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3)

마지노선, 다시 한 번 실패

프랑스, EU 회원국 세 번째로 국가비상사태 선포

29일 프랑스 정부는 리옹(Lyon)에서 'SCP-008', 소위 '좀비 전염병' 감염자가 발생함에 따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다고 발표했다. 테러조직 SCP 재단이 살포한 생물무기 중 하나의 검역에 실패한 것이다. 국가비상사태(계엄령) 선포는 덴마크, 체코에 이어 EU 회원국 중 세 번째다. 이로써 유럽연합(EU)이 바이러스 검역을 위해 자신있게 내세웠던 신(新) 마지노선은 한 달만에 허무하게 뚫린 것으로 드러났다.
신 마지노선에 대한 비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달 SCP 재단이 일본에서 살포한 여러 생물무기의 영향으로 동아시아가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고 러시아 정부와의 연락이 두절되자, EU는 폴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경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선언했다. 이에 방어 국가에서 제외된 그리스, 루마니아 등은 격렬히 반발하며 EU를 탈퇴, 독자적으로 재단과 강화 협상에 착수했고, 미국 역시 EU가 지나치게 소극적이라고 비판했다. 익명의 고위 관계자는 이러한 소극적인 방어선은 UN의 하부 조직인 세계 오컬트 연합(GOC) 사무차장이 개입한 탓이라고 주장했다. GOC 사무차장이 재단에 사적인 원한이 있고 시민의 안전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미 패닉에 빠진 프랑스 시민들은 파리를 탈출해 낭트, 캉, 런던으로 도망치고 있는 상황이다. 프랑스 정부는 오늘 개정된 국가비상사태법에 따라 UN군에 참여하던 모든 자국 병력을 순차적으로 불러들일 예정이다. 군은 영장 없이 모든 장소를 수색하고, 감염자를 구금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힌 프랑스 대변인은 질문에는 일체 답변을 거부했다.
신 마지노선의 실패에 국경을 맞댄 독일, 스위스, 스페인도 비상이 걸렸다. 이들은 즉각 프랑스와의 국경을 폐쇄하고 검역 강화에 나섰다. 이제 이번 검역 실패에 따라, 해당 방어선 설정을 주도한 여러 국가들은 비난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독일 총리는 사임 의사를 밝힌 상황이다. 그러나, 정작 자국에 감염자가 생긴 프랑스 대통령은 출근길에 만난 기자들에게 '사임할 뜻이 없다'고 명백히 밝혔다. » 관련 기사 2면

알 피네 GOC 사무차장은 화를 간신히 삼키며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일이 너무 많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을 때 말고는 신문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그 탓에 이미 신문이 나간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서야 읽어볼 수 있었다. 신문을 가지고 온 비서는 안절부절 못하며 그녀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씨발 겁쟁이 새끼들." 알 피네는 내리자마자 다짜고짜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주 UN 프랑스 대사를 찾았다. 대사가 눈에 들어오자, 그녀는 다짜고짜 그자의 멱살을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회의실 안의 사람들은 말릴 엄두도 못 내고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아예 밖으로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사는 완강했다.

"지금 유엔군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나라가 문제요! 바이러스가 퍼지지 않았어도 감염자가 나온 건 사실이고, 국민들의 압박이 얼마나 센 건지 알기나 한 거요?"

"그, 빌어먹을, 공-공-팔은 바이러스가, 아니라니까!" 알 피네가 한 글자씩 뚝뚝 끊어 말하며 소리쳤다. "이 시발 건 프리온이지 공기로 전염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지금 프랑스 감염자도 달랑 아홉 명인데, UN군에 있는 병력을 불러들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당신네들이 지금 빠지면 재단을 공격할 병력은 어디서 구할 건데 그럼? 재단이 애초에 이걸 살포한 이유가 시간을 벌기 위해서인데, 알아서 기어주는 꼴이니 참 잘났군! 이러면 애초에 그 잘나신 성전은 왜 선포한 건데?"

"언론에 좀비 전염병이라고 나왔으면 좀비 전염병인 거요. 그리고 좀비 하면 세계멸망이고. 애초에 미리 강경하게 대응하기로 한 건 내 뜻도 아니고 대통령님 뜻이니까. 정치 논리는 알 만큼 아는 거 아니요?" 대사가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이제 그 재단 놈들도 하도 위장을 잘 하고 여기저기로 숨어들어서 찾기가 쉽지 않은 걸 당신도 잘 알 거요. 그리고 솔직히 병력 수는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독일, 영국, 이탈리아가 배째지만 않으면. 병력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정보가 문제인데, 정보를 물어오는 건 당신들 역할 아닙니까? 일본에서 잡았다는 그 고위직은 아무 말도 안 합디까?"

