른 영한사전
0008. 번역이란?
요즘은 번역 에세이를 어떤 주제로 쓰려고 해도 꼭 이 주제로 돌아옵니다. 맨 처음에 이것부터 쓰려다가 포기했는데, 뭘 더 생각해 봐도 우선 이것부터 이야기해야 말이 나오겠더라고요. 간단하게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번역이란 뭘까요? 대충 "영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것"으로 생각하고 저는 번역을 지금까지 했지만, 아직도 정의를 딱 내리기 어렵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이라는데, 그럼 "옮기다"는 뭘까요? 국어사전은 어차피 순환 정의가 넘쳐나서 더 알아보기도 그렇네요.
번역학을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번역을 정의할 때 제일 자주 반복되는 용어는 바로 아래와 같습니다. 정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웬만한 정의는 아래를 변주한 내용이라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번역은 어떤 언어로 된 글이 주어질 때 다른 언어로 된, 원문과 등가인(equivalent) 글을 창조하는 행위이다.
등가
"등가"(等價, equivalence)란 뭘까요? 국어사전을 보면 "같은 값"이라고 나옵니다. 값어치가 같다는 뜻입니다. 도로교통법 시행령을 보면 주정차금지 구역에 2시간 미만 주정차한 승용자동차는 범칙금 4만 원을 납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차로가 있는 도로에서 인도로 통행하는 승용자동차도 4만 원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불법주차와 인도주행은 4만 원으로 등가라고 볼 수가 있겠죠?
하지만 등가라는 인식은 돈에서만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성격이 졸부인 사람이 불법주차했을 때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돈을 평소에 펑펑 쓰고 다니는데, 잠깐 잘못 주차했는데 4만 원으로 퉁치고 나올 수 있다면 "뭐 까짓거 4만원 내주고 말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이런 장면을 만약에, 가난에 쪼들려서 만 원 한 장이 아까운 사람이 보면 열통 터질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주차 실수로 4만 원을 날렸다면 자기한테는 만만찮은 돈이 깨지는데, 저 사람은 4만 원을 까이고도 반성하는 기색도 없단 말이죠. 이런 "역진세" 문제가 제가 말하려는 주제는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금액이 똑같은 것만으로 등가가 이루어졌다고 못 볼 수도 있다는 점은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설득력 있는 대안 하나가 바로 소득의 일정 비율을 과태료로 책정하는 방법입니다. 붋법주차하면 월급의 2%를 과태료로 납부해야 한다고 해 볼까요? 2021년 최저임금을 1개월에 맞춰서 계산하면 182만 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은 3만 6천 원을 내야겠죠. 자료를 찾아보니 "월급쟁이"면서 연 240억을 받는 분이 계시네요. 그럼 개월당 20억이니까, 이 분은 2천만 원을 내야 합니다. 금액은 500배 이상 차이 나지만, 과태료 청구서를 받으면 "으악! 월급의 2%가 나갔잖아??"라는 감정은 비슷할 겁니다. 중요한 점이 보이시죠? 이 정책은 종래의 금액의 등가 대신 소득 대비 비율의 등가, 나아가서 고통의 등가를 추구하는 방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등가가 알맞을지는 입법부 마음이겠지만, "어떤 등가를 선택해야 하는가"가 토론의 대상이라는 점은 모두 알 수가 있습니다.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번역의 목적은 원문과 "똑같은" 번역글을 짓는 게 아닙니다. 언어가 다른데 똑같을 리가요. 중요한 점은 읽는이가 번역글을 보고 원문과 "똑같다고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위의 정의는 동일(identical)이 아니라 동등(equivalent)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읽는이가 똑같다고 느끼려면, 제일 먼저 염두에 둘 점은 두 가지입니다.
- 내가 쓸 번역글은 원문과 어떤 점에서 동등해야 하는지
- 어떻게 번역해야 그 동등함을 실현할 수 있는지
이 두 가지를 알고 실천하는 행위가 바로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등가의 실현
바로 위에서 "등가란 무엇인가"만 말하고 "그럼 번역에서 등가는 뭐뭐가 있지?"는 안 살펴봤네요.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번역의 등가를 생각하면 아마 가장 먼저 직역과 의역이 떠오르실 듯합니다. 직역(直譯)은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함", 의역(意譯)은 "전체의 뜻을 살리어 번역함"이라고 국어사전에서 나오네요. 대충 직역은 표층적 등가, 의역은 심층적 등가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뭐 이 정도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시겠지만, 굳이 세 가지로 분류해 보겠습니다. 분류 용어는 순전히 제가 막 하는 말입니다.
