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알바시작한지 대략 한 달이 되었다. 이제 일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간다. 처음보다 일이 끝마치는 시간이 점점 앞당겨져 간다는 게 몸으로 느껴질 정도다. 하기야, 여기선 다른 공정에 비해선 크게 할 일이 없긴 하다. 가끔 원자재나 나르고, 불량품 분류하고, 완성품 나르고, 개수 확인하고… 다른 라인에서 근무하시다 온 김씨 아저씨 말론 다른 곳은 그렇게 더러울 수 없다고 한다. 기름때에 공장 소음은 기본이고 상사도 그렇게 딱딱할 수가 없다나. 여기 라인도 상사가 청결에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관여하시긴 하지만, 뭐 나도 깨끗한 걸 좋아하니 상관없다. 온갖 때에 절어 있는 것보다 훨씬 낫지. 뭣보다 여긴 알약 제조 라인 아니던가.
알바라서 딱히 관심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직도 이 라인에 뭘 만들고 있는지 잘 모른다. 끽해야 알약같이 생긴거. 마치 DHA 그 알약처럼 껍질이 투명하고 그 안에 약이 들어있는데, 이게 날마다 색깔이 바꿔서 나온다. 보통 노란색으로 나오다가 가끔 주황색이나 보라색, 녹색, 파란색도 본 거 같고… 그렇게 한 10가지 정도를 날마다 색이 바껴서 나온 걸 봐왔다. 처음엔 다 다른 약인가보다 했는데, 완성품 나르는 작업에서 상자에 '딸기맛', '포도맛', '콜라맛'이 써진 걸 봐서 다 같은 걸로 얼추 짐작했다. 아마 어린애들용인가보다. 뭐, 나야 그냥 방학 때 놀기 뭐해서 나온 거니 저게 뭔지까지는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평생 만날 일도 없을 것 같고.
요즘 정수기 물이 가끔가다 빨개 보인다. 김씨 아저씬 아마 니가 피곤해서 그런 것 같다고 얘기한다. 이게 한두 번이 아닌데 말이지. 흠, 주 중에 시간비면 병원이라도 한번 가볼까.
1.
'어제 들어온 게 103개, 오늘 들어온 게 54개, 총량 3902개….'
'케테르 등급'과 '해당인원 외 접근 절대금지'라는 표시가 붙은 창고 안에서, 쟈밀씨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안에 있는 물건이 재고조사지와 맞는지 천천히 살펴보고 있다. 창고 천장에 있는 등불이 자주 깜빡일 때마다, 그의 미간은 계속 씰룩거리고 그의 발걸음은 짜증이 오르는 게 대번에 느껴질 정도로 점점 건들건들해진다. 분명 그가 예전에 행정실에 등불 나갔다고 전구를 신청했는데도, 아직도 전구는커녕 그보다 훨씬 전에 신청했던 횐기필터도 보이질 않는다.
'..됐네 뭐. 훼손된 것도 없고, 아까 CCTV에서도 뭐 나온 게 없으니..'
상자 수를 빠짐없이 확인한 그는 창고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서류철을 입구 쪽에 있는 사물함에 넣고 잠근 후, 그는 휴게실에 가서 녹차를 우릴 물을 끓이고 다과를 꺼내와 잠시 쉴 준비를 하고 있다. 푹신한 검정 쿠션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오늘 했던 일을 잠시 되돌아보면서 곁에 있었던 후임 연구원의 말을 문득 떠올렸다.
"선배님, 솔직히 이거 손만 안 대면 그냥 안전급 아닌가요? 얘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요."
"얌마, 너 저번에 유출돼서 그 고생한 거 다 잊었어? 우리한테만 있는 거면 진작에 내려갔겠지만, 아직도 밖에서 팔리니까 우리가 이 고생을 해야 하는 거에요."
"그래도 요즘은 인터넷에서만 보이고 매장에서 팔리는 건 거의 없어 보이던데. 거기만 집중적으로만 감시하면 되는 거 아녜요?"
"허허, 얘 너무 안일하다. 공장이 하루이틀 장사하는 애들도 아니고, 계속 똑같은 곳에서만 팔고 있겠냐? 아 됐다. 가서 저거 옮기는 거나 도와줘."
"네~"
그렇게 대답하던 그였지만, 그도 역시 그 후배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도 그럴게, 이 알약이 케테르 등급이 붙은 것치고는 관리가 꽤 쉬운 편이다. 외부에 음료수 음용을 방지하는 캠페인이나 인터넷 데이터 사이사이에서 정보 찾아다니는게 좀 빡시긴하지만, 허구헌날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그나마 얌전해지는 놈들보단 훨씬 낫다. 이 알약 자체도 물을 한 없이 음료수로 만들어낸다는게 문제일 뿐, 음료수 자체는 독이나 해가 될만한 건 하나도 없다. 기껏해야 당이 올라간다는 정도. 또 그 음료수는 마시기만 한다면 노폐물로 정상적으로 배출될테니 처리하는 과정이 어렵지도 않다. 물론, "어머니의 세척법" 계획 내용이 이렇게 간단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이 약에 대한 처리방법이나 격리방법이 굉장히 쉽다는 것은 그 역시 완전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방금 달인 녹차가 오렌지색을 띠기 전까진 말이다.
