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자 (3)

O5-3는 러시아 정부청사의 집무실 안에 앉아 있었다. 재단과 러시아 간에 맺은 조약의 '호혜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대통령 고문직을 맡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 국내 정치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러시아 대통령(겸 O5-10)은 손해볼 게 전혀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실무는 러시아 정부에서 알아서 했고, O5-3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었다. O5 가운데에서도 협상을 잘못했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났다. 거의 다." 노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에 만년필을 쥐고 초조하게 돌렸다.

그때 허공에서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정장을 차려입은 카잔이었다. 아직까지 새로 얻은 능력에 심취해 있는지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안녕, 관리자님. 이렇게 또 보게 됐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3: 오… 어떻게 되든 꽃놀이패이긴 했지만, 정말로 성공했군.

신원 미상: 나한테 먼저 연락을 하신 분이 왜 이러실까. 나도 이제 이 공연에서 주역이라고. 변칙적인 능력을 얻으면서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당신이 지금까지 뭘 해왔는지 다 알고 있다는 말이지.

3: 선대(先代)는 대본에 충실했지. 너도 그렇게 하라고. 이제 날 도울 차례다.

신원 미상: 아니. 난 그자한테서 능력만 받았지 책임까지 물려받진 않았어. 이 세계가 망하든 말든 중요한 건 아닌데, 지금까지 당신이 재단의 힘을 어떻게 남용했는지 생각하니까 좀 역겨워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3: ██████는(불분명하게 들림) 다른 역할을 맡은 자에게 폭력을 쓰지 않아. 변칙적인 폭력은 더더욱 더. 그게 규칙이다.

신원 미상: 세계가 멸망하는데 규칙이라고 멀쩡하겠어? 그리고 그자가 마이클 마이어스마냥 도끼를 휘두르는 것도 벌써 봤는데?

3: 역시 그 정도밖에 안 되는군.

신원 미상: 뭐?

3: 내가 벌써 말했지. 꽃놀이패라고. 이 비열한 놈아. 이걸로 내가 안배해 놓은 모든 게 이루어진 거다. 아무도 아닌 자의 역할은 세계멸망을 조장하는 것이지. 그리고 넌 그 규칙에 따르지 않겠다고 지금 말했다. 그걸로 됐어. 네 그릇은 애초에 그 정도란 거다.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맡아버린 불쌍한 놈. 이 세계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재단이 찾아올 것이다. 지금 그 미래가 확정되었어.

신원 미상: (당황한 것으로 보임) 무슨 개소리야? 네탈시포 사제를 선동자로 보기에는 아직 영향력이 모자란데. 당신은 애초에 ██████(불분명하게 들림)을 선동자로 세우려 했잖아? 처음 반기를 들었을 때 밀어버리지도 않았고, 나중에 그 논의를 할 때도 참여하지 않았고… 지금 너무 김칫국 마시는 거 아니야?

3: 힘이 모자라면 쥐어주면 되는 일이지. 이미 수송기가 중국에 내리고 있는 중이다. 그깟 반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걸 싣고서. 이걸로 다 끝났다. 시나리오에는 다른 다섯 명을 죽일 필요는 없고 '무력화'시키는 것도 된다고 쓰여있지. 네가 세계멸망을 꿈꾸지 않는다고 한 순간, 넌 이미 무력해진 거야. 날 찾느라 시간낭비하는 동안, 모든 건 결정이 났다. 이제 가라. 가. 붉은 오른손(O5 직할 MTF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을 부르기 전에.

대화 종료. 본 도청 속기록은 내부보안부 보안등급 5-C. 킬리 차장에게 직통으로 전달할 것.


탐사(?) 1시간째

마음의 위안이라도 찾으려고 이 일지를 재단 보고서 양식으로 써본다. 네탈시포 사제 무리에 합류한지 한 시간이 지났다. 내가 기절한 사이 그들은 나를 평범한 공동주택 안으로 옮겨놓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 무리는 재단 기지를 공격하려고 나온 별동대에 불과하고, 수도 1,000명이 조금 안 된다고 한다. 본거지에는 대략 3,000명은 있다고 했다.

