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부터 뉴욕 UN 본부의 회의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한 페이지짜리 원고를 들고 읽어보고 있었다. 연락이 두절된 러시아를 제외한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수장들, GOC 알 피네 차장, 세계초보건기구 수장, WHO 사무총장이 모두 참여한 자리였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시아가 설령 초토화되었더라도 자신들의 국가는 지켜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지만, 이제 스페인 독감과 사스보다도 심각한 전 세계적 아웃브레이크에 직면한 터였다.
"우리 세계초보건기구는 광범위한 여행금지권고를 제외하고는 예방 조치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EU가 신-마지노선을 통한 무제한 검역을 선언했으며, 각국이 우리의 권고를 잘 따라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계 오컬트 연합 지도부인 108 평의회의 결정사항과, 우리 상급기관인 세계보건기구의 지침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내 감염자 발발에 따라 추가적인 개입의 필요성이 커졌으며, 시민들 사이에 퍼지는 패닉을 진정시킬 방안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감염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가 시급합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SCP-016'은 혈액을 통해 전염되므로, 그 전염성이 크지 않습니다. 현재 아시아 일부 지역을 빼면 해당 병원체에 감염된 사람이 발견된 바는 없습니다. 현재 우리는 각국 정부와 협력하여 수혈용 혈액에서 016을 감지할 수 있는 시약을 배포하는 중입니다. 각국 정부에서는 해당 시약의 사용을 의무화시킬 것을 권고하며, 병원에서는 입법 조치가 없더라도 해당 시약을 사용할 것을 권고합니다.
다음으로 'SCP-020'은 균류인데, 현재까지 신-마지노선 내에서 감염자가 나온 적은 없으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 감염자 사례가 확인되었습니다. 해당 위험지역은 현재 GOC 대원들이 대응 중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최소 18개월 간 해당 지역으로 가는 것을 자제할 것을 권고합니다. SCP-020이 있는지 여부는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며,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각 가정에서는 캠코더나 카메라를 이용해서 집 안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찍어보고 녹색의 곰팡이가 있는지 확인할 것을 권고합니다. 혹시 피부가 박리되고 부어오른다면, 즉시 지정 병원에 연락하여 감염 여부를 진단받을 것을 권고합니다. 또한 020에 감염된 경우 다른 사람들을 초대해서 감염자를 늘리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초대가 안전한 것인지 사전에 확인하는 것을 권고합니다.
마지막으로 SCP-008은 모든 점막과 체액을 통해 감염되는 프리온으로, 공기로 전파되지는 않습니다. 현재 프랑스 내에서 14명의 감염자가 확인되었으나, 모두 격리되었고 처분되었습니다. 예방 방법입니다. 먼저 이 프리온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여러 매체나 영상물에서 묘사하는 좀비를 떠올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염자에게 물리거나 공격당하지 마십시오. 감염자를 섣부르게 공격하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감염자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마십시오. 만약 가까운 사람이 독감 증세를 보이다가 하루를 못 넘기고 혼수 상태에 빠져든다면, 즉시 군경에 연락하십시오. GOC 및 각국 군경이 감염자의 격리와 치료를 맡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프랑스 정부에 권고합니다. 우리 세계초보건기구는 프랑스 동부 레지옹 전역을 SCP-008 위험지역으로 지정하며, 프랑스 정부에도 똑같이 할 것을 권고합니다. 위험지역 경계 전체에 검역선을 설치할 것과, 최소 1개월 간 학교, 공공기관, 공항, 철도, 기타 대중교통 수단의 휴업을 권고합니다."
미 대통령이 원고를 자리에 내려놓았다. "이 따위 얘기를 기자회견에서 할 수는 없어요. 경제가 박살날 거고 패닉이 찾아올 거요. 에피데믹(epidemic)도 아닌데 일반인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그렇지만 만약 어딘가에 감염자가 더 있다면요? 만약 지금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 나중에 손쓸 수 없게 되면 그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 할 겁니다."