구조적 등가
원문의 구조를 번역글에서 재현할 수 있으면 구조적 등가가 성립합니다. 물론 I love you를 곧이곧대로 순서를 따져서 "나는 사랑해 널"이라고 하면 그건 왈도체죠? 원문의 문장 성분 관계를 따져서 한국어에서 똑같은 기능을 부여하면 "나는 널 사랑해"가 됩니다. 직역이라고 하면 대다수가 구조적 등가에 해당합니다.
직역은 번역기! 하면 안돼! 라고 생각하긴 이릅니다. 구조적 등가를 우선 요구하는 분야는 많습니다. 언어를 공부할 때는 우선 저 언어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쪽이 좋습니다. 기술 번역이나 외교문서 번역은 괜히 의역했다가 원 의미에서 심각하게 틀어져 버리지 않도록 웬만하면 구조를 살리는 방향입니다. 중요한 부분은 "거기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구조를 보존하는 게 아닙니다. 구조를 보존할 이유가 있으니까 보존하는 게 핵심입니다.
의미적 등가
원문의 뜻을 번역글에서 재현할 수 있으면 의미적 등가가 성립합니다. 《티모시네 유치원》이라는 만화를 아시나요? 주인공 티모시는 수영을 잘하는데, 친구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Timothy is a good swimmer.
이게 무슨 뜻일까요? "티모시는 좋은 수영인이다"? 구조적 등가에 충실한 번역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화 맥락에서, 얘네들은 그냥 그날 수영을 배우는 시간이었고 딱히 티모시가 수영이 미쳤다거나 수영 장학생이라거나 그런 묘사는 없습니다. 그냥 말 그대로 티모시가 수영을 잘해서 저렇게 말하는 거죠. 사실 저 원문은 영어가 성격상 명사 중심 서술을 선호하는 면이 적잖이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건 다음 기회에). 어쨌든 저 말을 하는 친구의 저의가, 티모시가 수영을 잘한다는 것 이외에 딱히 구조적 등가를 추구할 만한 저의는 없다고 하면, 우리는 뜻이 똑같은
티모시는 수영을 잘한다.
라고 이 말을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효용적 등가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보러 찾아온 군중들에게 각자 저녁을 먹게 시키자고 예수에게 건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는 그렇게 군중들을 보내지 말고 제자들이 먹을 걸 나눠 주라고 말합니다. 이때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We have here but five loaves, and two fishes.
— 킹제임스 성경
다들 아시는 "이걸로 모두 배불리 먹게 하셨다" 그 일화죠.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fish는 물고기고, loaves는 loaf의 복수고, loaf는 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죠?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 개역한글판
네, 영어에서 빵이라고 하는 걸 개역한글판에서는 "떡"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이 번역 자체는 오역입니다. 원래 빵을 pão라고 하던 걸 중국어로 음차해서 餠이 됐고, 이게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떡"이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조선에서는 어떻게 보면 "떡"이 빵보다 훨씬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조선에서 빵은 흔하게 볼 만한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재배량도 적고 밀가루도 많이 만들지 않아서 굳이 빵을 만들거나 해야 할 수요가 없었습니다. 외국에서 맛본 빵을 가리키는 단어는 있었지만 적극 수입됐던 것도 아닙니다. 반면 떡 이야기는… 신라 시대 유리 이사금이 깨물었다는 일화까지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설날에 떡국 해 먹는 게 문화인 나라죠? 빵과 물고기는 당시 제자들이 빈 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무려 5개/2개씩은 나올 정도로 흔한 음식이었을 텐데, 조선의 입장에서 이걸 그대로 빵이라고 번역하면 마태가 의도한 그 감정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럴 땐 차라리 조선에서 흔했던 "떡"이라고 번역하는 쪽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요?
이것을 "효용적 등가"라고 하겠습니다. 원문 작가가 원문 독자에게 미치는 효과를, 번역글 작가가 번역글 독자에게 똑같이 미칠 수 있으면 효용적 등가가 성립합니다.
이상의 3가지 이외에도 여러 이유로 원문과 번역글은 "똑같을" 수 있습니다. 제가 참고한 자료에서는 5가지로 분류하는 사례도 있던데, 위에서 말씀드린 "효용적 등가"에 세 가지가 포함되더라고요. 물론 다른 점이 있긴 있지만 (관용구 수준에서 논하는 분류가 있었습니다) "구조", "의미", "효용" 세 가지로도 응용할 방법은 변화무쌍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일일이 모두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등가를 여러 가지 살펴보셨습니다만, 어떤 등가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 절대적 해답은 없습니다. 추구할 등가를 선택할 때 "제발 한국인이라면 이 등가부터 챙깁시다"가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는 이런 등가가 알맞겠군!"이라는 마음을 간직하시면 충분합니다. 똑같은 문장이라도 누구는 수식관계부터 챙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누구는 듣는이에게 미치는 영향부터 챙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임무는 자신이 선택한 등가가 왜 적절한지, 독자를 설득하는 것입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를 MCVMCVMCVMCVMCV라고 번역한다? 왜 둘이 똑같은지 설명할 수 있으면 문제 없습니다.