나는 사회학이나 경영학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일단 네탈시포 사제는 이 등급 체계를 이용해서 자기 무리를 유지하는 것 같다. 얘기를 들어보니 하위 등급은 상위 등급에게 무슨 짓을 당해도 반항할 수 없다. 그러나 조직 내에서 온갖 범죄가 일어나는 건 아니고, (그랬다면 아마 유지가 될 수는 없었겠지) 일단 같은 파벌 내의 사람들끼리는 철저히 단결하고 서로 챙겨준다. 즉 네탈시포 사제가 가장 위에 있고, 그 아래에 여러 조직들이 느슨하게 연합하고 경쟁하는 형태인 것이다. 내가 보기에 '사제'니 '성자'니 하는 표현은 말 그대로 직함에 불과하고, 이들의 형태는 사이비 종교조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폭력조직에 가깝다.

나를 데려온 사제 말로는, 기억해야 할 만한 파벌은 내가 마주쳤던 사르킥 잔당들(소위 부유하는 얄다바오트), 부서진 신 잔당, 인민해방군, 공안, 다섯째주의 잔당(방송에 나왔던 페데르센 등등), 사회복구청, 정죄청(둘 다 사제 직할) 정도가 있다. 기타 파벌은 세력이 강하지 않거나 특정 지역에서만 영향력이 있다.

탐사 2시간 30분째

사회복구청을 설명해 놓은 소책자를 발견했다. 사회복구청의 강령은 '사회 인프라 재건과 질서 복귀'로, 집이나 여러 건물을 짓고, 이 조직 내에서 규칙을 만드는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 직업이 시스템 아키텍트라고 아무렇게나 말했던 게 운이 좋았던 것 싶다.

다른 사람들이 미사를 가자고 한다. 나가봐야겠다.

탐사 4시간째

미사를 다녀왔다. 내가 지금까지 다녀온 미사와는 완전히 달랐다. 단 하나의 유일신을 숭배하는 미사가 아니라, 미사장에 앉아서 원하는 신에게 기도하면 된다. 네탈시포 사제의 신(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기는 하지만, 다양한 우상들이 있고 다양한 의식이 벌어진다. 사르킥 잔당들도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따로 떨어져서 한다. 앉아서 있는지도 모르겠는 신에게 기도하고 있자니 묘하게 평온한 기분이 든다.

탐사 4시간 50분째

신참들을 위한 행사가 있다고 해서 가는 중이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밖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깼다. 신, 신이 정말로 존재할까?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이런 일들에 눈감고 있는가? 인격과 감정이 있는 존재여서? 신이 그렇게 인간을 닮았다면 과연 완벽한 존재일까? 아니,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다 죽은 건가? 나도 여기서?

큐빅은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몸을 숙이고 일지를 휘갈기고 있었다. 버스가 멈췄다. 강가에 면한 강당이 눈에 들어왔다.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줄줄이 내려 강당으로 들어갔다. 무대에 켜진 조명 하나를 제외하면 강당은 깜깜했다. 큐빅은 뒷줄로 가려 했으나 보조 성자들은 맨 앞줄로 밀어냈다. "사제 직할 부서 소속이시잖아요." 그 중 하나가 속삭였다. 그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네탈시포 사제가 극적으로 리프트를 타고 무대 위에 올라왔다.

"반갑습니다. 여러분이 여기 저를 찾아 오신 이유는 잘 압니다. 사오싱(绍兴) 시에서 오셨든, 타이저우(台州) 시에서 오셨든, 지옥이 된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겠죠. 저는 톈진에서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균에 삼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감염되어서, 온몸이 벌겋게 벗겨지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온 사방이 초록색으로 얼룩져 있고, 공안들은 사람이든 건물이든 불태우고… 그 황천에서나 볼 것 같은 풍경을 여기 계신 모두 한 번쯤은 보셨을 겁니다. 어제 우리는 또다른 재단의 기지를 공격했습니다. 그 안의 사악한 무언가가 풀려났죠. 여기 그 짓을 한 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이들은 세계멸망을 획책하고 있었다고 자백했죠."

