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릴러 박사는 불편하게 좌석에서 몸을 뒤틀었다. 분명히 리무진은 매끄럽게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려나가고 있었고, 차 안에는 라디오부터 냉장고까지 웬만한 건 다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 나타샤라는 그 여자가 그를 무표정하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GRU P 부서가 우리를 어떻게 찾아낸 거지? 우리를 돕겠다는 건 또 무슨 소리고?’ 질문을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 때, 고든 소령이 선수를 쳐 버렸다. “일전에 당신네들과 재단 사이에 상당히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왜 우리를 돕겠다는 겁니까?”
나타샤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고개만 고든 소령에게 홱 돌렸다. 여전히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으며, 그녀가 딱딱한 악센트를 담아 사무적으로 말했다. “우리 GRU ‘P’ 부서는 어머니 러시아를 위해 일합니다. 당신들 재단은 명목상으로라도, 이 세상을 위해 일한다고 하죠. 슬프게도 그 둘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도착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말할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 윗분께서 직접 말하고 싶어 하실 겁니다.”
그녀의 말은 오히려 의문만을 더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리와 그쪽의 이해관계가 맞물리기 때문에 도와주겠다는 건가? 하지만 SCP-065-KO를 강점한 곳은 GRU ‘P’ 부서일 텐데? 혹시 우리가 지금 속아넘어가는 게 아닌가? 결국 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들은 진짜로 GRU ‘P’ 부서가 맞기는 한 겁니까?”
그가 던진 그 질문이 나타샤에게는 훨씬 더 함축적인 의미가 있는 듯 했다. 조각상 같은 무표정에 금이 가고, 한 순간 그녀의 시선에 분명한 경계심이 어렸다. 그러나 곧 그의 질문이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녀는 다시 아까의 사무적인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모든 것은 제 윗분께서 말씀하실 겁니다. 더 이상 질문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칼로 잘라버리는 듯한 그 대답에 박사는 더 이상 질문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다시 차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고, 덜커덩거리며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나타샤는 다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고, 박사는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는 이제 황폐한 시가지를 지나가고 있었다. 건물들은 대부분 판자로 막혀 있었고 거리에는 지나가는 사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은신처라지만 너무 음침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즈음에, 차가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다른 건물들과 별 특징도 없어 보이는, 그냥 버려진 것 같은 건물이었다.
나타샤는 그들 네 명을 건물 정문이 아니라 오른쪽 벽으로 안내했다. 한참 들어가자 벽에 잔뜩 녹슨 철문 하나가 붙어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설 때, 고든 소령이 속삭였다. “아마 재단 은신처처럼 외부는 별로여도 내부는 제대로 해 놓았겠죠?” “아마 그렇지 않을까-” 브릴러 박사가 소령에게 몸을 기울이며 그렇게 말하는 순간, 둘은 철문 너머의 모습을 보고 딱 멈춰섰다. 건물 안 역시 겉처럼 버려진 폐건물이었다. 멀쩡한 기자재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전선 하나에 전구 하나가 매달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소령이 문턱을 넘어서며 말했다. “알고 보니 여기로 데려온 게 우리를 암살하고 암매장해 버리려고 데려왔나 보죠?” 나타샤는 그런 빈정거림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들을 안내했다. 안쪽의 다 썩어가는 나무문 하나를 밀어 열자, 조그마한 책상과 의자들이 놓여 있는 방 하나가 나타났다.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곧 오실 겁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특무부대원 두 분은 다른 곳으로 안내해 드려야겠군요. 제 상관의 명령이십니다.” 고든 소령이 부대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그녀를 따라 방에서 나갔다.
브릴러 박사는 그 방을 대충 둘러보았다. 의자나 책상들은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어디서 가져온 듯 새 것이었고, 벽면 하나에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액자에는 찢어낸 것 같은 책 표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러시아어로 쓰여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누렇게 변색되어 있는 걸 보니 매우 오래된 듯 했다. 그 액자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갑작스레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났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나?” 뒤를 홱 돌아보니 늙은 백발의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발걸음마다 활력이 넘쳤고, 목소리에서도 늙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아닙니다.” 무심결에 존댓말로 그렇게 말했을 때, 그 남자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며 의자 하나에 털썩 앉았다. 고든 소령이 말했다. “어디 보자… ‘개인… 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 책 이름치고는 상당히 특이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당신은 누굽니까?”