너무 큰 주제를 다뤄 가지고, 앞으로 "이건 등가야! 이건 등가 아니야!"라는 말 빼고 또 할 말이 뭐 있을지 걱정되네요. 일단 위 내용은 간단히 겉핥기로 소개드렸으니까, 보충이 필요하겠다 싶은 부분은 댓글로 말씀해 주세요. 그 밖에도 좀 좁은 주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2021/07/01
0007. "앞에서 뒤로", before와 until
before, 무슨 뜻일까요? 너무 쉽나요? 그럼 이 문장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I was walking down the street before my phone rang.
"나한테 전화가 오기 전에 나는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맞기는 합니다. 특히 무슨 알리바이 묻는 장면이라면, 저는 전화 올 때 길거리에 있었는데요? 하면서 이런 문장이 나올 법하겠죠. 그런데 이 문장 뒤로 쭉 전화 이야기만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건은 전화 통화 내용에서 시작해서 쭉 펼쳐지는데, 그럼 "전화가 온다"라는 장면 뒤에는 바로 전화 통화 내용이 와야 하지 않을까요? 그 사이에 길거리를 걷는 장면이 독자의 상상 속에 삽입되는 게 과연 흐름 측면에서 나을까요?
"앞에서 뒤로"를 이야기할 때 제가 빠뜨리지 않는 말이 바로 before입니다. 전치사 "전에"라는 뜻이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번역에서 곧잘 before가 데리고 있는 문장을 전부 "앞에 있는 문장을 수식하는 구"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 before는 접속사입니다. 물론 "~하기 전에"라는 식으로 접속사 안에서도 "전에"가 꾸역꾸역 살아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Do it before I return = 나 돌아오기 전에 해놔) 하지만 어떤 경우 before는 "~하고 나서"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A before B라고 하면, 먼저 A가 있었고 그 다음에 B가 있었다는 데까지는 동의하시겠죠. 그걸 그냥 그대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 사건 순서도 A가 먼저고 B가 다음이고,
- 문장 안에서도 A가 먼저 오고 B가 나중입니다.
- 당연히 원문 독자는 A를 먼저 떠올리고 B를 나중에 떠올립니다.
- 그러면 번역글 독자도 A가 먼저 보이고 B가 다음에 보이게 하는 게 좋겠죠.
그저 익숙하신 대로 무작정 "전에"라고 하면서 B가 먼저 보이고 A가 나중에 보이게 옮긴다면, 읽는 사람은 인버전도 아니고 버퍼링이 걸린 기분이 들지도 모릅니다. 악당이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지만 눈치챈 용사의 일격에 죽어버렸는데, "용사에게 죽어버리기 전에 반격을 시도했다"라고 하면 이상하잖아요? 죽어가면서 반격했다는 자체에 의의를 두고 흐뭇했다면 몰라도. "전에"가 있는 이상 이것 또한 "유일하게 맞는 번역"은 아니지만, 사건 순서를 그대로 살려야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이쪽을 고려하면 결과를 훨씬 괜찮게 얻어낼 수 있습니다.
내가 길거리를 걷고 있던 중에, 전화가 왔다.
before와 비슷한 말로 until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까지"는 그냥 한 가지 뜻일 뿐입니다. 이것도 "~다가"로 대치할 수 있습니다.
The kingdom was maintained perilously but persistently until the rebellion eventually gave a final coup de grace.
왕국은 위태롭지만 끈질기게 이어지다가, 그 반란이 터지면서 최후의 일격을 맞았다.
"망했지만 그 전까진 그래도 끈질기게 노력했다"라고 강조하려는 뜻이 없다면 반란 이야기가 앞으로 올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until은 자신 앞의 사건이 자신 뒤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종결 내지 국면 전환되었다는 뜻입니다. until 13:00이라고 하면 엄밀하게 따지면 13:00:00 딱 맞췄을 때도 안 해당하는 거예요.
※ 이 원리를 말씀드렸던 분 중에는, 오히려 "전에"나 "까지"를 써야 할 상황인데도 그것까지 "앞에서 뒤로" 옮기셨던 분이 있습니다. 어느 원리든지 절대적인 건 없습니다. 어떤 때 어느 뜻을 적용해야 하는지, 판단은 여러분 스스로의 몫이예요. 2021/05/17
0006. "반영했습니다"에 하나 더 필요한 것
요즘 굉장히 많은 경우 번역 비평은 이렇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 번역자 A가 번역 비평을 요청한다.
- 비평자 B가 번역 비평을 올린다.