네탈시포가 무대 왼편으로 몸을 돌렸다. 부하들이 휠체어 두 개를 무대 위로 밀었다. 큐빅은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즈소와 풀그림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묶여있었다. 다른 이들은 야유하고 발을 굴렀다. "이들의 죄는 논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이미 나는 이들에게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아냈으니, 남은 건 죽음뿐입니다. 네, 자, 나오세요. 아무나 한 분. 나와서, 죽이세요."

야유가 뚝 그쳤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네탈시포가 무대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들고 말을 이어갔다. "왜요, 죽이라고 하니 못 죽이겠습니까? 그렇죠. 그렇게 항상 힘 없고, 나약한 사람으로 남아있을 겁니까? 우리가 상대하는 재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죠. 여기 이 파란 머리 여자가, 이렇게 묶여있으니 평범해 보입니까? 어제 내 신도 두 명을 칼로 난자한 사람이에요. 재단을 상대하고 싶다면서요. 살아남고 싶다면서요. 그냥 그렇게 앉아서, 누군가가 나 대신 더러운 일들을 대신 해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기라도 바라는 겁니까?"

네탈시포가 차갑게 객석을 쏘아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그럴 일은 없다. 이 머저리들아. 물론 나는 너희를 이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의식주를 주고 이 땅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생과 사의 경계에 섰을 때, 처절한 절망을 목도했을 때, 그때 너희를 구할 수 있는 건 너희 자신뿐이다. 오늘, 이 자들을 죽이면서 결의를 다져라."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네탈시포가 풀그림이 탄 휠체어를 무대 중앙으로 끌었다. "그래, 대책 없이 선한 자들아. 아직 내 신도라 하기에는 부족한 자들아. 많은 걸 바라지는 않겠다. 보기만 해도 느끼는 게 있겠지. 아무나 한 명만 나와라. 아무나 한 명, 나와서 이 자를 죽여. 단 한 명이다. 그걸로 끝이다. 더 이상 요구하진 않겠다."

여전히,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내 직속 부서들, 정죄청에 배속된 사람 없나? 이것보다도 끔찍한 광경을 많이 보게 될 텐데. 사회복구청은?" 보조 성자 하나가 큐빅을 턱으로 가리켰다. 네탈시포 사제가 그걸 눈치채고 맨 앞줄에 앉아있던 큐빅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사회복구청 신참이라. 올라와라. 어서." 큐빅은 끝나지 않을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때 큐빅의 시선이 휠체어에 묶여있던 풀그림과 마주쳤다. 풀그림은 흐려진 눈으로 큐빅을 처연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아주 살짝 끄덕였다.