처음엔 원래 녹차색이 주황색이었나 싶었다. 하지만, 원래 녹차라면 조금이라도 녹색 기가 서려야 할 것이 원래 오렌지 주스였던 마냥 물은 형광에 가까운 주황색을 띠고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바로 탁자에 내팽개치고는 싱크대에 있는 수도꼭지를 틀었더니, 꼭지의 끝에선 원래 투명해야 할 물이 누가 약이라도 탄듯 진한 빨간색으로 나오고 있다. 싱크대 바닥이 '물 색깔'로 채워지는 모습을 본 그는 순간 소름이 끼쳐 창고로 바로 달려가 자기가 재고확인을 잘못했는지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혹시 누가 중간에 누가 빼고 다시 상자를 덮고 갔는지 X-ray 판독기까지 써서 말이다. 하지만 웬걸, 재고상으론 전혀 문제가 없었고, 판독기에서도 중간에 없어진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재고 확인하면서 부랴부랴 윗선에 휴게실 수도 쪽에 문제가 생겼다고 얘기했는데 돌아온 답변은
"잘못 보신 거 아닙니까? 수돗물이나 녹차 전부 다 이상 없습니다. 수도탱크도 확인해봤지만 역시 이상 없습니다."
라고 무심하게 돌아올 뿐이었다. 그리고 뒤이어서
"일단 건강 체크해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중간에 밈에 감염되었을지도 모르니 특수검진-d형으로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라면서 단말기 통화음을 뚝 끊어버리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그는 다시 휴게실로 돌아와서는 엎질러진 오렌지 색의 녹찻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혀에 살짝 댔다. 희한하게도 그 물은 오렌지 주스 맛이 아니라 그저 맹물에 녹차를 우린 맛이었다. 싱크대에 있는 물도 여전히 빨간색을 띠었지만, 맛은커녕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적어도 자기 몸에만 이상이 있다는 걸 확인한 그는 안도하면서도 매우 허탈해하며 의자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도대체 뭘 어떻게 해왔길래 물 색깔 하나를 제대로 못 보는 반병신이 된 것인지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 꾸짖었다. 약 20분 동안을 자책과 멍 때림을 반복한 그는, 지친 기색으로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단말기로 검진예약을 신청했다.
2.
"..이상합니다. 쟈밀씨 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검진을 받은 지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온 진료실에는 혼란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 쟈밀씨는 물론이고 의료진인 캄포티드씨도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그럴 리가요? 지금도 제 앞에 있는 커피잔이 보라색으로 보이는걸요."
"일단 스트레스가 약간 쌓였다는 거 외에는 몸엔 이상이 없구요, 정신검진에서도 문제없고, 변칙성 피해 유무 검사에서도 음성으로 나왔습니다. 그냥 일반인이랑 똑같아요. 우리가 일반인에 대한 기준을 잘못 알고 있는게 아니라면 말이죠."
"허..뇌에 이상이 생겼나? 아직 대뇌피질쪽에선 결과 안 나왔죠?"
"네, 근데 시각 이상은 대부분 변칙성 피해 유무 검사에서 다루는 거라, MRI상으로 뇌세포가 변이된 흔적이 전혀 없는 걸보면 여기도 아마 정상으로 나올 거에요."
답답할 노릇이다. 책상 앞에 있는 커피잔은 물론이고, 상담실 오른쪽에 있는 창문에선 연두색 빗물이 쏟아져 내리는데 몸은 멀쩡히 정상이라니. 쟈밀씬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음, 예전에 베타-4단계 인식 개조 수술을 임상실험상으로 받은 기록이 있네요. 혹시 이 수술을 쟈밀씨말곤 받은 사람은 없나요?"
"어…저 말고 몇 명 더 모집한단 얘기를 듣긴 했는데, 일단 제가 제일 처음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집도의는 어디보자.. 지금 출장 가셨고, 그럼 수술 개발자를 한번 찾아가 보시겠습니까. 마침 비번이시네요."
여기서 더 있어 봤자 나올 것도 없고, 딱히 짚히는 데도 없겠다, 쟈밀씬 "그럼 그렇게 하죠."라고 말하며 상담실을 나섰다. 블랙버드, 이번에 오감 인식의 개선 및 왜곡 방지를 위해 새로운 수술법을 개발한 연구진 중 한 명이다. 주변 평판에선 '별 해괴한 말을 늘어놓는 꼬마 여자애와 같이 다니는 어벙한 사내'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감각 개선 관련 프로젝트에서 큰 공을 세우고 온 거나 이전에 부착형 홀로그램 생성기를 개발해 재단 인원과 민간인들을 구별해내 감각을 조종하여 격리작업에 큰 도움을 준 건 다들 인정해주는 등 자기 분야에선 나름 할 만큼 하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수술법을 개발한 것도 그의 공이 반절까진 아니라도 30% 이상은 들어간 셈이다.
"계십니까, 블랙버드씨? 예전에 임상실험받은 쟈밀 연구원입니다. 잠시 상담 좀 부탁합니다."
