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6)

 
천장에 달려있는 경고등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지 내부에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곳곳에 설치되어 구획들을 나눈 격리 셔터가 내려갔다. 좁은 공간에 갇힌 사람들이 소리 지르면서 셔터 앞으로 달려가는 통에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모두가 뒤엉킨 곳까지 섞여버린 레버는 넘어져 짓밟히지 않도록 가까스로 남들을 밀어내며 중심을 잡았다. 비공식 기지 안에는 위험 요소가 될 만한 것이 전혀 없을 텐데도, 안전한 곳이라고 믿었던 곳에서 겪는 폐쇄 사태에 오히려 모두가 패닉 상태가 되어 셔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몇몇 사람들이 옆에 붙어있는 키패드에 몰려 셔터를 열려고 했으나 서로 앞뒤로 밀쳐대는 바람에 제대로 보안 암호를 입력할 수 없었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레버와 뒤에서 인간 덩어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외쳤으나 셔터를 두드리는 소리가 그들의 목소리를 묻어버렸다.

"여러분, 문제될 것 없습니다! 이 기지 안에는 위험한 것이 하나도─"

한 남자가 외쳤지만 턱에 팔꿈치를 맞으면서 말을 끝맺지 못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당장 멈춰요! 당신들이 서로 밀어대서 셔터 보안을 해제하지 못 하고 있으니까!"

레버가 크게 소리 질렀다. 키패드에 붙어있는 사람들이 동조하며 한목소리를 내자 셔터문 앞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뒤에서 여전히 상황을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들이 밀어붙이며 대열을 흩트렸고 서로 부딪히면서 쓰러진 사람에게 걸려 다시 넘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결국 뒤로 피해있던 사람들이 앞사람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레버도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키며 동시에 셔터문에 붙어있는 사람들을 떼어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를 거칠게 옆으로 밀어내고 키패드 쪽으로 달려갔다.

"저리 비켜, 사람이 죽었다구! 여기 리치먼드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 화이트 짓이야, SCP 짓이라고!"

그가 SCP라는 말을 내뱉자 사색이 된 사람들이 다시 그들을 막고 있는 자들에게 고함치며 대열을 뚫기 시작했다. 레버를 밀어내고 키패드로 간 남자는 그때 키패드를 두드리고 있던 무리를 모조리 뒤로 잡아당겨 내버리고 자기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뒤로 던져진 사람들은 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남자를 끌어내려고 했으나, 그는 용케 키패드를 사수하며 암호를 끝까지 쳐 넣기에 이르렀다. 곧이어 셔터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자, 서로 먼저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붙잡고 있던 팔을 떼어내고 셔터문 틈으로 돌진했다. 그 와중에 뒤에서 밀쳐진 한 남자가 벽에 머리를 박으며 쓰러졌다.

레버는 자신을 밟고 지나가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솟구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셔터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뒤로 빠져있는 무리에게 다가갔다. 개중에는 섀넌도 있었는데 이제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보니 아까 어떤 사람을 끌어내다가 넘어뜨려진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도왔다.

"괜찮아요?"

"네, 일어나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네요. 드레스가 길어서 꼬리를 자꾸 밟혔어요." 그녀는 한참 앞에 떨어져있는 녹색 숄을 주우며 말했다. 여기저기가 밟혀서 완전히 너덜너덜해져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한쪽 팔에 대충 감았다.

"사람들이 이렇게 될 줄 전혀 몰랐네요. 그러니까 이 정도일 줄은……."

레버는 셔터문 앞에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대개 넘어져 밟힌 사람들이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세운 그들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이곳저곳을 주무르고 있었다. 뒤로 피해있던 이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기절한 채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 주변에 몇 사람이 모여들었다. 아까 벽에 부딪힌 남자였다. 레버는 이를 갈았다.

"이건 화이트도 SCP도 아닙니다. 그 사건은 이미 화이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로 종결됐어요. 이건 화이트가 한 짓처럼 꾸민 살인이란 말입니다." 그는 뒤에 내팽개쳐져 있는 시체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등을 돌린 채 열린 셔터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폐쇄 사태를 핑계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는게 틀림없습니다. 목적이 저 사람의 죽음 자체였든 다른 것이었든 간에 이 일을 벌인 녀석은 그걸 달성하고 도망치고 있는 거에요. 잡아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모두를 내보내면 다시는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격리 셔터는 한 번 내려가면 중앙 통제가 아닌 이상 하나하나씩 해제해야 해요. 아마 방금 몰려간 사람들은 지금쯤 다음 셔터문에서 또 지옥을 펼치고 있을걸요."

"이런 세상에."

레버는 격리 셔터를 향해 달려갔다. 아니나 다를까 저편의 반쯤 올라간 셔터문 앞에 이미 몇 명의 사람들이 엎어져있었다. 그는 그다음 셔터문까지 지나쳐서 마구잡이로 얽혀있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모두 멈추세요! SCP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지 폐쇄는 살인자가 도망치려는 속셈일 뿐이에요. 그러니 모두 진정하시고……"

"우리 중에 살인자가 있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칼이다, 칼! 저 사람 칼을 들고 있어요!"

그의 기대와는 달리 사람들은 더욱 겁에 질려서 이제 경고등에 놋쇠 단추가 번쩍거리는 것을 칼로 보면서까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시체는 목이 졸려서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꼼짝 못하는 상황 속에서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살인광에게 난자당할 것이라는 이미지가 사람들을 더욱 자극했다. 격리 셔터가 다시 열리자 사람들은 썰물 빠지듯이 셔터문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레버는 어느 틈에 그들의 틈바구니 사이에 들어와서 낑낑거리고 있었다.