- A가 번역글을 고친다.
- A가 번역글을 올린다.
언뜻 당연해 보이지만, 저는 하나가 더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3.5가 있어야 합니다.
A가 번역글을 어떻게 고쳤는지 알린다. (다시 2로 갈 수 있다)
이유는, A의 수정사항이 B의 의견과 불일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으로 비평은 정답 확인 과정이라기보단 토론의 한 가지입니다. 번역 비평이라는 것도, 비평자 B가 어떻게 번역해야 옳은지 말하는 형식이지만은 결국 그것도 주장압니다. 이 주장에 번역자 A가 긍정적/부정적 의견을 제시하고, 결국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서 비평은 비평이 됩니다. 그러러면 비평에도 비평의 비평이 있어야 하고, 비평을 살필 기회도 비평의 비평을 살필 기회도 있어야 합니다. 수정안을 확인할 기회를 미처 마련하지 않았는데 바로 종료를 선언하는 건 소위 콜드포스팅하고 사실상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옛날 개그가 있습니다.
선생: 어디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생님을 꼴아봐?
학생: 그럼 눈을 네모로 뜰까요?
선생의 의도는 웃어른을 그렇게 건방진 태도로 칩떠보는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알리는 것입니다. 학생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눈빛을 고칠 수도 있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 내 행동에 쌤이 무슨 상관이냐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학생이 진심으로 고치겠다고 생각한 다음에 다음날 눈을 네모로 뜨고 온다면, 그걸 고쳤다고 생각하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위 대화 다음에 선생은 문자 그대로 눈 이야기가 아니다, 태도 문제다 하는 피드백을 남길 수도 있겠죠. 태도가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랑 별개로, 적어도 대화의 진전은 나갈 수가 있습니다.
위 개그는 훨씬 무례한 사례였지만, 실제로도 번역에서 간접적 문투를 사용했다거나, 뜻은 납득했지만 문체는 내 것처럼 가고 싶다거나, 그렇게 수정안이 번역자 B의 뜻과 달라질 가능성은 항상 존재합니다. 그걸 확인할 만한 새가 없이 "반영했습니다"라면서 4로 넘어간다면, 납득할 수 있게 고쳤다기보다는 그냥 "고쳤다"라는 점만 강조하는 격이 되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법을 개정할 때 정당(정확히는 국회의원)은 어떤 법을 무슨 이유로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발의서에 명시합니다. 혹은 정부에서 어떤 법/규칙을 시행하겠다고 국민에게 입법예고를 하기도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일단 고친 다음에 국민 보고 잘못된 거 있으면 다시 말하라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법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꼭 국회의원들 법안 낼 때처럼 무슨 부분을 어떻게 고쳤는지, 목록 올려서 일일이 알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영했습니다" 한 마디뿐이라도, 만약에 비교할 시간만 적당히 주어진다면 그것도 충분히 좋습니다. 비평 시 버전과 반영 완료 버전이 뭔지만 알면 위키닷 기능으로 쉽게 비교할 수 있으니까요.
번역도 창작이랑 마찬가지로 비평은 의무가 아닙니다. 저도 콜드포스팅 잔뜩 하는 사람 중에 하나고요. 다만 본위키에서 토론이 더 넘치지 않게, 자기 글이 더 나아질 수 있게, 그런 뜻에서 비평을 요청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청하는 이상은 의의에 걸맞은 인식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비평 과정이 정말 의미 있는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21/04/10
0005. 격리 절차, is to be와 기속행위
격리 절차의 제일 기본은 아마 이런 문장이겠죠.
SCP-???? is to be contained in Site-19.
오늘은 이 문장을 번역하는 세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만 맞다기보단, 제 생각에 더 단순하게 가능한데 단순한 모양으로 해놓으면 좋지 않나~ 싶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is to be, 일단 이게 be to 용법이라는 건 쉽습니다. 저도 언제 배웠는지 기억 안 나지만요. be to 용법은 다섯 가지 뜻이 있죠? 예정, 의무, 가능, 의도, 운명. 이 중에 "재단 글 격리 절차"에서 제일 잘 나오는 용법이 바로 의무입니다. 위 문장은 SCP-????을 격리하는 기지는 반드시 제19기지로 하라는 명령이죠. 그러므로 첫째 번역은 이렇습니다.
SCP-????는 제19기지에 격리되어야 한다.
그런데 수동태는 안 쓰는 쪽이 좋다는 말이 많죠? 왜 그렇게들 수동태를 꺼리는지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수동태를 덜어내면 둘째 번역은 이렇습니다.
SCP-????는 제19기지에 격리해야 한다.
