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의 도서관 깊숙한 어느 곳에서, 종이 두 번 쳤다.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다, 미노스." Cat With Eye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만 결정을 해라. 우릴 아무도 아닌 자가 있는 곳으로 보내주던가, 여기서 도서관의 직원으로 부리던가. 둘 중에 하나다."
"네 말은 믿기 어렵다. 인간이 기억을 먹을 수 있는 힘을 가졌다라." 왕관을 쓴 노인이 말했다. "그러나 뻔히 들킬 거짓말을 할 자도 아니지. 그렇다면 여기서 그 능력을 입증해 보여라." 뱀 꼬리가 풀리며 매달려 있던 네 사람을 모두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여기 이 두 재단 요원의 기억을 먹어 보아라. 내 눈으로 직접 보면 믿겠다."
고양이가 자우에게 다가갔다. 자우와 귀신 군 모두 경계하면서 벽으로 바짝 물러났다. "잠깐만! 내가 무슨 서커스단도 아니고, 갑자기 뜬금없이 이래라 저래라 하면 뭐 어쩌라는 거에요?"
"자, 자. 진정해. 인류를 구하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려면 아무도 아닌 자를 처리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그게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요!"
자우와 고양이가 옥신각신하고 있는 사이, 노인은 다시 왕홀을 집어들어 만지작거렸다. 이트륨이 미노스를 불안하게 쳐다보다가 결국 소리쳤다. "그만! 다들 그만! 됐으니까, 이렇게 합시다. 상황 정리를 하면, 지금 세계멸망 시나리오가 있어서, 해결하려면 아무도 아닌 자의 기억을 봐야 하고, 그러려면 당신들이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거잖아요? 좋아요. 그냥 날 피험자로 쓰고, 대신 우리도 여기서 보내줘요. 가까운 재단 시설로. 여기서 마음대로 처분한다 그런 소리 집어치우고. 당신도 어쨌든 옛날에 재단 소속이었잖아요?"
고양이가 이트륨을 쳐다보고 씩 웃었다. "좋아. 미노스, 그리 할텐가?"
미노스가 별 상관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트륨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들어 몇 마디 문장을 휘갈겨 쓰고, 미노스에게 종이를 날렸다. "정말로 기억을 흡수하는 능력이 있으면, 내가 여기 뭐라고 썼는지 다 맞출 수 있겠지."
고양이는 자우를 계속 설득했다. "자, 내가 너한테 이것저것 숨기고 끌고 다니기는 했지. 이번만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는 그대로 해. 여기서 나가면 내가 아는 걸 전부 털어놓을 테니까. 저 재단 요원도 동의했잖아? 이 세상이 멸망하는 걸 막으려면 어떤 대가든 치러야 하는 법이야. 시간이 없어. 빨리!"
자우가 귀신 군을, Cat With Eye를, 이트륨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게 하죠." 자우가 이트륨에게 다가서고, 등을 돌리고 그의 앞에 섰다. 다음 순간, 이트륨이 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에 앉았다. 자우는 미노스에게 돌아서 몇 마디 문장을 말했다. 노인이 종이를 보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뭔가… 능력이 있는 것 같긴 하군. 보내주겠다." 미노스가 왕홀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내리찍은 지점부터 바닥이 밑으로 꺼지더니 노인을 뺀 모든 이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래로 추락했다. 세찬 바람이 다시 불고, 이트륨과 란란맥은 저 멀리로 튕겨 날아갔다. 고양이와 남은 두 명은 계속 아래로,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카잔은 비좁은 아무도 아닌 자의 방으로 돌아왔다. TV에서는 아직도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단독으로 입수했다는 GOC 특별관찰관 UD-14의 보고서에 대해 열심히 떠들면서, 재단과 GOC 중 어느 쪽이 진실을 말하는지 얘기하고 있었다. 카잔은 TV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책상에 펼쳐져 있는 붉은 일지를 황급히 뒤적였다. "어딘가에 있을 텐데,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지금이라도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
새로운 아무도 아닌 자는 거기에 너무 열중해 있어서, 뒤에서 누군가가 살그머니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침입자의 손이 어깨에 닿았을 때에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카잔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Cat With Eye가 바닥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어때? 뭐 쓸만한 정보 있어?" "아뇨… 어… 뭔가 이상한데요. 있어야 할 기억들이 없어요."
고양이가 책상으로 뛰어올라서, 엎어져 있는 카잔의 몸을 왼쪽으로 돌려 얼굴이 드러나게 했다. "젠장. 아무도 아닌 자가 바뀌었군. 좋은 징조는 아닌데."
"잠깐만, 잠깐만요. 이제 설명 좀 해줘요.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고, 왜 아무도 아닌 자가 바뀌어 있는 건데요?"
고양이가 카잔의 몸 아래에 깔린 붉은 일지를 발견하고 앞발을 뻗었다. 일지가 스르륵 빠져나와 공중에 둥둥 떠올랐다. "이게 있군.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카잔은 눈을 떴다. 네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지. 그와 똑같이 생긴, 정장에 중절모를 쓴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선대?" 아무도 아닌 자가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어느 순간, 그들은 호화로운 널찍한 서재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 참 재미있는 표현이군. 이곳에서는 넌 카잔이지. 난 아무도 아니고.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선대라는 건 틀린 말이지.
"여긴 내 머릿속 아닌가?" 카잔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당신을 흡수했으니까. 그걸로 내가 아무도 아닌 자가 된 거고, 이 시나리오에 개입할 수 있게 된-" 아니, 아니 아니 아니지. 비유적으로 그런 표현을 써오기는 했지만, 우린 연극배우가 아니야. 오히려 네가 시나리오를 진행에 관여하는 행동을 했다고, 시나리오가 너를 요주의 인물로 선포하는 거에 가깝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관리자The Administrator의 말이 옳아. 끝난 거나 다름없다. 세계가 멸망하도록 도울 자가 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지. 그러나 내가 조언을 해주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으니 조언이라도 한 마디 하자면.
아무도 아닌 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관리자를 돕는 게 가장 낫겠지. 그자를 면밀히 감시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 그거니까. 그러나 그런 결말이 쉽사리 상상이 되지는 않네. 자존심을 버리는 건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니까…
카잔이 눈을 뜨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의자에 묶여있었고, 고양이 하나가 맞은편의 침대에 앉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설명해 줘야 할 게 많은데, 일단 이것부터 설명해 보지 그래."
고양이가 앞발로 TV를 가리켰다. TV 화면에서는 최근 끊임없이 그랬듯이,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오늘, 연방수사국 특이사건반(UIU)을 연방수사국에서 독립시켜, 미국 영토 내 변칙적 존재 및 사건을 수사, 포획, 격리할 독자적인 기관으로 출범시킨다고 발표했습니다… 세계 오컬트 연합이 반발하는 가운데, 다른 국가들도 이에 동참할지 여부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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