"여러분, 진정하시고 기지에서 나가면 안 됩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그들은 정문 앞까지 도달했다. 어느 틈에 자신이 기지 로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버는 그들을 막는 것을 차라리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얼굴을 찍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의 두 팔은 신사복들 사이의 좁은 틈에 끼어서 도저히 휴대 전화를 꺼낼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로는 어차피 꺼내보았자 손에 간신히 쥐고 있는 게 다였다. 레버는 숨을 씨근거리며 어깨로 자기 코를 친 사람을 속으로 욕하면서, 팔을 빼내려고 버둥거렸다. 그 때 절망적인 목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왔다.

"셔터가 안 열려! 코드가 안 먹힌다고!"

정문 앞에서 애꿎은 셔터를 밀어대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키패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레버는 가까스로 그 무리에서 빠져나와 벽에 팔을 대고 서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여러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키패드를 누르고 있었는데 한 명도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먹통인 듯싶었다. 사태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순식간에 경악에 찬 얼굴로 키패드를, 그리고 뒤이어 셔터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레버는 당혹스럽게 그들을 어떻게 진정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봐, 기다려, 그렇게 난리 피울 것도 없어! 이렇게 다 같이 있으면 살인자 놈이고 뭐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 할 거야!"

인파 속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외쳤다. 순간 레버는 화색이 되어 큰 소리로 동의를 표했다. 군중 심리 덕분에 여기저기서 옳다는 얘기가 튀어나오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셔터문에서 스르르 빠져나왔다. 뭉쳐있던 사람들 간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졌다.

여전히 수런거리고는 있었지만 적어도 고함치는 사람은 없어졌다. 상황은 일단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이제 남은 일은 모든 사람들을 로비에 모아두고, 살인자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레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천천히 사람들 앞에 서서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뒤쪽에서 또 비명이 들려왔다. 아연해진 사람들이 멀뚱히 그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데, 지나쳐온 갈림길에서 정문으로 통하는 길이 아니라서 그들이 무시했던 다른 쪽 셔터문 아래로 어떤 여자가 내리닫았다. 그녀는 소리를 빽 질렀다.

"저쪽에 시체가 있어요! 사람이 죽어있다고요!"

레버의 표정은 다시 굳어버렸다.

"뭐야?!"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자 레버는 다시 물러나면서 그들을 걱정스럽게 힐끔거렸다. 여기서 다시 공황 상태에 빠진다면 열리지 않는 문에다 대고 무슨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하지만 우습게도, 적을 한 명의 살인자로 규정한 사람들이 이성을 회복해서 더 이상 살인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는 쪽으로 대화가 전개되었다.

"살인자가 저쪽으로 갔어! 다 같이 놈을 잡으러 가자고!"

분위기가 다시 우르르 몰려들 기세로 변하자, 레버는 그들보다 앞서 여자가 달려온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이자 사람들도 그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소식을 전한 여자가 따라오지 않아서 레버는 무작정 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셔터가 한 방향으로만 열려있어 올바른 방향을 취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셔터가 닫혀있는 마지막 지점에 도착했다.

레버는 충격을 받았다.

"이런 세상에……."

"어떻게 이런……!"

뒤따라온 사람들이 주저하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들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바닥을 타고 지금도 계속해서 퍼지는 붉은 피가 그들의 구두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맙소사!"

막 도착한 여자 한 명이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셔터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피가 넓게 반원을 그렸다. 어떤 남자가 배를 깔고 누워있었다. 레버가 보고 있는 쪽으로 엉덩이와 다리를 보이며 몸을 쭉 편 자세였다. 그런데 바닥까지 완전히 내려가 있는 셔터 때문에 허리 위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셔터가 남자의 몸뚱어리를 이등분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공포에 젖은 시선으로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셔터가 느릿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길이 잠시 키패드를 향해 쏠렸으나, 아무도 암호를 입력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이제 모든 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예상해버렸음에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올라가는 셔터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반토막 난 시체가 완전히 드러났을 때, 사람들은 건너편에서 피 위에 뒤집혀 펼쳐진 책을 보았다.

모비 딕이 표지를 통해 하얀 고래 그림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피를 들이마시는 것처럼, 그것은 떡하니 입을 벌리고 탐욕스러운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둔 상태였다. 그런데도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듯이 말도 안되게 새하얀 페이지에 레버는 이성을 잃었다. 그는 홀린 듯이 다가가 고인 피 위에서 그것을 집어들었다. 책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 화이트다."

정적이 흘렀다. 레버의 동공은 커졌고 모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화이트…… 화이트라고! 이 기지 안에 화이트가 돌아다니고 있어!"

"여기서 이러고 있다간 죽을 거야! 한 명씩 한 명씩 전부 다!"

두 사람이 먼저 대열을 빠져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정문을 향해 돌아가는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이 기지를 메웠다.

이것은 몇 십분 간 계속되었다.

시체는 계속해서 발견됐다. 2층 복도에서 손이 토막 난 채 얀의 트럼프 카드에 덮여있는 남자가 나왔고, 개인 방 중 하나의 욕실에는 웨딩드레스를 붙잡고 욕조 안에 상반신을 집어넣은 채 익사한 여성이 있었다. 냉동 창고 안에서는 나르시스의 대리석 조각상과 함께 동사한 연구원이 나타났다. 시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잿빛으로 질려있었고 보는 이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대조적으로 그들 옆에서 발견된 물건들은 모두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채였고 깨끗하게 빛나는 순백색으로 사람들의 넋을 나가게 했다. 레버는 마지막 물건인 손수건을 찾아 기지를 헤매었는데, 그것은 곧 창고 앞에서 목이 졸린 상태로 발견된 처음의 남자 손에 쥐어져 있었음이 밝혀졌다. 손수건 또한 예외 없이 구겨진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이따위 장난질은 두고 볼 수 없어. 뭔가 좀 해보란 말이오."

