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테인먼트의 사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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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빗소리는 회의실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원더테인먼트 사옥 내에서도 가장 어두침침하고 으슥한 공간. 제2회의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그 공간, 발랄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가득한 사옥의 다른 부분과는 천지 차이인 그곳은 원더테인먼트 법무부의 소유임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강한 회색빛 색채를 풍기고 있었다.

그곳이 오늘의 협상 장소였다.

빗줄기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배경으로 마주 앉은 두 진영 사이에는 미약한 냉기가 스산하게 흐르고 있었다. 열띤 말이 오가는 사이사이에서 던져지는 미끼와도 같은 말. 입질이 오는 순간, 그걸 낚아채는 자가 이 협상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너머에서 던져지는 수많은 미끼. 이곳의 말과 말 사이에서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구분이 없어, 서로가 서로에게 미끼를 던지고 입질을 기다렸다. 상대편의 누구든 부디 낚싯대를 던지고 바닥에 엎어져 떨어진 부스러기를 게걸스레 먹길 바라면서.

헤럴드 윤은 그 테이블의 왼편 3번째 자리에서 이 거대한 우로보로스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는 마셜, 카터&다크 유한책임조합을 대표하는 협상단의 일원으로 그 자리에 나와 있었다. 물론 주요 협상을 담당할 정도로 직급이 높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이 모든 암투의 급류를 정통으로 맞고 서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적재적소에 좋은 도움만 제공하면 되었을 뿐.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되었을 텐데.

윤은 굳은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긴장 상태를,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욕지기를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고통스러운 감정들이 긴 잠복기를 끝내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협상 때문이 아니었다. 윤은 이와 같은 일을 이미 수차례나 겪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준비도 철저했다. 긴장할 일이 뭐가 있을까. 아니, 애초에 긴장 자체가 제거되었는걸.

공간 자체의 문제 탓이었다.

넌 이제부터……넌 내 동생이야…

통증.

윤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억은 지난 25년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빠른 망각에 언제나 감사했다. 적어도 옛 나날을 잊을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그는 아무렴 좋았다. 그러나 이 건물, 이 빌어먹을 정도로 아이스크림 냄새가 진동을 하는 이 건물에서는, 그 감사도 녹아내린 하드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인즉 이 건물에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부터, 기억은 그에게 덮쳐왔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기억들. 어린 시절의 짙은 안개. 차마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다른 이들을 방해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의 의식 속에는 오직 이 저주받은 공간에서 달아나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은 바람밖에는 없었다.

"…윤."

목소리. 헤럴드 윤은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가, 그제야 그때가 자신이 발언할 차례였음을 깨닫고 초조하게 침을 삼켰다. 보아하니 몇 초간의 공백이 생긴 모양이었다. 낭패다.

그는 조심스럽게 양쪽 모두에게 사과를 표하며, 사전에 연습한 발언을 끝마쳤다. 다행히 그의 실책이 협상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금, 대화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한 가지만 없었더라면, 그는 마음 놓고 다시 상황에 집중할 수 있었으리라.

누군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테이블의 말단에 앉아있는 여자, 원더테인먼트 측의 인물. 윤은 바로 얼굴을 돌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곁눈질로 그 불명의 관찰자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 주의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설마 내가 허점을 만든 건가. 내가 허점이 된 걸까. 머릿속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졌다.

붉은 머리에, 총명한 눈빛. 주근깨가 살짝 내려앉은 얼굴. 적갈색 정장. 어딘지 친숙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이네."

윤은 종이컵을 입에 대었다가, 한숨을 내쉬며 창틀에 올려놓았다. "안녕."

붉은 머리의 여자는 어딘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윤은 그를 알았다. 아주 오랫동안 알았고, 아주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이.

그들은 회의실 밖의 복도 위에 서 있었다. 1차 회의는 끝이 났다. 30분 후의 2차 회의는 다른 팀이 와서 이어나가기로 했다. 윤의 팀은 후발팀을 보조하고 귀환해야 했다. 윤은 어렵지 않게 정수기를 찾을 수 있었다. 정수기의 위치는 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웃기지도 않은 민트 맛 생수가 나오는 정수기는. 그가 막 한 잔을 따라 입에 댈 찰나에, 그녀가 따라왔다. 아까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금세 그녀가 따라온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원하지 않던 기억과 함께.