큐빅은 멍하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걸어나갔다. 네탈시포가 그의 등을 감싸안고, 한 손에 칼을 쥐어주었다. 등골이 찌르르 떨려왔다. 그는 풀그림을 마주보고 섰다. 그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해 보였다. 모든 손가락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고, 코가 부러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풀그림이 눈을 감았다. "해." 네탈시포가 뒤에서 속삭였다. 천천히 칼을 쥔 손이 앞으로 향하고, 따뜻한 액체가 큐빅의 손을 타고 흘렀다. 큐빅의 눈앞도 눈물로 흐려졌다. 이명이 들려오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시." 네탈시포의 목소리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들렀다. 큐빅은 칼을 뺴서 다시 찔렀다. 감촉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고마워." 혼란스러운 큐빅의 머릿속으로, 풀그림의 그 작은 속삭임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큐빅은 칼을 내던지고 주저앉아 비명을 질러댔다. 네탈시포가 흥이 깨졌다는 표정을 짓고 손짓했다. 부하들이 다시 나와 축 늘어진 풀그림과 즈소를 끌고 나갔다. 네탈시포가 엎어져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큐빅의 등에 손을 얹고 속삭였다. "그래, 유감스럽구나. 그러나 네 선함도 보답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 오늘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모임이 끝나고, 네탈시포 사제는 강당 뒤편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강은 이 모든 일이 벌어지기 전과 똑같아 보였다. 아니, 똑같은가? 네탈시포 사제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강가로 다가갔다. 강가에 서있는 나무 하나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잎은 까맣게 물들어 죽어있었고, 땅 역시 질퍽거리는 새까만 액체로 물들어 있었다. 잉크 냄새가 났다. 뭐지? 네탈시포가 강을 따라 위쪽으로 계속 몇 백 미터를 걸어갔다. 한참 나무들 틈을 지나 덤불을 헤치고 지나가자, 마치 화성 탐사로봇처럼 생긴 기계장치가 땅에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 위에 놓인 작은 탱크에서 새까만 액체가 조금씩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앞에 있는 카메라는 계속 회전하고 있었다. 네탈시포 사제가 그 장치 앞에 섰다. 갑작스레 회전하던 카메라가 그의 앞에서 딱 멈췄다. 카메라 위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네탈시포 사제는 몰랐겠지만, 그 카메라는 영상을 재단으로 보내고 있었다. 영상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O5-2가 손을 휘저었다. "하늘이 우릴 돕는군. 저놈을 생방으로 잡다니. 그냥 오염되는 장면만 찍어도 충분했는데. 저놈 화면에 나오는 거 감안해서 프롬포트 좀 바꾸고, 지금 시작해." 방송실 안에서 O5-2가 일어나 카메라 앞에 섰다. "저는 SCP 재단 소속 최고위층 중 하나입니다.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열까 했으나, 워낙 사정이 급박한 탓에 부득이하게 유튜브 생방송이라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우리 세계에 닥친 가장 심각한 위기에 대해 경고하고자 합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분위기가 가벼운 적은 별로 없었지만, 오늘 백악관 상황실의 분위기는 특히 무거웠다. 프랑스에서 008 감염자가 나오고, 러시아가 동유럽에 공세를 시작한데 이어, 이번에는 에스토니아의 수도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사상자 6만 명이라는 참담한 결과에 여론은 들끓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모든 GOC 관련 인원을 추방했고, 러시아와 동맹 조약을 맺겠다고 나선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그 동안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은 적이 별로 없던 SCP 재단이(이는 여타 테러조직이 보이는 행태와는 굉장히 달랐다) 유튜브 생방송으로 GOC와 UN을 강경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우리의 강령은 확보, 격리, 보호입니다. GOC는 우리가 그 바이러스를 고의적으로 살포했다고 주장했으나, 우리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GOC가 재단 기지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격리실이 파괴되면서 유출된 것입니다. 이번 SCP-1428로 인해 탈린이 초토화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변칙 개체를 안전하게 빼내려 했을 뿐이지만, GOC는 어설프고 서투른 공격으로 대참사를 불러왔습니다. 그 개체는 파괴하려 하면 자동으로 활성 상태에 접어들어 폭발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 대참사 후에 재단 직원들은 다시 목숨을 걸고 그 개체를 간신히 격리했습니다."