그리고 기지 내의 인원들은 로비에 모여있었다. 외부로 나갈 수 있는 문들의 보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차례 소동이 지나간 후 진정된 열 명 가량의 사람들은 다섯 가지 물건들을 한가운데 모아두고 둘러싸고 있었다. 각자의 방에 누워있는 부상자들과 그들을 간호하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 이곳에 있는 셈이었다. 방금 전에 목소리를 낸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 큰 기지에서 온 양반. 당신이라면 뭔가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네보다 아는 것도 많을 테니까!"

레버는 신랄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저도 해결책을 강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를 것 없어요."

"그래, 당신이라고 별 거 있는 것도 아니군."

"그만해요."

섀넌이 신경질적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우린 모두 화이트의 인질이에요. 다 같은 처지라고요. 그러니 쌈박질은 그만하고 뭔가 쓸만한 말을 하시는 게 어때요?"

"뭐라고?"

"됐습니다. 그녀의 말이 맞아요. 제가 기지에 연락을 취해뒀으니 회수팀이 파견될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화이트의 격리 방법을 찾아내보죠."

"그거 좋군! 한 번 찾아보시오. 말이야 세 살배기 꼬맹이도 잘 하겠지."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며 거칠게 팔을 내저었다. 레버는 어금니를 깨물며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신경 쇠약, 분노, 공포, ……모두 지쳐있었다.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 할 게 당연했다. 그렇다면 외부인인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려고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수많은 눈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가 사건을 마법처럼 해결해줄 것처럼. 그렇지만 레버 역시 막막할 뿐이었다. 기지 전체를 손아귀에 넣다니, 이런 유령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만약 이런 분위기에서 뭔가 해결책을 꺼내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격양된 감정을 자신에게 풀려고 들 것이다.

그는 흐트러지는 생각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당장은 괜찮다고 하더라도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군중들을 데리고 행동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자그마한 꼬투리라도 잡혔다치면 바로 화형이었다. 마녀 사냥은 쉬운 일이다……. 그리고 한 번 날뛰기 시작한 사람들은 서로 물어뜯으며 자멸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것도 위험하다. 무능력하게 보여서는 안된다. 레버는 속삭이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힐끗거렸다. 그가 선도하는 역할을 자처하는 수 밖에 없었다. 뭔가 행동을 시작해야 했다. 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감정의 표출을 집중시킬 어떤…….

잠깐만.

"레이스 양은 어딨죠?"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멈추었다.

"뭐라고요?"

"레이스 양 말입니다. 가장 최근에 들어왔다는 신입이요. 파티장에서 봤는데요. 이곳에 다 모인 것 아니었습니까?"

"자기 방에 누워있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간호하고 있던가."

"아니요, 그쪽 명단은 전부 확인했습니다. 직원 목록을 일일이 대조했는데 레이스라는 이름은 아직 없더군요."

어떤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레이스라고? 그런 이름의 직원은 없어."

"무슨 소립니까? 우리도 그녀를 봤어요."

다른 사람들이 그의 말에 반박하고 나섰다.

"맞아, 파티장에서 춤추고 있었다고요."

"어쩌면 파티 도중에 밖으로 나갔을 지도 모릅니다."

"인사 담당을 못 믿는 거야? 그런 여자는 없었어. 근 두 달 동안 여기 신입이라곤 들어온 적이 없었다고."

"하지만 저도 그녀를 봤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람들이 다시 불안해하기 시작하자, 레버는 선수를 쳤다.

"감시 카메라로 확인해봅시다. 그녀의 존재 여부나 만약 아직 기지에 남아있다면 어디에 있는 지도 알 수 있겠지요."

그들은 맞장구를 치며 동의했고, 으스스한 장소에 혼자 남기 싫었던 무리들은 한데 모여 보안 경비실로 이동했다. 직원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부상자들에 대해 그리고 레이스 양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내보이며 애써 두려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레버는 최대한 말을 줄이며 위엄을 보이려 애썼다. 이런 행동이 자신에게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준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경망스럽게 행동하며 가벼운 태도로 다가가는 짓은 더더욱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보안 경비실에서 의외의 인물과 맞닥뜨리면서 당혹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레멘스?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야?"

핼러윈을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로 보낸다고 하던 클레멘스는 초췌한 모습으로 CCTV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발작적으로 눈을 깜빡이며 레버를 돌아보았는데 눈두덩이 짙은 보랏빛이 될 정도로 피곤에 찌든 모습이었다. 그의 떨리는 손가락이 빠르게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레버의 심경을 몹시 거슬리게 했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를 쳐다보는 클레멘스를 마주하게 되자, 레버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고, 클레멘스. 너 괜찮은 거야?"

"레버, 이건 단순한 미치광이의 소행이 아니야. 화이트는 존재했어."

레버는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두려워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렸다.

"알아, 친구. 괜찮아, 우리가 그녀를 잡을 거야. 괜찮을 거야."

클레멘스가 갑자기 레버의 뒷목을 부여잡고 자신의 눈앞으로 그를 끌어당겼다. 레버는 바싹 말라가는 입에 마지막 남은 침을 삼키며 그가 음절마다 끊어가며 속삭이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화이트를 찾아야 해, 레버. 그녀를 찾아내야만 해."

레버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천천히 그의 손을 떼어내고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의 등을 두드리고는 돌아보며 말했다.

