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인간

냉동건조 비프 스트로가노프 50일째. 베켓Beckett 박사는 아주 우거지상으로 고기와 밥을 꿀꺽 삼켰다. 한 가지 음식만 먹고 탈 안 나고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베켓은 도전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메뉴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했다. 그래도 지난번에 치킨카레로 세웠던 기록은 깬 참이었다. 또 여기서 그만한다고 해도, 적어도 사전포장한 다른 음식들 죄다 떨어져도 영양죽하고 비타민 알약 없이 계속 살 만큼은 소고기가 남는다는 뜻이니까.

이딴 병신 음식도 나중에는 보석처럼 떠받들면서 처먹고 자빠지겠지.

창문 바깥을 바라보며 베켓은, 환풍기 바람을 달 평원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라 상상하며 맞아봤다. 한두 번도 아니긴 하지만 담배 한 갑만 더 슬쩍 챙겨올걸, 싶어졌다. 피워봤자 피해도 없는데, 결국에 보면. 워너Werner가 알았으면 아주 발광을 했겠지만.

워니Werney, 이 똥 씹은 얼굴 건방진 새끼. 우주 보낼 만한 하고 많은 인간들 중에서 O5들은 어쩌자고 제19기지에서, 자율복장 입는 날에도 정장 처입고 오는, 최대 모험이 시리얼에다 설탕 넣는 거였다는 워니를 딱 뽑아서 나한테 붙여줬을까. 그래 차라리 그새끼가 가서 다행이다. 같이 살아봤자 진작에 한 명 갔겠지.

한마디를 안 해. 나-잠깐-나감-좀-있다-돌아옴 같은 소리도 안 해. 씨발 무슨 갈 때 악수 한 번이라도 안 해.

끝까지 좆같네 너, 워니.

베켓은 몇 달 전 그날을 떠올렸다. 그날 워너 박사는 크레이터 속에서, 지평선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무선 채널까지 열어놓고. "야, 워니, 너 어디 가?"

인류의 마지막 대화였다. "야, 워니, 너 어디 가?" 미친.

무슨 내가 네 마음속 생각을, 진중하고 의미 있는 소리를 바랐냐고. 진짜, "그럼 안녕" 그것만 말해줘도 충분히 진중하고 의미 있었겠다. 그걸로 만족하고 남았다.

그때 내가 너 따라갔으면 네가 돌아왔을까?

아니, 안 돌아왔겠지. 그래서 내가 아무 말도 안 했지.

끝까지 좆같아, 씨발새끼.

그 음울하게 생기고 웃지도 않는 워너 박사가 더 빨리 나가떨어진 건 참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이딴 환경에서 희망을 가진 쪽은 오히려 그쪽이었기 때문이다. 워너는 낙관주의자였다. 다음 직원들 한 바가지가 갈 준비 중이라는, 폐허를 딛고 일어나는 신인류의 개척자들을 보낸다는 O5들의 브리핑도 워너는 믿었다. 두 사람 다 이제 우주왕복선이 더는 올 일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워너는 재단이 숨겨둔 비장의 무기가 있다고, 어디선가 포탈이 생겨서 O5들이 짠 하고 나타나 메달을 친히 걸어주고 예전 그대로인 세계로 다시 데려갈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워니가 나간 그날이 아마 이제 우리밖에 안 남았다고 깨달은 날이었겠지. 나는 아직 여기 있네. 맨 나중에 내가 그 얼굴 똥 닮은 워니보다 희망을 덜 품었다는 이유로. 이제 뭘 희망해 봤자 뭔 소용이야? 저기서 그 "리전에어" 그걸 발사한 판국에?

베켓은 지난일을 회상했다. 모든 게 바뀐 그날. 그놈이 목성 대기를 뚫고 올라오기 시작하던 날. TV에 대통령이 옆에다 감독관을 데리고 나온 모습. 통곡 소리만 들리는 거리. 아드리엔Adrienne한테 진짜 직장이 뭐였는지 말하던 날.