"만약 이걸 공개적으로 발표하면, 당장 사람들이 북미와 영국으로 도망칠 거요. 한번 패닉이 시작되면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진짜 감염자가 얼마나 생기냐가 중요한 게 아니요. 대중을 공포에 질리게 하지 않는 게 중요한 거지."
고성이 오가며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은 갑론을박을 벌였다. 미 대통령이 속으로 생각했다. GOC 차장을 빼면 아마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재단이 가지고 있는 걸 달랑 세 개 풀었는데 이꼴이니 몇 천 개를 풀어버리면 그 때는 대관절 어떻게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통령님,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07:26(MSK) [AP통신] — 러시아 연방군, 핀란드 동부로 진격 (속보)
07:28(MSK) [AP통신] — 핀란드 정부 대변인, 러시아군 진격에 "침략행위"로 규정 (속보)
07:47(MSK) [AP통신] — 러시아 연방군, 우크라이나에 폭격 재개시 (속보)
00:50(EST) [CNN] — 미 대통령, "무슨 상황인지 러시아 측과 확인 중이다" (속보)
06:53(CET) [로이터] — NATO 군사위원회 의장, NATO군 폴란드 국경에 배치 지시 (속보)
08:25(MSK) [AP통신] — 러시아 대통령, "우크라이나·핀란드·벨로루시·카자흐스탄 등이 UN 결의 위반하고 재단과 접촉해서 부득이하게 조치 취한 것…증거 공개하겠다"
08:26(MSK) [AP통신] — 주 UN 러시아 대사, "NATO 개입할 근거 없다…부다페스트 각서 위반도 아니다"
08:29(MSK) [AP통신] — 러시아 연방 내무부 대변인, "해당 국가들은 UN 결의 위반하고 재단과 결탁…국가안보 위해 불가피하게 자위권 발동한 것"
07:36(CET) [로이터] — 우크라이나 대통령, "러시아 제국을 다시 만들어 우크라이나를 집어삼키려는 속셈…미·영 군사적 개입해야" 주장하며 피신
UN 주재 러시아 대사가 연 기자회견장은 꽉꽉 들어차 있었다. 대사는 본국으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았다고 짧게 말하고, 바로 화이트보드에 붙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말했다. "이 장갑 트럭은 재단 것으로, 보시다시피 아스타나를 떠나서 계속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여러 위성 사진들이 있습니다. GOC가 공개한 재단 위장 기업들의 자금과 물자, 각종 위험한 변칙적 특성을 가진 존재들이 이들 국가에서 이동하는 모습을 위성으로 촬영하였으며, 관련 서류도 확보하였습니다. 이는 이들 국가가 안보리 및 총회 결의에도 불구하고 재단과 부적절한 접촉을 취하고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기자들은 러시아 대사의 설명을 납득하고 돌아갈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이 너도나도 손을 올리고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그런데 왜 러시아군이 헬싱키를 점령한 겁니까?" "우크라이나에는 왜 폭격을 시작한 거죠?" "한 달 넘게 재단의 생물무기 때문에 본국과 연락이 끊겼다고 알고 있는데, 러시아 내 피해 상황은 어떻습니까?" "러시아 정부는 마그니츠키 사건을 비롯해서 증거 조작을 단행한 전례가 여럿 있는데, 이것도 조작된 것 아닙니까?" "핀란드와 우크라이나를 합병하려는 의도 아닙니까?" 대사는 연단에서 내려와 기자들에게 한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기자들은 아우성치며 퇴장하는 대사의 등에 대고 질문을 열심히 던졌다.