여기까지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셨다고 잘못된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이걸 더 짧게 줄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도 법은 잘 모르지만, 법 개념을 아주 대충 끌어와서 설명하겠습니다. 행정행위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행정청이 법집행을 하는 행정작용"을 뜻하는데, 그냥 누가 법에 따라서 어떤 짓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행정행위는 대강 기속행위와 재량행위로 나뉩니다. 기속행위는 행정청이 법령을 그냥 기계적으로 집행하는 경우고, 재량행위는 요건 충족이라든지 법 효과 선택 등을 판단하는 데 행정청에게 재량권이 주어지는 경우입니다. 뭐가 기속행위고 뭐가 재량행위인지는 사실 행정행위의 성질을 따져봐야 하는 문제지만, 대충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조문이 어떤 말로 끝나는지 보면 됩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살펴볼까요?
제130조 1항 국회는 헌법개정안이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의결하여야 하며, 국회의 의결은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제90조 1항 국정의 중요한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국가원로로 구성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를 둘 수 있다.
바로 보이시겠지만 "해야 한다"로 끝나면 기속행위, "할 수 있다"로 끝나면 재량행위가 됩니다. 이 때문에 국가원로자문회의는 두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안 둬도 상관없고, 실제로 지금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 헌법 개정은 60일 이내로 의결을 못 했거나 찬성 의원이 재적 2/3 미만이라면 절대로 다음 단계(국민투표)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기속행위로 해석하는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다"입니다.
제97조 국가의 세입·세출의 결산, 국가 및 법률이 정한 단체의 회계검사와 행정기관 및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감찰을 하기 위하여 대통령 소속하에 감사원을 둔다.
위의 "둘 수 있다"와 달리 이건 "둔다"이기 때문에, 국가원로자문회의와 다르게 감사원은 꼭 둬야 합니다. 두기 싫으면 헌법을 고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한다"와 "해야 한다"는, 의무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그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부여하는 의무를 좀 더 강조하려고 "해야 한다"를 쓰고 싶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한다"로도 충분합니다. 그래서 셋째 번역은 이렇습니다.
SCP-????는 제19기지에 격리한다.
※ SCP-??? must be contained ~ 이런 문장은 어떨까요? 이때야말로 "해야만 한다"라는 표현이 필요할까요? 하고 싶으시다면 이때도 "한다"로 하실 수 있습니다. 부사 "반드시"가 앞에 적당한 데 들어간다면요. 이렇게 '품사를 다른 품사로 번역하는 방법'은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2021/02/28
0004. "앞에서 뒤로" : 기본 원리
Spoiler: 《V for Vendetta》 (2005)
번역하면서 배운 걸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저는 "앞에서 뒤로"를 꼽겠습니다. 간단하지만 의외로 생각하기 어렵고, 의외로 이해하기 쉬운 원리입니다.
"앞에서 뒤로"는 우리가 어떤 문장을 읽을 때 글 앞부분을 먼저, 글 뒷부분을 나중에 읽는다는 원리에서 출발합니다. 문장을 아무 부분이나 랜덤하게 읽는 분은 안 계시겠죠? 우리는 문장을 쓰는 순서 그대로, 좌횡서(左橫書) 시대인 지금 기준으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습니다. "그걸 누가 몰라?" 문제는 번역할 때 그런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생각하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브이 포 벤데타》, 영국에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고 이에 아나키스트 V가 테러로 저항한다는 줄거리의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또다른 주인공 이비는 V 덕분에 감옥체험(?)을 하고 나서 V의 은신처를 나서는데, 이때 V가 이비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If I had one wish, I would wish to see you again — if only once — before the 5th.
여기서 말하는 5th는 11월 5일, 즉 V가 최종 폭탄 테러를 감행하기로 한 날인데… 제가 이 영화를 맨 처음 볼 때 자막이 이랬습니다.
11월 5일 이전에 마지막으로 당신을 한번 더 만날 수 있겠소?
이 번역이 뜻 자체가 틀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 이 자막이 나오면 저희는 어떻게 될까요? 자막으로는 "11월 5일"부터 보이는데 들을 때는 5th가 맨 나중에 나오게 되겠죠. "영화랑 자막이랑 꼭 싱크가 맞아야 하나?" 그거야 케바케겠지만, 이렇게 접근하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이 장면 앞에서 이비는 "여기 계속 머물 수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V도 이비도 둘 다, 둘이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V에게 이비는 지인 이상의 관계이기 때문에, V는 떠나는 이비에게 1.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자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미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했으니 2. 그걸 11월 5일 이전으로 할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한번만 더 보자"와 "11월 5일 이전에"의 순서에 이런 의미가 있다고? 만약에 번역대로 원문에서 11월 5일을 먼저 입에 올렸으면 V는 좀더 냉정한 성격이었겠죠. 하지만 바로 뒤에 V가 가면 집어던지고 우는 장면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영화 해석이야 물론 그냥 제가 한 이야기지만, 제 해석대로 "한번만 더 보자"가 앞에, "11월 5일 이전에"가 뒤에 나오는 게 다 의미가 있다면 번역에서 무슨 일이 생겨날까요? 영화 속에서 이비가 들은 순서대로 관객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자막을 짜 줘야겠죠. 즉 V의 대사를 듣는 이비의 감정에 관객이 이입하려면 자막에서도 "한번만 더 보자"가 앞에, "11월 5일 이전에"가 뒤에 나와야 합니다.
