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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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같이 가지 않을래?"

저 멀리서 아직도 울리는 듯한 음악 소리, 그 음악이 나를 다시 세상으로 이끌었다. 그 음악 소리가 이끄는 대로 나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환한 태양 빛, 그녀의 반짝이는 악기, 그녀의 다정한 미소. 문득 그저 긍정했다.

그리고, 내게도 이름이 생겼다.

벨, 벨라트리스, 벨.

뒤죽박죽이게도 나에게 "우리"가 생김으로써 "내"가 생기게 되었다.


꼬맹아
아가야
아이야
저기
이놈아
거지
도둑놈

나를 부르는게 아니라, 흔히들 거리의 아이들을 부르는 말. 그러나 내가 불리던 말.

그 안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들이 알 필요 없는 사람이기에. 거리를 떠도는 아이. 이야기로 따지면 옛날옛날 한 옛날에라는 말속에 생략되어버릴 사람일 테니까.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거기서 벗어났다.
나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우리. 한낮의 떡갈나무 유랑극단 소속의 새 둥지 가지의 꿈속여행 잎.

벨, 벨라트리스, 벨.

나는 벨이다. 나는 존재한다.

그 사실이 문득문득 행복해서, 웃었다. 메이가 내게 왜 웃느냐고 물었고, 나는 메이의 머리카락이 엉켜서 웃는다고 대답했다. 그냥 사실, 이 기분을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벨이라서 행복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어쩌면 그냥, 부끄러웠을 뿐일지도 모른다.

생소했다.

아침마다 투덜대며 벨을 깨우는 캐시가, 밤마다 벨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이, 벨에게 요리가 입에 맞냐고 물어보는 모나가, 풀과 동물의 이름을 벨에게 알려주는 제이콥이. 생소했다.

생소해서, 그게 나라는 게 생소해서, 그저 웃었다.


새소리가 들려온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세상이 밝아져 버려 눈이 부셨다. 그래서 더 침낭 속으로 스스로를 파묻었다.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폭신폭신하지… 나뭇잎들은 어디 간 거야…'

저 멀리서 자꾸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을 방해하는 그 목소리가 싫었다.
몸을 깊이 더 깊이 파묻었다. 물속에 잠기는 자갈처럼, 더 깊이깊이. 아무런 소리도 듣지 않을 수 있게…

"…에엘!"

으음…여전히 목소리가 들린다.

"…에에엘!"

더 몸을 깊게…파묻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눈을 한껏 찡그리고 듣지 않으려고, 잠에 다시 빠져들려고 노력했다.

"베에에엘! 일어나라고!"

베에엘? 그게 누구지… 졸려… 더 자고 싶다.

"베엘! 벨! 좀 일어나! 이 늦잠꾸러기야!"

벨? 그게 누구더라. 어디서 들은 이름인데… 마을 사람 중에 그런 이름이 있…던….졸려.

"일어나라고!"

침낭을 누군가 자꾸 흔든다. 자고 싶은데 왜 나를 괴롭히는거지. 그러고 보니 침낭…침낭…?

"벨라트리스! 아침마다 깨우기 힘들잖아! 좀 일어나라고!"

벨라트리스…벨…아, 맞아. 나한테 생긴 이름이었어. 그랬지.

"모나가 아침 다했다고 깨우랬단 말이야. 좀 일어나!"

저 목소리는… 캐시구나. 이 침낭도 캐시의 예비침낭… 아 그래. 어제 야영장에서 잠들었었지.
캐시와 모나, 제이콥, 한, 메이랑 같이.

캐시의 궁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대답을…해야겠지.

"…으으응… 일어났어… 그만 흔들어…"

느릿느릿, 손을 뻗어서 침낭의 밖에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아침의 찬 공기가 나에게 장난치듯이 밀려들어 왔다. 추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 나기만 했다.

"뭐야 깼으면 얼른 말을 하지 그랬어. 괜히 오래 깨웠네"
캐시가 투덜거렸다.

내가 휘적휘적 흔드는 손은 어느새 멈춰서는 찬 공기 속에서 늘어져 있었다. 그 손이 내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내 손이 늘어진 만큼 나 또한 늘어져 있지 않았다고 말하기에는 내가 다시 졸고 있었다. 캐시가 그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내 손이 나오느라 살짝 벌어진 침낭의 입구를 벌렸다. 찬 공기가 후욱 밀려 들어오고, 나는 다시 잠의 호수에서 자맥질하려던 시도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추워어…"

"불까지 오면 안 추워, 그리고 따뜻한 스프도 먹으면 되겠지"
캐시가 내 의미 없는 투덜거림에 답할 무렵, 나는 간신히 눈을 떠 침낭 밖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밝고 반짝이며, 무엇보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모닥불까지 가면, 그 모닥불에 끓고 있는 스프가 있을것이다. 우리보다 일찍 일어나 그 모닥불을 피운 한이 있을 것이고, 모나가 그 불에 스프를 끓여놓고 기다릴 것이다. 내가 달려가면 메이가 나를 안아줄 것이고, 제이콥이 아침부터 건반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이다.