“P 부서의 사무관일세. 자네들이 우리 내부 체계를 아는 건 아니겠지만. 이름은 알 필요가 없을 듯 하고. 그래.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 니키타 흐루쇼프가 연설한 걸 모아놓은 걸로, 나름 초판이라네. 꽤나 구하기 힘들었지. 러시아어 본으로 구하려니 더더욱 그랬고.”
브릴러 박사가 다른 의자에 앉았다. 그가 경계심을 담아 물었다. “당신들 GRU ‘P’ 부서가 우릴 돕겠다고 하더군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어떤 소리를 하려는 겁니까?”
그 사무관이라는 노인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그렇고말고. 당연히 질문을 해야겠지. 자네들이 뭘 노리고 오는지는 알고 있네. SCP-065-KO 때문이겠지. 그 속내는 몰라도. 보자…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혹시 자네들 우리 부서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아나?”
“스탈린 아닙니까?” 고든 소령이 쏘아붙이듯 말했다. “끔찍하게 기나긴 냉전과 군비 경쟁을 만들었던 작자죠. 군비 경쟁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하나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인데.”
“아.” 사무관이 한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바로 그게 흐루쇼프가 주장했던 걸세.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 스탈린을 숭배해서 생겼던 소련의 폐해를 공격했지. 우리 P 부서는 분명히 스탈린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고 그를 숭배하는 자들도 꽤 있었지만, 동시에 흐루쇼프의 말에 공감하고 스탈린의 영향을 우리 부서에서 없애려 한 나 같은 사람도 있었다네. 우리는 둘로 쪼개져 버린 거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우리 부서의 내력에 대해 이해해야 해.” 사무관이 소령의 얼굴에 떠오른 지루하다는 표정을 보고 덧붙였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래. 우리는 스탈린의 유지를 따르려는 쪽과, 스탈린을 배척하고 개혁을 요구했던 쪽으로. 결과는 다소 암담했네. 강경파는 흐루쇼프를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고, 우리는 그걸 필사적으로 방해했지. 재단이 거기에다 우리가 분열된 틈을 타 입지를 넓혀갔고 점차 세력이 약해지고, 그런 나날이었지. 사실 스탈린이 무너지자 P 부서 역시 같이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 당시에는 들기도 했지.”
“하지만 흐루쇼프는 실각했지 않습니까?” 고든 소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오래 전에 그랬지. 우리라고 모든 정치싸움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네. 거기에다 그가 스탈린을 씻어내기는 역부족이라는 걸 깨닫고 다른 후보를 찾고 있었고. 고르바초프를 밀어주면서 우리는 상황을 장악해 나갔네. P 부서는 개편되었고 강경파는 숙청당했지. 숙청당하기 싫었던 자들은 우리에게 굴복하고 들어오거나, 아니면 도망쳤네.” 사무관은 아무렇지도 않게 ‘숙청’이라고 말했다. 브릴러 박사는 그게 어땠을지 생각해보며 속으로 몸을 떨었다. 사무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가 권력의 맛을 보자,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려 들었다네. 다시 P 부서를 정치에 깊숙이 개입시키려 했지. 그러나 우리는 스탈린에게서 그걸 뼈저리게 겪었고, 제2의 KGB 같은 건 할 생각도 없었기에 고르바초프를 버리기로 했지.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고르바초프를 몰아냈더니, 콰쾅!” 그 노인이 몸을 잔뜩 연극적으로 휘저었다. 고든 소령이 그 뒤를 이어 말했다. “그리고 소련이 해체됐죠.”
“그래, 그래. 그 이후는 자네들이 알 필요 없지. 새로운 러시아 대통령 옐친과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걸 빼면. 자, 그래서 이 역사 강의가 지금의 상황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대충 짐작이 가나?” 브릴러 박사가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P 부서에 두 개의 세력이 있고, 당신은 온건파란 뜻입니까? 그러면 아마 SCP-065-KO를 점령한 건 강경파란 뜻이겠죠?”
사무관이 감동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박수를 쳤다. “대단하군, 대단해! 아주 훌륭한 학생이군! 성적을 매길 수만 있다면 A+를 줬을 걸세. 자, 그래서, 이제 우리 쪽 속내는 대충 알았겠군. 난 스탈린의 개들을 밟아버리고 싶네. 그들은 어머니 러시아의 적이야. 존재 자체가 해악이라고. 그럼 이제 차례를 넘기자고. 자네들 속내는 뭔가?”