그 기자회견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전파가 잡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그 회견을 볼 수 있었다. 제5기지의 지하에 앉아있는 네탈시포 사제도 마찬가지였다. 사제는 아무도 아닌 자를 자기 취향에 맞게 심문하기 위해 밤새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부하들은 길다란 침대의자와 양산을 설치하고, 그 앞에 전선과 회선을 끌어와 TV, 전등, 노트북, 캠코더, 전등 등등을 설치해 놓았다. 아무도 아닌 자는 사슬로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은 상태였다. 네탈시포 사제는 침대의자에 몸을 누이고 편안히 기자회견을 보고 있었다. 네탈 사제가 리모컨으로 화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이것도 당신이 예견한 일 중에 하나인가? 위대한 러시아 제국의 재건?"
아무도 아닌 자가 공중에서 몸을 돌려 TV화면을 바라봤다. "전 관여한 바가 없습니다만,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죠."
"그럼,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말이지." 사제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떻게 해서 당신은 미래를 예언하고 미리 행동할 수 있는 거지? 당신 본인한테 예지력이 있었으면 여기 와서 나한테 잡히지는 않았겠지. 부서진 신의 교단이나 다섯째주의, 심지어 사르킥 잔당들까지 받아들였지만 그 중에서 예지력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던데. 당신은 뭘 '섬기고' 있는 거고, 어떻게 예지력이 있는 거지?"
그 얘기가 오가고 있는 장소에서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큐빅 박사는 폐허 속에 엎드려 있었다. 공포에 질려 양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은 채였다. 전날 밤 큐빅은 아무도 아닌 자를 피해 서버들 틈바귀에 숨어있었고, 네탈시포 사제가 천장을 부수고 들어올 때 서버들이 쓰러지며 그를 깔아뭉갰다. 큐빅 박사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사제의 부하들이 죽은 고디스와 카일리의 시체를 옮기고 있었다. 서버들과 부서진 파편들이 그의 몸을 완전히 덮어주어 가만히만 있으면 들키지는 않을 터였다. 아무도 아닌 자는 사술로 둘둘 묶여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다른 살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제가 침대의자에 앉아 심문을 시작하자, 큐빅은 숨소리도 새어나지 않도록 손과 입을 막고 즈소의 모습을 찾아 초조하게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 사이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모른다고? 그럼 왜 여기로 들어온 이유는 뭐지? 여기 있는 연구원들을 죽인 이유는 뭐고? 넌 여기 와서 뭘 하고 있었냐고?"
"저, 사제님. 제가 안일하게 사제님한테 정보를 준 곳에 어슬렁거리다가 잡히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말해봤자 제가 입을 열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요?"
사제가 넓은 소매 속에서 단검을 하나 꺼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손끝으로 칼날을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매달려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서서, 사제는 단검을 아무도 아닌 자의 배에 깊숙히 찔러넣었다. 아무도 아닌 자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한 순간 그가 숨을 멈추고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다시 애써 평정을 찾으며 숨을 내쉬었다. 사제가 단검을 빼냈다. 칼날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고, 아무도 아닌 자가 입은 정장에도 구멍은 뚫렸지만 피가 묻지는 않았다. 사제가 소매 안으로 다시 단검을 집어넣고 한 발짝 물러났다. "재미있군. 상처를 입지는 않지만 역시 신과 같은 힘은 없는 것 같은데. 그것도 괜찮지. 생각해 둔 게 있다."
사제 뒤쪽에서 카잔과 사제의 부하들이 관처럼 생긴 상자 하나를 밧줄로 묶어서 아래로 내렸다. 그들은 천장에 뚫린 구멍을 간신히 통과한 그 상자를 똑바로 세웠다. 사제가 카잔의 목에 묶인 사슬을 잡아당겼다. "그럼, 관리자 나으리, 이게 뭔지 여기 아무도 아닌 자에게 설명 좀 해주지."
"이건… SCP-762입니다. 아이언 메이든과 똑같지만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죽지 않습니다. 고통만 그대로이고 아무 부상도 안 입죠."
