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심히 엉망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카에스틴이 말했다.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카에스틴 차장.” O5-2가 그 특유의 색색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바이러스 때문에 전선이 완전히 교착 상태에 이르렀소. 아시아는 재단 영향권 이외에는 무정부 상태고, 유럽과 북미 등지도 방역 때문에 우리한테 신경 쓸 여력이 없으니.”
“요주의 단체들이 붕괴되었으니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킬리가 주장했다. “부서진 신의 교단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혼돈의 반란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힘을 못 쓰고 있습니다. MC&D도 마찬가지고. UN이든 GOC든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이쯤에서 평화 협상을 벌일 때가 왔습니다.”
“쯔산 비서 일은 유감이지만 킬리 차장, 그건 당신 소관이 아닐 텐데. 당신은 내부 보안부 소관이지 않나.” O5-2가 맞받아 쳤다. “TV는 보고 있나? 얼마 전 뉴스에 무슨 소식이 나갔나 보기는 했소? 네탈시포라는 정신나간 놈이 지금 중국을 휩쓸고 다니고 있고, 부서진 신의 교단 잔당들과 다섯째주의를 흡수하기까지 한 판에. 공개적으로 TV에서 재단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한 자들이 남아있는데 여기서 멈추겠다?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말도 안 됩니다.” 킬리 차장이 발끈했다. “우리 부서 보고서에 따르면 지금 전체 자원의 66% 이상을 소모했습니다. 이대로는 채 2년도 못 버티고 무너질 겁니다. 우리가 SCP 개체를 제대로 격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네탈시포 같은 자들을 꺾을 수 있죠. 더군다나 제가 들은 정보에 따르면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Ethics Committee 89-A 항에 따라 직권 수사를 요구합니다. 대상은 소위 세계멸망-”
킬리가 말을 멈췄다. 옆에 앉은 카에스틴이 발을 세게 밟았기 때문이었다. 카에스틴이 옆에서 킬리에게 살짝 고개를 저었다. 킬리가 헛기침을 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O5-4가 물었다. “Ethics Committee 89-A 항은 내부 보안부의 직권 수사에 관한 것 아닙니까. 뭐 계속 말할 것 있습니까, 킬리 차장?”
“아니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킬리가 짧게 말했다.
“그나저나 그 네탈시포라는 놈은 어떻게 그렇게 세력을 빠르게 불린 거요?” O5-7이 물었다.
“그자는 저인망처럼 소도시와 마을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통상적인 사이비 종교에서 쓰는 집회 방식에다가, 현재 퍼지고 있는 바이러스에서 구해줄 수 있다는 걸 미끼로 사람들을 빠르게 끌어들이고 있고요.” 카에스틴이 보고서 한 장을 집어들고 대답했다. “거기다가 재단 시설이나 관공서를 확보해 필요한 자원을 충당하고 있고.”
“그 사제가 중국에 있다는 것도 잊으면 안 됩니다.” O5-9가 덧붙였다. 회의실에 낮게 웃음소리가 퍼졌다. O5-2가 심기가 불편해진 듯 테이블을 두드렸다.“여러분, 지금은 민첩하게 움직여야 할 상황이오. 최대한 빨리 그 네탈시포 사제라는 자를 제압하고, GOC와의 전선을 독일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각자 최선을 다하도록 하시오. 이만.” 테이블에 앉아있는 평의회 의원들의 모습이 한 순간 사라졌다.
회의가 끝나고 킬리와 카에스틴이 빈 회의실로 단둘이 들어갔다. 킬리 차장이 물었다.
“뭐죠, 아까 그건? 왜 얘기하지 말라는 겁니까?”
“세계멸망 시나리오. 죽은 노래마인 관리자가 발설한 정보 아닙니까. 당신이 쯔산이 가지고 있던 녹음기에서 알아낸 정보. 만약 그 정보가 사실이라면 평의회가 모를 리가 없죠. 그럼에도 숨기고 있다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이고.” 카에스틴이 느긋하게 답했다.
“하, 정보국에서도 열심히 우리 부서를 견제하고 있나 보군요. 뭐 좋습니다. 하기야 그게 사실이라면 평의회에서 기를 쓰고 숨기고 할 테니 대놓고 나서기는 힘들겠죠. 그래서, 정보국에서는 뭔가 대단한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모든 시나리오들은 다 실험을 거쳐서 만들어 내는 것이고, 그걸 실험하는 시설이야 몇 개 없죠. 그쪽으로 내가 요원을 하나 보내겠습니다. 11호라고, 괜찮은 요원 하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보고 그 시설들이 어디인지 정보를 공유하자는 거군요. 뭐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나저나-” 킬리 차장이 일어서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런데 네탈시포 사제라는 자가 정말로 그렇게 심각한 문제입니까? 이 모든 걸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메뚜기떼 같은 자죠.” 카에스틴이 답했다. “한번 휩쓸 때는 무시무시하지만 제철이 지나면 금방 사그라들 겁니다.”
27기지의 외벽 전체는 무너져 있었다. 네탈 사제는 큼지막한 돌벽 파편 위에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이것저것 짊어지고 지나다니고 있었다. 한 명이 사제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사제님. 기지 전체를 차지했습니다. 모든 악마들은 다 파괴되었습니다. 여기서 일하던 자들은 대부분 잡혔고, 몇몇은 패닉 룸으로 도망쳤습니다.”
네탈 사제가 기지개를 폈다. “식량과 기름은? 전부 확보했나?”
“예, 그렇습니다.” 남자가 공손하게 답했다. “패닉 룸을 뚫어보려고 하고 있지만, 계속 실패하고 있습니다. 잡힌 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들도 모두 다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다 처리하게. 아, 굳이 그 패닉 룸을 뚫을 필요는 없네. 적은 너무나도 사방에 퍼져있어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그냥 내버려두고 떠나지.”
네탈시포와 남자가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자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네탈 사제가 그를 보고 일어섰다. “또 당신이군.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여기저기 다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아닌 자가 사제에게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저는 재미가 있는 곳이라면 다 찾아다니니까요. 그래, 역시 믿음이란 무섭군요. 기지 하나는 그냥 송두리째 박살나 버릴 정도라니. 그래, 여기 중국에 남아 있는 재단 내의 시설에 관한 것들입니다.” 아무도 아닌 자가 서류가방에서 서류 한 뭉치를 꺼내 사제에게 건넸다.
“또 정보를 줄지는 몰랐는데.” 사제가 서류를 건네받았다. “이 정보는 꽤나 고마운데, 왜 주는 건지는 전혀 이해가 안 가는군. 왜 날 돕는 건가?”
“아, 순전히 재미 때문이죠,” 아무도 아닌 자가 서류가방을 닫으며 답했다. “당신과 당신의 그…신도들이 보이는 에너지가 너무나도 재미있으니 말입니다. 모든 게 다 결국 무(無)로 돌아갈 걸 알고 있다는 저에게는 없는 이런 활력이 너무 재미있다니까요. 재미있는 일이 충분히 지속된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꼭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네탈시포 사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나는 이 세상을 구하는 게 목적일 뿐. 나는 내 갈 길을 계속 갈 뿐이다. 당신도 당신 갈 길을 가라고. 내 길에 끼어들지 않도록 조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