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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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람다-92. 무사히 이상성부 시설 내에 진입했다. 응답하라, 오버."

짐시 군모를 벗은 분대장은 무전기에 가까이 대고 말하였다. 그의 머리는 땀으로 덮여 있었다. 비좁은 통로 속에서 분대원들은 각자 짧은 시간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들 가쁜 숨을 내쉬며 몸이 축 늘어졌다.

"에이 씨- 무전기는 또 왜 이런데. 염병할."

반응 없이 지직거리는 잡음만 나자 김 하사는 짜증난다는 듯이 무전기를 몇 번 두드렸다. 그러고 허공에 휘두르고 나니 그제서야 신호가 제대로 잡혔다.

"여기는 사령부. 현황 보고하도록. 오버."

"총 인원 6명. 현 인원 6명. 모두 이상 무. 오버"

"확인. 계획대로 시설 내로 계속 진입하고 변칙 개체 및 이상 현상 발견 시 즉시 보고 바람. 오버"

"알겠다. 오버."

형식적인 무전이 끝나고 분대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분대원들은 힘없이 다리를 뻗으며 걸었다. 입구에서부터 계속 이어진 좁은 통로는 끝이 없어 보일 정도로 길었다. 이상한 소음까지 나 정신이 흔들렸고 움직이기 힘들 지경이었다.

뒤에서 비틀거리며 걷던 분대원 한 명이 곰팡이가 가득한 벽에 몸을 기대었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긴장한 채 걷기만 하니 도저히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그의 앞에 있던 선임이 어깨를 툭툭 치고 일으켜주며 말했다.

"정신 차려, 임마! 괜히 쓰러져도 너 못 부축한다고."

"아, 알겠습니다. 죄송함다."

아까부터 다들 말할 기운이 없어졌다. 좁고, 지치고, 소란스럽고, 무엇이 나올지 모르고, 무엇보다 이리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 큰 원인이었다.

교육 시간에만 듣던 K급 시나리오가 발생하였다. 세상 곳곳에서 알 수 없는 기원의 물체들이 나타나 공격하고 O5는 무슨 연유인지 죽거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이들 같은 말단은 모르는 일이었겠지만 이미 소문은 퍼질대로 퍼진 후였다. 이제 더 이상 역정보는 필요치 않았다.

이상성부. 그것은 재단이 그동안 숨겨왔던 어쪄면 추악한 진실일지도, 어쩌면 달콤한 거짓일지도 모를 곳이었다. 탐사를 맡은 분대의 분대장조차 자신이 정확히 어떤 곳을 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정보가 없는 곳이기도 했다. 그저 이름에서 수상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재단에게 '이상성'이란 무엇이었을까? 변칙성도 아닌 '이상성'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근데 김 하사님."

"왜."

의지할 빛이라곤 랜턴 밖에 없는 그들에게 말 한 마디가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아직 조우한 변칙 개체는 없었으나 언제, 어디서 뛰쳐나와 뭔 짓을 할지 몰라 항상 긴장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나기 시작한 마찰음 때문에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왜… 이번 일이 일어난 건지 아십니까?"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통로 안을 울리는 소음을 제외하면.

"몰라. 윗분들도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알아. 난 그냥 명령만 따를 뿐이야."

"알겠슴다…"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그후 여섯 명은 다시 조용해졌다. 할 얘기가 없었다. 박 이병은 이제 비틀거리진 않지만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속은 쓰려왔다. 정 일병은 들어올 때부터 말이 없었다. 정 일병의 고향은 부산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지금 들어와 있는 시설 근처의 주택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일생 동안 집 옆의 '그것'이 이런 것이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하였다. 한때 건설된 포로수용소 건물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다들 이번 사태의 원인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이끄는 분대장은 그저 명령만을 따라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자칫 분대원이 모두 정신나가버리거나 죽어버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어떤 사명감이었다.

"분대장님. 여기 문이 있습니다."

곽 상병이 랜턴으로 문 곳곳을 비추었다. 보통 크기의 철제 문이었다. 문 구석구석에 보이는 녹슨 자국이 건물의 연령을 짐작케 해주었다. 문에는 페인트가 벗겨져 갈색 피부만을 드러내는 명판만이 있었다. 한글로 '이상성부'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열쇠를 넣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여태까지 이 시설의 보안이 뚫렸다거나 정체가 들키지 않았다는 게 신기한 일이었다.

"열쇠를 이 안에 넣었었는데. 그래, 이거였지."