카잔이 SCP-762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박사 가운을 입은 연구원 하나가 이미 쇠꼬챙이에 뚫린 채로 들어있었다. 안에서 꺼내자 상처는 흔적도 없이 아물었지만, 연구원은 얼굴을 떨구고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땀과 침을 흘렸다. 그는 몇 발짝도 떼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져 몸을 발작적으로 실룩거렸다. 가랑이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사제의 부하들이 천천히 사슬을 풀고 아무도 아닌 자를 바닥으로 내렸다. 발버둥치는 그를 가볍게 제압하고 부하들은 그를 SCP-762 내부의 쇠꼬챙이에 찔러넣었다.
"일단 몇 시간 뒤에 보자고, 그럼. 점심을 못 먹어서 말이야." 사제가 씩 웃고 구멍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그의 부하들이 SCP-762의 뚜껑에 빗장을 걸어 잠가버리고, 카잔의 목에 걸린 사슬을 끌어다 기둥에 묶어두었다. 큐빅 박사는 그 모든 과정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쳐다볼 뿐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들키지 않으려 은폐물 안쪽으로 더 깊숙히 숨어드는 것밖에 없었다. TV에서는 러시아군의 침공과 알 피네 차장의 기자회견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러시아 정부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GOC 대원들이 핀란드, 스웨덴,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를 포함해서 7개국으로 파견되었습니다.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러시아 정부가 군사적 행동을 즉각 멈출 것을 촉구한다는 게 GOC의 확고하고 일관된 입장입니다." 알 피네 차장이 마이크에 대고 답했다.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저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현재 러시아 정부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파악 중입니다." 알 피네 차장이 답을 마치고 즉시 퇴장했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는 위성 전화기로 전화를 한창 하던 중이었다. 차장이 걸어나오자 비서가 전화를 내렸다. "위성 추적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재단 차량들이 맞는 것으로 보이고, 탈린과 민스크로 나누어서 집결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했지. 재단 위장 기업들에 경제적 제재를 안 하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이 머저리들은 위대한 유엔군이 참전했다는 소식만 들으면 재단이 항복할 거라고 생각했다니까. 얼마나 건방을 떠는지 국가도 아닌 일개 사조직에 UN 제재를 가하는 건 우리가 겁먹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개소리도 했었지, 안 그래?"
"물론입니다." 비서가 맞장구쳤다. "아마 재단이 가진 막대한 자금을 접수하려는 생각이었겠죠."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알 피네 차장이 짜증을 냈다. "그리고 지금 상황 좀 보라고. 러시아는 항상 그랬듯이 아무 도움도 안 되고, 그리스는 강화 조약을 맺겠다고 설치고, 재단은 이렇게 대놓고 위협존재들을 옮기고 있잖아. 탈린과 민스크라고? 에스토니아에 벨로루시가 당첨인가?"
"맞습니다. 타격조는 준비 완료했습니다. 탈린에서는 화물을 터키행 배에 선적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민스크에서는 열차를 동원할 것 같답니다."
"좋아. 놈들이 출발하기 전에 현장 지휘관의 재량에 따라 공격한다. 위협존재가 있으면 파괴하고, 재단 인원이 있으면 되도록이면 생포해. 러시아가 더 기고만장하지 않도록 하려면 공개석상에서 아니라고 증언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사제가 떠난 이후에도 큐빅 박사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여전히 두 명의 부하들이 SCP-762 앞을 서성거리며 지키고 있었고, 카잔은 방 한가운데에 묶인 채였다. 풀그림과 즈소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무장을 하고 있지 않은 큐빅이, 돌과 장비들에 깔려 다리도 성치 않은 상황에서 이 둘을 조용하게 처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하나마나한 것이었다. 박사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도대체 뭐가 있을지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셔츠 앞주머니에는 볼펜, 담뱃갑 하나. 바지 주머니에는 직원 신분증과 라이터. 역시나 쓸 만한 것은 라이터 하나밖에 없어 보였다. 마침 큐빅 박사가 깔려있는 곳에서 50c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배기구가 하나 보였다. 그가 알기로 이곳 기지의 모든 배기구 안에는 불꽃 감지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큐빅 박사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몸을 들어올리고 라이터를 빼냈다. 그의 몸을 덮어서 가려주고 있던 서버가 들썩거리며 큰 소리를 냈다. 사제의 부하 두 명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고, 한 명이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고쳐잡고 그쪽으로 다가왔다.