"기억 양Ms. Remember."

"나는 이제 그 이름 안 써." 여자가 빙긋, 그러나 약간 슬프게, 웃었다. "난 메리야. 메리 베르나르Merry Bernhardt. 이사회가 나한테 취업 기회와 새 신분을 줬어. 지금은 원더테인먼트 물류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 아직 집은 없지만."

"집이 없다니."

메리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는 거야, 전처럼."

"…그래."

빗소리를 배경으로 한 채,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둘은 섣불리 서로에게 어떠한 주제도 던져댈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윤은 심장에 식은 부싯돌이 던져지는 것과 같은 중력을 느꼈다.

침묵을 깬 건 메리였다.

"넌 어때, 저—"

"미안한데, 날 그 이름으로는 부르지 마."

윤이 말을 낚아챘다.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내보이면 머릿속 어딘가에 묻혀 있던 기억이 잠에서 깨어날 것만 같았다. 간신히 억누르고, 간신히 회상치 않으려고 했던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다시 그곳에 매일 수는 없었다. 잠시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는 놀란 메리를, 그리고 메리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추악한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기억 대신 자괴감과 모멸감이 치솟았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미안하다고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헤럴드 윤. 그게 내 이름이야."

"그래, 좋은 이름이네." 메리가 미약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서, 이제… 다크 씨의 상점에서 지내는 거야?"

"…그렇게 됐어. 그리고…" 윤이 침을 삼켰다. "미안해. 편지하려고 했었어. 그런데 일이—"

"일이 너무 바빴겠지. 이해해."

침묵은 다시 찾아왔다. 둘은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윤에게서 느껴지는 필요 이상의 비밀스러운 분위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윤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줄 수 있는 안부가 없었으므로 받을 수 있는 안부도 없었다. 나아가 이런 지긋지긋한 곳에서의 안부란 듣지 않는 것이 훨씬 나았다.

묻고 싶은 것은 그저 단 한 가지였다.

"…이사벨은 어때?"

"잘 살고 있지." 메리가 대답했다. "비서랑 짝짜꿍이 잘 맞아. 매년 전해 매출을 상회하고 있어. 원더테인먼트는…번영하고 있어. 잘 이어받은 거지."

"잘 됐네."

윤은 굳은 얼굴로 물을 홀짝였다. 민트 향이 나는 액체가 목을 타고 흘러내려 갈 때, 그는 어딘가 날카로운 것이 목구멍을 후벼 파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주 오래전, 탄생 직전 겪었던 어떤 고통의 연속이 떠올랐다.

"…리틀 미스터즈가 매출이 좋다는 건 들었어."

메리의 얼굴이 긴장하는 것이 서서히 느껴졌다. 그의 이마 위를 덮은 짙은 붉은 물결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아주 느리게 시야에 들어왔다. 메리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목을 가다듬었다.

"주력 상품이잖아, 재단에서도 수요가 있는 상품인데. 다크 씨의 상점에서도 미스터즈가 거래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어."

그의 말이 맞았다. 윤은 거래 명세서에서 그 지긋지긋한 이름이 몇 번이나 오르내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입 사원이었던 나날, 그러한 활자들은 비수가 되어 가슴 깊숙한 곳을 찔렀었다. 윤은 그날 몇 번이고 욕지기를 참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사가지." 윤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다행이야. 그래도 그게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지."

눈앞에는 암흑. 창을 두들기는 비는 어느새 그 세기를 불려 가고 있다. 윤은 자신이 금단의 말을 꺼낸 것을 알면서도 짐짓 여유로운 척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메리의 표정을 식별할 수 없었다. 식별하기 싫은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둘 사이에 공유되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크기를 재확인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박사님께서 유용하게 쓰셨을 거야." 메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정리정돈 씨와… 그 많은 연구들이 그들을 만드는 데 쓰였으니까."

윤이 웃음을 흘렸다. "정리정돈 씨는 잘 지내?"

"소식 끊긴 지 꽤 됐어. 그래도 잘 지낼 거야…다른 누구도 아니잖아."

"맞아."

윤은 새삼 얼떨떨한 감정으로 메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이 주제로 웃으며 말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주 약간의 빛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다.

"…있잖아, 이사벨은… 기억해?"

"누구를?"