"앞에서 뒤로"란 바로 이런 원리입니다. 원문 독자가 문장을 읽으면서 떠올리는 심상 순서를 재현하는 게 바로 "앞에서 뒤로"입니다.
예시를 들어 볼까요? 이런 심상이 특히 필요한 글 하나를 보겠습니다.
Harry S. Truman was a "Little Man" who left his big footprints in human history.
해리 S. 트루먼, 인류 역사의 주요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키가 작아서 "리틀맨"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 문장에서 리틀맨이 "인류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앞에 오는 이유는 뭘까요? 비록 별명이야 "키 작은 사람"이라고 붙었다지만, 전후질서를 확립했다든가 미국의 위상을 드높였다든가 하는, 역사의 큰 물줄기에 끼친 영향은 절대로 작지 않다는 뜻이 있겠죠. 그런데 이 문장을 수식관계만 따져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해리 S. 트루먼은 인류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리틀맨"이었다.
이러면 이상해집니다. 일단 "별명은 작은놈이지만 역사 속에선 큰놈이었다"라는 흐름은 다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뭘 강조하는 걸까요? 역사책 페이지는 수놓을 줄 알았지만 한갓 루저였다? 이런 상황을 저는 "그림이 엉켰다"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원래 문장에서 읽을 때 그려지는 그림이, 수식관계만 따지다 보니 번역글을 읽을 때는 안 그려지는 거죠.
그러면 이 문장을 "앞에서 뒤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요? 리틀맨이 먼저 나오고 족적이 나중에 나와야 한다면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해리 S. 트루먼은 "리틀맨"이었으나, 인류사에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간단하죠? 독자는 원문을 읽을 때의 그림을 그대로 그릴 수 있습니다.
물론 "앞에서 뒤로"가 만능은 아닙니다. 언어 구조상 어순이 어쩔 수 없이 고정되는 경우가 있고, 문화적 약속 때문에 위치가 고정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 언어 구조상 고정되는 경우
Roses are the king of flowers.
장미는 꽃의 왕이다.
- 문화적 약속으로 고정되는 경우
1, Uisadang-daero, Yeongdeungpo-gu, Seoul, Republic of Korea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 : 국회의사당 주소
이럴 때까지 무조건 앞에서 뒤로 번역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게 바로 왈도체 아닌가? 중요한 것은 문장을 중심 의미별로 몇 조각으로 나눌 수 있는지 보고, 그 조각 안에서는 순서가 섞이더라도 조각들끼리의 순서는 살리는 데 있습니다. 아까 예문을 응용해서 세 조각짜리만 볼까요?
XCninety told me that (Harry S. Truman was a 'Little Man' / who left his big footprints in human history.)
나인티가 나한테 한 말로는, (해리 S. 트루먼은 "리틀맨"이었지만 / 인류사에는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첫째 조각에서 "나인티가 말을 나한테 했다" 그러지는 않지만, 조각들 자체는 순서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뒤로"는 아직 이야기하지 못한 점이 두 개쯤 더 있습니다. 머지않아서 말씀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요즘은 《브이 포 벤데타》에 자막이 이렇게 "싱크 맞춰서" 나옵니다.
당신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만나고 싶소… 11월 5일 이전에.
제가 오천원 내고 직접 스트리밍해서 확인해봤으니 믿으셔도 괜찮습니다. 2021/01/23
0003. "로서"야 "로써"야?
저는 번역 비평할 때 맞춤법 문제를 잘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맞춤법은 올리고 나서 제가 직접 고쳐도 됩니다. 또 제가 아니더라도 글 읽는 다른 사람이 고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맞춤법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어 하나를 띄어 쓰든 안 띄어쓰든 그게 뭐 그리 중대한 문제는 아니잖아요? 살다 보면 그 정도 틀릴 수 있지 싶고 또 누구나 지적할 법한 맞춤법은 그냥 넘어가는 편입니다.
거꾸로 번역자가 정말 제대로 모르고 있고, 또 내가 직접 고치기보다는 진짜로 제대로 알려줘야겠다 싶은 맞춤법은 꼭 말씀드립니다. "로서"와 "로써"가 그 중에 하나입니다.