빌어먹을. 큐빅 박사는 속으로 이를 악물고 서둘러 손을 배기구가 있는 벽 쪽으로 뻗었다. 칙칙거리는 소리와 함께, 라이터의 불이 켜지고 배기구 안쪽에서 감지기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부하 한 명이 쇠파이프로 서버를 걷어내고 큐빅을 발견했다. 큐빅은 스프링쿨러에서 물이 쏟아져서 시야를 방해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쇠파이프가 위로 올라가는 순간, 큐빅은 왜 화재경보가 작동이 되었는데도 물이 쏟아지고 있지 않은지 깨달았다. 이너젠 가스. 이 지하에는 물을 맞으면 망가질 수도 있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비싼 장비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당연하게도 재단은 이런 중요시설의 불을 끄기 위해 물이 아니라 가스를 이용했다. 그것도 박물관이나 도서관에서 흔히 쓰는 이너젠 가스를. 무색무취에 운무를 만들지도 않아서 화재 시 안전하게 대피하는 데에야 좋았겠지만, 지금 큐빅 박사에게 필요한 역할은 전혀 해주지 못했다. 쇠파이프가 내려오며 큐빅 박사의 허리를 강타했다. 큐빅 박사는 비명도 못 내지르고 몸을 뒤틀었다. 부하가 발로 그를 걷어차고 다시 후려갈겼다. 쇠파이프가 연이어 날아오며 그를 두들겼다. 큐빅은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고 위액을 토해냈다. 공격자가 토사물을 피해 잠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때, 뒤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공격자의 목덜미를 칼로 찔렀다. 공격자는 뻣뻣하게 굳어서 뒤로 돌아서려 했지만, 칼을 들고 서 있던 즈소가 더 빨랐다. 즈소는 그자의 등, 팔, 손, 옆구리를 거침없이 십수 차례씩 찔렀고, 그자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비명만 지르다 쓰러졌다. 선혈이 즈소의 온몸에 튀어 남색 머리카락이 어둡게 물들 지경이었다. 즈소가 얼굴에 점점이 묻은 피를 손으로 훔쳤다. 즈소가 상냥하게 웃었다. "모범적인 재단 직원이라면 SCP 개체를 자기 마음대로 쓰면 안 되지만, 재단이 없어지고 있으니 재단 규정도 별 의미는 없겠죠. 그나저나 이 기지에 SCP-668까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카잔 관리자님?"
큐빅의 눈에 다른 부하 한 명도 이미 쓰러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큐빅은 배를 감싸고 헐떡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카잔은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풀그림이 죽은 남자가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조심스럽게 뺏어 들었다. "큐빅 박사는 데려가야 해. 여기서 나갈 길을 안내할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
즈소가 SCP-668을 허리춤에 집어넣고 큐빅을 일으켜 세웠다. 즈소가 반대쪽 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쪽 배기구로 우리 셋 모두 왔다갔다 할 수 있어요. 보안 장치는 무력화시켜 놓았으니까 괜찮을 거 같네요."
풀그림과 즈소가 큐빅을 양쪽에서 부축했다. 큐빅은 비틀거리면서 걸어갔다. 그들의 등 뒤에서 카잔이 소리쳤다. "잠깐만… 지금 날 내버려 두고 가는 건 아니지? 여기 그 사제놈의 부하가 얼마인지 알아? 족히 수천은 된다고! 유클리드급 개체 몇 개 가지고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즈소가 고개를 뒤로 돌려 싱긋 웃어보였다. "SCP-668 보고서를 보면 수천 명도 죽일 수 있다고 하던데요. 체력이 따라 줄 지는 모르겠지만. 뭐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세요?"
