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브라이트의 수많은 초상화

칼 글라스코Carl Glasko로서는 자기가 브라이트 박사의 자택 문앞까지 찾아갈 줄은 미처 예상 못 했다. 박사님 거울 좋아하시나 보네요, 라고 화장실에서 농담한 건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그런데 그 농담이 어쩌다 자화상 이야기로 번지더니, 이렇게 초대까지 받게 됐다. 그리고 제19기지 이사관이 자기 자화상 컬렉션 좀 보러 오겠냐고 물어볼 때 싫다고 그러기도 쉽지가 않고.

"아, 칼! 자네 왔구만." 문을 열고 나온 잭이 말했다.

"네, 박사님이 초대하셨으니까요. 저녁 같이 하자시는데 제가 어떻게 빼요?"

잭이 가볍게 웃었다. "뺀 사람이 몇 명인지 가르쳐 주면 놀랄걸. 재단에서 유명해질 때 안 좋은 점은 모두들한테 '감히 범접 못할 사람' 취급받는다는 점이야."

잭은 칼을 집안으로 들였다. 집은 2층 주택이었는데, 너무 화사하지 않으면서도 이따금 적적한 데가 있었다. 발소리가 조금 크게 메아리쳐 들렸다. 벽에는 살짝 벗겨진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게 칼에게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칼과 작은 6인용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다. 둘은 한쪽을 텅 비워두고 다른 쪽에 붙어 앉았다. 둘의 대화 내용은 화제가 자주 바뀌다가, 나중에는 진지한 철학적 분야로 들어가면서 나름 심도 있는 토론으로 발전했다. 두 사람은 함께 있는다는 것의 기쁨과 괴로움을 이야기했다. 정체성 이야기도 했다. 얼굴 이야기도.

"마침 그간 못 따본 18년산 레드브레스트 위스키가 있었지." 그렇게 말하면서 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위스키는 자기도 좋았다.

술이 몇 잔 돌았을 때 잭은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는지 칼에게 드디어 지하실을 보여줬다. 지하실로 가는 문은 벽장이나 여분 창고겠거니 칼이 생각하던 문이었다. 계단은 불빛이 어둑했다. 희미한 전구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잭은 "공기"가 안 좋아서 이렇게 보인다고 말했다. 수십 년 동안 사실 공기를 갈았던 적도 없었지만.

칼이 지하실 바닥까지 내려오자 잭은 스위치를 하나 켰다. 전구 몇 개가 깜빡여 켜지며, 벽 하나에 가득한 자화상들을 비췄다. 자화상이지만, 서로 다른 얼굴들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얼굴을 더 자주 바꾸시네요." 칼이 말했다. 잭은 조금 웃음짓고, 방 한가운데의 탁자로 걸어갔다. 탁자에는 거울 하나, 스케치북 하나, 연필 여럿이 있었다. 스케치북에는 칼과 막 저녁을 먹은 그 잭과 비슷한 자화상이 그려지는 중이었다. 잭은 자리에 앉아 주위 그림들을 아쉬운 듯 바라봤다. 조용하게 얼마가 지났을 때, 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박사님께 말을 거나요?"

잭이 칼을 돌아봤다. 똑같은 웃음이 얼굴에 걸렸지만, 눈빛에 무거운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이야기 몇 가지 들어보겠어?"

칼이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잭이 이야기를 마치자, 두 사람 주위로 침묵이 무겁게 깔렸다. 잭은 자기가 들고 왔던 위스키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술은 한 시간 전에 마무리한 칼은, 대신에 벽에 걸린 초상화들 속에서 길을 잃은 잭을 바라봤다.

"아직도 옛날 몸이 그리우세요?" 칼이 물었다. 멍청한 질문이었다. 칼도 답은 벌써 알았다. 그 답을 잭한테 듣고 싶었을 뿐.

"그럼, 그립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세요?"

그 말을 듣자, 잭은 조금 웃었다가 대답했다. "아주 재밌단 말야. 숙주들은 자기 몸을 다른 누가 가져간 것 때문에 심란해하는데, 내 몸을 자기들이 가져가면 어떤 모습일지 모른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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