"예, 곧 갑니다~"
가벼이 두드린 문 너머에는 톤이 약간 높은 남성의 목소리가 약간 멀리서 들려온다. 약간 조급해하는 듯한 목소리는 총총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가까워지고 이내 문이 열린 현관엔 정리가 안 된 갈색 곱슬머리의 남성이 문고리를 잡고 쟈밀씨를 맞이하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마침 하피가 자고 있어서 조용히 얘기할 수 있겠네요. 뭔가 마실 거라도 내드릴까요?"
"어, 우유 한 잔 주세요. 데워서요."
블랙버드씬 싱긋 웃고는 주방으로 걸어갔다. 여타 다른 연구원의 숙소보다 꽤 넓은 편인 버드씨의 숙소는 크기에 비해 소박하게 꾸며져 있으며, 거실에 놓인 소파엔 약간 푸른기가 도는 검은 단발머리 여자애가 베개를 베고 이불을 덮은 채 자고 있었다. 주방엔 최신기기가 설비되어있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깔끔해 보인다.
"자, 여기 데운 우유입니다."
"감사합니다."
흰색 우유. 쟈밀씨가 본래 색으로 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음료 중 하나이다. 한동안 물 색깔에 시달리다 보니, 물은 하루에 필요한 만큼만 마시고, 나머진 유제품으로 대신해왔다. 우유가 아예 다른 색을 안 띄는 건 아니지만, 원래 과일 들어간 우유라고 생각하면 그냥저냥 괜찮은가보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못 본지 대략 한 달쯤 된 거 같네요."
후릅 "그런대로 지내고 있습니다."
"네, 수술받고 나서 불편한 건 없으신가요?"
"사실 오늘 온 게 그것 때문에 상담하러 온 겁니다."
"어,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네. 이것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3.
"그럼 이 컵에 있는 물이 전부 다른 색깔로 보인다구요?
"네, 여기 싱크대에서 나오는 물은 파란색, 여기 물통에 있는 건 녹색, 심지어 냉동실에 있는 성에까지도 분홍색으로 보입니다."
"흠…"
"그나마 다행인 게 땀은 색이 좀 옅더군요. 얼마 전에 땀 뻘뻘 흘리며 일하는 공사인부를 봤는데, 처음엔 몸에 왜 저렇게 황달 끼가 있는가 했습니다."
도자기 컵에 남아있는 우유를 비우면서, 쟈밀씨는 자신의 증상에 대해 상세히 말하고 있다. 블랙버드씨는 증상을 들으면서 자신이 개발했던 수술 내용에 무엇이 연관되어 있는지 필기 노트에 적으면서 비교해보고 있었다. 사실 쟈밀씬 땀뿐만 아니라 자기가 흘렸던 눈물 또한 주황색으로 본 적도 있었으나,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꺼내지 않았다.
"수술을 1달 전에 받으셨죠? 효과가 나타난 건 수술 4일 후였구요."
"네, 이런 일이 일어난 지는 2주쯤 됐구요."
"지금 이 수술을 받은 분이 쟈밀씨 포함해서 열 분이신데, 아직 뭔가 이상하단 얘긴 못 들어봤어요. 특수 건강검진에선 정상이라고 나왔다고 하셨죠?"
"네. 부작용이 나타났다거나 나빠졌다는 얘긴 전혀 없었나요?"
"전혀요. 굳이 따지자면 수술받은 사람 중 한 분이 안경을 쓰기 시작한 거밖에 없겠네요."
"음.. 이 수술이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도 같이 개선되는 거였죠? 혹시 다른 감각이 시각에 영향을 끼치는 사례가 있었나요?"
"감각끼리 합해져서 공감각적 능력을 갖게된 사례가 있긴 해요. 가령 냄새가 보인다던가, 소리에 맛이 느껴진다던가 말이죠. 다만 어느 한 감각이 다른 감각의 본래 기능을 크게 왜곡시키는 사례는 없습니다. 만약 쟈밀씨 증상이 물마다 성분을 구분해주는 능력이라면 어느정도 설명은 될 것 같습니다만.."
"아마 그건 아닐 겁니다. 물 받아서 한번 끓여 보던가 다른 걸 타보던가 해서 성분을 바꿔봤는데 달리 변하는 게 없었어요."
"중간에 다른 개체를 관리하셨다던가 접촉한 적은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예전에 밈을 두 개 관리한 적 있긴 한데, 아시다시피 수술 3주 전에 다른 곳에 배치됐습니다. 수술 전에 했었던 밈적 영향 여부 검사도 음성으로 나왔습니다.
"흠… 알 수가 없네요. 이 수술이 대뇌세포에 단백질 나노로봇을 투입해서 데이터를 주입한 후에 뇌에 그대로 흡수하는 방식인데, 이 흡수 과정에서 뇌세포를 변형시킨 것이면 모를까, 뇌 검사에서도 변형된 게 없다고 하니.. 그때 들어간 나노로봇에 저장된 데이터 내용도 시각 쪽으론 변칙성 감지 및 구분에 대해서만 써져있지, 감각 기능 자체를 수정시키는 내용은 위험성이 다분해서 배제했어요."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자, 한동안 둘 사이엔 펜을 두들기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거실에는 여자아이의 쌕쌕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저, 그러면 저희 둘이서 내일 대성 박사님을 만나보는게 어떨까요? 이분도 저랑 같이 수술법을 개발하셨고, 자기가 직접 임상실험에 참여하셨거든요."