군복 주머니를 뒤지던 분대장은 철제 문과 같은 빛깔의 열쇠를 손으로 꺼냈다. O5-12가 가지고 있던 열쇠였다. 왠지 피 냄새와 탄내가 섞여 나는 것 같아 기분이 불편했다. 분대장은 그 불길한 열쇠를 빨리 손에서 털어내고 싶어 구멍에 열쇠를 열심히 꽂기 시작했다. 작은 전등의 빛 말고는 아무런 빛이 없는 환경에서 열쇠를 꽂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몇 번을 덜컥거리며 열쇠를 돌리고 나니 문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굉장히 낡은 문이여서인지 굉장히 빽빽하였다. 굉음과 함께 바닥을 긁으며 문이 겨우 열렸다.

웃음 소리가 났다. 어쩌면 울음 소리. 희미한 폭발음도 같이 들려왔다. 기묘한 소리의 조합이 어두컴컴한 문 너머의 공간에서 나는 것 같았다.

"으으… 여긴 또 뭐야."

곽 상병은 눈을 희미하게 뜨고 랜턴을 문 안쪽으로 비추어 보았다. 비슷한 통로였지만 무언가 달랐다. 김 하사는 분대원의 상태를 확인하고 소리의 근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작은 계단통이 하나 있었다.


고요한 적막만이 흘렀다. 회의는 진행 중인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무도 좀처럼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중간마다 비어있는 좌석 때문일까. 희망이라곤 한 줌도 없는 상황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그들만이 알고 있는 진실 때문일까.

"그래도 이렇게나마 모여있는 게 참 다행입니다."

검은 정장의 남성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첫번째로 말했다. 몇십 분 만의 첫 문장이 나오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들썩이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세상은 서서히 망해가는 판국에 평의원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가고 있지만 말이야.

2가 투덜거리며 팔짱을 꼈다. 그가 목을 앞뒤로 흔들 때마다 챙이 넓은 초록빛 실크 모자가 동시에 까딱거렸다.

"아시다시피 8은 '공장장'이 되었습니다. 12는 탈주 도중 사살되었고 13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은 8에게로 찾아가 현재 부재입니다."

1의 말이 끝나자 무거운 분위기가 더욱 가중되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라 별다른 말이 나오진 않았으나, 모두 그 사실을 여전히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또다시 이어진 침묵 끝에 파란색 블라우스 차림의 여성이 탁자 건너편의 인물에게 질문했다.

"9, 어쩌자고 10을 8에게 보낸 거지? 그는 재단을 배반하고 '공장장'이 되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자라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침착하세요, 4. 당신도 공장장이 무엇인지 잘 아시잖나요?"

어린 소녀는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 앞에서 어찌 보면 뻔뻔하게 반응했다. 그런 모습을 본 4는 그가 더욱 증오스러웠다. 그에게 9는 매사에 느긋하게만 대하고 평의원으로서의 책임감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 말은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이야."

"자, 자. 4는 일단 자리에 앉으시고, 아까 4의 질문에 대하여 9가 명확한 질문을 해주셨으면 하는데?"

연륜이 있어 보이는 백발 노인이 둘 사이에 껴들며 중재했다. 늘 그렇듯 공손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냉철함이 들어 있었다. 4는 불만이 있다는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앉았고 9는 그의 곰방대를 쓰다듬었다. 처음 입을 열었던 탁자 중앙의 남성, 1은 그런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다들 '공장'이 무엇인지 아신가요?"

9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전에 듣는 이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 습관이 있었다. 9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7이 둥근 안경을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변칙적인 물건을 대량 생산하는 요주의 단체. 자세히 알려진 배경은 없다만은, 어쩌면 재단과 모든 요주의 단체의 기원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있었지. 뭐, 지금이야 공장장이 8인 것으로 판명이 났고…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나?"

그는 턱은 괸 채 무관심한 말투로 말했다. 9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4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리를 꼬고 앞뒤로 까딱거렸다.

"여러분이 아직 모르는 게 있습니다. 그럼 왜 8은 공장장이 되어 세상을 다시 한 번 멸망시키려 할까요?"

"말 좀 그만 돌리고 본론부터 말해주게, 9. 지금이 무슨 질의응답 시간이라도 되나?"

2가 쓴소리를 하였다. 9는 그의 말에 신경 쓰지도 않고 계속했다.

"공장은 8의 작품이자 그의 유일한 역작입니다. 온갖 변칙 개체를 다량 생산해내고 그 결과 재단의 마음대로 세상을 줘락펴락할 수 있었죠. 하지만 8은 오만했습니다. 너무나도 오만했습니다. 마침내 모든 경지에 오르자 그는 자신을 신이라 여겼습니다. 결국 세상은 그의 '작품'들로 채워져 갔고 질서는 사라지고 혼돈 밖에 남지 않았죠."