"찾을 거야, 클레멘스. 방에 가서 쉬고 있어. 누가 클레멘스를 방에 데려다 줘요."

"제가 갈게요. 클레멘스, 이리 와요."

섀넌이 나서서 그를 데려갔다. 비칠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클레멘스는 혼자 계속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거렸다. 레버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벽면에 곳곳에 설치된 CCTV의 화면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는 우선 화면들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레이스나 다른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있나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곧 컴퓨터를 조작하여 CCTV를 뒤로 돌리기 시작했다. 화면은 그가 처음으로 레이스를 만났던 시점으로 바뀌었다. 레버가 섀넌과 함께 로비 구석에 앉아있고, 레이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 뒤 한 남자가 달려와 창고의 시체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었고 사람들은 그를 따라 몰려갔다.

레이스는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레버가 보안 카메라 화면을 전환해가며 그녀를 쫓았다. 레이스가 걸어가는 동안 보안 셔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경고등이 번쩍이고 있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머리를 흔들거리며 복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런데 화면이 멈짓하다가 하얀색 노이즈로 채워지며 잠시 공백이 되더니, 다시 복도를 지나치는 레이스의 모습이 반복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소는 언제나 같았지만 레이스는 화면이 새로 보여질 때마다 각각 다른 사람을 한 명씩 만났다. 뒤에서 화면을 보고 있던 직원들이 그들이 살해당한 직원들이라고 증언했다. 레버는 레이스가 그들을 만나는 과정을 화면에 크게 띄웠다.

한 남자가 레이스와 대화를 하다가 화를 내며 팔을 위로 뻗어댔다. 모비 딕에게 반토막이 난 사내였다. 그다음 만난 여자는 웨딩드레스와 함께 익사한 자였는데 레이스가 지나가는 동안 팔짱을 끼고 그녀를 노려보며 혼자 수군거리고 있었다. 다시 어떤 남자가 나타나서 레이스의 앞에서 무언가를 떠벌이고 있었는데 화면을 통해 그의 과장된 몸짓을 보던 직원 중 하나가 말하길 그 남자는 파티 도중에 저것과 꼭 맞는 행동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에 레이스에게 화를 내던 남자도 파티 도중에 봤다는 얘기를 했고, 한 여직원이 죽은 여자가 레이스에 대해 험담하는 것을 들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레버는 계속해서 화면을 돌렸다. 네 번째 직원은 레이스가 지나가는 것에 신경 쓰지 않은 채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졸고 있었다. 그는 냉동 창고에서 대리석 조각상과 함께 동사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남자는 레이스 앞에서 두 손을 내밀며 그녀에게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카드 아래로 손이 토막 난 자였다. 사람들은 그가 술에 취해 레이스에게 청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온통 하얀 화면이 나왔다가 마지막으로 텅 빈 복도에서 레이스가 걷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돌연히 제자리에서 멈추고 뒤를 돌아본 뒤,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순진무구한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화면이 다시 하얗게 되어서 끝까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화이트였어."

"뭐라고?"

"레이스 양이 화이트였다니!"

"그럼 지금껏 우리가 귀신과 떠들고 춤췄단 말입니까?"

"끔찍해라."

두려움과 놀라움이 뒤섞여 탄식을 내뱉는 사람들 사이로 레버는 할 말을 잃은 채 망연하게 하얗게 변한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뻔뻔하게 파티장에 참가해서 모두를 속이고, 사람들을 죽인 뒤에 감시 카메라까지 조작하는 유령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이것은 너무 압도적이다! 그는 차라리 기지 외벽을 뚫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생각했다.

"우린 이제 좆 됐어, 친구들. 좆 된거라고. 이런 유령이 작정한 거라면 우린 여기서 못 빠져나가. 끝났단 말이야."

로비에서 레버와 말다툼을 벌일 뻔한 남자가 역정을 부렸다. 사람들은 절망한 나머지 무어라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팔짱을 끼고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고 있었다. 신경증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이제 아예 대놓고 레버를 겨냥하며 뭔가 해주기를 요구했다.

"당신, 이런 일을 해결하려고 온 것 아냐? 이런 경우는 배워본 적도 없던가?"

물론 레버는 이런 일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고문 역할일 뿐이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해결사적인 발언을 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가 취해야 할 행동이라면 곧 그가 본능적으로 떠올렸던 것, 지금껏 계속해서 무언의 압박을 받아 왔던 그것, 피하고 싶었지만 이제 도리가 없는, 즉…… 화이트가 바라고 있는 것.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어야 하는 것 밖에 없었다.

"로비로 돌아갑시다. 다섯 가지 물건들 중에 어디에 화이트가 깃들어있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비로 돌아왔고 하얀색 물건들을 앞에 둔 상태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레버가 제시한 해결책은 너무 애매모호한 것이라서 다시 신경증에 걸린 남자의 항의를 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뭘 어쩌자는 거야? 이렇게 보고만 있으면 화이트가 나타나서 어떤 게 자기 집인지 알려주나?"

레버는 사사건건 뇌까리는 남자의 주둥아리를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고 차분하게 말했다.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화이트는 우리가 자신을 찾아내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다면 우리가 해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얘깁니다."

"뭐야? 화이트가 바라고 있어? 지금 귀신하고 통했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 응?! 이 미친 자식아!"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씩씩거렸지만 레버는 기죽지 않고 대항했다.

"화이트는 시체 옆에 물건을 하나씩 놓아두는 수고를 감수해가면서까지 무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녀는 우리를 모르모트로 놓아두고 게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게임이라면, 정답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게임? 사람이 죽었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남자 뒤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비탄에 잠긴 신음이 흘러나왔으나, 레버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해서 정답을 밝혀낸다면, 그녀는 자발적으로 게임을 끝낼 것이고 그 틈을 타 격리시키면 됩니다. 격리시키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우리를 이대로 보내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거 미치겠군!"

