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5)

 
사교 파티를 조사하러 갔던 클레멘스는 이미 기지에 와 있었다. 레버는 그에게 리치먼드와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이번 사건을 정신분열증 환자의 소행으로 종결시키는 것에 동의하느냐고 약간의 허탈감을 섞으며 물었다. 클레멘스는 동의했다. 그는 피곤하게 처진 눈을 들고 레버에게 힘없이 끄덕여보였는데 아무래도 돌아온 뒤에 섀넌에게 상당히 시달린듯 했다. 레버가 그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그는 할 일이 많다는 흔한 핑계로 언급을 회피했다. 그래서 레버도 더 묻지 않았다.

레버는 그가 그의 실수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을까 약간 기대했지만 클레멘스는 피곤하다며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레버는 이 바보 같은 사건에 대한 보고를 올려야 한다는 걱정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걱정하는 이유는, 물론 기초 절차를 지키지 않아 한바탕 벌여놓은 헛짓을 그대로 보고서에 옮겨야 한다는 점도 있었지만, 아직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화이트는 단순히 리치먼드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 그녀를 볼 수 있었던 것인가?

이 문제는 섀넌이 가져온 검시 결과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LSD."

극소량으로도 효과가 나타나는 강력한 환각제. LSD가 야기하는 현실감의 상실은 약물이 체내에서 완전히 배출된 뒤에도 심하면 몇 달 동안, 복용 중에 보았던 환각이 재현될 정도로 악명 높다. 하지만 그 특유의 초월적인 효과가 대중들을 매료시켜 속속들이 보고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사람들이 남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리치먼드처럼 부유한 자라면 이런 것쯤 구하기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담배처럼 피우도록 만들어진 것을 이용했다면 리치먼드의 파티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리치먼드가 화이트의 존재에 대해 떠들어대자 환각 효과에 빠져든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녀를 보았다고 믿게 된 것이다. 검시 결과는 리치먼드가 이전에도(아마도 화이트를 만났다는 그 사교 파티에서) LSD를 복용한 적이 있음을 말해주었다. 그것의 플래시백 현상이 실제로는 약물의 효과가 끝났음에도 그가 주기적으로 화이트의 환각을 보게 만든 것이다.

이제 레버는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사건은 종결되었다. 결과적으로 굉장히 겸연쩍은 처지에 놓인 섀넌은, 또 한 번 사과하는 대신 레버를 기지의 할로윈 파티에 초대했다.

"할로윈이라니. 벌써 그렇게 됐군요."

"네, 이제 곧이잖아요. 사실 파티라고 해봤자 어차피 뷔페 같은 느낌으로 끝날 테지만."

"뭐, 그래도 괜찮겠는데요. 제 기지에서는 할로윈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상어다!'하면서 두들겨패는 친구들이 있거든요."

"그건 그것대로 재밌게 들리는데요."

"당신이 때리는 쪽이라면 그렇겠죠."

두 사람은 웃었고 음식 잔치로 바보 같은 사건을 마무리하는데 합의를 보았다. 그래서, 레버는 비공식 기지에 하루 더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베일리 씨, 솔직히 거절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파티는 친한 친구들과 즐기는 게 더 재밌을 테니까요. 어쨌든 할로윈이니까 저기 본부에서도 파티는 할 거 아니에요? 여기 남으시는 이유가 뭐죠?"

섀넌이 이렇게 묻자 그는 목뒤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까 말하신 대로, 이번 사건의 마무리 같은 겸도 있고…… 농땡이죠. 할로윈이라도 시킬 건 다 시키니까."

"그런가요."

섀넌이 다시 웃었지만 레버는 어줍은 미소에 그쳤다. 그건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본심도 아니었다. 그가 이곳에 남는 건, 기지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니까.

"그럼, 전 올라가 보겠습니다."