알 피네가 멱살을 놓아주고 한숨을 쉬었다. "O5-10 말이군. 그자는 미군이 잡아두고 있고, 미군이 심문을 담당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우린 아무것도 몰라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대사가 거들먹거렸다. 대사가 아직까지도 회의실에 남아있던 사람들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회의실이 텅 비자 대사가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당신이 기자회견에 나서서 프랑스 개구리들이 군대를 빼서 이제 씨발 온 세계가 테러조직 앞에 무릎꿇을 거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보리를 설득해서 O5-10이라는 그자를 당신들에 넘겨주겠소. 좋은 거래 아니요?"

알 피네는 잠깐 망설였지만, 지난 세기 동안 쌓아놓은 오컬트 연합의 심문 기술을 O5 중 하나에게 시험해 볼 수 있다는 건 너무 유혹적이었다. "..오케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대사에게서 돌아섰다. 어떤 기술로 심문을 시작해야 할지 생각하니 조금 기분이 나아진 알 피네 차장은 방을 나갔다. 비서는 안도한 얼굴로 총총 따라갔다. "제2소회의실에서 회의가 있습니다. UIU 샐리 부부장과 미 국무장관, 유엔군 부사령관이 참석하실 예정입니다. 지금… 2분 30초 늦으셨습니다."

"더 늦어도 돼 그럼." 알 피네가 잘라 말했다. 그녀는 회의에 늦게, 그것도 가장 늦게 참석하는 것은 참석자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 한 명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믿었고, 그 특권을 내려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샐리 걘 왜 끼는 거야? 회의에도 격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닌가? FBI 국장이라도 시원찮을 판에 UIU 부부장?"

"국무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굉장히 급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샐리 부부장은…" 비서가 들고 있는 서류판을 뒤적거렸다. "…담당 실무자로 배석한다고 답변 받았습니다."

알 피네는 영 탐탁치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문 앞에 멈춰서서 좀 더 기다리다가, "이제 10분 15초 늦으셨습니다." 하는 비서의 말을 듣고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다른 참석자들은 이미 다 와 있었다. 약간의 승리감을 안고 자리에 앉는 찰나, 비서가 언급하지 않은 참석자가 한 명 더 보였다. 갈색 단발머리에 수수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자리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완전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회의에 들어가면서 참석한 사람의 이름이나 직책도 모른다는 건 치명적인 결례였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비서를 어떻게 갈궈야 하나 이를 갈기 시작했을 때, 그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알 피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SCP 재단 O5 평의회 소속 O5-4입니다. 직접 만나뵙는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이런 썅…" 알 피네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서슬에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당황해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샐리의 눈에 희미하게 승리감이 드러났다.


거대한 회의실의 중앙에는 원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원탁을 둘러싸고 팔걸이 없는 의자가 주르르 벽에 닿은 채로 놓여 있었다. 원탁에는 열세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전부가 차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탁에 앉아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네다섯에 불과했다. 중간중간 비어있는 자리 위에는 노트북이 하나씩 놓여 있었고, 노트북 화면에서는 실루엣을 하나씩 비추어 주었다.

카에스틴과 킬리 차장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벽에 붙어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원탁에서 노트북도 없이 완전히 비어있는 자리가 몇 개 눈에 띄었다. 킬리 차장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4가 안 나왔는데, 그 사람 미국에 있지 않아요? 뭐가 바쁘다고 회의도 안 나오는 걸까요?"

"포로로 잡히기라도 했나보죠." 카에스틴도 목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너무 안전한 데에 있어서 늦잠을 잤을 수도 있고."

회의실 중앙의 문이 열리고 O5-3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회의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O5-3가 자리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고, 사람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O5-3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O5-12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벽에 걸린 스크린이 켜지고 세계 지도가 화면에 나타났다. "브리핑 드리겠습니다. 현재 우리 재단은 러시아 정부와 협력하여 유럽 러시아 지역에 본부를 두고 있고, 에스토니아, 핀란드, 우크라이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북미 내 기지는 아직까지 건재하고 잘 위장해 있으며, 동아시아에 위치한 기지는 75%가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O5-3가 손을 내저으며 말을 끊었다. "다 아는 얘기는 그만하게. 오늘 자 신문에도 나오던데 또 얘기할 필요가 뭐가 있나. 그보다…" 3이 고개를 돌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내부 보안부 부장?"
킬리 차장 옆에 있던 내부 보안부 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근 GOC-UN에 접촉해서 정보를 넘긴 인원은 얼마나 되고, 재단을 배신하고 아예 도망친 인원은 얼마나 되며, 그 중에서 내부 보안부가 잡아낸 건 얼마나 되나?"