그리고 수많은 기적들. 리전에어의 첫 실험 발사. 지미 키멜의 전자기 펄스 드립. 조카들이 크레파스로 로켓이랑 폭발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미사일이 제일 센지를 가지고 싸우던 모습. 교황이 산 피에트로 광장에 신자들을 모으고 전세계의 원자폭탄을, "금속으로 빚은 주의 천사들"을 위해 기도하던 모습.

모든 전쟁의 중지. 무의미한 입씨름, 하찮은 정치질들의 중단. 인류의 모든 부정적 에너지들이 저 바깥의 정체 모를 비인간적 위협을 맞아 한 목적 아래 모여, 거기다 대고 어떤 독설과 증오를 퍼부어도 숭고한 대접을 받던 모습.

그때 맡은 일 대부분에서 혐오와 공포가 따라왔다. 잘해봤자 암울한 만족감이었다. 일이 끔찍하게 잘 풀린다고 해야. 하지만 그 몇 달 - 난 재단이 자랑스러웠어. 이런 데서 일하는 나 자신이 대견했어. 내가 인간이란 사실이 그렇게 좋았어.

그것만으로 가치가 있었을지도.

워니한테 감사라도 해야 하나. 내가 이제 달에다 발 디딘 마지막 인간이잖아. 너는 반(反)-올드린, 나는 반-암스트롱 되는 거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종말입니다.

또 다른 가물가물한 기억. 눈들 반짝이던 MIT의 졸업반, 올드린이 들어와 미국을 새로 이끌어갈 기술자들에게 꿈과 대담한 전진 이야기를 하던 모습, 관중들의 환호와 탄성으로 발언하는 소리가 완전히 묻혀버리던 모습. 친구들을 뒤로 하고 펜이랑 종이조각 앞에 앉았던 것, 그 덕분에 보잉사로, 케이프 커내버럴로, 제19기지까지 오게 되었던 길. 이제 다 흙먼지 됐겠지, 다른 모든 것처럼. 갑자기, 베켓은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기지 저장고 쪽으로 출발했다.

그것밖에 방법은 이제 없으니까.


몇 시간 뒤, 로버는 보급품들을 채우고 격납고를 출발했다. 로버 뒤로 문이 스르륵, 조용히 닫혔다. 문앞으로 어떤 발자국이 저 멀리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로버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베켓은 꿈을 꾸었다. 자기가 우주로 온 맨 처음 순간,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가 같이 있어줬다. 암스트롱, 올드린, 콜린스, 베켓, 워너. 달 위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유인 임무. 사실은 인류의 마지막이겠지만.

로버가 길을 멈추고, 자동조종장치가 삐 소리를 내자 베켓은 쪽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헬멧을 쓰고 끈을 꼭 짜맸다. 에어로크가 쉬이익 얼리고, 베켓은 밖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눈앞으로 착륙선이 보였다. 그 옆에 깃발 하나가 뻣뻣하게 똑바로 선 채로 있었다. 베켓은 착륙선의 금속 다리에다 장갑을 갖다댔다. 현대 기준에서 참 어색하게 생긴 모습이었다. 손이 올드린의 서명을 만나자 멈춰섰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계셨나요, 올드린 씨?

10년 일찍 떠나셨다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아예 떠나지 않으셨다면?

베켓은 갑자기 지친 기분이 들고, 이곳까지 왜 왔는지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성조기가 펄럭이고 국가(國歌)가 울려퍼지는 상상을 하면서, 산소 부족 경고 소리가 들릴 때까지, 까만 하늘과 갈색 지구를 바라보며 그냥 있었다.

베켓은 돌아오는 길에 또 잠이 들었고, 또 꿈을 꾸었다. 다빈치의 비행 기구 그림, 피렌체의 거리, 예배당의 천장, 아드리엔과 마시는 레드와인.


돌아왔을 때는 새벽 1시였다. 그리니치 표준시로. 베켓은 매일 하던 통화가 그리웠다. 이제 와서 할 수 있게 된다고 뭔가 달라질 듯해서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여기서는 시간표 맞춰서 사는 쪽이 좋았으니까. 베켓은 기지 컴퓨터를 켜고, 지구의 기지들을 돌아봤다. 실시간 - 정확히는 1초 늦은 실시간 - 카메라 피드는 아직도 돌아갔고, 베켓은 이놈들은 왜 자기가 호출하는 대로 사진들을 다 보여줘서 자기를 비웃으면서 고문하는 건지 이유가 궁금해졌다. 베켓은 제19기지를 띄웠다. 입구 경비탑은 중앙 빌딩 위로 쓰러져 있었고, 식당은 이제 아주 사라진 모양이었다. 하늘에는 먼지와 유황 한 떼거리가 맹렬하게 소용돌이쳤고, 돌조각이며 파편들이 회전초처럼 오만 데 나뒹굴었다. 그렇게 인류의 잔재만이 보였다.