남자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레버의 눈앞에 집게 손가락을 들이댔다.

"그따위 안일한 가능성으로 우리를 설득시키려는 생각은 마시오. 당신이 아무리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 있다고 해도, 절대로 그 말도 안되는 바보짓을 하도록 순순히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레버는 그의 손가락을 옆으로 쳐내며 대답했다.

"그럼 당신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나 봅시다. 잘난 민간요법 솜씨 한 번 보죠."

그의 신랄한 어조에 남자는 눈을 치뜨며 레버를 노려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지."

남자는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갔다. 레버와 다른 직원들이 불안한 눈으로 그가 사라진 방향을 좇으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액체가 반쯤 들어있는 플라스틱 용기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는 흰 물건들을 모아둔 곳으로 가져가 뚜껑을 따고 마구 뿌리기 시작했다. 식용유 냄새가 아릿하게 피어올랐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레버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남자는 그를 가소롭게 쳐다보며 주머니에서 오일 라이터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쥔 레버는 자신이 떠맡게 된 역할에 경악하여 말도 안된다는 얼굴로 다시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손을 툭툭 털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다 태워버리라고, 그러면 유령이고 뭐고 뼈도 못 추리겠지. 당신이 해, 탁월한 본부 친구. 난 무시무시한 유령의 분노를 사고 싶진 않으니까."

레버는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다가, 여기서 거절할 수 없는 입장임을 깨닫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을 하며 남자의 방식에 수긍하고 있었다. 레버는 라이터를 쥐고 있는 손을 천천히 앞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괜찮을까?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렇게 판을 엎어버려도 괜찮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중얼거리던 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맞아, 다 태워버리면 유령도 자연스레 없어질 거야!" 그가 엄지손가락을 부싯돌에 가져다 댔다. "이런 간단한 방법을 진작 생각해내지 못하다니." 하지만 너무 간단한 해결책이 아닐까? 이것은 명백히 반칙의 성질이었다. 이 행동이 허용될 수 있을까? "화이트는 아무것도 못할 거야, 불태워버리라고." 하지만 맞는 말이다. 한 번 붙으면 고민할 필요 없이 모든 것이 타버릴 것이다. 화이트는 자연스레 소멸된다. "괜찮을 거예요. 망설이지 말고 불을 붙이세요." 결국 고민할 필요가 없다. 궁극적인 목적은 화이트에게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방법이 옳다. 이제 어쩌면 모두에게 창피를 당하겠지만,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고 사람들은 안전할 것이다. "붙이세요, 붙여!" 레버는 심호흡을 하고 머리를 쳐들었다.

그는 헉 소리를 내며 숨을 삼켰다. 사람들 뒤로 하얀 머리의 여자가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레버를 향해 미소 지으면서 동시에 노기 어린 눈빛을 쏘아붙였다.

규칙을 깨면 안되죠. 당신도 알잖아요?

그의 손이 마구잡이로 후들거렸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말이 나오지 않아 떨리는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의 모니습을 보고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그와 그들의 뒤를 번갈아가며 돌아보았다.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 점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공포에 잠긴 레버의 표정에서 모든 것을 읽은 듯이, 그들은 슬금슬금 자리에서 물러나더니 뒤로 꽁무를 뺐다. 안절부절못하던 신경증의 남자는 경련이라도 하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뒤흔들더니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가버렸다.

혼자 남은 레버는 그때까지 화이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아직까지 라이터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기겁하며 그것을 한구석을 향해 던져버린 뒤 자신의 방을 향해 마구 내달렸다. 계단을 오르면서 그는 그제야 경고등이 멈췄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동시에 기지의 폐쇄도 해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다시 로비에 모인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폐쇄 조치가 해제된 탓에 대부분의 직원들은 외부로 떠나버린 상태였고, 정식 기지의 회수팀은 내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와 다섯 가지 하얀 물건들은 다시 창고로 옮겨졌다. 회수팀의 차량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이제 레버에게는 그마저도 많이 의심스러워 보였다. 화이트는 외부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답을 찾아내기를 원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어째서.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레버는 화이트를 찾아내기 위해 다시 로비에 사람들을 모았다. 자리에는 그와 섀넌을 포함해서 다섯 명이 왔을 뿐이었는데 그중에는 신경증 남자도 있었다. 그는 레버 앞에서 보였던 자존심 때문에 도망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목록에서 화이트를 어떻게 구별하느냔 말입니까?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라곤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그는 다시 정중한 말투로 돌아가있었다. 레버는 굳이 그를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겁니다. 던져놓고 답을 맞추기를 기다리는 형태라면 논리 문제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그 부분 말입니다. 당신이 그 이론을 확신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남자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레버를 흘겨보았다. 그러나 레버는 단호한 태도로 일축했다.

"확신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면 순순히 우리를 놓아줄 거예요."

"대체 어딜 봐서……"

"더 이상 이 얘기는 하지 맙시다. 하지만 말해두건데 화이트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요."

그들은 심각한 얼굴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자, 결국 우리가 알아내야 하는 건 이 중에 어떤 것이 화이트냐는 겁니다."

"하지만 어떤 것이라도 그릇이 될 수 있어요. 글쎄, 베일리 씨, 이게 만약 논리 문제라면, 답을 끌어낼 수 있는 힌트가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섀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레버가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요, 그거에요!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들만을 가지고도 답을 알아맞힐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것들 중에 어떤 게 유효한 힌트죠?"