레버는 로비에서 나와 자신의 방으로 향하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오르면서, 자신이 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인가 생각했다. 당연한 생각이다. 목숨을 거는 고생이 일상인 곳이다. 쉬는 중에도 언제나 비상사태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에 늘 긴장된 상태이고, 심심하면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동료는 계속 교체되고 덕분에 이상한 녀석들과도 함께 일해야 했다. 근무지 감찰은 불시에 찾아오고 상사는 스트레스를 자기 부하에게 푸는 정신병에 걸렸다. 그런 곳에서 무려 육 년 간 일해왔는데 이 정도 농땡이를 피우는 것 정도야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레버는 단순한 농땡이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가 전혀 보람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들려오는 수많은 격리 실패와 그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써댄 수많은 시말서, 감찰관들의 지적과 상사의 무리한 요구 그리고 인류의 평화니 세계의 안보니 하는 두루뭉술한 것을 위해 모두가 확보와 격리와 보호를 외치는 것 따위들을 치러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SCP를 실제로 본 적이 거의 없다. 그건 그의 보안 등급이 2등급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그동안 해왔던 일이 대부분 무용지물으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고 얘기해도 좋을 것이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애초부터 SCP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재단이 주장하는 이상에 반하는 행동을 한 레버는, 정신병자를 쫓다가 상사에게 기본 수칙을 지키지 않았다고 또 질책을 듣게 생겼다. 그는 실망스러웠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거창한 이유도 아니다. 레버가 원하는 건 그저 그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SCP를 확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격리하는데 어떠한 방안도 제시하지 못했고,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기회도 갖지 못했다면, 재단에서 일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그는 섀넌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모두가 마음 속에 투쟁의 대상을 품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행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싸워 이겨낼만한 존재가 없었다. 그것을 이미 극복해냈기 때문이 아니냐고 섀넌이 그랬던가? 그렇지만 다른 적수가 서둘러 나타나지 않는다면, 패배한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나저러나 의욕은 생기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레버는 이곳에서 자신과 같은 문제로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아직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현실을 직시한 사람들이 자신에 비해 이미 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레버는 그들을 약간 동경하게 되었다. 데이트를 하고 돌아온 클레멘스를 보라, 그는 비록 뚜렷한 목표가 없을지라도 자신을 위해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레버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레버 자신도 이미 목표를 잃었기는 마찬가지인데 여전히 길이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헤멜 이유가 있을까?

그래서 이제 그만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레버는 시덥잖은 일로 불려다니면서 허송세월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날, 레버는 어째서 이 장소에 찾아왔는지 화끈거리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적절한 근거를 찾아냈다. 재단을 나오기로 결심한 그는 이제야 자신을 위해 쓸모 있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치 클레멘스처럼…… 인간 관계를 도모하고 개방적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어쩌면 이것이 안정된 삶의 첫 토대가 될 가능성도 충분할지 모를 그러한 방식을 취할 뿐이다. 그는 캔버스의 부동산 사무소 앞에 섰다.

그는 그녀에게 이번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으로 왔다. 그녀가 듣고 싶어 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얘기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캔버스도 흥미를 보일 것이다. 하필 레버가 찾아왔느냐고 한다면 그 외에는 알려줄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왜 그녀에게 알려줘야겠다고 작정했냐고 한다면…… 인간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속으로 중얼거리던 레버는 낡아빠진 컨테이너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 완전히 할 말을 잊어버렸다.

"들어오세요."

그는 안으로 들어갔고, 캔버스가 자신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는 모습에 놀랐다. 그녀는 최대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는데, 쭈뼛거리는 레버의 모습을 최대한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정말로 다시 만났군요."

그리고 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레버는 초조한 마음에 자신의 목적을 바로 말해버렸다.

"리치먼드 사건의 결과를 알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 찾아왔습니다."

캔버스가 눈을 크게 떴다. 레버는 이제 그녀가 "제가 그걸 왜요?"라고 대답할 광경을 상상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리치먼드는 어떻게 됐죠?"

그녀는 사려깊은 여자였다.

"리치먼드 허드슨은 마약을 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이후에도 지속적인 환각을 보았고 정신분열증에 걸렸습니다. 미쳐버린 그는 환상에게 맞서겠다며 사람들을 목졸라 죽였습니다." 레버는 국어책을 읽듯이 경직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 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정신병원으로 갈 텐데 다섯 명을 죽였으니 다시는 바깥 세상을 밟지 못할 겁니다."

여전히 레버를 놀리는 듯한 표정에 변화 없이, 캔버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결국 살인 사건이었던 셈이죠."

여기서 레버는, 그가 캔버스에게 자신을 리치먼드의 변호사라고 소개했었음을 다시 인식했으며 사무소를 떠날 때 그녀가 했던 말도 떠올리게 되었다. "사건을 꼭 해결하셨으면 좋겠네요." 분명 당시 언론은 이번 사건을 표면적으로는 자살으로, 묘사하기로는 초자연적인 기현상이나 정체불명의 이교 숭배 파티라고 보도했었다. 변호사가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하여튼 아니었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죠, 캔버스. 아닌가요?"