"흐음…"

3은 자신의 하얀 턱수염을 매만지며 9의 말을 경청했다. 그는 흥미로웠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실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창조되기 이전의 이야기였다. 오직 8과 9만이 알고 있으리라 여기지는 사실이기도 하였다.

"재단은 '거의'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8을 제어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단 한 가지만 남겨둔 채로요. 그건 바로 세상을 재창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몇십 초 동안 고요함이 회의장을 감돌았다.

"9의 말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이미 한 차례 멸망했었고 다시 창조된 것이라는 것이지?"

4가 9의 말을 요약하려 들었다. 9는 긍정의 표시로 한 것인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그동안 침묵을 지켜오던 5가 마침내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세상이 재창조되었다는 말인가?"

9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지금과 같은 방법이었습니다."


"에이 씨, 귀마개 이거 완전 쓸모가 없는데? 소리가 계속 들리잖아."

어두운 눈빛의 송 일병이 귓구멍에서 귀마개를 뽑아 바닥에 내던졌다. 바닥에 튕긴 귀마개는 몇 번 구르다가 문 앞에서 멈춰섰다. 성질이 나 급하게 귀마개를 빼버려서인지 송 일병은 빨개진 귓구멍을 만졌다. 박 이병은 계단통 옆에 있는 문을 랜턴으로 비추었다. 그의 떨리는 손 때문에 랜턴의 빛도 같이 흔들렸다. 모두가 김 하사의 말만을 기다렸다.

김 하사는 품속에서 무전기를 꺼내어 통신을 걸었다.

"아- 아- 사령부, 응답하라. 오버."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귓가를 맴도는 마찰음, 옅은 폭발음, 우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 소리, 소리…

"씨발, 모르겠다. 그냥 들어가자."

히스테리라도 난 것인지 김 하사는 분대원들에게 소리쳤다.

"예? 아, 아니, 잘못 들었습니다? 사- 상부의 명령이 내려온 후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박 이병이 말을 더듬으며 김 하사의 갑작스런 발언에 놀라워 했다. 곽 상병은 그런 박 이병이 한심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으랴? 당장 무너져도 안 이상할 건물에서 위험하게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냐?"

"하, 하지만…"

"그럴 바엔 전 차라리 들어가겠습니다. 나가봤자 더 이상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조 병장이 당당하게 말하였다. 입술을 내민 송 일병은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분대원들도 같은 의견인 것 같았다.

"모두 동의하는 모양새입니다."

"좋-아. 들어가보자고."

곽 상병이 긴장하며 녹슨 파란색 문의 둥근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 문과는 달리 이번 문은 손쉽게 열리었다.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두운 복도 양 옆에 달린 7개의 문이었다.

"또 문이야? 문, 문, 문. 이젠 문만 봐도 미쳐버리겠다, 진짜."

송 일병이 투덜거리며 전등으로 문들을 비추었다. 다른 이상성부 시설에도 유난히 문이 많았다. 김 하사는 그런 점이 미심쩍으면서도 이내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대원들은 살금살금 복도로 걸어갔다. 7개의 문은 잠겨 있었다. 문 너머에 무언가 있을 게 분명했다. 어째선지 가까이 다가가면서부터 소리가 더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시바… 진짜 사람 미치게 하는 곳이네."

정 일병이 문 옆의 명판을 읽고는 중얼거렸다. 명판에는 한글로 여러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알 수 없는 맥락의 조합이라 분명 아는 글자에 아는 단어인데도 무슨 의미인지 해석하기 어려웠다. 어떤 것은 아예 무언가에 긁혀 나가 읽을 수도 없었다.

"여기에는 볼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내려가야 하겠습니까?"

곽 상병이 김 하사를 바라보며 상황을 보고했다. 문에는 창문조차 달려 있지 않아 내부를 관측할 수는 없었다. 열화상 카메라로 보아도 짙은 푸른색의 배경만이 눈에 띄었다. 박 이병은 문을 보더니 고개를 휘저으며 아무것도 없어자고 말하였다. 김 하사는 한숨을 쉬며 분대원들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지하 2층으로 내려가자. 아마 이 망할 놈의 소리의 근원도 저 아래에 있을 거 같고. 정 힘들다 싶으면 무리해서 가지 않아도 돼."

"그- 그래도 전 혼자 있는 것보단 같이 가는 게 낫습니다."

"근데 너 괜찮냐?"

"괜찮습니다. 두통 때문에 머리가 조금 아프긴 한데 버틸 만합니다."

"오바하다가 쓰러지지 말고 힘들면 말해."