로서, 로써, 한위키에서 글 많이 쓰시는 분도 굉장히 잘 틀립니다. 적어도 한 번은 말씀드렸는데 또 다음에 틀리신 적도 있습니다. 비슷하기 때문에 당연히 헷갈릴 만합니다. 하지만 뜻만 알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같이 살펴볼까요?
로서 (조사)
1. 지위나 신분 또는 자격을 나타내는 격 조사 (표준국어대사전)
ex) 그것은 교사로서 할 일이 아니다.로써 (조사)
2. 어떤 일의 수단이나 도구를 나타내는 격 조사 (표준국어대사전)
ex) 말로써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한다.
둘 다 뜻이 하나가 아니지만, 이 정도만 써도 비슷한 뜻들이 뭔지 보이실 것 같습니다. "로서"는 자격격 조사, "로써"는 기구격 조사로 분류합니다. 자격격이란 자격을 나타낸다는 뜻이고, 기구격이란 그 다음에 오는 용언의 내용을 실현한다는 뜻입니다. 위 에문에서 첫째는 화자가 "교사라는 신분을 지닌 채로"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둘째는 천냥 빚을 갚을 방법이 말에서 나온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조금 더 쉽게 구분할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 "로써"는 바꿔쓸 말이 많습니다. 일단 국어사전에 "로써"는 "로"와 완전히 똑같은 뜻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강약 차이만 다르지). "로 해서"하고도 바꿔쓸 수 있습니다. "를 가지고"하고도 바꿔쓸 수 있습니다.
- "로서"는 뜻이 직접 호환되는 말은 아니지만 자리에 "~이기 때문에"를 넣으면 어색하지 않습니다.
- 영어로는 뜻을 알겠는데 한국어에서만 둘이 헷갈린다면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로서 : 로써 = as : by 입니다. "교사로서"는 as a teacher, "말로써"는 by a word라고 써야겠죠.
마지막으로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예문 하나만 소개드립니다.
- 농부로서 밭을 쟁기로써 갈았다.
- 농부로써 밭을 쟁기로서 갈았다.
두 문장을 영상으로 찍으면 1번은 전원일기, 2번은 초현실 고어물이 됩니다. 2021/01/19
0002. 30초만에 번역 실력 키우는 법
한국어∩영어 잘 하세요? 영어를 잘 하시고 한국어를 잘 하시더라도, "한국어∩영어" 실력은 생각보다 좁을 수 있습니다. 대뜸 아무 영단어를 보여주면서 한국어로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전이 있죠. 번역할 때 우리는, 뜻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봅니다. 아주 편리하죠? 그것 때문에 "한국어∩영어" 실력은 좁아집니다.
미디어로서 사전은 되게 정적입니다. 말의 뜻은 시간이 흐르며 항상 바뀌고, 어떤 뜻이 새로 생기거나 어떤 뜻이 사실상 효력을 잃고는 합니다. 나무위키 같은 데라면 몰라도, 어학사전에서는 그런 변화가 제깍 반영되리라고 바라기 어렵습니다. 아무 영한사전이나 펼쳐보시면 의외로 "왜 이런 뜻을 싣고 있지?"라고 생각할 만한 풀이들이 많습니다. 어떤 뜻은 만나보기 어렵거나 죽어버린 채로 있기도 하고, 어떤 단어는 새로운 뜻을 얻었는데 그 뜻을 싣지 않기도 합니다.
더구나 영한사전의 문제점은, 어떻게 보면 사전보다는 번역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apple이라는 말을 생각해 볼까요? apple을 영영사전에서 찾으면, "Malus domestica 나무에서 나는 흔한 둥근 과일, 온화한 기후에서 재배"(윅셔너리), "장미과 나무에서 나는 둥근 과일, 보통 얇은 녹색 또는 빨간색 껍질과 아삭한 과육이 있음"(옥스퍼드)라고 나옵니다. 자세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백과사전은 아니니까 넘어가죠. 영한사전에서는 뭐라고 나오나요? "사과"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슨 나무에서 나오는 어떤 과일이라는 뜻을 보고 이게 우리나라로 치면 어떤 과일일까 고민할 틈도 없이, 영한사전은 apple이 "사과"라고 정해 버리는 거예요.
물론 영한사전의 기능 자체가 "이 말을 어떤 다른 말로 바꿔써야 하는지"를 도와주려는 거지, 일일이 해설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번역할 때 영한사전에만 의존한다면 그 기능은 악영향을 끼칩니다. 영어는 절대 한국어가 아닙니다. 똑같은 문장이라도 번역할 방법은 글마다, 작가마다, 문단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전은 그 방법을 하나로 딱 강제 통일시켜 버립니다. 거기다 영한사전만 본다면, 우리는 한국어 속에서 어떤 말이 이 말과 제일 어울리는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남이 정해 준 그 뜻 안에서만 "이 중에 어떤 게 제일 나을까"라고 고민하게 됩니다. 게다가 맨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그 뜻이 시시각각 업데이트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래서 한국어이자 영어라야 하는 번역글에서 언어 능력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본질적으로는 "뜻을 제대로 찾아보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다음에 따로 다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하나 소개드립니다. 바로 한영사전을 찾아보는 거예요.