"뭘 말인가요?"

"이번 사건이 단순한 자살이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그는 이미 그것이 그녀가 단순히 그런 기사에 속아넘어가지 않는 똑똑한 여자라는 걸 뜻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또한 대화를 끌고 갈 좋은 소재가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맞아요. 물론 확신하진 못했지만…… 그런 부잣집에 들락거리는 사람 다섯 명이 한꺼번에 동시에 자살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상한 일이죠."

"당신은 게다가 제가 리치먼드의 변호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지요."

캔버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사건이 리치먼드의 살인이라는 걸 예상했으니까요. 변호사보다는 탐정이 기웃거리는 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레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리치먼드의 짓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죠?"

캔버스는 다시 웃었지만, 그녀의 미소 역시 미묘하게 비틀어져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리치먼드 씨는 전부터 이상했어요. 목적 없이 비틀거리면서 헤메는 모습을 보았죠. 앞에 있던 길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에요. 이런 징조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종종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지르곤 하죠. 미리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자들을 곁에 두다가 봉변을 당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레버는 어째선지 약간 거북해졌다.

"그의 모습을 직접 보셨다고요?"

"오, 그럼요. 그 사람 할 일 없이 저택 바깥을 마구잡이로 돌아다녔거든요. 바로 언덕 밑에서 지내는 저야 자주 볼 수 있죠. 한 번은 자기 보고 패배자라면서 징징거리는 꼴까지 봤다니까요." 그녀는 레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벽에 막혀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건 그냥 노력을 안 할 뿐이에요. 그랬다면 적어도 거기서 그러고 있지는 않았겠죠."

레버는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침을 삼켰다. 캔버스는 천장을 쳐다보며 리치먼드가 그녀에게 했다는 얘기를 다시 상기했다.

"그는 그 벽이라는 데 미쳤던 것 같아요. 최후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넘고야 말겠다고 이를 바득바득 갈더라고요. 하지만 집착 또한 좋지 않은 법이죠. 덕분에 그는 해서는 안 될 짓까지 해버린 셈이잖아요. 벽을 넘겠다는 각오는 좋지만 적어도 각오라는 건 적어도 실현할 수 있는 걸 골라야 하지 않겠어요."

"음, 네, 맞습니다."

그녀는 다시 레버에게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리치먼드 씨를 욕할 수만은 없겠네요. 세상에는 벽이 막을 목표도 없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레버는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캔버스는 아랑곳않고 그녀의 얘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어쨌든 목표를 달성하는 건 좋은 거죠. 방법이 그릇되지만 않는다면요. 벽을 돌아가는 방법도 있고요. 돌아갈 방법이 없다면 발판을 마련할 수도 있겠죠. 언제나 길은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베일리 씨?"

"무, 물론입니다."

"베일리 씨? 당신 지금 괜찮아요?"

레버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캔버스에게 비웃음 당하고 있는 리치먼드의 얘기가 꼭 자신의 것처럼 여겨져서 지금도 그녀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그는 갑작스럽게 일어나, 캔버스를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허둥지둥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그의 데이트는 그렇게 끝났다.


저녁 6시부터 시작된 할로윈 파티는 예상하던 것과 많이 달랐다. 그건 차라리 포트럭 파티였는데, 직원들이 각자 음식을 하나씩 만들어 로비에 마련된 테이블에 전시하듯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두 정장 차림이었다.

"어째서 전부 검은색 턱시도 일색입니까?"

새하얀 프린세스 드레스 위에 초록색 숄을 걸쳐 굉장히 과장스러운 콘셉트로 치장한 섀넌이 흥겹게 대답했다.

"브루스 웨인도 배트맨 복장을 벗으면 정장을 입고 다니잖아요! 재단이라고 배트맨하고 다를 것 없어요. 그림자 속의 수호자, 다크 나이트─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재단이니까.' 안 그래요?"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레버는 자신도 방에 올라가서 뭔가 하나 만들어와야 하지 않겠나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섀넌은 어색하게 차려입은 레버의 등을 떠밀며 로비로 밀어넣었다.

"뭐 하고 있어요, 떠들러 가자고요."