똑같네, 똑같아.

베켓은 송신기 버튼을 눌렀다.

제19기지 자동 메시지입니다. 카테고리 1 기지급 기능 정지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대리 사령부에 연락하여 명령을 기다리십시오.

안녕, 제19기지. 안녕, 감독관들. 저 데리러 오시려면 아직 멀었죠들?

워니가 어떻게 포탈을 찾아내서 거기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네요. 드디어 유머감각을 발동해서 갈 때 내 컴퓨터에 장난을 쳐놨을지도. 거기가 다 정상으로 돌아와서 다들 식당에 앉아서 나 골탕먹일 개꿀잼 몰카 회의 중일지도.

워니, 내 말 들려? 들리는 거 다 알아, 사랑하는 씹새끼야. 그 포탈 타고 지금 바로 일로 와, 들리냐고? 너 여기 좀 같이 있자고.

"워니, 이 씹창놈, 좀만 같이 있자고." 베켓이 중얼거렸다. "O5들, 같이들 좀 오세요, 들려요? 설명 많이 해주셔야겠는데요. 돈을 얼마나 더 받든, 슈퍼파워가 얼마나 있든 이제 상관없이 좀 대들어야겠는데요."

제19기지 자동 메시지입니다. 카테고리 1 기지급 기능 정지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대리 사령부에 연락하여 명령을 기다리십시오.

"씨발 워너랑 감독관 나오라고!" 베켓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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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직장 돌려줘! 내 책상! 내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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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이랑 내 차랑 - 내 잔디깎이! 잔디깎이 하나는 사줄 수 있잖아! 내 동생이랑 엄마랑 아빠 보여줘! 아드리엔 돌려내! 걔랑 와인 한 병만, 이탈리아 다시 한 번만, 그 푸른 - 그 썩창나게 푸른 진짜 바다 한 번만! 개좆같은 달의 바다 말고 진짜 바다, 진짜 물 있는 바다!"

제19기지 자동 메시지입니다. 카테고리 1 기지급 기능 정지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대리 사령부에 연락하여 명령을 기다리십시오.

베켓은 컴퓨터 위로 푹 쓰러져, 몸을 떨면서 울었다.

"TV 한 번만 - 한 번만 - 한 번만 - 보여줘, 리전에어 성공했다는 말 듣게, 그 외계 똥덩어리 날려버렸다는 소식 듣게, 세상이 안 망했다고 확인하게, 그냥 저 에스씨피 이삼구구가, 그새끼가 무히 – 무흐 - 무효화됐다고, 우리가 지옥으로 보내줬다고 나도 알게."

"좆같은 내 세상 돌려내."

수신 중입니다.

베켓은 퍼뜩 똑바로 앉았다. 어느 샌지 바뀐 카메라 화면이 보이자, 팔걸이를 꽉 부여잡고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다. 화면에 산덩이만한 외계 기계가, 원자폭탄 수천 방에 잔뜩 그을은 자국을 달고 소용돌이치는 대기 한가운데 뜬 채로 있었다.

새로운 영상 피드가 확인 가능합니다.

베켓이 다시 의자로 몸을 털썩 뉘었다. 기적 같은 구조 소식이 아닌, 그저 그 항상 변덕스럽던 음성인식 소프트웨어였다.

수신 중입니다.

갑자기 아드레닐린이 다시 치솟으며 베켓은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떨리는 손으로 베켓은 송신기 버튼을 눌렀다.

원자로 전원 파괴: 임무 중지
원자로 전원 파괴: 임무 중지
원자로 전원 파괴: 임무 중지

마지막 인간이 달 위에서 그때 웃었는지 울었는지, 말해줄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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