"그럴까요? 그분도 별말씀 없으셨죠?"
"네. 워낙에 말이 없으시기도 하지만, 불편해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 내일 보죠. 아침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우유가 바닥에 조금 남은 컵을 싱크대에 갖다 놓은 후, 쟈밀씨는 버드씨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도중에 소파에 누워있던 여자애가 게슴츠레 눈을 뜬 채 깨어있던 걸 봤지만, 눈인사만 간단히 하고 갔다.
4.
"어서 오게."
쟈밀씨가 아침 일찍 찾아간 블랙버드씨 숙소 문 앞에는 블랙버드 본인이 아니고 다름 아닌 그의 애완동물'이었던' 하피가 그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청바지에 보라색 면티, 검은 가디건을 걸친 모습에 반쯤 눈을 뜬 채 무표정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어린애치고는 약간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긴 하지만 겉보기엔 일반 청소년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가녀린 목에 걸쳐진 '타입 A-032 / B.Harpy'라고 써진 플라스틱 명함판은 그녀가 실험 도중에 나타난 개체란 걸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쟈밀씨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마중과 무심한 말투에 내심 당황했다.
"어..안녕하세요?"
"어젠 육신의 안식을 취하느라 제대로 인사를 못했구만. 소개하지. 나는 부패한 콘돌안에서 봉인됐다가 청옥의 부름에 깨어나 강림하여, 지금은 한때 콘돌의 권속에 매달렸었던 자를 구원해주고 있는 원환의 타천사, 브리스티.B.다비라고 하네. 뭐, 그냥 편히 하피라고 부르게나."
"어, 네. 반갑습니다. 연구원 쟈밀이라고 합니다."
"지금 녀석은 아직 어제의 과오를 다 벗겨내는 중이라 좀 늦을 거라네. 잠시 기다리게나."
"네….뭐, 알겠습니다."
아마 그녀는 그 주인이 아직 세면중이라고 말하려는 듯 했다. 쟈밀씨는 아직 잠이 몽롱하게 남은 것도 있어 약간 부아가 치밀어올랐지만, 그냥 그러려니하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어제 자네에 대해서 대충 들었네, 지금 마안의 저주에 걸린 것 같다고 했나?"
"그렇죠."
"참 애석한 일이로군. 새로운 힘을 얻는 데엔 다 저주가 깃들기 마련이니."
"네, 뭐 그렇네요."
"근데, 그게 정말 저주라고 생각하나?"
"네?"
"내 생각엔 자넨 지금 진실의 문에 한 발짝 다가선 거라고 생각된다네."
"그게 무슨 소리죠?"
"자네가 얻은 힘은 거짓된 모습을 들춰내고 조금 더 고결한 진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지. 여태까지 우리가 봐왔던 생명수의 고결한 모습은 사실 화려하면서도 방탕한 모습을 감추기 위한 위선의 로브가 아니었을까? 자넨 그 로브를 가차 없이 벗겨낸 거고 말이지."
아까부터 이 애는 왜 나한테 자꾸 반말인가 하는 불만을 가진 그였지만, 그는 대충 맞장구쳐주기로 했다.
"아니죠, 그 음료수는 특수약품이나 사람 몸에서 분해되고 나머진 그냥 물로 나오는데, 그게 아니고 그냥 음료수로 나온거라구요? 그럼 전 세계 사람들은 전부 당뇨로 병에 걸리고도 남았죠."
"아무리 인간들이 만들어냈다지만, 오직 인간만이 정화할 수 있다는게 오히려 더 석연치 않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 약재도 인간에게서 가져온 에메랄드의 과실즙에서 가져온게 아니던가."
"…..글쎄요, 그래도-"
"나는 지금 회색 철갑 상인의 옥구슬의 눈물에 대해서 얘기하는게 아니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옥구슬이 흘린 눈물 색의 향연에 대한거지. 샐러맨더의 땀과 세이렌의 눈물이 합쳤는데, 어찌하여 바이올렛의 꿀물이 되지 않고 샐러맨더의 땀만이 남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나?"
쟈밀씨는 순간 깜짝 놀랬다. 방금 그녀가 말한 것은 블랙버드씨와의 상담에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으며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대성 박사라고 했나? 전에 저 녀석 몰래 만난 적이 있지. 그리고 난 거기서 보이지 않았던 세상의 본모습을 한 꺼풀 나마 벗겨내 볼 수 있었다네."
"네?"
"내 장담하지. 자넨 지금 허황된 거짓에 휘말린게 아니고 혼란스러운 진실에 휩싸여 정신을 못 차리는 걸세. 이 몸에 있는 썩어빠진 콘돌을 걸고 맹세하지."