"바이러스 얘기는 거짓말입니다. GOC와 UIU 모두 재단이 고의적으로 살포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쨌든 여론은 들끓을 겁니다. 진실 게임 구도가 잡히는 것 자체가 안 좋고요. GOC가 재단에 비해 변칙 개체를 다루는 데 너무 서투르다는 얘기는 이미 나오고 있습니다. 전국적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고, 이 전쟁에 대한 회의론도 심각합니다. 더군다나 EU는 공격할 수 있는 추가적인 재단 시설도 못 찾아내고 있습니다. 여론을 뒤집을 만한 전과(戰果)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모니터에서 O5-2의 모습이 잠시 사라지고 네탈시포 사제의 모습이 나타났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중국 내에는 아직도 재단 시설들이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위험한 변칙 개체를 격리하면서, 오늘도 재단 직원들은 목숨을 걸고 기지들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GOC의 대참사를 수습하는 사이,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SCP-505라 하는 아주 위험한 만년필이 탈취당했습니다. 그 범인이 바로 이자입니다."

영상의 크기가 조금 줄어들고 그 옆에 O5-2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이자는 네탈시포라고 합니다. 그 자신도 변칙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정부가 없어진 지금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벌입니다. 이자가 어제 재단 기지를 공격했고, SCP-505를 탈취해 갔습니다. 이 만년필은 특수한 잉크를 끊임없이 내뿜는데, 이는 수산화나트륨으로만 제거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자연에 스며들면 회복 불가능한 수준의 환경오염을 일으킬 것이고,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걸 탈취한 자가 바로 이자입니다. 똑똑히 봐두십시오, 여러분.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들 중 하나니까요."

카메라가 확대되며 네탈시포의 얼굴을 전면에 잡았다.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 중 한둘은 일어나서 가까이 다가섰다. 다시 O5-2가 나타났다. "물론 제 말을 믿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이자가 누군데? 하실 수도 있겠죠. 그러나 UN-GOC도 이자를 알고 있습니다. 아주 위험한 인물로 보고 있죠. 또 저희 말을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만년필이 뭐 그리 위험하냐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이번에는 폐허가 된 마을의 모습이 화면에 떠올랐다. 석유를 뒤집어쓴 것 같은 모습의 말들과, 온몸이 새까맣게 물들어 죽어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희가 이걸 처음 발견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사막 지역이었기에 격리가 가능했지만, 지금 네탈시포 사제는 강가에서 이걸 풀었습니다. 사오싱 시 근처에서요. 대략 15일 뒤면 이것이 첸탕 강으로 퍼질 것이고, 25일 뒤면 동중국해에 영향을 주기 시작할 겁니다. 그러면 격리는 불가능합니다. 세계는 멸망할 겁니다."

"저게 사실인지 확인해." 대통령이 낮게 말했다. "정찰기 띄우고 위성 돌려서 확인하게. GOC 쪽에 저게 가능한지 확인할 수 있나?"

O5-2는 화면 속에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우리 재단은 여러분에게 간청합니다. 우리는 끔찍하게 위험한 것들, 이 세상을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것들을 가둬두고 있고,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SCP-505를 무력화하고, 중국의 다른 위험한 변칙 개체를 손에 넣기 전에 네탈시포를 제압하는 겁니다. 우리 재단은 여기에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방송이 끝났다. 회의실에 앉은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의견을 쏟아냈다. "별로 의미는 없는 얘기입니다. 어차피 재단 시설들은 다 꽁꽁 숨어있고, 방역 때문에 찾아내는데 집중하지 못해서 지금 이 전쟁은 소강 상태입니다. 거짓 선전 같습니다."

"GOC는 저 얘기는 진짜일 수 있는데, 재단 제안을 받지 말고 미국 본토 내에 암약해 있는 재단 시설 및 기지를 공격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무인기 공격을 가하고요." 전화를 끝마친 국토안보부 장관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다가 에스토니아 꼴 나면 어쩔 거요?" 대통령이 손사래를 쳤다. "저 네탈시포라는 자가 제3의 세력을 키우고 있어도, 머나먼 중국 땅이니 별 상관이 없지. 하지만 재단을 친다? 아직까지 재단이 미국 본토 내에서 일을 벌인 적이 없는데, 괜히 벌집을 들쑤시는 꼴이 나는 걸 볼 수는 없소. 이대로 가면 내년 중간선거는 박살이요, 박살. 뭔가 큰 거, 획기적인 거 없습니까? 확실하게 이 난국을 뒤집을 수 있는 거."