영어가 절대 한국어가 아니라는 사실은, 한국어가 절대 영어가 아니라는 사실과 똑같습니다. 한영사전도 문제점은 똑같습니다. 이 한국어 낱말에 어울릴 만한, 나름 문제없는 영어 낱말을 싣고 있죠. 그런데 한영사전에 실린 영단어를 보면 "어? 이것도 이런 뜻이었어?"라고 놀랄 만한 말들이 많습니다. 당연합니다. 영어:한국어 다대다 대응 관계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한쪽으로 한 영단어가 얼마나 많은 한국어 단어로 가는지만 살펴봤는데, 시선만 거꾸로 했더니 이렇게 많은 영단어가 이 한국어 단어로 들어오는지 보이니까요. 익숙한 단어일수록 아마 더 잘 보이실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간단한 방법은, 어떤 한국어 단어가 생각났는데 "이걸 영어로 뭐라고 하지?"라고 궁금해진다면 사전에 찾아보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까요?
cooperate, 어떻게 번역할까요? "협력하다", "협조하다"입니다. 너무 당연한가요? 그런데 "손잡다"를 한영사전에 찾아보면 cooperate가 튀어나옵니다. 둘의 뜻을 한번 볼까요?
cooperate (verb)
To work or act together, especially for a common purpose or benefit. (윅셔너리)손잡다 (동사)
서로 힘을 합하여 함께 일하다. (표준국어대사전)
이렇게 되면 cooperate 쓸 자리에 "손잡다"를 써도 되겠죠? 하지만 보통 안 쓰입니다. 그 일차적 이유가 바로, 영한사전에서 "협력하다", "협조하다"를 선호하고 "손잡다"를 잘 안 챙겨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손잡다"가 영어로 뭔지 찾아보고 cooperate를 찾아냈다면? 그러면 저는 앞으로 cooperate를 번역할 때 방법이 하나 더 늘어난 거죠.
일부러 많이 하실 필요도 없고, "어? 이건 뭐라고 하지?"라고 생각나실 때마다 단어 하나씩만 찾으셔도 충분합니다. 30초도 안돼서 검색 한 번으로 번역 실력이 한 걸음 발전한다면 해볼 만하죠? 2021/01/19
0001. copy는 "사본"이 아니다
재단 번역에서 숱하게 오해받는 단어 중에서 copy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오해일까요? 예문을 보겠습니다.
There are 128 copies of the album CD.
이 문장은 CD의 복사본이 128장이나 있다는 말일까요? 맥락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런 문장은 이를테면 앞에 이렇게 부연설명이 붙을 수도 있습니다.
재단은 미국 전역을 뒤져 그 앨범 CD를 모두 회수했다.
그러니까 회수한 정발본 앨범 CD들을 가리키는데 128 copies라고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왜? copy는 사본인데? 당연하지만 이유는 copy는 "사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윅셔너리(Wiktionary)에서 copy를 찾아볼까요?
copy (noun)
8. A printed edition of a book or magazine.
- Have you seen the latest copy of "Newsweek" yet? : 뉴스위크 지난호 봤어?
- The library has several copies of the Bible. : 도서관에 성경이 여러 부 있었다.
제가 쓴 번역 중에서 copy에 해당하는 부분은 어디일까요? 지난 "호", 여러 "부"겠죠. 좀 더 넓게 말하자면 여기서 copy는 어떤 문서를 세는 단위로 쓰입니다. 재단에서 "보고서 한 부 갖다줘"라는 말을 쓸 수 있겠죠? 이 "보고서 한 부"라는 말은 영어 원문에서 a copy of report라는 모습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 이렇게 쓰이는지 헷갈린다면 "이거 복사 두 장만 해 줘"라는 말을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두 장 뽑아서 들고 갔을 때 그 문서들은 뭔가요? 어떤 원본을 복사했으니 "사본 둘"일 수도 있지만, 그것들 자체도 하나의 문서이기 때문에 "문서 둘"이기도 합니다.
copy라는 말이 나올 때는 "이게 '사본'이 필요한 상황인가?"라는 물음을 꼭 던져보세요. 대개는 한 부, 한 장 같은 결론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 copy를 번역할 또 다른 후보는 "본(本)"입니다. "원본"을 가리킬 때 original copy라 하기도 합니다. 2021/01/16
내용을 보고 하실 말씀, 아니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