메리는 의문조로 물었지만, 윤은 그가 이미 무얼 묻고 있는지 아는 것을 알았다. 그가 물을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으니까.

"우릴."

그가 천천히 말했다.

"프로토타입을."

메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러나 윤은 그의 눈가에 차츰 어두운 기색이 감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니."

희망은 올 때만큼이나 빠르게 그에게서 떠나갔다. 헛된 기대를 조금이나마 하고 있었던 것이 갑작스레 부끄러워졌다.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 몸에 기억된 수많은 교육과 지침이 척수에서 끓어올랐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태는 오랜만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망막에 기억된 어떤 잔상 때문에 윤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메리는 살짝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윤이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래, 그래야만 했겠지."

"그분껜 계획이 있었어." 메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우릴 잊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 거야."

메리는 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되뇌이는 듯했다. 그 순간, 윤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써 지켜왔던 울타리가 산산조각나는 소리였다. 오래전 그 사람을 보며 무언가를 간절히 빌었던 기억이 났다. 그들과 함께하길 빌었던 기억이 났다.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에서 시야에 들어오던 그 보랏빛. 그 순간 온몸에 퍼지던 지독한 슬픔과 상실감. 그러나 지금 심장이 가리키는 감정은 오직 하나다. 분노.

"……눈앞에, 자기 가족들을 놔두고도?"

침묵이 짙게 내려앉았다. 메리의 눈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절대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내기라도 했다는 듯이.

"…메리. 이사벨은 우리를 잊은 게 아니야. 우리가 잊혀진 거야."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철저한 자기진술이었다. 윤은 입안에서 혀를 난도질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최대한의 담담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슬프기보다 허탈한 감각이 허파에서 위로 상승하여 날숨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이사벨만 우리를 잊은 게 아니지. 그 지엄하신 원더테인먼트 박사님 본인마저도 우릴 잊으셨지. 원더테인먼트 박사님께서는, 그래, 그놈의 원더Wonder한 계획을 이루려고, 자기가 손수 만든 자기 딸마저 수년간 다른 가정에 맡기고 그들 전부의 기억을 지울 정도로 철두철미하셨으니까."

"…헤럴드."

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목 안에 가시가 돋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가에 서서히 열기가 감돌았다. 목에 가해지는 압력과 머릿속의 수많은 감정들은 같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윤은 메리를 잠시 응시했다가, 고개를 숙였다.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그의 시선은 허공을 배회했다.

"우린 뭘 위한 거였지?"

포장지처럼 각막 위를 눈물이 덮었다. 윤은 흘러내리지 않음에 감사했다. 수없이 자신을 향해 던져댔던 질문. 그 질문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느끼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메리는 입을 꾹 다문 채 창백한 얼굴로 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메리 역시 그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그 칠흑같이 어두웠던 유년의 시절을 지난 평생 계속 짊어지고 왔다는 것을.

이제 물어볼 사람도 없다. 그는 영영 가버렸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던, 그들 중 유일하게 선택받은, 그들 중 맏이로 태어난, 장자. 이 지독하게 오래되고 지독하게 더러운 가문의 장자로 태어난 자는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형제가 생겼고, 새로운 형제들이 옛 형제들의 흔적을 지웠고, 옛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죄를 짊어져야 할 자는 사라지고 말았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원래 없던 사람처럼. 원래 아무도 아니었던 것처럼.원래 그런 작자였으니까.

"…난 이 공간이 싫었어. 미칠 듯이 싫었어." 윤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누나도 결국은 우릴 어둠 속에 가둬놓고 떠나갔어. 문이 열리는 순간을 기억해, 메리? 우린 아버지가 데리러 온 줄 알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었지. 아프기만 할 뿐이었어. 그렇게 정체 모를 을 투여 당하고, 맞고, 굶고— 결국은 우리 중 몇몇은 죽고 말았지."

"…그만해."

"광대 씨가 죽던 날 기억나? 풍선이랑 솜사탕으로 만들어졌던 그 친구?"

"…제발, 헤럴드."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못 먹었던 우리가 어떻게 못 했겠어, 우린 살아야 했는데. 광대 씨는—"

"그만하라고!"