"대통령 각하." 화상으로 참여하고 있던 UN 대사가 입을 열었다. "실은 재단에서 우리에게 접촉해 온 자가 있었습니다. 재단 최고위층 중 하나로,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면 재단 수뇌부를 전부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 얘기를 왜 이제 하는 건가!" 대통령이 벌컥 소리쳤다. "그 조건이 뭔데?"

"재단 수뇌부 및 명백한 책임이 있는 일부 직원을 제외하고는 모든 재단 직원을 사면할 것." UN 대사는 일부러 O5-4가 제안했던 조건들을 살짝 바꾸어 말하고 있었다. "재단이 격리해 놓은 변칙 개체를 GOC가 맡지 말고 각 정부 내에 격리 부서를 만들어서 격리할 것."

"끝내주네! 그런 좋은 제안을 나한테 숨기고 있었다고! 당장 받아들여!"

"하나 더 있습니다. 이렇게 만든 격리 부서에 현 재단 직원을 우선적으로 임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마지막 조건에 회의장 안의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계속 밀어붙였다. "그게 왜? 뭐 문제가 되나? 그자들은 미국 내에서 테러를 한 적이 없고, 미군을 살해한 적도 없지. 어차피 수뇌부만 공개재판과 청문회에 넘기면 여론도 만족할 거고. 아마추어 같은 GOC를 배제하는 것도 좋고. 좋은 제안 아닌가? 당장 법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하지만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대(對)-재단 전선은 무너집니다. 다른 국가들이 동조하지 않으면 그 책임이 우리에게 돌아올 겁니다."

"각하." 국가안보보좌관이 말을 끊었다. "저 만년필 얘기는 진짜인 것 같습니다. FBI 특이사건반이 체포한 재단 직원들이 몇 명 있는데, 그들에게서 확인했습니다. 일본에서 체포된 O5-10도 그런 변칙 개체가 중국에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좋아. 그럼 조치를 해야겠지." 대통령이 머리를 싸맸다. "일단 그 재단 최고위층과 접촉해서 이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뭐냐고 물어보시오. 실행 가능하면 독자적으로 실행하고. 그리고 무인기든 폭격기든 동원해서 저 네탈시포를 죽여. 그 다음에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받아들이는 게 좋아보이는군. 좋아. 이 제안이 법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그… FBI 특이사건반에 이미 재단 직원 하나 있지 않았나?"

법무부 장관과 백악관 법률고문이 서류를 미친 듯이 넘겼다. "맞습니다. 샐리 박사라고, 현 특이사건반 부부장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관할권 문제 때문에 UIU를 FBI에서 독립시켜서 아예 독자적인 수사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또… 국무부는 현재 이민 및 국적법(INA)에 따라 재단을 해외 테러 조직(FTO)으로 규정했습니다만, FTO로 규정하는 건 해외 조직만 해당됩니다. 따라서 만약 미국 국토 내 재단 조직이 해외 재단 조직과의 연관성을 일체 부정하고 완전히 분리된 조직이라고 천명한다면, 일단 법적으로는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논란이 심할 겁니다. 2차 세계대전 때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나치 과학자들을 데려올 때도 그랬듯이."

"우리 정부는 테러범과 협상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 대통령이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이런 제안을 받았다고 발표할 필요는 전혀 없소. 기소 면제나 격리 부서 창설은 그리 큰 손해가 아니니 상관없지만, 직원 승계는 꼭 필요한 자만 데려오면 그만일 뿐."

"다른 국가들에는 뭐라고 해야 합니까, 각하?" UN 대사가 모니터 너머로 물었다.

"우리는 이 제안을 수락하기로 결정했고, 안보리나 GOC가 뭐라고 하든 그대로 간다. 30일 내로 결정해라. 딱 그렇게만 말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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