"우리가, 우리가 힘을 합치면." 카잔이 다급하게 말했다. "여기 중국 내에도 아직 남아있는 기지들이 있으니까, 그 사제를 막아야 하지 않겠어? 이 기지에 있는 케테르급 개체들을 챙겨가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해질 거라고! 그… 관리자, 재단 설립자한테 전화가 왔었어. 사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까!"
"속으면 안 돼요." 큐빅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이 기지에 케테르급 개체는 하나밖에 없어요. 무기로 쓸 만한 것도 즈소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게 다고."
"흠, 그렇긴 하지만. 들어봐도 나쁠 건 없지 않을까요?" 즈소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카잔을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668보다 효율적이고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라면 말하는 사람이 누구든 실행해 봐야죠. 668이 저한테 있으니 절 공격할 수는 없을 거에요."
대형 화물선이 항구에 정박해 있었고 수십 대의 트럭과 차량들이 북적북적거렸다. 탈린 항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큰 화물선이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뛰어다니며 트럭에 있는 짐들을 화물선으로 옮겨 실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꿈쩍도 못 하고 있는 트럭 하나가 있었다. SCP-1428이 들어있는 장갑 트럭이었다.
"아니, 아무리 지금 러시아에서 전쟁이 터졌다지만, 케테르급 개체를 화물선으로 나르는 게 말이 되냐고요. 서류 상 중국 가는 걸로 되어 있는데 그냥 중국으로 보내요."
"지금 무슨 수로 전쟁터를 뚫고 중국으로 가요? 그리고 바이러스 검역 때문에 폴란드 국경부터 모든 차량 검문하는 거 몰라요? 육로로 계속 가다가는 국경선 절대 통과 못 해요. 배로 옮겨야 안 걸리죠."
"격리 절차 상 섭씨 1,500도 이상으로 계속 소각시켜야 한다는데 돌발 상황이라도 생기면요? 이 배 포르투갈로 가는데 거기 이 정도 케테르급 개체 관리할 시설 없을걸요?"
트럭을 운전해온 직원과 항구 관리직원이 옥신각신하고 있는 동안, 위장한 GOC 타격조 대원들도 사람들 틈에 섞여 타격 지점을 노리고 있었다. 한 명이 옷깃을 끌어올려 옷에 달린 초소형 마이크에 대고 속삭였다. "대형 컨테이너가 하나, 중형 철제 상자가 여덟, 소형 상자가 열하나. 무장한 인원은 보이지 않습니다."
"민간인들은 대피 완료했다. 민스크 타격조가 2분 후에 준비 완료된다. 그때 일제히 타격한다."
"라져."
민스크에서는 재단 직원들이 컨테이너와 대형 상자들을 기관차에 계속해서 연결하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유클리드 급이지?" 직원이 한 손에 서류판을 들고 높이 2m 정도 되어보이는 강철 컨테이너 하나를 가리켰다. 서류판에는 격리 절차와 일련번호가 간략하게 쓰여있었다.
"네. 15분 후에 출발하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직원은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뒤쪽에서 회색 정장을 입은 GOC 대원 하나가 손전등을 비추며 걸어왔다. 손전등 유리에는 룬 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 여자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서류판을 집어들었다. 내용을 확인하고 여자가 옷에 달린 마이크를 잡았다. "위협존재 발견. 재단 일련번호로… SCP-966이다. KTE-실버 정도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파괴하겠다." 여자가 강철 컨테이너로 가까이 다가가 품 속에서 AA-12 샷건을 꺼내들었다. 탄알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조정자와 대형 위협존재에 대응하고자 특수 처리가 되어있었다. 다른 대원 하나가 가까이 다가가 빗장을 풀고 문을 벌컥 열자, 여자가 컨테이너 안으로 샷건을 난사했다. 맨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울부짖는 소리와 벽에 쾅쾅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발끝에 따뜻한 액체가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몇 초 뒤, 컨테이너 안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가 샷건을 넘겨주고 다시 컨테이너 안으로 손전등을 쭉 비추었다. "청산 완료. 포로 두 명 확보. 이동한다."