킬리 차장이 무릎에 놓아둔 자료들 틈에서 종이 몇 장을 뽑아 부장에게 넘겼다. 부장이 자료를 보며 3의 질문에 답했다. "최근 15일 간 정보 유출자와 이탈자는 총 42명 있었으며, 이 중 34명을 체포하였습니다. 다만 동아시아 내 기지에서는 얼마나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통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케이. 이처럼 재단을 배신하고 떠나가려는 자들이 끝도 없이 생기는 것은-" O5-3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말을 이었다. "아마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서이겠지. 재단이 강하다고 해도 저 강대한 GOC-UN 동맹, 나아가서 전 세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들 하겠지. 평의회가 지금까지 수십 년간 기적의 역사도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아마 이 중에서도 많은 수가 그렇게 생각할 것 같은데-" O5-3이 회의실 안을 쭉 눈으로 훑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 킬리 차장은 속으로 떨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선언해 두겠습니다. 첫째, 전 재단의 직원은 재단 본연의 목적에 충실할 것. 확보, 격리, 보호라는 재단의 강령은 바뀐 적 없습니다. 둘째, 불필요한 군사적 충돌을 일체 삼갈 것. 셋째, GOC-UN 및 요주의 단체들에 대한 정치외교적 행위는 O5 평의회에서 완전히 관할하므로, 기지 및 관련 지부는 독자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또한-"

"잠시만요." 뒤쪽에 앉아있던 과학부 부장이 일어났다. "아무리 O5라도, 지금 하신 말씀은 완전히 개소리인데요."

어색한 침묵이 회의장 전체에 내려앉았다. 카에스틴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알 피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시 평정을 되찾고 그녀가 차갑게 물었다. "지금 이건 뭐하자는 개수작이지? 미국과 재단이 뒷구멍으로 붙어먹겠다는건가? 재단이 지금 유럽을 잘근잘근 씹어먹고 있는데, 미국 본토는 전쟁터가 아니니 강 건너 불구경한다 그건가?"

"진정 좀 하시죠." O5-4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저는 제안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제안은 니미럴." 알 피네가 으르렁거렸다. "재단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무조건 항복뿐이다. 당신 포함해서 O5들은 내가 직접 처형장으로 끌고 갈 거고."

"이봐요. 잘나신 사무차장 나으리." 샐리가 말했다. "대사한테 들었는데, O5-10 데려다가 고문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 수작이나 부리려고 할 때, 우리는 그자를 통해서 O5-4를 여기 데려왔어요. 좀 진지하게 들어보시죠?"

O5-4도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참 호전적이시군요. 저에게 항복을 할 권한이 있었다면 전 항복했을 겁니다. 그러나 참 안타깝게도, 저는 지금 재단을 대표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어서요."

비서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차장님, UN 사무총장님이 오셨습니다만…"

"나중에 와." 알 피네가 손을 내저었다. 비서는 머리를 숙이고 다시 물러났다. "O5가 재단을 대표하지 못하면 누가 대표하고 있다는 건데?"

"지금 재단은 분열되었습니다. 한편에는…" O5-4가 양 손바닥을 펼쳤다. "변칙 개체를 무기로 쓰면서 전쟁을 밀어붙이는 파벌이 있고, 그에 암묵적으로든 공개적으로든 반대하는 파벌이 있죠. 지금 강경파들이 평의회와 고위 부서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들은 평의회에서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기도 힘들어요. 그리고 저들은 지금 변칙 개체를 얼마든지 무기로 쓸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 생물무기들을 이렇게 빠르게 퍼뜨린 것도 다 사전에 준비를 해놨었기 때문이었겠죠. 전 거기에 반대합니다. 간단히 말하죠. 강경파들을 모조리 넘겨드리겠습니다. 각 기지부터 정보국, 내부 보안부, 외무부, O5들까지 전부 다."


O5-3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태연한 척 했으나 그의 손이 떨리며 얼마나 분노한 상태인지를 보여주었다. 노인의 소매 속에서 공책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평소의 3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실수였다. 노인이 허리를 숙여 붉은 일지를 소매 속에 다시 집어넣고, 아드득 이를 갈았다. 그 소리가 침묵을 뚫고 방 전체에 들렸다. 과학부 부장은 애써 의연한 표정으로 O5-3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3이 한 단어씩 힘을 주어 말했다. "나는 꽤나 명료하게 말한 것 같은데, 내 말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가나?"