말을 끝내고 주먹으로 가슴을 가벼이 치면서 씩 웃어 보이는 그녀의 당당한 태도는 충분히 그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언행엔 흔들림이 없으며, 뭔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얘기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한 번 더 놀랐는데, 이번 수술 효과 중 하나인 참/거짓 판단능력에서 그녀의 말이 다 참이었다고 뇌에서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누구보다 더 자신 있어 보였고, 그 옆에는 그녀의 예전 모습이었던 앵무새가 신기루처럼 어렴풋하게 보였다.
"에고,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앵무새의 형체가 막 뚜렷이 보이려던 찰나,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블랙버드씨가 나온다. 문밖을 막 나선 모습은 어제보단 깔끔하지만, 머리는 아직 덜 마른 채 헝클어져 있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나진 않았어요."
"생명 간의 약속은 곧 신뢰의 사슬고리일터, 어찌 자신의 고리를 끊어놓으려 하느냐."
"네네, 알-겠어요. 우리 타천사님~"
"하, 언제까지 내가 네 녀석의 수발을 들어줘야 하는지."
블랙버드씨가 나오기 전까지 웃고 있었던 그녀가 다시 입꼬리를 내려 무표정으로 바꾼 채 그를 나무라자 그는 으레 그래 왔었던 듯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쓰다듬을 당해서 머리가 그 주인의 머리처럼 헝클어져 가는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면서도 얼굴을 살짝 붉혔다. 방금 쟈밀씨가 봤었던 그 모든 걸 다 아는듯한 당당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딱 세침데기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 가시죠. 지금 가면 딱 시간에 맞겠네요."
"그러죠.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하피씨."
"그대들의 길에 평안이 기원하길."
인사를 나눈 두 남성이 복도로 걸어가면서 그 중 쟈밀씨는 괜시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랬더니 하피와 눈이 딱 맞아버렸는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게 다시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다시 앞을 보았으며, 그녀는 그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하며 살짝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자신의 숙소로 되돌아갔다.
5.
"박사님, 박사님? 계십니까? 블랙버드입니다. 저번에 임상실험 받은 분과 같이 왔습니다. 박사님-? 에효, 또 어디 계신담."
분명 프로젝트실로 배정받기 전의 A동 3층 제2회의실은 건물 안에서 제일 넓은 곳이었지만, 지금은 갖가지 문서와 컴퓨터 빛 각종 분석기기로 가득 찼다. 어떤 곳은 아예 문서로만 벽을 이룬 채 쌓여있었다. 지금은 프로젝트 일부가 끝나서 기계가 대부분 꺼져있고 커튼이 다 쳐져 있는 등 잠시 소강상태이지만, 몇몇 기기들이 아직 계속 작동하고 있다.
….컹
"어디 코 고는 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요?"
"어, 네. 저기 문서 더미 쪽이네요. 박사님-"
창문 쪽에 문서로 둘러싸인 쪽으로 가보니 문서 더미 뒤쪽으로 옆머리만이 남은 60대 노인 남성 한 명이 안대를 쓰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오침 시간인 건가요?"
"아뇨, 그냥 자는거에요. -저 박사님, 블랙버드입니다."
블랙버드가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하자 조금 전까지 푹 자고 있었던 그가 "크헝"하면서 약간 움찔거렸다. 그러고는 양팔을 깍지끼고는 기지개를 피더니 안대를 벗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두 남자를 맹하니 쳐다봤다.
"크흠, 왔나? ..옆엔 누군가?"
"아, 네. 저번에 베타-4단계 인식 개조 수술을 받았던 쟈밀 연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때 수술 날 한번 뵀었습니다."
"…그랬나? 기억이 안 나는군. ..해서 여기 온 이유가 뭔가?"
"저, 그게 이 분이 수술받고 며칠 뒤에 물 색깔이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더라구요. 특수건강검진-d형에서도 별다른 결과는 안 나왔구요."
"물 색깔?"
물 색깔이란 말을 듣자 노인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러더니 책상에 있는 안경을 쓰고 "잠시만"하고는 주머니에 있는 펜을 꺼내 쟈밀씨의 왼쪽 손등을 당겨 살짝 찔러보더니 입을 비쭉거렸다.
"감각 간 싱크로 과잉은 아닌거 같은데? 수술을 언제 받았다고 했지?"
"한 달 전쯤에 맨 처음으로 받았습니다."
"물 색깔 말고 다른 증상은 없었나?"
"그때 수술 효과로 보일 수 있는 거 말고는 이상한 건 없었습니다."
대답을 들은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책상 위에 있던 문서들을 모아 정리하고는 블랙버드씨에게 건네주었다. 문서 안에는 각종 그래프와 글자로 빼곡히 가득 찼다.
"자, 여기 자네가 저번에 정리했던 차트일세."
"아, 네."
"들고 가서 마저 작업하게나. 이 분은 나하고 얘기하고 있겠네."
"어..네, 알겠습니다. 그럼.."
문서를 받아든 블랙버드씬 둘에게 인사하고 바로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완전히 나간 걸 본 노인은 연구실 중앙에 있는 책상에서 서랍을 뒤지더니, 소형기기가 부착된 렌즈 하나와 물이 든 컵을 들고 쟈밀씨에게 다가갔다.
