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이야기 » 미래가 만드는 과거
심장에 싸늘한 기운이 전해졌다. 그것은 직후 무섭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속이 끓어올랐다. 손이 저절로 올라가 가슴을 쥐어뜯었다.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천천히 살코기를 찢는 나이프처럼, 상처를 쑤시는 아픔은 서서히 밀려들어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도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만, 만약 자신이 살아남는다면, 그 때 죽어버린 제이미의 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될까? 내가 살아남는다고 해도,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런 안일한 방법이 성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종이 가방이 손에서 떨어졌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권총 뒤로 캐버너 소령의 얼굴이 나타났다. 펠릭스가 소리를 질렀다.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의 눈빛으로 소령을 쳐다보다가, 그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구할 수 있었는데. 이건 정말 근소한 차이였다. 그 사실에 억울해해야 할까? 이윽고 무릎이 꿇렸다.
종이 가방이라. 내가 이걸 가져온 것은 무슨 의미일까? 펠릭스에게 샌드위치를 건낸 사람은 내가 되고 싶다는 마지막 미련?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물론 나는 두려웠다. 그래도 그 때, 그러니까 지금 울고 있을 펠릭스를 바라보고 든 결심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그를 되돌려주자고. 분명 나 역시 제이미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제이미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을 테니까. 불청객인 나의 기회를 위해 그의 몫이던 것을 빼앗는다면, 그건 그에게 불공평하지 않을까?
머리가 아찔해졌다. 소령이 총구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앞에 서 있던 구두가 뒤로 돌아 뚜벅뚜벅 소리 내며 걸어가 버렸다. 손에 힘이 풀렸다. 바닥에 피가 쏟아졌다.
과거를 바꾼다고? 제기랄……. 어쩌면 이건 선택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길은 나를 빠져들게 했다. 거부하려고 해도 자꾸만 떠오르는…… 말로 딱히 표현할 단어가 없다. 모든 게 그저 대본에 쓰인대로 같다. 아마 과거의 '나'가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 때도 내 옆에 종이 가방이 떨어져 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묘한 일이다. 오리지널이 죽는 것을 보고 대신 죽겠다고 결심한 내가…… 죽는 모습을 보고 오리지널이 죽는 것이라고 착각하다니. 과거와 미래의 두 사람이 만난다면 타임 패러독스가 일어난다는 그 얘기도, 지금 보니 웃기지 않은가. 그 두 사람이 만난 이 시점에, 타임 패러독스라는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실현될 거라니.
이제 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으슬으슬한 것이 춥다. 피가 빠져나가서 그런 것 같은데. 시야가 흐릿해졌다 말다를 반복했다. 펠릭스는 안간힘을 쓰며 뒤로 묶인 손을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애쓸 필요 없을 텐데. 사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과연 내가 펠릭스를 구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나는 그 상황에서 펠릭스에 대한 의심을 포기한 남자다! 이까짓 일이야 문제될 것도 없다. 비록 영웅의 자리를 빼앗기긴 하겠지만. 약간 분하기도 한데, 사실 자연이 허락하지 않은 나라는 존재가 그래도 이 바보 같은 신파극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하지 않을까.
입이 벌어졌다. 손에 힘이 풀렸다. 고통이 천천히 사그라드는 듯했다. 가까스로 눈을 들었다. 타오르는 해가 지평선에 걸려있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공연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눈앞에 익숙한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주마등, 주마등인가?
세상에, 저건 토마토 케이크인가? 이 생각은 꿈에도 못했는데. 토마토가 올려진 식탁을 앞에 두고 둘러앉은 우리 가족의 모습. 아빠, 엄마,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이 한 명씩 다가와서 곁에 앉는다.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내 친구들. 아이작, 레인 부부, 리지웨이 아저씨, 그리고 펠릭스. 파티의 시간.
그건 허무하게 끝났다. 다시 고통이 찾아왔다. 주마등이 끝나면 바로 편안하게 죽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촛불이 꺼졌다. 다시 눈앞에 붉은 하늘이 보였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개운했다.
고개가 다시 떨어졌다. 얼핏 보니 펠릭스는 이제 매듭을 푸는 걸 포기하고 울고 있었다. 죽어가는 날 위해 울어주는 것이겠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가 내 존재에 대해 영원히 몰라야 할 텐데. 제이미, 그 멍청한 자식이 취한 다음에 헛소리를 하진 않을까 문득 걱정이 된다. 뭐, 괜찮겠지.
숨이 가빠져왔다. 눈이 자꾸만 감기려고 했다. 아니, 벌써 감은 걸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통 새까맸다.
그녀에게 웃어 보이고 싶었다. 다 괜찮아질 거라고. 영웅이 나타나 널 구해줄 거라고. 이젠 울 필요 없을 거라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아쉽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고개를 숙이자, 펠릭스에게 이런 꼴을 보일 순 없지.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았는데.
그렇지만 나는
갑자기 나른해졌다. 잠이 쏟아졌다. 이제 더 이상 헐떡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제야 겨우 눈치 챘다. 숨이 잦아드는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몸이 천천히 앞으로 쓰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시원한 땅바닥이 편안했다. 눈을 감자 어둠이 날 감싸 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해가 지는 것 같았다. 그래, 잠을 자자. 탄생부터 이 순간이 오도록 계속해서 지치고 노곤했을 이 불쌍한 몸을, 나는 그렇게 영원한 어둠 속에 뉘였다.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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