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기지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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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된 거로군요. 이것 참, 마지막까지 농락당하고 있었다니 원.”

“그래도 당하지는 않으셨잖아요.”

패닝 박사는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앞에서 캠핑카가 튀어나왔을 때는 아주 식겁을 했지요. 근데 캠핑카에 놀란 건 매복해있던 혼돈의 반란 쪽도 마찬가지라서, 우왕좌왕하다가 우리 쪽 요원들에게 사살된 겁니다. 진짜로, 별 건 없었어요, 그냥 녀석들이 캠핑카를 향해 총을 쏠 때 일어나는 불빛을 저격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운이 좋았다고 봐야겠죠.”

제이미는 패닝 박사의 휠체어와 보조를 맞추며 걷고 있었다. 박사는 언제나 유쾌해 보였으며 이제 모든 고민거리가 사라진 제이미는 그런 그에게 급속도로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박사가 TP의 역사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을 때, 그는 늘 찝찝하게 남아있던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캐버너 소령은 그 때 그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습니까? 혹시나 소령도 과거로 날아가버린 건 아니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린 통구이가 된 그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반응에 참가하지 못했어요. 참, 그러고 보니 저도 물어볼 게 있습니다만, 시간을 역행했던 당신의 클론은 죽었다고 했지요?”

“……예.”

박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굳이 이런 곳을 찔러서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알아둬야 할 게 있어서요. 그가 미래에서 가져온 물품을 당신에게 맡긴 적은 없습니까?”

“예, 뭐, 없습니다만.”

“아, 그럼 됐습니다. 그런 물건들은 말썽을 곧장 일으키거든요. 뒷처리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이제 제이미 씨는 푹 쉬면서 승진 통보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승진이요?”

“그럼요, 이번 사건 해결의 주역인데 당연하죠. 제가 적극 추천한다면 보안 인가 3단계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제이미는 이 사실에 기뻐해야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우선은 감사를 표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복도를 따라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패닝 박사는 D동이 두 번째 폭발로 완전히 붕괴되었기 때문에 TP가 재개될 가능성은 없을 것이며 본부도 타키온 펄스의 부작용을 관찰했던 만큼 기밀 프로젝트를 영구히 봉인하기로 결정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들이 복구된 A동을 지날 무렵, 패닝 박사는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제이미 씨, 샘플이 토마토였다는 확신은 어디서 가지신 겁니까? 당신이 말한 것만으로는…….”

“…….”

“……때려 맞추신 겁니까?”

제이미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패닝 박사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소문은 어디 가질 않는 군요. 제이미 씨의 이성적이면서도 과감한 결단력은 정말 인상 깊습니다. 펠릭스 양과 좋은 팀이 되겠어요.”

“그건 무슨……?”

“여러 모로 두 사람은 궁합이 좋은 것 같군요. 자, 병동까지 다 왔습니다. 바로 저 병실일 겁니다. 애인을 만나러 가셔야지요.”

패닝 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하자, 제이미는 말없이 그에게 웃음을 흘리며 작별 인사를 한 뒤 병실로 들어섰다. 펠릭스는 깨어있었다. 그는 그녀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좀 어때?”

“완벽해.”

두 사람도 역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자신들의 몸 상태에 관한 안부가 오고 간 뒤 그들은 부상당한 동료의 근황과 복구 겸 리모델링된 기지 디자인의 감상평 따위의 화제로 대화를 지속했다. 펠릭스가 물었다.

“리지웨이 박사님은?”

“아이작과 같이 계셔. 강제적이었지만 이왕 휴강하게 된 거, 둘이서 여행을 떠나볼 생각이라는데.”

“잘 됐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묘한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다. 그들이 맡았던 역할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에 대해서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대화 소재가 다 떨어지자, 제이미는 펠릭스에게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팔짱을 꼈다. 펠릭스도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결국 제이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흠, 아무래도 우리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기로 합의를 본 것 같네.”

펠릭스가 움찔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게, 그러니까, 제이미, 사실은…….”

“됐어, 괜찮아. 나도 너에게 숨길만한 일이 있었으니까. 그냥 이대로 덮어두자. 서로 알아서 좋을 것 없을 테니 말하지 않은 것 아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제이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녀와 눈을 마주하며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펠릭스,”

그는 '제이미'를 떠올렸다.

“1월 15일…… 그러니까 내가 토마토 때문에 베이커 형사님께 처음으로 조사받던 날 있잖아. 우리가 형사와 만나기 직전에 나눴던 대화 기억해?”

“어…… 그 때가 언제였지?”

“네가 나보고 방금 저쪽 복도로 갔는데 어떻게 이쪽에서 튀어나왔냐고 말하려던 참이었잖아.”

“응? 아, 그 때…… 힉!”

펠릭스는 갑자기 눈을 이리저리 피하며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 그 때 얘긴 뭐 하러.”

“무슨 얘기였지?”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제이미를 노려보다가 그의 표정을 읽은 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물었다.

“진짜 기억 못 하는 거야?”

제이미는 여기서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클론의 말 때문에라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이 정도는 펠릭스가 밝혀도 될 것이다.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전에 그녀가 이 대화에 대해서 물었을 때 보인 반응이 너무 유별났던 것도 그의 궁금증을 더 증폭시켰다. 그래서…….

“맞아, 기억이 안 나. 하지만 정말 중요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해서 지금 물어보는 거야.”

펠릭스는 그 말에 전처럼 심상찮은 반응을 보이다가, 몸을 배배 꼬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저, 나하고 커피 마시러 나가자고…… 그랬어.”

제이미는 그 자세 그대로 잠시 굳은 직후 어퍼컷을 맞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뭐라고!”

“아니, 그…… 러니까! 네가 그랬다니까!”

그는 그녀가 전에 보였던 반응을 다시금 되새겼다. 수치스러움, 혹은…… 부끄러움. 이런 세상에, 그는 천장을 한 번 쳐다보고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펠릭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이미, 이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이러면 빠져나갈 구석도 없어지잖아. 펠릭스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이 없어진 그를 초조하게 지켜보다가, 상황을 수습하려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면 네가─”

“아니, 펠릭스.”

제이미는 다시 뒤돌아서서 그녀를 똑바로 마주하고 말했다.

“그건 잊어버려. 너도 농담이었다는 거 알잖아. 야, 우리끼리 무슨 커피냐.”

펠릭스는 그 말을 듣고 멍해지더니 입 꼬리를 달싹이다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으, 응…… 당연하지.”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명백한 표정이 어려 있었고, 제이미는 실실거리며 그것을 지켜보다가 그녀가 침을 삼키고 다음 말을 꺼내는 순간을 잡아 말을 끊었다.

“대신 나중에 내 방에 찾아와. 샌드위치라도 정성껏 만들어줄 테니까. 토마토 잔뜩 넣어서.”

제이미는 이 말을 하면서 펠릭스의 반응을 만끽했다. 처음에는 축 처져서 듣고 있던 펠릭스의 눈동자가 점점 커지더니, 반짝거리다가 마침내 환하게 미소 지으며 기쁨으로 가득 찼다.

과연, 우리 기지의 자랑이라고 할 만 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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