메리의 목소리가 잔향을 남기며 복도를 울렸다. 윤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가 상처를 냈다. 잔뜩 일그러진 메리의 얼굴. 그때 그들은 형제들의 시신을 파먹어 연명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빛 하나 없이 손으로 더듬어 가며. 어쩌면 저 표정이 그날 그들이 지었던 얼굴일지 모르겠다고, 윤은 생각했다. 방향을 잃고 그저 혼란스러움 안에서 자라날 수밖에 없었던 그 유년의 얼굴, 그 유년의 표정.

"제발, 제발 그만해. 부탁이야."

핏기가 마른 메리의 얼굴을 보고 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 모든 일이 대체 왜 일어났던 것인지. 박사는 그들이 극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장난감이란 무릇 인간이 버틸 수 없는 상황 — 이를테면, 어둡고 좁은 캐리어에 갇히거나, 주인의 시야 밖으로 밀려나 며칠이고 몇 달이고 무관심 속에 연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들 역시 어디까지나 장난감이었다. 요컨대 박사는 그들을 한 곳에 몰아놓고 내구도와 안전성 테스트를 한 셈이었다. 그리고 박사는 그런 테스트를 통해 얻은 수치를 가지고 새로운 리틀 미스터즈를 만들어냈다. 그 테스트에서 죽은 박사의 자녀들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들이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박사와 박사의 딸마저 그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애도하는 형제들만이 남았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그들의 시신을 뜯어먹은 형제들만이.

"한때는 그 방을 떠날 수 있음에 감사했었어. 하지만 이젠 알아. 우린 그곳에서 죽었어야만 했어. 이름 없이. 아무도 아닌 것 같이." 윤이 웃었다. "진실된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말이야."

"헤럴드…"

졸음, 그리고 끔찍한 탄생. 왜 그들은 그런 탄생과 그런 최후를 맞아야만 했던 것일까. 윤은 턱에서 액체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그제야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가 곤죽이 되는 것마냥 아파왔다. 동생? 동생은 무슨. 난 한 번도 네 동생이 된 적 없었어. 윤은 약간 초록빛이 도는 눈물을 뺨에서 닦아냈다. 내가 정말 당신 동생이었다면 그곳에서 날 구해줬겠지. 날 꺼내줬겠지. 죽어라 벽면을 긁어댔던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자 윤은 몸을 떨었다. 이 기억 때문에 얼마나 뇌를 긁어내고 싶었던가.

"메리, 넌 언제나 강했지. 넌… 우리 중 가장 강했어. 내가 아버지였다면 널 선택했을 거야. 널… 새 세대에 편입시켰겠지."

메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은 살짝 비틀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서," 윤이 간신히 말을 이었다. "계속 일하고 있을 수 있는 건데."

"…"

비가 창을 거세게 때렸다. 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벽을 두들기는 소리 같아서, 모두 말이 없었다. 그들 모두 윤이 말하지 않음으로 말한 그 한 단어를 알 수 있었다. 그 저주 아닌 저주의 말을 알 수가 있었다.

"…그만 가볼게."

윤은 그 자리에 붙박여 서 있는 메리를 뒤로하고 복도로 비틀비틀 거닐어 갔다. 회의실은 멀지 않았는데도, 그는 왜인지 빠르게 그 안으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목울대에 무언가가 치밀면서 위가 뒤틀렸다. 어둠 속에서 두 손을 꼭 맞잡고 떨던 그 손을 생각했다. 공포에 질린 숨소리가 기억났다. 한때 우린 같은 어둠 속을 거닐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너는 우리를 어둠으로 밀어 넣은 자들과 함께 서 있구나. 혼란스러움과 아연함, 그리고 죄악감. 그는 목울대에 단단히 박힌 듯한 지난날의 기억을 삼키려고 했지만, 삼켜지지 않았다. 울음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헤럴드 윤Herald Yoon은 이내 복도에 멈추어 섰다.

귓전에 환청인 듯 메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그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벽면에 몸을 기댔다.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바닥으로 한없이 추락했다. 왜 우린 여기까지 와야만 했을까. 왜 그들은 우릴 이 길가에 버리고 간 걸까. 지난 삶은 늘 의문의 연속이었고, 앞으로도 그것은 변함이 없을 것만 같았다. 어찌 되었건 답을 해줄 수 있는 이는 이미 영영 떠나갔으니까. 아버지는 이제 이곳에 없으니까.

한때 저기요 씨Mr. Hey였던 이는, 눈가에 흐르는 초록빛 눈물을 닦고 복도를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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