"제 추측으로는…… 리치먼드 사건 때와 지금, 각각 다섯 명씩 사망자가 발생했죠."

"그렇다면 두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봐야겠군요."

"두 사건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피해자들의 사인이죠."

"사인이요?"

레버가 사람들의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이번 사건에서 사람들의 죽음은 판이한 양상을 보였습니다. 익사, 동사, 몸이 반토막이 나면서 쇼크사, 손이 토막 나면서 과다출혈에 의한 사망……. 그런데 리치먼드 사건 때는 어땠죠? 피해자들은 모두 목이 졸려 질식사했습니다." 그는 사람들 너머로 다시 화이트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 사실에 오히려 고무된 레버는 보란 듯이 몸짓을 크게 하고 설명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여기서 딱 한 명, 질식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장 처음에 창고 앞에서 발견된 남자 말입니다. 그 옆에서 발견된 물건이 바로 손수건입니다." 레버가 손가락으로 정사각형을 그렸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찾는 정답은 이 손수건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는 양손을 펼치고 의기양양하게 사람들을, 화이트를 쳐다보았다. 화이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잘했어요.

해냈다! 레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사건을 해결했다는 생각에 부풀어 그녀를 향해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화이트는 계속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레버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녀가 그에게 굴복한 것이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레버의 주장에 수긍했다. 개운치 않았던 방식에도 불구하고, 신경증 남자까지 그에게 동의했다. 이제 레버가 한껏 열을 올리며 손수건의 격리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는데, 로비 뒤편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더니 다급하게 그들을 불렀다. 기분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레버는 약간 풀이 꺾이며 그를 받았다.

"무슨 일입니까?"

"모비 딕이 없어졌습니다!"

레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뭐라고요?"

"다른 건 다 있는데 모비 딕만 없어졌습니다. 감시 카메라도 화면이 새하얗게 돼버려서 누가 가져갔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는 산만하게 팔을 놀리며 사람들의 시선을 어지럽게 했다. 당혹감에 휩싸인 레버는 급히 화이트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의 미소는 어느새 악랄한 비웃음으로 바뀌어서 그를 조롱하며 깔보고 있었다. 레버는 그 잔인하고 소름 끼치는 표정의 변화에 할 말을 잃어, 황망한 시선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누, 누가, 누가 기지에서 나갔습니까?"

그는 경황 중에 말을 더듬으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대부분은 아직 놀라워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신경증의 남자가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레버를 비웃고 있었다. 레버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직원들이 다 나가고 없어서 정문을 제외한 다른 문은 모두 잠겨있는 상태입니다. 만일 그 유령이 뭔가 손을 쓴 게 아니라면 출구는 정문밖에 없어요."

"우, 우리는 밖으로 나가는 사람을 아무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기지 안에 있다는 얘기겠죠."

"화이트가 다른 출구를 열어줬을 가능성도 따져봐야지."

신경증의 남자가 코웃음을 치며 레버를 업신여기는 시선을 보냈다. 레버는 애써 고개를 들었다.

"그래, 맞아요. 누군가가 출구가 열린 적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다른 사람들도 지금 기지에 남아있는 인원들을 파악하세요. 한 명이 여기 남아서 정문으로 나가려는 사람을 막으세요. 지금이 마지막 순간입니다. 화이트는 도망치려고 하고 있어요. 여기서 놓치면 안됩니다. 어서, 어서 움직이세요! 시간이 많지 않을 겁니다!"

그는 사람들을 재촉하여 창피스러운 꼴을 면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직원들은 허둥지둥하며 각자가 맡은 역할을 위해 뛰어다녔다. 하지만 신경증에 걸린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레버 옆에서 빈정거렸다.

"내가 정문을 지키죠, 베일리 씨. 당신은 뭘 할 속셈입니까?"

"저는…… 저는 화이트가 누구의 손에 들어가 있는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겠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벌써 별로 신빙성 있는 방법처럼 들리진 않지만 말입니다."

레버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 상황에서는 내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내 역할에만……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창피함을 드러내 보이지 않기 위해 그 생각에만 몰두했다. 화이트가 누구의 손에 들어가 있는지 구별할 방법, 누가 화이트에게 홀려있는지 구별할 방법…… 그리고 그는 돌연히 캔버스의 말을 떠올렸다.

"징조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종종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지르곤 하죠. 미리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곁에 두다가 봉변을 당해요."

그녀는 방법을 알고 있다. 캔버스를 만나야한다. 레버는 뒤늦게 놀라워하며 정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도망치는 것으로 여긴 신경증 남자가 뒤에서 소리쳤다.

"이봐, 베일리 씨! 다른 물건들은 어떻게 하지? 손수건을 포함한 네 개 말이야!"

레버는 벌겋게 된 얼굴을 숙이고 되는 대로 말했다.

"가, 갖다 버리십시오. 그냥 태워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차에서 뛰어내린 레버는 부동산 사무소의 녹슨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한밤중이긴 했지만 캔버스는 이 안에서 생활한다고 스스로 말했는데…… 레버는 사무소 안에서 침구류를 본 적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책상 뒤편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지만 회상한 바로는 공간은 충분한 것 같았다. 그는 충분히 그녀가 이 안에서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안에 없지?