"지금 이 물이 무슨 색으로 보이나?"
"지금은 노란색으로 보입니다."
그러더니 노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주머니에 있던 리모콘을 꺼내 만지작거리더니, 렌즈에 있던 소형기기의 불이 반짝였다. 그리고는 그 렌즈를 쟈밀씨 눈에 갖다대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어, 지금 아무 색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이 더 선명해진 것도 같구요."
"흠흠…"
그리고는 렌즈를 다시 서랍 안에 넣고 이번엔 뿔테안경을 주는 것이다. 안경을 받아 쓴 쟈밀씨의 시선에는 이전까지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물색을 비로소 물만의 투명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 이젠 완전히 잘 보입니다. 이 안경은 뭔가요?"
"그 렌즈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개선단계를 낮춰주는 기능렌즈인가요?"
"아닐세, 바로 감각공유기능을 가진 렌즈일세."
"감각공유요?"
"그래, 이 렌즈는 지금 시각만 공유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자네가 눈이 살짝 나빠서 다행이구만. 테는 뿔테 말고도 다른 것도 가능하니 골라보게나."
"저 잠시만요, 박사님. 감각공유라면 지금 타인의 감각을 쓰고있다는건데, 지금 그 타인은…?"
"아, 그래. 그것부터 설명해야겠구만. 따라오게나."
각종 안경테로 가득 찬 서랍을 열어 보여주던 대성 박사는 그제야 떠올렸다는 듯이 서랍을 닫고 서류 더미가 벽을 이룬 곳으로 걸어갔다. 벽에 다다르자, 서류에 끼워진 줄 한줄을 잡아당기더니 서류 더미 한 곳이 커튼처럼 스르륵 올라가 접히고 그 안에는 숨겨진 문이 있었다.
"홀로그램 블라인드일세. 변칙적인 거 없이 착시현상을 약간 이용한거라 자네 눈에도 잘 구별이 안 갈 거라네."
"아.."
"들어오게나."
다시 블라인드를 내린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기계식 관이 쭉 들어선 곳이다. 관 뚜껑에는 내부를 볼 수 있도록 유리창이 달려있으며, 유리창을 통해 밝은 푸른빛이 나오고 있었다. 아까 연구실도 몇몇 기기만 빼고 다 꺼져있어 꽤 조용했지만, 여기는 쿨러소리만 조용히 들릴 뿐 조용을 넘어서 침묵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쟈밀씨는 잠시 멋쩍게 쳐다보다가 걸음을 한 발짝씩 옮겨 관 내부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관 안에는 다름 아닌 D계급 인원들이 관자놀이에 뭔가를 부착한 채로 들어가 있었다.
"저, 박사님. 이분들은 대체 누구죠?"
"보다시피 D계급. 원래 월말처리자였지. 지금은 냉동인간 상태일세."
"냉동인간 말입니까?"
"그래, 자네가 지금 쓰고 있는 안경이 어디 보자.. 여기 9번 관에 있는 사람의 시각을 공유한걸세."
"어…잠깐 이해가 안되는데.. 그럼 저 말고도 다른 아홉 분들도 이런 일을 겪은건가요?"
"여덟 명일세. 자네를 뺀다면."
"그럼 한 명은-"
"그 사람은 맹인일세. 블랙버드가 모르고 말 안 했나 보군."
"…"
"뭐..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아까 얘기했듯이 자네 말고도 똑같은 현상을 겪은 사람이 있었다네. 나도 포함해서 말이지.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안 되니 이 D계급 인원들의 감각을 쓰는 걸로 해결했지. 이 사람들도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생명은 보장된 셈이고 공유된 감각은 손상되거나 노화되지 않으니 흠이 될 게 없지."
"저, 그러면 이 현상은 완전히 고칠 방법은 없는 건가요?"
"음- 그렇게 사태를 일단락한 후에 그 현상에 대해서 좀 더 조사해봤는데 얼마 안 가 결론에 다다르렀지. 애석하게도 이 현상은 그냥 정상일세."
"네? 조사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아니야. 내가 계속 조사하고 조사해봐도 똑같더군. 그래서 한번 물 자체를 조사해봤더니, 놀라운 걸 발견했네."
"…?"
의구심에 가득 찬 그를 뒤로하고, 노인은 한쪽에 있는 컴퓨터에 다가가 자판을 두들기면서 프로젝터를 리모콘으로 켰다. 프로젝터로 비춘 스크린에는 재단 인트라넷 로고가 띄워져 있다.
"저기, 뭘 하시는 건지-"
"자네, 수술받고 나서 위성지도를 본 적 있나?"
"….네?"
노인은 말을 끝내면서 컴퓨터 화면에 현 전 세계 위성지도 화면을 띄웠다. 쟈밀씨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쓰고 있는 안경을 천천히 벗겨 스크린을 쳐다보자, 그대로 주저앉았다.
"공장이 아주 큰 일을 냈지. 감당할 수도 없는 짓을 저질렀어."