"우리, 아니, 당신들은 SCP-008을 포함한 고위험 개체를 고의적으로 살포했습니다. 재단의 강령을 정면으로 박살내는 일이었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전 세계를 적으로 돌리는 짓이었다고요. 그래놓고는 이제와서 우리더러 격리에 충실하라는 게 말이나 되는 겁니까?"

"난 또 무슨 소리인가 했군." O5-3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순전히 10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지. 평의회가 그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 같나? 지금 이 원탁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여기 러시아, 미국, 동아시아 등등 죄다 흩어져 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네. 그래서 지금 선언해 두고자 하는 걸세. 다시 평의회가 고삐를 쥐노라고. 아, 그리고 그와 아울러, 10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에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하고, 새로운 O5-10을 임명하고자 하네."

O5-3가 돌아서서 문가에 서 있는 요원 둘에게 손짓했다. 요원들이 문을 열었고, 양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들어왔다. 머리카락이 얼마 남지 않아 이마가 훤히 보이고, 사각턱에 고집스러워 보이는 인상의 러시아인이었다. 그가 O5-3과 악수하고 비어있는 10의 자리에 가서 섰다. 과학부 부장은 입이 떡 벌어진 채로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정식으로 소개하지. 현 러시아 연방 대통령이시자 재단 상임고문의 자리에 계신 분이고, 부단한 노력 끝에 재단에서 직을 맡겠다고 동의해 주셨네. 이로써 우리는 한 국가의 위치에 서서 세계를 대할 수 있게 될 걸세. 자, 그럼, 이의 있나?"

잠깐 동안 침묵이 회의장 안에 감돌았다. O5-3가 천천히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원탁에 앉은 사람들과 영상 안의 사람들이 뒤따랐고, 이어 회의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열렬히 박수를 쳤다. 그때까지도 서 있던 과학부 부장도 동참했다. 회의장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혔다. 지금까지 암울한 비관이 맴돌았다면 이제는 사람들의 눈에 약간은 광기에 찬 희망이 보였다. 새로운 O5-10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띄고 자리에 앉았다.


한참 동안의 각론을박 끝에 알 피네 차장은 O5-4가 진지한 제안을 하고 있다는데 동의했다. O5-4가 제안을 계속 설명했다.

"대신 조건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제가 넘겨드리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재단 직원들은 완전 사면해 줄 것. ICC, 국가 내 재판, 청문회 등등 전부 다요.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봅니다."

국무장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해당 강경파들을 조사하면서 공범으로 밝혀지는 자들은 어쩔 수 없어요." 샐리가 덧붙였다. "O5들도 당신 말고는 봐주기 힘들어. 어쨌든 최고위직이잖아." 알 피네 차장도 말을 보탰다.

"알겠습니다. 둘째, 재단이 격리해 놓은 변칙 개체들이 UN으로 넘어가게 될 텐데, 이들을 GOC가 파괴하게 두지 말고 각국 정부에서 격리 부서를 만들어 격리할 것. 정부가 맡기 힘든 경우에는 UN 산하에 별도의 국제기구를 만들 것."

"뭐?" 알 피네가 기가 차다는 듯 되물었다.

"셋째, 이렇게 만들어지는 격리 부서에 재단 직원들을 우선적으로 임용할 것. 지금까지 격리를 맡아온 사람들이 맡는 게 제일 낫겠죠. 그리고 이상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행할지 합의하여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형태로 공개 발표할 것."

"돌았군." 알 피네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왜 이런 제안을 하나 했더니. 재단을 각 국 정부 아래에 재건하겠다는 거군? 그러다가 한 몇십 년 지나면 다시 독립해서 새로 차리게?"

O5-4는 평온하게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P 부서에서 구조조정이 있었을 때 거기서 잘린 직원들은 MC&D나 반란으로 갔죠. 재단이 없어지면 거기 있던 직원들은 어떻게 될까요? 윤리니 정치적인 리스크니 하는 건 집어치우고 실용적인 면에서 좀 바라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재단을 재건하는 게 가능하겠어요?" 샐리도 쏘아붙였다. "각국 내로 들어가면 지금처럼 초법적인 권력은 절대 없을텐데."

"하. 당신들 지금 눈 뒤집힌 유럽이 그 제안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알 피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개소리였군. 당장 꺼져. 한 번만 더 여기 얼쩡거리면 체포해서 포토라인 앞에 세울테니."

샐리와 국무장관도 자리에서 일어나 알 피네를 붙잡고 설득했다. 셋이 문 밖에서 소리를 높여 싸우는 사이, O5-4는 의자에 등을 편안히 기대고 조용히 웃었다.


4부 끝. 5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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