한참 동안 전전긍긍하던 레버는 실례를 무릅쓰고 언덕 위로 올라가 리치먼드의 저택을 방문하기로 했다. 잠그지도 않는 저택의 정문까지 달음박질한 그는 초인종을 누른 뒤 기다릴 새 없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힐러리가 살고 있는 앞뜰의 오두막 앞에 버티고 서서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는데, 예상치 못하게도 작은 나무문이 아니라 셔크 하우스의 커다란 철제 문이 열렸다. 고개를 돌린 레버는 뜻밖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안나 허드슨의 것으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드레스 차림을 한 힐러리 크래들이 그를 마주하고 서 있었다. 우아한 것처럼 보이도록 꾸며낸 것이 확연하게 보이는 몸짓을 하며 점잔을 빼는 목소리로 레버를 부른 그녀가 미소 지었다. 레버는 그녀의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서 받은 어색함이 어디에선가 이미 느낀 적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당신은 그 때 그 변호사로군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오셨죠?"

힐러리는 교양 있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쓰면서도 이전의 경박한 말씨를 제대로 감추지 못했다. 레버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이 어색함이 리치먼드의 미치광이 연기에서 느꼈던 것임을 알아챘다.

"당신 설마……."

"왜 그러시죠?"

그는 하려던 말을 끊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힐러리 역시 미치광이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는 팔에 소름이 돋아오는 것을 느끼며 가까스로 캔버스에 대해 질문했다.

"이 언덕 아래에 있는 부동산 사무소 말입니다만, 안에 사는 여자가 어디서 밤을 지내는지 아십니까?"

"어디라고요?"

"부동산 사무소요, 저기 밑에 컨테이너처럼 생긴 곳 말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레버는 본능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는 몸을 덜덜 떨면서 그녀의 뒷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처럼 두어 발자국을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똑똑히 들었고, 울렁이는 속으로 언덕을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호흡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 안에는 몇 년 전부터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어요. 거긴 완전히 버려진 곳이에요."

레버는 부동산 사무소 앞까지 뛰어와 문을 열어젖혔다. 캔버스를 만날 때 보았던 깔끔함은 온데간데없고 녹슨 쓰레기들로 가득 찬 공간이 나타났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개를 마구 흔들며 방 이곳저곳으로 미친 듯이 시선을 옮기던 레버는 도망하는 것처럼 그곳을 빠져나와 자신의 차로 돌아왔다.

그는 후들대는 손으로 힘겹게 시동을 걸고 기지로 내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캔버스가 화이트였다고? 이곳에 도착한 그날부터 그녀에게 놀아난 것이란 말인가? 그는 핸들을 힘껏 때리면서 공포를 삭였다. 화이트, 그녀는 도대체……. 그리고 그는 흰 셔츠를 입고 자신을 빤히 알고 있다는 것처럼 미소 짓던 캔버스를 다시 떠올렸다.

캔버스, 레이스…….

죄다 하얀 것들이지.

그는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화이트는 너무도 무자비한 벽이었다. 자신을 막고 다른 사람들을 막고 심지어 한 기지 전체를 덮어버릴 수 있는 그런 벽을 어떻게 뛰어넘는단 말인가.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심호흡. 레버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직 늦은 것은 아니다, 길은 언제나 있다. 화이트가 어떤 식으로 사람을 홀려먹는지 알게 되었으니, 그녀의 희생양이 된 사람을 찾으면 된다. 그가 모비 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리치먼드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는 화이트의 분신에게 푹 빠져있을 것이니 지금 누군가를 사귀고 있는 남자를 찾으면…….

데이트가 있거든.

레버는 다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윙크를 보내던 클레멘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눈이 보랏빛이 되도록 감시 카메라를 들여다보며 화이트를 찾아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비틀거리면서 화이트를 찾아다니던 모습은 리치먼드가 그의 파티장에서 벌였던 그것과 흡사했다. 만약 클레멘스가 화이트의 희생양이라면, 지금까지의 그의 행보 역시 리치먼드의 그것과 같게 된다.

일을 크게 벌여야했지. 이제까지 내가 다른 영역을 정복할 때 으레 그러듯 말이야.

레버는 기지에서 살해당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리치먼드에게 살해당한 사람들과 그들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교차되었다. 사람들을 죽인 범인은 역시 클레멘스가 되는 것인가? 그는 부들거리는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화이트를 찾아야 해, 레버. 그녀를 찾아내야만 해.

그녀는 아무에게도 자신에게 닿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

"안돼, 안돼!"

그는 재차 핸들을 때려대면서 엑셀레이터를 바닥까지 밟았다.


기지에 도착한 레버는 실성한 듯이 정문으로 몸을 던졌다. 로비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섀넌이 레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베일리 씨, 찾아봤는데 다른 문이 열린 기록은 없어요. 그리고 모비 딕이 없어진 뒤로 기지를 나간 사람도……"

레버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대며 물었다.

"섀넌, 클레멘스가 사귄다고 하던 여자 친구 이름이 뭔지 혹시 알아요?"

"네? 어, 그게, 그러니까…… 스노우. 스노우였어요."

그는 전율하며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그를 따랐다. 레버는 곧장 클레멘스의 방으로 향하여 문을 열어젖혔다. 클레멘스는 책상 앞에 앉아서 책 속에 들어갈 듯이 머리를 숙이며 모비 딕을 읽고 있었다.

"클레멘스?!"

레버는 그에게 돌진했다. 클레멘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책에 들러붙어있었다.

"비록 각자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우리는 꼭 해야 해."

"클레멘스!"