파티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괜찮았다. 직원들이 일할 시간에 요리를 공부했는지 음식들도 맛있었고 모두 유쾌했다. 로비 가운데에 유물이라고 할 만한 축음기가 거대한 메가폰과 함께 자리 잡고 있었는데, LP 판을 가져온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할로윈 파티에서 재즈 음악을 트는 기괴함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건 정말로 소름 끼쳤는데 요리만 먹고 싶었던 레버에게 자꾸만 춤을 출 구실을 주었기 때문이다.

몇 분 간의 곤란을 겪은 뒤 간신히 무도회장에서 빠져나온 레버는 쉬고 있는 섀넌의 옆자리에 걸터앉으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런 파티는 영화에서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러기에는 아깝죠."

레버는 테이블에서 가져온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파티장을 지켜봤다. 음식 테이블 앞, 자판기 옆, 축음기 주변, 곳곳에 사람들이 여러 무리로 퍼져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한 여자를 위시하여 모인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것은 인정할 만 했으나 남자들이 너무 그쪽에 편파적인 것처럼 보여서 약간 우스웠다. 클레멘스였다면 분명히 저 중에 있을 텐데. 하지만 그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

"클레멘스는 어디 갔습니까?"

"아, 여자 친구 만나러 갔어요. 여자는 바뀔 지 몰라도 사귈 때는 충실하라는 게 좌우명이거든요."

그렇군, 레버는 얼마 전에 겪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각나 쓴웃음을 지었다.

"클레멘스가 저런 여자를 두고 다른 사람과 사귀고 있다는 게 믿겨지질 않는군요."

"그럴 수 밖에요. 저 아이 이름이 아마 레이스인데, 어젠가 들어온 신입이거든요. 클레멘스가 만나긴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아직 만나지 못한 게 틀림없겠군요."

신입이 으레 그렇듯 정장 파티에서도 하얀 가운을 고집하고 있는 레이스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밝게 재잘대고 있었다. 저렇게 남자를 독차지하면 여자들에게 질투를 살 텐데도, 용케 여직원들에게 다가가 말을 섞는 것을 보면 붙임성도 좋아보였다. 그와중에 저편에서 한 사람이 또 달려와 그들에게 합류하는 것을 보면서 레버는 그녀의 신기한 재주를 부럽게 여겼다. 그 남자가 전해준 소식이 모두를 술렁이게 만든 모양이다. 로비 한 구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보지 않을래요, 베일리 씨? 레이스 양이 무슨 재주로 사람들을 놀랍게 하는지 궁금한데요."

"좋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가가면서 그들의 화제가 레이스에 관한 것이 아닌 것을 알았고, 또한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레버가 이리저리 말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물었으며 그는 자연스레 그 대화를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레버와 섀넌 이전에 마지막으로 무리에 합류했던 남자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기지에서 보관 중이던 물건들이 없어졌습니다. 한 명이 지금 확인 중인데, 감시 카메라 화면으로는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되묻는 소리에 장내는 시끌시끌해졌다. 섀넌이 그 남자에게 물었다.

"그게 뭔데요?" 사방이 다시 일순간 조용해졌다. 남자는 애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이제 필요 없는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없어졌다는 점 자체가……"

"없어진 게 뭡니까?" 레버가 기다리지 못하고 재촉하자 남자는 구태여 자신이 달려온 방향을 뒤돌아보며 시선을 피했다.

"리치먼드 사건의 SCP 후보들이었습니다. 없어진 물건이 총 다섯 개인데, 책 한 권하고, 조각상 하나 하고, 카드 묶음에……, 웨딩 드레스, 또 그리고 어디보자……."

"하얀색 손수건?"

"아 네! 맞아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질답으로 모두 혼란스러운 와중에 레버가 의아하게 서 있는데, 남자가 바라보는 방향에서 높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모두가 그곳을 향해 눈을 돌리자 이제까지 질문에 대답하던 남자가 비명 소리가 들린 기지 창고 방향으로 길을 안내하며 앞장섰다. 한바탕 소란이 일고 있는 창고 문 앞에는 이미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좁은 복도에서 난장판이 되어 요란하게 문 앞을 에워싸고 야단인 사람들을 헤치며, 진원지까지 파고든 레버는 반쯤 열려있는 창고 문에 기댄 채 쓰러져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의 목에는 넥타이가 묶여있어서, 공포에 질린 눈을 하고 혀를 축 늘어뜨린 채 죽어있었다.

곧이어 경보가 울리면서 기지가 폐쇄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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