탈린과 민스크 양쪽에서, GOC 대원들은 반격할 틈을 주지 않으려 신속하게 움직였다. SCP-096를 청산할 때 발생했던 엄청난 인명피해를 반면교사 삼아, GOC 대원들은 항상 가능한 한 최대한의 무장을 유지하고 다녔다. 조현병 환자들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케테르급 개체인 SCP-870도 타격조가 가져온 기적학적 에너지 포착 투시경을 피하지는 못했다. SCP-2984는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있었지만, 9mm탄 열여덟 발을 맞고도 살아있지는 못했다. SCP-127은 살아 있지 않은 동료 총들에 비해 딱히 튼튼하지 않았다. SCP-1057(GOC 소속 마법사들은 '투명한 상어'라고 불렀다)은 타격조 중 비슈누를 섬기는 마법사 하나가 없애버렸다. 재단 직원들은 급하게 이동하느라 대부분 비무장 상태였고,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민스크 타격조 정리 완료했습니다. 전 위협존재 청산 완료. 재단 직원 3명 생포."
"탈린 타격조… 현재 위협존재 하나 제외하고 청산 완료. 재단 직원 6명 생포."
GOC 본부 통제실로 보고가 날아들어왔다. 초조하게 보고를 기다리던 알 피네 차장도 긴장을 풀고 박수를 쳤다. "기자들에게 연락하고 생포한 놈들은 브뤼셀로 이송시켜. 자살 못 하게 잘 막고. 탈린 쪽에는 하나 남았다고? 그럼 지금부터 카메라 켜서 청산 과정 촬영하지. 기자회견 때 써먹으면 그림 좋겠네."
정확하게 1분 27초가 지나자 통제실 중앙의 거대한 데이터월에 카메라 화면이 들어왔다. 타격조 대원들이 장갑 트럭을 에워싸고 있었다. 대원 한 명이 서류판을 들고 읽었다. "재단 일련번호, SCP-1428. 현재 이 장갑 트럭에 실린 텅스텐 컨테이너 안에 있습니다. 세계 오컬트 연합 식별자는 없으나, 분류하자면 KTE-구드릭-블루로 분류 가능합니다. 타입 블루의 위협존재는 기적학적 작용을 할 수 있으며, 반기적학적 총기를 이용하여 사살합니다. 반격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중화장을 포함한 안전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대원들이 준비를 끝마치고, 컨테이너 문 앞에 서서 갖가지 총화기를 겨누었다. 텅스턴 컨테이너는 고열로 달아올라 맨손으로 열 수는 없어서, 한 명이 망치와 집게로 문을 부숴버렸다. 한쪽 문이 떨어져나가고 열리자, 대원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카메라 화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멀찍이서 무릎 꿇은 채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재단 연구원 하나가 공포에 질려 엎드렸다.
총탄이 몸을 뚫고 지나가자, SCP-1428이라 불리는 까마귀가 활성 상태에 접어들었다. 한 순간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과 플라즈마가 터져나오면서, 순식간에 컨테이너 안과 트럭 근처는 수십 만 도의 온도로 달아올랐다. 텅스텐으로 된 컨테이너와 트럭, 도로가 열로 끓어오르고 녹아내렸다. 연이어 폭발이 사방을 휩쓸어 버렸고, 카메라 화면이 하얗게 빛나더니 바로 끊겨버렸다.
데이터 월 옆쪽에 있는 위성 화면이 깜빡거리더니 탈린 시내를 비추었다. 방금 전의 폭발로 항구는 흔적도 없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그에 따른 폭풍이 시내를 휩쓸었고 거의 모든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시는 한순간에 황폐해진 상태였다. 통제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충격으로 멍하니 그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다.