그는 클레멘스의 책을 잡아 빼앗았다. 클레멘스는 잠자코 앉아있었다. 책의 겉표지를 본 섀넌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던 레버는 그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클레멘스,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지금 네가 어떤 상태인지는 알기나……"

레버는 클레멘스가 의자에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턱에 불이 붙은 듯한 느낌과 함께 뒤로 날아갔다. 그의 손에서 모비 딕이 떨어져 나갔다. 클레멘스는 그것을 주워들고 거칠게 사람들을 헤치며 도망쳤다. 레버는 얼얼한 턱을 부여잡고 허둥지둥 일어나 그를 쫓기 시작했다. 급작스러운 사태에 쳐다보고만 있던 사람들도 그를 따라 클레멘스를 쫓았다. 클레멘스는 계단을 계속 올라가 옥상으로 통하는 문 앞에까지 도달했다. 그는 층계참의 빈 공간에 놓여있던 책상 따위의 비품들을 계단 아래로 마구 쏟아부었다. 레버와 사람들이 주춤하며 막혀버린 길을 치우는 사이 클레멘스는 옥상으로 나가 밖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클레멘스, 이리 나와!"

레버가 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클레멘스가 모비 딕을 읽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고 있었다. 다급해진 레버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누가 열쇠를 가지고 와요!"

누군가가 대열을 빠져나갔고 레버는 클레멘스를 설득하기 위해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클레멘스는 아랑곳 않고 흥분한 언성을 더 키울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레버는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마음을 졸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은 한 단 아래쪽 층계참의 벽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창문을 통해 옥상을 올려다보려고 했으나, 클레멘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레버는 포기하고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내려와 열쇠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클레멘스의 혼잣말은 더욱 열을 띠고 있었고 그것을 들으며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만약 열쇠가 먹히지 않는다면? 화이트가 그들을 또 방해한다면? 차라리 사다리를 가져와서 올라갈까?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클레멘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섀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베일리 씨, 클레멘스는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책만 손에서 떼어놓는다면……."

레버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섀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문을 올려다보며 클레멘스의 모습을 찾았다. 레버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느끼고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기지에서 파견된 회수팀이 도착했다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열쇠를 가지러 갔던 연구원이 숨찬 소리를 내며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레버는 앞으로 달려나가 그에게 열쇠를 받고 계단을 다시 오르기 위해 돌아섰다. 그 때 위에서 갑자기 클레멘스의 외침이 크게 들려왔다.

"마침내 에이허브 선장이 모비 딕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은 창문 밖으로 클레멘스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보고서는 거의 다 작성되었다. 레버는 우울한 심경으로 내용을 재차 확인하고 있었다. 회수팀이 모비 딕을 가져갔고 그것은 검은색 상자에 밀봉되었다. 화이트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아마 '안전'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이번 회수를 성공적으로 완료한 보상으로 받은 휴가를 곧바로 사용했다. 그리고 여전히 비공식 기지에 남았다. 충격에 빠진 섀넌은 아무 말없이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고 레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방 안에서 보고서를 써냈으며 이제 첨부할 자료를 찾아 CCTV 녹화 자료를 뒤적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막바지에 이르른 보고서는 클레멘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그의 영상을 필요로 했다. 레버는 그의 행동을 쫓으며 그가 어떻게 해서 모비 딕을 가져갔는가를 써냈다.

섀넌의 도움을 받아 방으로 돌아간 클레멘스는 한동안 혼자 그곳에 있다가 비척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아무 목적이 없는 것처럼 복도를 배회하다가 어느 순간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이없게도 그곳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기지 밖으로 도망친 상태였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겁에 질려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레멘스는 아무런 방해도 없이 모비 딕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와 레버가 발견할 때까지 그것을 읽었다.

레버는 클레멘스가 창고로 방향을 잡은 시점을 계속해서 돌려보았다. 그도 자신처럼 하얀 머리 여자를 보았을까? 그의 여자 친구 스노우는 어떤 옷을 입고 나타났었을까? 그는 스노우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도 그녀에게 비웃음을 당했을까.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던 레버는 그때 클레멘스의 옆을 지나치던 턱시도 차림의 남자의 존재를 눈치챘다. 파티 직후에 벌어진 일이므로 턱시도 차림인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 남자는 카메라를 뒤로하고 클레멘스의 옆을 지나쳐서 뒷문으로 향했다. 뒷문의 기록을 확인하러 간 남자가 이 자였을까? 그러나 레버는 이렇게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파티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의 뒷모습은 익숙했다.

곰곰이 생각을 한끝에 떠올린 것은 레버를 망연하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그건 연예계 기자 데이비드 샌들러의 모습이었다. 화이트를 찾아내고 말겠다던 그의 모습을 되새기며 레버는 어째서 그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잠겨있었을 뒷문으로 사라질 수 있었던 방법을 찾아내는데도 매진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는 샌들러가 화이트의 도움을 받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레버는 샌들러를 따라 카메라를 전환해가면서 그는 그가 기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절대로 카메라를 향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출구에 도달한 샌들러 앞에 푸른 등이 들어왔고, 뒷문은 아무런 문제 없이 열렸다. 그 장면에서 화면을 멈춘 레버는 기분 나쁜 눈을 하고 화이트가 그를 도운 이유를 막연히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윽고 따라오는 무서운 추측에 의자를 박차고 나가 지나가던 연구원을 아무나 붙들었다. 그는 모비 딕을 제외한 다른 네 가지 물건들을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는데, 직원들은 하나같이 소각장으로 가져가 태웠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레버는 소각장으로 가 소각 기록을 뒤져댔다. 그러나 레버의 희망이 무색하게도 그것들 중 기록에 쓰인 것은 셋 뿐이었다.

손수건이 소각되지 않았다.

레버는 다시 방으로 달려가 화면을 돌렸다. 샌들러가 마지막 순간 밖으로 나서기 전에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 듯 그가 한동안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서 있다가 다시 몸을 돌릴 때, 레버는 발견했다. 그의 턱시도에 꽂혀있는 행커치프는 하얀색이었다. 모든 일은 그렇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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