스크린에 비춰진 지도는 더이상 우리가 알고 있던 푸른 바다와 녹색 대륙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오만가지 잡색이 전 세계를 휘젓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6.
"어..그러니까 저게 지금.."
"세계의 진짜 모습일세. 자세히 보면 강도 핏줄처럼 울긋불긋하고, 아마존이나 다른 숲도 물을 먹고 다른 색이 나왔고, 북극하고 남극은..뭐, 딱 보는 그대로일세."
"…"
"해조류는 이 난리에도 별 반응이 없다네. 참 신기하지."
실시간으로 색이 뒤바뀌는 위성지도를 바라보면서,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히 얘기한다.
"그…물을 조사하셨다는데 내용이 어땠습니까?"
"성분 분석이야 자네도 해봤을 테니까 넘어가고, 뭘 해도 안 되니까 그냥 머리 식힐 겸 빛 스펙트럼을 분석했지. 빛 스펙트럼이 백색 빛이면 꽉 차고, 아니면 몇 줄만 표시되는거, 자네도 알고 있지?"
"네."
"결과지를 들고 난 깜짝 놀랐다네. 스펙트럼이 끊기지 않고, 꽉 차있었는데, 이게 연속 스펙트럼처럼 색이 배열된게 아니라 한 색깔로만 꽉 채워져 있었다네. 분홍빛 물이면 분홍색, 녹색빛 물이면 녹색으로 말이지. 분석기가 잘못됐나 해서 백열등으로 해봤는데 이 녀석은 또 정상 연속 스펙트럼으로 나왔어. 헌데 더 가관인 건, 그걸 들고 다른 녀석한테 물어보니 왜 연속 스펙트럼 두 장을 갖고 계시는 거냐고 되묻더군. 여기 스펙트럼 분석 결과지일세. 그때 이후로 몇 번 더 해봤지만, 결과는 똑같았어."
쟈밀씨가 받아든 결과지엔 하나같이 단색으로 칠해진 직사각형밖에 보이지 않았다. 직사각형 윗변엔 파장을 나타내는 기호와 수치가 적혀져 있었다.
"나도 이 스펙트럼이 왜 이렇게 나오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네만, 일단 지금 물 자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이더군. 왜 이렇게 된 거지하고 자료를 찾아보다가, 자네가 맡은 알약에 대한 성분분석표를 보았지. 결과야 뭐 그냥 슈퍼에서 파는 음료수하고 다른 게 없지만, 비고란에 이렇게 적혀져 있었다네. '증발분리법을 통한 실험은 예상대로 당 찌꺼기와 물로 나뉘었는데, 이상하게도 변칙성감지기에는 당찌꺼기뿐만 아니라 물에도 변칙성이 감지됐다.'라고 말이지."
"그, 원래 그 음료수 자체는 전염성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물에도 변칙성을 같이 공유하는 거구요."
"해서 당 찌꺼기와 분리된 물을 다시 물에 넣는 실험을 해봤더니, 당 찌꺼기만 물을 음료수로 만들고 물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네. 희한하게도 이때 변칙성은 또 감지가 안 됐었다고 하네."
"허…"
"이건 내 가설이네만, 그때 물이 갖고 있었던 변칙성은 아마 음료수 색의 고정이 아니었을까 싶네. 노폐물로 나온 물이 되돌아온 것처럼 보인 것은 우리 몸 어딘가에 물에 대한 인식을 바꿔주는 성분이 있는 것 같고."
노인은 말을 마치고 잠시 몸을 일으켜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 물을 꺼내 마시고 컵을 든 채로 다시 되돌아 왔다. 이러한 얘기를 처음하는게 아닌 듯, 노인은 막힘없이 흐르듯이 말하고 있다.
"-뭐, 그 외에도 색의 우위 관계라던가, 노폐물로 배출된 물은 왜 변칙성이 감지 안됐는가 등등 연구할게 여러가지 있었지만, 일단은 먼저 상부한테 비상상황이라고 얘기하면서 보고를 해봤다네. 절대 거짓이 아니며 내가 지금 누구한테 조종당하는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보이스 지문-4단계까지 쓰면서 말이지. 그랬더니 뭐라고 답변이 온 줄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이 문서 한 번 읽어보게. 앞에 말고 뒷면만. 뭐, 원래 그건 O5 허락을 받아야 하네만 어차피 나갈 때 부분 기억소거를 해줄 테니 상관없네."
"어…네."
노인이 건네준 서류엔 재단이 예전에 격리에 실패한 개체에 대한 설명과 그에 대한 O5의 전달문을 대략 요약한게 적혀져 있다. 문서 맨 위에는 [열람 승인자: O5-2]라고 도장으로 찍혀져 있었다.
"보다시피 그거는 너무 많이 퍼졌었고, 또 너무 많이 사람들이 봐서 격리 자체가 불가능했지. 그래서 그때 O5는 그 현상 자체는 보는 거 외에는 피해 같은게 전혀 없으니 그냥 원래 그랬던 것으로 퉁치자고 했었다네. 이번에도 그랬어. 물 자체는 예전에도 똑같았고, 색깔 말고는 피해 상황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으니 그냥 덮어두자고. 전하고 다른 거라면 그땐 민간인들이 너무 많이 알아버렸지만, 지금은 우리 만이 알고 있을 뿐이지."
