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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물음을 던졌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늘 깔끔하게 새하얗던 소녀의 방 벽에는 피가 산발적으로 툭툭 튀어 있었고, 바닥에는 붉은 기가 낭자했다. 그녀는 바닥에 널브러진 조금 전까지 제 가족이었을 법한 무엇인가를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앞에 버티고 선 것은 그저, 제 방을 장식하던 인형 중 하나였다. 아니, 분명히 전까진 인형이었을 터인데. 가 더 정확하겠지. 지금 저것이 대체 무엇인지, 소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생기 없이 또렷이 바라보는 동공을 마주하고 있자니 속에서 어두운 공포가 스멀스멀 밀려왔다. 참지 못한 그녀는 새된 비명을 질렀고 이에 동요한 인형이 한 손을 들었다. 살얼음 같았던 유리창이 산산이 깨어졌다. 이내 방이 한 차례 크게 흔들렸으며 충격을 버텨내지 못한 가구들은 엉망으로 망가졌다. 소녀의 발에 닿는 액체는 참을 수 없이 뜨거웠고, 끔찍하게도, 다른 인형들마저 마치 부름을 받기라도 한 듯 일제히 일어나기 시작하자 소녀는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 두 눈을 감았다.

누가 제발, 이걸 꿈이라고 해 줘. 깨어나면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나한테 말해 줘. 제발.


그는 어느 정도 충분한 실력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재단의 격리반이었다. 그런 능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탈주한 개체의 포획은 꽤 성공적으로 끝났다. 임무 완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한 가정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만. 소녀라, 그는 여자아이한테 못내 마음이 걸렸다. 일이 터진 집에 거주하고 있던 민간인들은 현장에서 전부 살해되었다. 누구 하나 빼놓지도 않고, 모두. 그는 그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남자는 그 참사에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가족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죽은 소녀는 아마도, 제 딸과 엇비슷한 나이였을 것이다. 찢겨나간 시체와 남자의 딸이 겹치는 상상에 그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자신과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그랬다. 지금까지는, 그래. 그들은 나름대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앞으로도 그럴지 확신을 하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소중한 것들을 지키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가 맹세하는 것이었다. 일은 남자에게 슬픈 안타까움으로 가까이 다가왔고, 또한 항상 경각심을 심어 주는 도구였기도 했다.

부디 너무 늦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유품을 끌어안고 우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그에게는 그런 일은 생각하기도 싫었으니까. …너무 이기적인 말이지만은. 불행한 일을 겪는 것이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연구원은 입고 있던 흰 가운을 나름 화려하게 펄럭이며 요원이 가져온 보고서를 느긋한 손길로 받아 보았다. 보고서는 탈주한 SCP 개체의 것이었다. 남자는 이번에 담당으로 발령 난 차였다. 종이를 샅샅이 흩어보던 그는 아래에 부록으로 딸린 사건 기록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내용이 흥미로운 것인지, 그러니까 여기서 무언가 연구할 것을 찾아내기라도 했는지 그는 곧장 요원에게 솟아나는 궁금증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그것참 안된 이야기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떻게 죽었다고? 뭔가 시체에 특이 사항은 없었어? 연구원은 쉴 새 없이 조잘댔고 너무 성실해 오히려 불쌍할 정도인 요원은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전부 차분하게 대답해 주다가, 시간이 흘러가자 결국 그도 한계에 도달했는지 그냥 직접 보세요! 란 한 마디만 남기고 복도를 뛰어 도망쳤다. 그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까 그 요원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견해를 낮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상관없어, 어차피 내가 마저 알아내면 되니까. 어떤 변칙성이 또 있을지, 누가 알아? 그건 유클리드잖아?

그랬다, 그에게 그 사고는 오히려 행운이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새로운 가능성' 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상당히 흥미롭다. 남자는 괜히 들떠 콧노래를 조금 불렀고, 보고서는 얌전히 그의 가운 주머니 속에 접혀 들어갔다.

…자, 감사 인사를 해 둘까요. 꼬마 아가씨. 네가 내 지적 탐구심을 자극할 여지를 주어서 말이지. 즐거운 일을 만들어 줘서 고마워.


소녀의 친구는 소녀가 얼마 전부터 유치원에 나오지 않는 것에 의아해했다. 그녀는 소녀와 꽤 친한 관계였으며, 자주 같이 다녔다. 소녀를 최근 통 보지 못하는 이유를 담당 선생에게 물어봐도 썩 괜찮은 답을 얻어내지 못한 그녀는 실망감에 표정부터 시무룩해졌다. 그녀에게는 이제 놀아줄 친구가 없었고, 너무나도 심심했으며,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을 놀이터 의자에 앉아 멍하니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돌연 벌떡 일어나 놀이용으로 쌓아 놓은 모래 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차라리 모래성이라도 만들 생각이었다. 거기에는 자신 있었으니까. 혼자 놀기에도 딱 좋았고.

자리를 잡은 그녀가 모래를 몇 번 만지작대자 제법 멋진 모양이 갖춰졌고, 그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뿌듯해 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참 잘 만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몇몇 여자아이들이 그 모습이 신기했던 것인지 그녀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응? 이건 말이지…

즐겁고, 자연스러운, 물 흐르듯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대화가 이어졌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

소녀의 친구는 이제 소녀를 잊어버렸다.


"…살펴보실 기록 여기 있습니다, 지휘관님."

지휘관이라 불린 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보고서를 대충 흩어 내렸다. 그리고는 이내 더는 거기에 관심 둘 게 없어졌다는 듯, 가벼운 손짓으로 서류를 책상에 던졌다. 종이와 유리가 무미건조하게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손을 까딱였다.

"어느 정도는 아래에서 처리하게 둬. 어차피 그렇게 주시해야 할 SCP도 아니니까. …이제 다른 보고서를 가져와 봐. 나 오늘은 좀 바빠서. 백만 년 만에 데이트인가 뭔가를 한다고. 기다릴 텐데, 뭘 준비해야 할까…"

소녀는 처음부터 그에게 어떠한 의미도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쓰라리고, 매정한 이야기였다. 그에겐 상관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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