박사와 소령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이 자의 말은 분명히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P 부서가 돕겠다고 나선 상황에서, 이걸 내쳐야 할 이유도 없었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박사는 SCP-065-KO에 대한 그 보고서의 얘기를 꺼냈다. 얘기를 모두 듣고, 사무관은 인상을 쓰고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차라리 소설을 썼더라도 이것보다는 나은 설정이 나왔을 텐데. 젠장, 이런 걸 누가 어떻게 믿겠어-’ 그렇게 속으로 궁시렁대고 있을 때, 사무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게 다인가? 그게 전부라고? 자네들이 하고 있는 생각이 겨우 그거라고?” 사무관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의 얼굴은 갑작스럽게 분노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고귀한 목적밖에 없다는 개소리를 믿을 것 같나? 재단이 무슨 진짜로 이 세계를 위한 수호자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보지? 뭐, Diplomacy Party 사건은 무슨 사악한 P 부서 대 선량한 재단이라도 되는 줄 아나? 천만에! 재단도 자기네 프락치들을 잔뜩 꽂아놓으려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온 거에 불과해! 나는 진실을 말하면서 위험을 무릅쓰는데, 자네들은 되도 않는 입에 발린 소리만 늘어놓는군.”
그 사무관이 완전히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령과 박사가 그를 붙잡았다. “좋습니다. 말하겠습니다. 우리는… 사실 재단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불신의 눈초리가 소령을 향했다.
“우리 지휘관은… 재단이 다른 단체들을 공격하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결국에는 사무관 당신 말처럼 무언가 다른 목적으로 이용당하게 될 거라 생각하셨고. 평의회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지금 전쟁을 막으려고 사절단으로 여기 와 있는 겁니다.”
“아.” 사무관이 코웃음을 쳤다. “자네들이 도착할 때 그 환영해 주던 헬기들을 고려해 볼 때 정식 사절단은 절대 아니겠군. 뭐 좋네. 아까 전보다야 현실적인 동기군. 그럼 이제 좀 비즈니스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논의를 해 볼까.” 노인이 품 속에서 리모컨 하나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천장에 잘 가려져 있던 빔 프로젝터가 내려와 작동했고, 한 쪽 벽에 설계도처럼 보이는 지도를 띄웠다. 사무관은 마치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그 화면의 이곳저곳을 짚어가며 말을 시작했다.
“여길 보면 지금 SCP-065-KO에 있는 경비들 위치를 알 수 있네. 강경파들이 독자적으로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어서 실시간 업데이트는 아니지만, 24시간에 한 번 꼴로 갱신되고 있고. 빨간 점이 경비들 위치고, 파랗게 표시된 곳은 주요 포인트일세. 이 포인트들을 차지하면 경비들을 제거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SCP-065-KO에 자네들 말대로 그런 장치를 숨길 수 있을 만한 지점은 지하이겠지. 이게 바로-” 다시 한 번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어두컴컴한 통로를 찍은 사진으로 바뀌었다. 통로를 알 수 없는 두꺼운 파이프 하나가 쭉 가로지르고 있었다. “지하의 비밀 금고실로 향하는 통로일세. 나타샤가 몰래 잠입해서 찍어왔지. 매우 좁기 때문에 방어하기도 쉽고, 또 세뇌된 노동자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에 그리 쉽지는 않을 거고. 자, 그럼 내 정보는 이쯤이면 충분할 것 같군. 이 정보에 대한 요구사항은 딱 두 가지일세. 첫 번째는 강경파를 제거하는 것, 두 번째는 즉시 SCP-065-KO 관리 인원을 제외한 군대를 우크라이나에서 철수시킬 것. 그리 무리한 부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자네들이 그 정도야 충분히 해 줄 수 있겠지.” 노인이 프로젝터를 껐다. 다시 의자에 주저앉아 피곤한 듯 이마를 어루만지던 그가 문득 떠올랐는지 물었다. “아, 그런데 자네들도 별로 그 쪽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한데. 어떻게 접촉할 계획인가?”
“글쎄요.” 브릴러 박사가 불안하게 웃었다. “아마… 정공법을 택하는 게 가장 빠르겠지요.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뭐, 제 발로 걸어들어가서 포로로 잡힐 계획이라도 있나?” 노인이 키득거렸다.
“…그것도 고려하고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