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또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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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사의 일기, 2500년 3월 17일

오늘도 지구에서 또 하루가 흘렀다.

오늘은 성 패트릭의 날이다. 제대로 계산했다면 그렇다. 지금까지 찾은 가장 오래 가는 달력도 벌써 한 세기 전에 끝나버렸으니.
이제는 벽에다 조그맣게 긋는 빗금뿐이다. 슬슬 많아서 버거워지려 한다.
일어나서 벽에 난 구멍 바깥으로 나와 붉은 태양과 보랏빛 모래폭풍이 황량하고 까마득한 땅을 휩쓰는 모습을 보노라니 옛날 좋았던 때가 생각난다.
네렘사Neremsa와 벌였던 매트리스 쟁탈전. 알레프 기지로 기네스 맥주를 몰래 밀반입하려고 발명한 장치. 파이프를 물들였던 초록색 물감. 괴물 한복판에서 친구들과 벌였던 축제.
친구… 괴물…
둘이 차이점은 이제 별로 없다. 살아남은 놈한테는.

죽음이 모두를 하나하나 데려갔다. 흐르는 시간과 덧없고 연약한 인간의 몸뚱이가 거들었다.
네렘사는 SCP-062-FR이 일으킨 격리 실패에 휘말려 죽었다. 프로그Frog는 102세라는 노구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에즈쇼Ezcyo는 감금된 정신병원에서 인격 분열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일등국장은 뭔가 큰 소리가 난 다음에 자신의 권총 "의심추격기"를 손에 붙잡고 노환 심장마비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마르쿠스Marcus, 요하네스Johannes, 에이테이라Heiteira, 카지,Kaji, 릴라Lylah, 카제Kaze, 가부리크Gabouric, 그 이상한 놈 이름이 뭐였지? 아, 퍼플트뤽Purpletruc. 모두 죽었다.

벤지Benji만이 몇 년 동안 나와 같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벤지 이후로 나는 더 친구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2310년 인간과 SCP의 대전쟁이 터지는 와중에서 벤지는 살아남지 못했다. 제19기지에서 핵탄두가 폭발하며 불어닥친 바람이 벤지의 시신을 마저 불살랐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가장 악독한 놈마저도. SCP-096SCP-106도 죽었다.
물론 브라이트도 죽었다. 시신도 목걸이도 벤지와 함께 네 가지 바람에 휩쓸려 흩어졌다.

머지않아 마지막 인간들이 그 뒤를 따랐다. 몇몇은 다른 행성을 개척하려 했으나 너무 이상에 치우친 계획이었다. 토성을 지나지도 못해서 모두 죽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힘까지 그러모아 도시를 세웠다. 그러나 모두 파괴되었다. 자신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또는 그 어떤 생명에게도 부적합해진 환경 때문에.
남은 자는 없다. 아무도 없다. 오로지 침묵뿐이다. 더 있다면 지난날의 행복했던 우리를 비웃는 바람뿐일까.

학살이 끝나고 몇십 년이 지나 SCP-2000을 가동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생겨난 인간들은 방사능에도 기온에도 태양광선을 막아줄 대기가 전혀 없는 환경에도 버티지 못했다. 사산아들만이 너무 거친 빛 한가운데를 굴러다녔다.
이제 결심을 해야만 했다. 나는 혼자였으니까. 거의는.
이따금 나는 눈을 깜빡했다. 그리고 머리에서 "우드득"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재빨리 다시 일어나 보면 조각상이, 외로워하며 아무 목적도 잃은 듯 서 있었다.
무미건조한 나날이었다. 운이 좋으면 무언가 마주치기는 했다. SCP-073SCP-076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싸우던 자리, 또는 시간이 흐르며 유순해진 SCP-682.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나머지 이제는 서로 죽이기조차 포기한 채로. SCP-682. 지금 이 세상에서 친구에 가장 가까운 존재.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것을 싫어하던 놈이 그나마 견디지 못하는 마음을 아주 조금 덜어주는 녀석이 되었다.

시간이 지난다. 기억은 남는다. 예전 같은 친구는 더 없다.
왜 나는 함께하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다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까? 지금 기다리지들 않을까? 저 하늘 위 알레프 기지에서 질 좋은 맥주와 담배를 꼬나쥐고 나를 오랫동안 기다리고만 있지들 않을까?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도, 가능한 한 많은 것을 터뜨려도, 나한테는 불충분하다.

왜 나는 죽지 못하는 걸까?

날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보내줘.

이렇게 빌게.

다른 날과 똑같이.

잘 자, 내일 봐.

그림 박사의 일기, 2500년 3월 18일

오늘도 지구에서 또 하루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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