정 일병이 박 이병의 등을 토닥이며 계단 쪽으로 밀어주었다. 송 일병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하나 꺼내 계단에서 복도를 바라보는 쪽으로 카메라를 설치하였다. 지하 1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어? 아까 저거 뭐냐? 봤어?"

마지막으로 나오던 조 병장이 정 일병의 어깨를 툭툭 건들며 자신이 본 게 맞는지 확인을 시도하였다. 정 일병은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조 병장은 이상하다며 복도 안을 둘러봤지만 아까 봤던 이상한 무언가를 찾으려 애썼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이미 내려가는 분대원들을 따라 어두운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가 나오면서 다시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콘크리트 바닥을 걷는 소리마저 사라지자 희미한 마찰음만이 복도 안을 채웠다. 카메라는 알 수 없는 진동 때문에 흔들거렸다. 카메라의 네모난 화면 속에 무언가 나타났다.

하얀 형체 두엇이 화면 속에서 나타났다. 형체들이 카메라를 응시하였다. 가만히 선 채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카메라 너머에는 계단통이 있었다. 얼마 후 형체들은 희미해지며 모습을 감추었다. 다시 한 번 마찰음이 섞인 고요함이 내부를 맴돌았다. 이따금씩 속삭이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럼 8을 막아낼 방법이라는 건 없다는 거야? 아무리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4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에 9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4는 그런 9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5는 수염을 어루만지며 의자에 거의 누운 모습을 보였다.

"그나저나 자네는 어떻게 지금 이전의 세상의 일을 기억하는 거지? 8과 더불어서 말이야."

6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느릿느릿하게 질문했다.

"아주 극히 일부만이 그 세상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겁니다. 저와 8, 13, 그리고 '관리자'. 이렇게 4명이죠. 8이 또다시 총력적을 일으키기 전 그를 감시하고 제어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불행히도 이에 실패하고 말았지만요."

"13이 죽은 이유가 그 임무를 실패했기 때문인 걸지도 모르겠군.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을 테고."

5가 몸을 앞쪽으로 기울여 말했다. 1은 여전히 다른 O5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미동조차 없어 한편은 기괴하였다.

"8은 다시 자신의 주도 하에 움직이던 세상을 만들길 원했습니다. 그동안 O5 평의원으로 다니며 자신만의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왜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았던 거냐고? 자네도 8이랑 같은 생각이었나?"

4가 목소리를 높여 9에게 질타를 날렸다. 9는 반응하지 않았다. 어떤 심오한 뜻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음, 갑자기 말을 끼어들어 미안한데, 그럼 이상성부에 대해서 물어봐도 되겠는가?"

3의 질문을 들은 9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빛은 비장하면서도 공포에 빠져 있었고 입술은 말라들어갔다. 몇 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말할 수 있었다.

"이상성부는… 공장의 쓰레기장이나 다름 없습니다."

흥미로운 대답에 3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웃음을 지었다. 그의 표정을 본 사람은 없었다. 5는 헛웃음을 지었다. 9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4는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쓰레기장이라니, 뭔가 비밀이 있는가 보군."

6이 말하고 이에 9가 대답했다.

"그곳은 이전 세상의 잔재가 유일히 남아있는 곳입니다. 이전 세상에서 '변칙성'으로 취급된 물체들이 오늘날의 세상에선 그걸 넘어선 '이상성'으로 여겨진 것이죠. 8은 평의원의 권한을 사용하여 이상성부의 정체를 감추어 온 겁니다."

"이상성부의 그 이상성이라는 게 그런 의미였을 줄은… 전혀 몰랐네."

2가 말을 마치자 4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굳이 한 곳에 모아두지 않고 여러 곳에 분산시킨 건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나 보군."

"8은 재단을 '공장화'하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해 왔습니다. 일본 하시마섬이나 영국 런던에 있는 이상성부 시설로 추측되는 건물이 이제서야 발견되어 격리된 건 가 일부에 불과했죠. 이번에 시카고, 모스크바, 알제, 상파울루, 부산 등 각지에서 이상성부 시설의 정체가 밝혀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 숨길 필요조차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쓸모가 없다면 어쩌면 매우 특별할 '무언가'를 찾아내어 그동안 용도를 찾기 위해 구석에 박아둔 물건이 필요 없어지고, 그 결과 이상성부의 존재를 드러내버리는 거라는 말로 들리네."

3이 말을 해석하자 9는 긍정의 표시인지 모를 미소를 지었다. 잠시 9의 말을 곱씹어 보던 7이 갑자기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질문을 던졌다."

"잠깐만, 중간에 '공장화'라는 표현이 무슨 의미지?"