캐시를 바라봤다.

"왜?"
캐시가 뚱해서는 물었다.

"넌 언제 일어났어?"
내가 물음에 물음으로 되물었다.

"엄청 일찍 일어났지! 한이 불피울 때 잔가지도 모아왔다고!"
캐시가 자랑스레 말했지만, 캐시도 아직 잠옷인걸.

"거짓말, 아직 잠옷 그대로잖아"

기지개를 켰다. 몸 여기저기가 찌뿌드드했지만, 예전의 그 나뭇잎 이불과 비교하기에는 미안할 정도였다. 살짝 몸을 굴려서는 일어났다. 침낭에서 나와, 침낭을 배운 대로 돌돌 말아서 침낭 가방에 넣었다. 여기저기 올록볼록해 제대로 접힌 것 같지는 않지만, 어찌어찌 침낭 가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직 서투르지만 그래도 가방 정리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뿌듯해하면서 일어나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았다. 해가 떠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창창한 하늘이었다. 숲속의 어두운 하늘이 아니라, 밝고 청명한 하늘이었다.

늦은 아침이나 점심 즈음에 일어나면, 언제나 숲은 전부 깨어 있었다. 깨어서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캐시가 깨운 아침에는, 넓은 하늘이 보이고, 동물들도 하나둘씩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어스름한 하늘과 아침 바람을 맞으면서, 그렇게 나도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구름이 흐른다.
하늘 높은 곳에서 흐르는 구름은 뭘 바라보고 있을까. 저 높이서도 내가 보일까. 그리 생각하며 기지개를 켰다.

어느새 캐시는 본인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불 가에 앉아 스프를 먹고 있었다. 매일 같은 풍경. 그러나 볼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다.

모나가 스프를 나눠주고, 한이 그 옆에서 빵을 자르고 있다. 제이콥이 아침을 먹으며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고 캐시는 거기에 딱 달라붙어서 아침을 어디로 먹는지도 모를 만큼 빠져 있었다. 그리고, 메이가 그걸 보며 웃고 있었다. 아침 해에 눈부시게 빛나는 검은 빛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서는, 모나를, 한을, 제이콥을, 캐시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기지개를 켜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에다가, 왜인지 모르게 아직 비어있는 듯한 가슴이 나를 서늘하게 채우던 그 순간에, 메이가 나를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메이가 웃었다. 그 환한 웃음에 왠지 모를 서늘함이 날아가고, 메이가 본인의 무릎을 탁탁 치고서는 나를 부르는 두 팔에, 내가 뛰어들어 안겼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멍하니 불가를 지키는 것도 잠시, 제이콥의 이야기가 끝났는지 입에 물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은 캐시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베엘! 메이 품은 내꺼란 말이야!"
돌아본 캐시는 입이 부루퉁해져서는 메이와 내 사이를 파고들었다.

메이의 따뜻한 품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더 메이를 끌어안으며 캐시를 밀어냈다.
"아냐 내꺼야!"

우리 둘이 한참을 투닥거리며 싸우고, 감정 또한 상하려 하던 무렵에, 결국 메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이렇게 싸우니까 둘다 안아줄 수가 없겠어."

우리 둘은 울상이 되어서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캐시의 입가는 여전히 부루퉁해져 있었지만, 팔 힘이 조금은 약해져 있었다. 결국 서로를 쳐다보고서는 각자 메이의 품 한편에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메이의 품에 그렇게 오래 있지도 못했는데, 캐시가 조금 양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캐시가 그래 줄 리가 없다.

결국 메이의 오른쪽 다리에 걸터앉아서 메이의 코트를 휘감고는 그 온기를 나눌 뿐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에게 뚱해 있는 모습을 보던 제이콥은 금새 악보를 뚝딱 만들어 우리에게 가져 왔다. 우리를 위해 만든 악보였을 것이다. 그저 우리만을 위해.

낮은음 자리를 치는 나와, 높은음자리를 치는 캐시. 그렇게 우리 둘이 연습을 하자면 매번 부딛치고는 했다. 서로가 서로의 동선에 방해가 되고, 서로가 맞았네 틀렸네, 그러다가 몇번 화도 냈었다.

그렇지만 곧 괜찮았다. 음악을 연주한다면, 모든건 천천히 괜찮아졌으니까. 음악이 결국 우리 사이에도 있었으니까.

서로의 동선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서로의 눈을 마주쳐가며 타이밍을 쟤고, 틀리더라도 결국 같이 연습다다 보면, 괜찮았다.


해가 점점 떠올랐다.
하늘이 시리게도 파아란 색이다.

이제는 다시 길을 나설 채비를 해야 한다. 모두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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