"저, 그럼 박사님 말고도 다른 분들도 이 정보를 다 알고 있는 건가요?"
"그래, 사실 이 정보는 내가 수술받고 나서 5일 차에 다 알아낸 거라네. 그리고 그 뒤에는 임상실험 지원자에게 이 정보를 미리 얘기하면서 수술받기 싫다면 기억조작을 해줘서 내보냈고, 할 사람만 받아서 수술해줬다네. 그러고는 다들 그 안경 하나씩 챙겨갔지. 대부분 안경 새로 맞출 겸해서 말이지."
"그럼, 저는 그때 왜 부르지 않으신겁니까?"
"나도 모르겠네. 내가 분명 이전에 수술받은 사람도 같이 불러오라 했는데 자네가 못 들은 것 같군. 원래 그 증상도 대부분 수술받은 직후에 나타나는 거라 다들 잊어버렸던 것도 같네. 미안하네."
"…"
"뭐, 상황이 그렇게 됐고. 자네는 그 안경을 쓰면서 평소처럼 살아가면 될걸세. 어, 자네가 그럴 사람은 아닐 것 같아 보이네만, 만일 이 내용을 퍼뜨리려는 즉시 안경 안에 있는 기절유도제가 투입이 될걸세. 설사 얘기를 어찌저찌 했다 해도 2-3일 내로 주변사람들 기억소거처리하고 당사자는 바로 전출 보내버릴걸세."
"혼란가중을 막기 위해섭니까?"
"그렇지. 도시에 청년 한 명이 갑자기 비가 빨간색이다라고 외치면 미친놈처럼 보겠지만, 우리같이 먹물 좀 먹은 사람들이 자세히 설명하면 재단 안에서라도 그 파급력은 생각보다 엄청나다네. 아무쪼록 조심하게나."
쟈밀씬 손에 쥐고 있는 안경과 뒤에 있는 냉동인간 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관 속에 있는 인간은 편안히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안경다리에는 조그마한 구멍이 나 있다. 그러고는 다시 안경을 써보았다. 안경을 통해 본 지도는 그가 평소에 알고 있었던 바로 그 푸른색 세계지도였다. 이 모습이 사실은 거짓된 모습이었다니, 여러모로 심란해 하는 그였다.
"저,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뭔가?"
"여기에 타입-A 변칙개체가 온 이유가 뭡니까?"
노인은 그의 물음에 콧방귀를 뀌며 살짝 웃었다.
"그 꼬마애가 진짜 별거 아닌 꼬마애라고 생각하나?"
"네?"
"이 말만 하지. 보통 그 돌에 닿은 사람은 변칙성 단계 2를 기록했지만, 그 애는 5를 기록했어."
"…?"
"이만 가보게나."
쟈밀씬 의문을 풀리지 않은 채 떨떠름해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의문은 얼마 안 가 홀로그램 블라인드 쪽에 숨겨져 있는 기억소거제에 의해 말끔히 사라졌다.
7.
"선배님, 언제부터 눈이 나빠지셨나요?"
"좀 됐어. 요즘 눈이 침침하길래 새로 하나 맞췄다."
오늘 새로 들어온 개체 수를 파악하기 위해, 쟈밀씨와 그의 후배를 포함해 다른 부서에 있던 사람들도 같이 불러서 리스트를 들고 여기저기 들여다보고 있다. 예전에는 종류가 5가지밖에 안 됐고, 하루 입고량이 70개 안팎이었으나, 요즘은 가짓수가 14가지로 늘어났고, 입고량도 5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약을 보관할 창고가 점점 가득 차자, 한쪽에선 차라리 약을 풀고 다 마셔버리자는 마냥 웃을 수도 없는 제안이 올라올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조사하던 중 물건을 실은 트럭이 또 들어오자, 다들 한숨만 쉬었다.
"또 들어오네 저거. 이거 파악하고 옮기는데 시간이 꽤 걸리겠는데?"
"그러게요. 공장 녀석들은 어쩌려고 이렇게나 많이 만들어 놓을까요? 나중에 감당이나 하려나."
"글쎄다. 이거 말고도 다른 것도 많이도 만드는데 말이지. -뭐, 사실 공산품치곤 하루입고량이 엄청 적은편이긴 한데 말이지."
"어..그건 그렇네요. 여튼, 전보다 일이 엄청 빡세졌네요."
"뭐 그렇지. 자, 마저 끝내자구."
"네."
쟈밀씨가 상자 라벨을 이리저리 찾아보며 허리를 숙이다가, 관자놀이에 흐르던 땀 때문에 안경이 떨어졌다. 다시 안경을 들어 올리려다가, 그는 상자에 떨어진 땀방울 자국을 봤다. 보라색이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안경을 들어 귀에 제대로 걸쳤다.
현재 파악된 상자 수는 458개, 그 안에 들어간 약상자 수는 상자당 150개. 방금 들어왔던 트럭은 다시 상자를 실으러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