"8의 목적은 세계의 재창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재단을 '공장화'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변칙 개체를 대량 생산하고 재단을 이용하여 이를 관리하려는 속셈으로 여겨집니다."

공장화. 들어보지도 못한 단어에 평의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재단이 '공장'으로 변했다는 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재단이 그동안 힘들게 '확보'하고 돈을 들여 '격리'하고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감추며까지 '보호'하던 변칙 개체들은 모두 무엇이란 말인가. 침묵이 이어지던 중 3이 그 흐름을 끊었다.

"이거 참 흥미롭군. 재단의 근원이 그 가설대로 공장인 데다가 재단은 이미 그 공장 자체가 되어버렸다니. 관리자의 말도 이제 보니 달리 느껴지는구만."

확보, 격리, 보호.

3의 말이 끝나자 1이 마침내 말했다.

"상품을 '확보'하고, 용도를 찾을 때까지 보관, 즉 '격리'하고, 인류가 아닌 그 상품을 '보호'한다… 어디까지나 추측이나, 재단의 모토를 정한 건 '관리자'의 일이었으니 어쩌면 관리자도 8과 동업자일지도 모르겠군."

"아까 관리자도 지금 이전의 세상을 기억한다고 했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지. 그나저나 관리자가 어디 있는지는 아나, 1?"

6이 질문하였다. 1은 고개를 저으며 말하길,

"최근 들어서 연락이 없다네. 애초에 나조차도 그가 누구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상태라 직접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지. 어쩌면… 그도 이번 사태에 직접 관여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1의 한탄 섞인 말에도 9는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5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그럼 재단은 공장의 창고에 불과했다는 말인가? 공장의 상품을 보호하는 그런 역할일 뿐이었다고? 그럼, 관리자가 재단을 설립할 때부터 그래왔다는 말인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갔다.

"말을 좀 해봐, 1! 자네는 뭔가를 알고 있을 것 아닌가?"

1은 그의 호통에 주춤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네. 나도 아는 바가 없네."

"하, 좋아. 분명 관리자가 알고 있겠지. 직접 그와 만나봐야겠어."

5는 의자에 걸린 가죽 자켓을 입고는 일어섰다.

"이봐, 5. 무리한 짓은 그만두지? 누구인지도,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보다 이 세상이 멸망하는 게 더 빠를 거라고."

2가 등을 돌려 회의장을 박차나가는 5을 바라보았다. 5는 테이블에 눈을 향한 채 담담하게 말하였다.

"세상이 망하는 건 상관 없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거 하나만 알고 싶은 거니까. 1, 지금 알고 있는 관리자에 대한 정보 좀 나눠줄 수 있나?"

"알겠네, 알겠어. 흔쾌히 도와주지."

"고맙네. 아, 그나저나 9,"

5는 문 밖으로 나가기 전 차분히 앉아있는 9에게 짧은 질문을 던졌다.

"10은 지금 어디 있는지 아나?"


"8."

차가운 바닷바람이 여자의 얼굴을 스치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바다의 소금기 가득 든 짠내가 온 세상에 퍼지고 있었다. 밤하늘은 항상 그랬듯 하얀색 별빛을 내보내며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었다. 여자의 말을 들었는지 망망대해를 바라보던 키 큰 남자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네. 10."

작은 웃음을 지으며 여자를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앳되어 보였다. 그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나긋나긋하면서도 미심쩍었다. 이윽고 그는 자신의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10은 뒤로 살짝 물러설 뿐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갈색빛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무슨 일로 내게 찾아온 거지?"

"당신이야말로 잘 알 텐데, '공장장' 나으리."

비꼬는 말에도 8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바다로 향하였다. 거대한 살덩이가 굉음을 일으키면서 해수를 가르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으리라.

"아름다운 밤바다의 풍경이야. 저 웅장한 절경을 한 번 봐보라고. 수억 년 역사의 세상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건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지. 일생에서 한 번 밖에 볼 수 없는 광경이라네."

"그런 건 질문에 대답부터 하고 해주었음 하는데."

8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10은 불쾌했다. 자신을 이런 답답한 사내에게 보낸 9가 이해되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한 것이길래 그를 보낸 것인가.

여전히 파도 소리만이 있었다.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검푸른 바닷물이 잔잔히 몰려왔다가 물러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윳빛 물거품이 주위를 돌아보던 10의 눈에 띄었다.

"그럼 이야기를 말해도 될까?"

"물론. 알고 있는 이야기 모두를 말해주면 더 좋고."

8은 아까와 비슷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해수에 반사된 달빛이 씁쓸한 눈빛의 사내를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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